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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시루봉에 올라 보니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한국은 총선도 끝나고,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무서운 핵폭탄에 나라가 결딴이 나는 줄 알고 다들 안절부절 못했는데 그것도 이제 한풀 꺾이는 것 같다. 그 뿐인가? 고생 끝에 낙이라고, 그러한 두려움과 어려움의 몇 달을 지나는 동안 한국은 자기도 모르게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부러워하고 배우려 하는 나라로 떠올라 버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져 있더라는 어느 벼락출세 연예인의 후일담이 생각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반전을 같은 한국 사람이면서도 누구나 반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남들한테 줄기차게 모멸과 비하를 당하던 시절이 너무 오래라 그 동안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헐뜯기에 익숙했던 일부 인사들에게는 눈앞의 확 달리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히 남의 부러움을 사다니! 학생이 감히 선생을 가르치다니! 이른바 ‘국뽕’ 뉴스들은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데 이제는 안 보고 안 들을 수도 없게 생겼다.
미국은 어떠한가? 이것도 또 다른 인지부조화다. 뭐든지 한 번 쓰고는 무더기로 갖다 버리고, 먹는 것 가지고 내던지고 짓뭉개고 장난치던 이 풍요의 천조국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병원에서 목숨 걸고 고생하는 의사나 간호원들에게 나눠 줄 입마개마저 턱없이 모자란단다. 뒤늦게 한국에까지 손을 벌리며 이것저것을 얻어 오기는 하지마는 미국의 이런 민낯은 이미 웬만큼 드러나 버렸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동양이면서 동양이 아닌 척 자아분열증에 시달리던 일본 역시 비슷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미국에게는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런데 한국을 두고 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을 가지고 야단법석을 떠는 꼴일 수 있다. 한국은 그리 올라서도록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이백 년 전에 이미 다 예약이 돼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너무 ‘국뽕’에 취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그 동안 비정상이 아주 오래 가다 보니 그게 정상처럼 여겨졌을 뿐이라는 말씀이다. 믿거나 말거나!
에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지, 그런 예언이나 참언들엔 이미 다 식상을 하셨다고요? 맞습니다. 예언으로 올일을 맞추기란 그저 소발에 쥐잡기지요. 이때까지 세상에 나온 숱한 예언가와 예언서들, 저 노스트라다무스에서부터 토정비결까지, 에드가 케이시를 비롯하여 도선 국사, 탄허 스님, 그리고…, 바이블의 예언서들은 또 어떡하고요?
사실 이 세상의 예언가들을 다 불러 모시자면 밤하늘의 별만치 짜르르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새로운 별들이 마구 솟아올랐다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엉터리요 사기꾼들인가 아니면 정말로 뭐가 있긴 있는가? 일등별, 이등별…, 그 별들의 밝기에 따라 조금씩 예언이 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 많은 별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예언을 한 사람이 제법 있고 그 예언 가운데 상당수가 앞으로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든가, 어쨌든 들어서 우선에 기분 나쁘지 않은 그런 내용들이 많다. 팔이 안으로 굽어선지 한국 출신의 예언가들 중에는 당연히 그런 신나는 내용이 더 많다. 그 가운데 구한말 일제초에 걸쳐 짧은 일생을 살다 간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 은 이런 말들을 했다.
“장차 세계를 밝힐 참된 법[眞法]이 우리나라에서 나온다.”
“다음 세상[後天]에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천하가 한 집안으로 통일된다.”
“우리나라는 앉아서[座上] 천하를 얻으리라.”
증산 강일순
누구는 말하기를, 그 당시 우리가 대대로 너무나 비참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이런 마약 같은 희망 유언비어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었다고. 그게 아니라면 그 추종자들이 확신에 차서 몸 바쳐 믿듯이, 이러한 천기누설(?)은 민중을 일깨우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위대한 신탁이요 복음이었단 말인가! 누구는 미치광이라고 하고 누구는 하느님이라고 믿으며 나머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름마저 낯선 강증산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요즘같이 집콕, 방콕 하며 성질도 시간도 죽여야 하는 이 나날들에서 한 자락을 삐져 내어 한국의 민족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강증산이라는 얼핏 기묘하고 신비에 싸인 인물과, 그로 인하여 뻗어나가고 얽힌 숱한 민족종교의 한 무더기 넝쿨을 한 번 들쳐 보는 것이 나 자신을 되돌아봄에는 물론이요 미국에까지 건너온 이 이웃 종교를 제대로 알게 하는 데에 쏠쏠한 보탬이 될 것이다.
무릇 세상 일이 그렇듯이 증산이나 증산교라고 해서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질 수는 없으므로 우리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대충이라도 모르고서는 엉뚱한 견해에 고착되기 쉽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여기서 부득이 증산 이전의 중요한 인물 하나를 불러와야 하는데, 태어나고 죽은 해를 잘 알 수 없는 연담 이운규(蓮潭 李雲圭)가 그 사람이다. 아마 퍽 생소하실 것이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흘러온다.
우리는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가 창시한 동학(東學)이나 천주교의 다른 이름인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그리고 조선말 실학(實學)의 선구로서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이라는 말도 들어 보았는데 이것은 종교가 아닌 새로운 학풍을 일컬음이다. 그런데 동학 이전에 남학(南學)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 뿌리가 연담이라는 인물이라는 것은 들어 보지 못한 분도 많을 것이다.
아마도 1804년생일 것 같은 연담은 구한말의 도인(道人)이다. 서화담-이토정-이서구로 이어지던 학문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논산의 띠울마을[茅村里]로 내려왔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연담이 남학을 시작했으며, 동학을 일으킨 수운뿐만 아니라 정역(正易)을 완성한 일부 김항(一夫 金恒1826~1898)과 훗날 남학을 중흥시킨 광화 김치인(光華 金致寅)을 차례로 불러 이들에게 지침을 준 큰 스승이었다고 한다. 동학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연담은 1861년(철종 12년), 선도(仙道)의 전통을 이어갈 자라 하여 최수운에게 부탁하기를 뒷날 동학의 주기도문이 된 3ㆍ7자 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을 읊으며 몸과 마음을 닦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김광화에게는 불교의 전통을 계승할 자라 하여 ‘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라는 주문을 주면서 수련하라고 시켰다고 한다.
수운 최제우
마지막으로 김일부에게는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대는 쇠하여 가는 공자님의 도를 이어 장차 크게 천시(天時)를 받들 것이니 이런 장할 데가 없다. 이제까지는 ‘너’라 하고 ‘해라’를 했으나 이제부터는 ‘자네’라 하기도 모자랄 터인즉 ‘하소’라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예서(禮書)만 너무 볼 것이 아니라 서전(書傳)을 많이 읽으소. 그렇게 하면 자연감동(自然感動)이 되어 크게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단다. 연담 자신이 본래가 유학자이니 유교를 살려낼 김일부에게 가장 기대가 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한시는 이러하다.
觀淡莫如水 맑은 것을 봄에는 물 만한 것이 없고
好德宜行仁 덕을 좋아하면 어짐을 행함이 마땅하리
影動天心月 그림자 움직임은 하늘마음의 달이니
勸君尋此眞 그대여 이 진리를 찾으시게나
위의 얘기들이 사실이라면 연담은 과연 우리 정신사에 엄청난 씨앗을 뿌린 대단한 농부요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운의 동학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崔時亨1827~1898)의 대에 이르러 동학농민전쟁(1894~1895)이라는 민족사의 큰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었다가 3대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에 의해 천도교로 거듭났음을 알고 있다.
해월 최시형
일부 인사들은 증산교를 동학에서 옆길로 빠져나간 방계종교로 치는데 증산은 자신의 가르침을 ‘참동학’이라고 부르는 등 동학과의 연관을 부정하지 않았었다.
광화 김치인은 운담 대신 남학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오방불교(五方佛敎) 또는 광화교(光華敎)라는 교단을 이루었다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오만 명의 남학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분쇄되어 목이 매달리고 만다. 이후 그 갈래에 여러 분파가 생겨 명맥을 이어 갔으나 현재에는 거의 소멸되고 있다.
일부 김항은 어찌됐을까? 19년 동안 ‘영동천심월’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정진하다가 1879년 깨달음을 얻고 정역(正易)을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는 복희 팔괘(八卦), 그리고 주 문왕(周 文王)의 문왕 팔괘에 이은 수천 년만의 대역작이다. 세계와 우주가 움직이고 돌아가는 원리, 새 세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해석하고 예측하는 새로운 공식을 알아낸 것이다. 김일부는 수행에도 별났다. 오음주송(五音呪頌)이라고 하여 음ㆍ아ㆍ어ㆍ이ㆍ우 라는 다섯 자의 주문을 외우고 펄쩍펄쩍 뛰는 춤을 추며 수도하였기 때문에 뒷산의 풀이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라는 종교단체를 이루었으나 그가 죽은 뒤에 여러 분파가 생기더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지금은 거의 쇠잔하여 있다.
지금 한국에는 주류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신ㆍ구교), 그리고 한풀 꺾인 유교와 같은 외래 종교 외에 한국 땅에서 생겨난 수많은 신흥종교들이 있는데 크게 보아 동학 계통, 증산교 계통, 단군 계통과 무속 계통이 있다. 거기에다가 불교, 기독교, 유교, 도교 등 외래종교 계통도 있는데 대부분의 신흥종교들에는 기존의 종교들이나 민족고유의 샤머니즘 등에서 온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신흥종교 가운데에서도 민족종교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민족성을 내세우며 타민족에는 전도력이 미약하여 한국 내에서만 주로 통용되는 종교들을 일컫는다. 무교라고도 일컫는 샤머니즘은 조직된 종교가 아니므로 일반적으로 민족종교에서 제외된다.
이들 민족종교 중 많은 것들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우리가 사는 현대를 선천시대(先天時代)에서 후천시대(後天時代)로 바뀌는 교역기(交易期)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천ㆍ후천 세계라는 개념은 본래 운담 이운규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가장 짙게 밴 종교가 증산교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냥 선천ㆍ후천으로 바뀌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바뀌도록 우주 질서를 인위적으로 조종하겠다는 것이 증산교다. 증산교가 동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생겨난 종교지만 샤머니즘적인 요소도 가장 크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증산과 증산교에 대해 알아볼 시점인 것 같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미신이니 사이비니 뭐니 하는 선입견을 일단 내려놓고 아, 그런 것도 있구나! 이 세상에 제 홀로 무엇이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를 않나? 강증산이라는 사람도, 증산교라는 종교도 한 다리 건너 내 조상이요 이웃이요, 내 몸과 마음의 연장이며 한 때의 내 몸짓이었을 수가 있지, 그리고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무덤이 어디 있었더냐 하고 마음을 가눌라치면 이 다음 이어지는 나의 글을 마저 읽기가 훨씬 수월할 뿐만 아니라 증산의 실체에 다가가는 길도 웬만큼 쉬이 드러나 보일 것이다.
각설하고.
증산 강일순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 호가 제멋대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양각도 언저리에서 평양 관민에 의해 불타 버린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고종 8년)의 해에 태어났다. 전라도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 있는 외갓집에서 진주 강씨(晋州 姜氏) 가난한 농부의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그 후 고부군 우덕면 손바래기[客望里]에 있는 친가에서 자랐다.
마을 뒤에 야트막한 시루봉(시루메 甑山 해발 100미터)이 있어 증산이 도를 닦을 때 이 봉우리에 자주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서 호(號)가 증산이 되었고, 안 가 봐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산 모양이 떡 찌는 시루같이 생겼나 보다. 아니면 시루메란 것이 사뭇 먼 옛이름의 비틀린 음사(音寫)이거나.
증산의 소년기에는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같은 사건이 잇달았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총명했던 증산은 어릴 때부터 틈틈이 글공부를 하여 훈장 노릇을 할 정도는 되었는데 열너댓 살쯤에는 글공부를 중단하고 집에서 나와 떠돌아다니면서 머슴을 살거나 나무를 베거나 하면서 살았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 스물한 살에 열여덟 살 정치순(鄭治順 1874~1928)과 결혼을 했다. 아내는 소아마비에다 곰보였는데 집안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도 닦는다고 돌아다니는 남편을 수발하느라 고생고생 하다 딸 하나 낳아 남기고는 그 해에 이혼을 당하고 만다. 정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시부모에 불손하고 성질이 나빠서였다는데 소박맞은 후 재결합하자고 빌고 빌었는데도 증산은 딴청이었다. 저는 다리로 밥덩이를 싸안고 남편 안 굶기려고 힘겹게 오르내렸던 곳이 그 시루봉이다.
증산은 첫장가 든 후 김제에 사는 처남 정남기의 집에서 훈장 노릇을 하다가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바로 그 동네, 고부군에서 터지자 합류는 안 하고 구경꾼처럼 따라만 다닌다. 형세를 관망한 것 같은데 동학군이 결국 이 싸움에서 질 것을 일찌감치 내다보고는 다른 사람들이 동학군에 들어가는 것을 말렸다는 것이다. 증산이 특히 당시의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 패륜적이고 요상한 행실을 했다지만 뭔가 예지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그러다 이듬해 동학 농민 혁명은 증산의 예상대로 실패하고 같은 해 민비가 죽는 을미사변(1895)이 터지자 소심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내빼 방콕을 한다[俄館播遷, 1896]. 하지만 다음해, 여론의 등쌀에 못 이긴 고종은 자기 나라 궁으로 되돌아와 일제의 은근한 사주를 받아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광무황제(光武皇帝)라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한다. 증산이 스물일곱 살 때다(1897).
도통한다고 다시 떠돌아다니던 증산은 서른 살이 된 1900년 고향에 돌아와 남들 보기에 기행이든 말든 나름의 도 닦는 수행을 한다. 낮에는 주로 시루봉에 있으면서 부인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밤에 배고프면 내려와 집에서 쥐눈이콩을 몇 알 집어먹고는 다시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1년, 31살의 증산은 전북 모악산 대원사(母岳山 大院寺) 절에 들어가 집중 수도를 하는데 드디어 음력 7월 어느 날 도통을 하니 스스로 옥황상제(玉皇上帝),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컫는다. 증산교의 탄생이다.
여기서 잠깐 옆길로 새자면 전주 바로 남쪽의 모악산(해발 796 미터)이나 대원사는 터가 좋은 모양이다. 이 언저리에서 도가 트인 사람이 증산만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모악산 바로 밑에는 ‘오리알 터’라는 금평 저수지가 있다. 하지만 오리하고는 관계가 없고 누가 ‘올(來) 터’라는 뜻이다. ‘올터’가 ‘오리터’가 됐다가 다시 ‘오리알터’로 변했다. ‘천하우주의 모든 기운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며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할 메시아, 미륵불이 오고 상제(上帝) 강증산이 오는 곳이니 한마디로 ‘우주의 자궁’이다. 정여립도 이곳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고 녹두장군 전봉준도 오리알 터 아래 황새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증산 강일순
증산이 도통한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은 조금 미뤄 놓고 그의 행적을 좀 더 따라가 보자.
도통하고 집에 돌아온 증산은 족보를 태워 버린다. 말인즉슨 ‘족보가 나에게서 다시 시작하며 모든 공명이 나에게서 다시 새로워진다.’는 선언이다. 부모나 집안 어른 등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기가 찼을지 짐작이 간다. 마치 중세말 유럽에서 성경을 불살라 버린 것과 같았는데 서양이었으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1902년, 서른두 살이 된 증산은 아홉 살 많은 제자 김형렬(1862-1932)의 집에서 살며 이른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시작한다. 아까 말한 우주의 질서를 바꾸는 작업이다. 증산 자신이 하느님이니까 가능하다는 것이지 아무나 못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주문과 부적, 기도 등이다. 김형렬은 증산의 가장 독실한 제자라 할 수 있는데 훗날 대원사에서 수행하고는 미륵불교를 만든다.
여기서 잠깐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천지공사에는 목적에 따라 운도공사(運道公事)· 신도공사(神道公事)· 인도공사(人道公事)가 있다.
운도공사는 지금까지 우주에 예정돼 있던 변동의 원리와 운명을 고치는 작업이다. 말세의 운도를 조정하는 세운공사(世運公事), 각종 재액(災厄)을 없애서 사람을 구하는 액운공사(厄運公事), 각 종교의 진수를 모아 무극대도를 만드는 교운공사(敎運公事), 각 지방의 지운을 조정하는 지운공사(地運公事)가 있다.
신도공사는 원한을 품고 죽은 신명들의 원한을 없애줌으로써 신명계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인데 신명의 원한을 제거하는 해원공사(解寃公事)와 신명을 재배치해서 각 신명간의 갈등을 풀고 이질적인 각 지방과 민족의 신명을 통일시키는 통일신단 구성이 있다.
인도공사에는 말세운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이 수련을 해서 신명과 동화되도록 하는 신화도통(神化道通)이 있는데 후천시대의 윤리도덕을 미리 닦도록 한다. 주문을 외우며 기도하고 수련한다.
1903년, 증산은 구릿골[銅谷]로 이사하는데 그 다음 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딸 강순임(姜舜任 1904~1959)이 태어난다. 그리고 이혼한다. 증산과 첫째 부인 정치순 사이에는 이전에 2남2녀가 태어났으나 모두 죽고 순임이만 살아남아 나중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세운다.
정치순을 내친 후 증산은 김형렬의 셋째딸 김말순(金末順 1890~1911)을 아내로 삼고자 했으나 장모 될 사람이 말순이가 열다섯 살로서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증산은 말순을 아내처럼 대한다. 몇 해 뒤에 증산이 죽을 때가 되어서는 어린 말순이더러 와서 간호하라 했으나 이번에도 어미의 반대에 부딪치자 증산은 말순이가 자기 부인이라며 자기가 죽더라도 절대 재가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실 이때에는 증산이 이미 제자 차경석의 이종 사촌 누이인 고판례(高判禮 1880~1935)와 재혼한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증산이 죽은 후 말순이는 시집을 가는데 얼마 안 가 병들어 죽고 만다. 증산교에서는 말순이가 하느님의 당부를 어겨서 벌받았다고들 한다. 증산은 평소에 말하기를 후천에는 과부나 홀아비가 있어서는 안 되니 서로 결혼하라고 했었는데 본인은 정식 결혼도 안 한 젊은 여인의 앞길을 막아 놓는 말을 했으니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증산의 언행에는 이렇듯 모순되는 점이 제법 눈에 띈다. 적어도 세속적인 눈으로 간주되는 그런 성인은 아닌 것 같다.
증산은 자신이 아내를 구하는 일을 수부공사(首婦公事)라고 했는데 증산교의 교의를 세운 사람은 실은 둘째 부인 고판례다. 고수부(高首婦), 천후(天后), 고부인(高夫人), 사모(師母)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상제(上帝), 증산상제(甑山上帝), 옥황상제(玉皇上帝), 천사(天師), 선생님 등으로 칭하는 증산과 함께 근본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증산이 새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하였다면 고판례는 실제로 증산교를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민심은 더욱 흉흉해진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융희시대(隆熙時代)가 된다. 그리고 동학의 주요 인사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 증산의 제자가 되는데 이는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면 차경석은 훗날 증산의 둘째 부인인 고판례의 교단으로부터 독립하여 보천교(普天敎)를 세우고 교주가 되었는데 이 보천교가 한 때 신도 육백 만에 이르는 조선 최대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일제의 눈을 피해 천자에 등극하여 차천자로 불린 차경석은 정읍에 거대한 성전인 십일전(十一殿)을 짓는 등 한 동안 독립을 염원하는 민중의 꿈을 대변하는 듯하였으나 결국 일제의 압박을 못 이기고 타협, 협조하여 신망을 잃고 쓰러진 후 보천교도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 경매에 붙여진 거대한 십일전은 헐려 서울로 옮겨져 다시 짜맞추어 지어졌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다.
1907년 증산은 차경석의 홀로 된 이종 사촌 누나인 고판례(당시 27살)와 결혼했는데 두 달 뒤인 1908년, 증산은 제자 스무 명과 함께 느닷없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는 혐의였는데 38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증산이 망가진 몸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전지전능을 믿었던 제자들은 시골 순사에도 무력하게 고초를 당하는 교주의 모습에 너무도 실망하여 거의 다 흩어진 후였다. 이에 증산은 남은 제자인 구릿골 김준상의 집에다가 동곡약방이라는 한약방을 열어 놓고 덧붙어 산다.
정식으로 한의학을 배운 적이 없는 증산은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주술적인 처방을 내리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 상태는 황달과 내종, 호열자(콜레라)의 증세를 나타내며 급속히 악화된다. 그러다 아래위로 피를 쏟더니 결국 주재소를 나온 지 1년 반 만인 1909년 8월 9일(음력 6월 24일), 쓸쓸히 벽에 기댄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서른일곱 살이었다. 심한 고문으로 내장이 파열되어 덧난 것 같다.
증산이 죽은 직후인 1909년 9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두 달에 걸쳐 일제는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을 벌이는데 조선인 앞잡이들을 앞세워 남한 일대, 특히 전라도 지역을 가로 세로 이 잡듯이 뒤져 의병들을 잡아 죽였다. 의병뿐이 아니었다. 고개 빳빳하고 눈에 힘 들어간 자는 보이는 대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근거지가 될 만한 촌락까지 초토화시켰으니 이는 합병에 앞서 저항의 씨를 아예 말리려는 작전이었다. 대략 만 7천 명의 의병이 사살되고 4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체포되어 처형당한 쟁쟁한 의병장만도 103 명에 이른다.
증산교
이로써 한말 의병은 궤멸되어 만주 등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으니 이듬해 일제의 강제 합병에도 조선인들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는 서구의 피상적인 관찰과 평가는 그리해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보면 증산의 죽음은 그 하나의 작은 전초전의 결과이겠다.
증산의 주검은 당시 그 고장 풍습대로 초빈(草殯)을 썼다. 주검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시렁에 얹어 풀로 덮어 놓았다가 몇 해 후 살이 썩어 없어지고 난 남은 뼈만 추려 다시 땅에 묻는데 멀리 남방이나 폴리네시아와 연원이 닿는 장례 습속이다. 훗날 증산의 뼈를 가지고 오랫동안 다툼이 일어나는데 주된 요인은 증산의 뼈에는 큰 영험이 있다는 제자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증산의 유일한 딸인 강순임이 소송에서 이겨 지금은 김제의 증산법종교 교단에 모셔져 있다. 하지만 왼팔 뼈는 언젠가 다툼의 과정에서 사라졌는데 누군가 왼팔에 더 큰 영험이 있다고 믿고 빼돌린 것 같다.
아무튼 이리하여 증산이 떠나가자 마지막 남은 제자들마저 흩어졌다. 그런데 이 불씨를 살린 것은 역시 여자였다. 증산의 둘째 부인 고판례는 사실 결혼 후 증산과 동거한 기간이 두 달 남짓이었다. 시부모를 모신 적도 없고 증산이 숨을 거둘 때도 곁에 없었다. 이게 서운했던지 고판례는 다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삼년상을 치른 후 증산의 첫 생신 치성을 드리다 일이 터졌다. 절을 하고 일어서던 고판례가 기절을 하며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한참 후에 깨어나서는 자신이 증산을 만나고 왔다며 증산의 말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죽은 교주가 살아왔다며 흩어졌던 신도가 모여들었다. 고판례는 비로소 교단다운 교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교세가 날로 불어나자 차경석은 교묘한 방법으로 고판례를 신도들로부터 따돌리며 자신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그러면서 전횡을 부리니 증산을 직접 모셨던 다른 제자들이 모조리 흩어져 각자 따로 교단을 차리고 고판례도 마침내 차경석과 결별한다. 차경석은 얼마 있다 신도들을 모조리 이끌고 나가 보천교의 교주가 된다. 이리하여 시작된 분파는 세월과 환경에 따라 새끼를 치며 끝없이 갈라지고 명멸한다.
비록 증산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의 민족종교 내지 신흥종교들의 분파작용은 그야말로 어지럽고도 눈이 부실 정도라 그 모든 이야기를 일일이 다 싣자면 백과사전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돌이켜보면 이를 무조건 탓할 일은 못 되는 것 같다. 세상만사 깎아 놓은 잔디밭처럼 단색으로 통일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들녘의 잡초밭처럼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고, 필 놈은 피고 시들 놈은 시들면서 각양각색으로 흐드러지고 거꾸러지는 것이 좋은가? 증산 계통 종교 하나만 하더라도 산 가지, 죽은 가지, 무성한 가지, 시드는 가지를 다 그리려면 체육관 벽면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하기야 기독교, 불교 등 기성 종교들도 더하면 더했지 별반 다를 바가 없으리라 본다. 그러니까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이러한 여러 교단 가운데 몇 가닥을 들추자면 고판례가 1911년에 세운 선도교가 처음이다. 태을교나 훔치교라고도 불렸는데 신도들이 증산이 가르쳐 준 태을주를 많이 읊었고 그 첫 구절이 ‘훔치 훔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산의 딸인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가 있다.
수제자 김형렬이 세운 미륵불교가 있는데 고판례가 죽은 증산을 만나고 왔다고 하자 자신은 첫부인인 정치순으로하여금 증산의 혼령과 접촉하게 하였다. 정치순이 실패하자 자신이 직접 모악산의 금강대에 들어가 백일간 수련한 끝에 신안(神眼)을 얻고 세운 종단이다.
그밖에도 여러 종단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지만 현재 우리 눈에 뜨이는 중요 종단에는 증산도와 대순진리회가 있다.
증산도(甑山道)는 1978년에 생긴 종단으로 80년대부터 유행한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특히 전국의 각 대학에 폭넓게 퍼졌는데 이론적인 교리 정립에 심혈을 기울인 종단이다. 이른바 주류 사학계에서 위서로 취급하는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받아들여 적극 활용한다. 경전으로는 도전(道典)을 쓴다.
다른 하나는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인데 신도수가 가장 많다. 1969년에 생겼는데 이 종단 하나로도 한국 8대 종단에 들어간다. 수재의연금 등을 가장 많이 내는 단체로 알려졌다. 대순이란 말은 증산이 이 세상을 구하려면 어느 나라에 태어날까 하고 지구를 몇 바퀴 돌았기[大巡]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전으로는 전경(典經)이 있다. 전에는 길거리 전도로 ‘도를 아십니까?’ 하고 말을 붙이며 접근했다고들 한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여러 교단이 있지만 통일된 경전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나 의례, 양식도 없이 각자도생에다 각양각색이며 심지어는 이들 간에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단 한가지 확실한 공통점은 증산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 모신다는 것이지만 그를 부르는 호칭도 종단에 따라 다르다. 현재 증산 계통 전체의 신도 수는 잘 파악이 되지 않으며 본래 종교 통계가 고무줄 통계이긴 하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심지어는 수백만까지 들쭉날쭉하다.
대순진리회
위에서 살펴본 바로는 증산교에 대해 사람에 따라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되기도 하겠지만 여러 군더더기를 떨쳐 버리고 그 가르침의 핵심을 알아보는 것이 지름길이겠다.
다른 무엇보다 증산의 가르침에는 근대적 가치가 녹아 있고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가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어록에서 몇 가지 가져와 곱씹어 보자. 먼저 후천개벽 사상이다.
“이제 혼란키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천지개벽이라 옛일을 이음도 아니요 세운(世運)에 매여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처음 짓는 일이라.”
“이제 하늘도 뜯어고쳐 물샐 틈 없이 도수(度數)를 짜 놓았으니 제 한도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다음은 인존(人尊)사상이다.
“신보(神報)가 인보(人報)만 같지 못하니라.”
“인망(人望)을 얻어야 신망(神望)이 오른다.”
“일은 하늘이 꾸미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다[某事在天 成事在人]”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라.’
“신은 사람이 먹는 대로 흠향(歆饗)하느니라.”
“교중(敎中)이나 가중(家中)에 분쟁이 일어나면 신정(神情)이 문란해지나니 그것을 그대로 두면 세상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느니라.”
평화를 염원하는 것으로는,
“해원(解寃)해야 상생(相生)한다.”
민족주체사상으로는 이 글 앞머리에 든 것 ‘국뽕’ 말씀 외에도,
“조선을 장차 세계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사람을 믿는 자는 이롭지 못하리라.”
“서양사람…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에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써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度數)를 어기는지라…”
그럼에도 놀랍게도 근대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조선을 장차 세계 상등국으로 만들려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라. 이제 배에 실어 오는 화물표를 따라서 넘어오게 되므로 그러하다.”
“후천에는 …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이 요구하는 대로 빼닫이 칸에 나타나며 모든 일을 자유 욕구에 응하여 신명이 수종 들며 운차를 타고 공중을 날아 먼 데와 험한 데를 다니며 하늘이 나즉하여 오르내림을 뜻대로 하며…”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에는 불 때지 않고 밥을 지어먹으며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농사 지으며 도인의 집마다 등 대 한 개씩 세우는데 온 동학이 크게 밝아 햇빛과 같으리니 이제 전등은 그 표본에 지나지 못한 것이니라. 또 기차도 화통 없이 몇 만 리를 삽시간에 통행케 되며 문고리와 옷걸이도 황금으로 만들며 신도 금당혜를 신으리라. 또 곡식 종자도 한 번 심어서 베어들인 뒤에 해마다 그 뿌리에 움을 길러 걷어 들이는 것이 생기리니 이제와 같이 심고 거두기에 큰 힘이 들지 아니하며 또 아무리 박전이라도 옥토가 되게 하리니…”
몸과 마음이 나란히 발전해야 하며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강조한다.
“직업은 귀천이 없고 녹(祿)줄이 달려 있나니 성의를 다하여 종업(從業)함이 옳거늘…”
“글도 않고 일도 않는 자는 사농공상에 벗어난 자니 쓸 데가 없느니라.”
“선천에 안락을 누리는 자는 후천에 복을 받지 못 하리니 고생을 복으로 알고 잘 받으라.”
“선천에 낮은 직이요 업이었으나 직이라는 것은 병을 낫우어 주는 것이고 업은 잘 거느리면 그 직과 업이 성스러운 것이 되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관(神觀)은 이러하다. 자기 자신은 물론 최고의 신이다.
“천지간에 가득찬 것이 신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의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이렇듯 증산의 가르침은 민족의 수난기에 생겨나 발전해 왔다. 닥쳐올 미래의 두려움에 떠는 민중에게 빛과 희망을 전하며 증산은 늘 ‘마음을 놓으라’고 했다.
증산을 따른 이들은 저마다의 해석으로 이상사회를 꿈꾸며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였고 때로는 민중을 우롱하며 잇속을 챙겼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러한 악몽 같은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으며 못 견디고 미쳐 버렸을지도 모를 현실에서 구해낸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꿈이 한낱 백일몽이었든 남들도 여태 멀쩡히 믿는 천년왕국에는 얼추 다가가든 한참 못 미치든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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