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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깊이 제1권 제2장
상승주의의 미학
반 경 환
아름다운 인간- 행복한 인간에 대하여
나는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라는 대 전제 아래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때에 ‘시’라는 말을 문학적으로만 지나치게 축소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 속에는 우주 전체를 응축시켜 놓을 수가 있는 것이듯이, 내가 사용하는 ‘시’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학문, 예술, 정치, 역사,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만일,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의 탐구가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학자는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사람이며, 역사가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족적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한 개인의 행복보다는 그가 속한 국가와 인류 전체의 행복을 연출해내고자 하는 사람은 정치가이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자기 자신의 행복은 물론, 인류 전체의 행복을 연출해내고자 하는 사람은 경제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급문화인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은 원시적인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보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타고 난 성격이나 취향이 다르듯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은 다종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고급문화인들의 한 특성을 이루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반하여,원시인들의 삶의 양식은 공동체 사회에 이미 저당잡혀 있거나, 어떤 분업화도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고급문화인인 오늘날의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이 다종 다양하다고 해서, 그 삶의 양식을 꿰뚫고 있는 근본적인 명제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지점에서, 모든 학문, 예술, 정치, 사회, 역사, 경제, 문화는 우리 인간들의 낙천주의를 양식화시켜 놓은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자 한다. 만일, 모든 학문, 예술, 정치, 사회, 역사, 경제, 문화가 우리 인간들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양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할 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우리 인간들의 역사와 함께, 그처럼 번성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인간들의 삶은 회의되거나 질문되기 이전에 조건없이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며, 삶이란 죽음의 완성이다. 지혜의 오른 쪽에는 장수가 있고, 지혜의 왼쪽에는 부귀영화가 있다. 따라서 모든 학문, 예술,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 분야의 행복을 연출해낼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평이란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지이며, 우리는 전문가들에게 그 믿음과 신뢰를 토대로 하여, 얼마 간의 존경과 경의를 표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살 수가 있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것일까? 이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명제이고,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 명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면 과연 잘 살 수가 있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것일까? 헤겔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자기 속성으로 인지하여 전유하는 것이 정신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에 대한 유물사관만이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인도의 도덕부정론자나 니체는 위해, 폭력, 착취는 모든 유기체들의 근본조건이므로 선악을 넘어서서 행동하라고 말하고, 기독교주의자들은 머나 먼 하늘 나라의 천국을 말하고, 불교의 사상가들은 공수래공수거라는 말로써 무소유의 행복을 말한다. 어떤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고, 어떤 사람의 행복은 조소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어떤 사람의 행복은 전쟁과 이전투구의 대상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의 행복은 영원한 경의와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서설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한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가 있다. 첫째는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의 명제, 하나의 행동방식이 결정되면 아무리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세계를 변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는 것이고, 넷째는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학문)에만 전념을 하겠다는 것이다. 언어도, 법도, 사회적 획득물이고, 도덕도, 종교도, 부도 사회적 획득물이다. 따라서 사회적 동물로서 전통과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 것이고, 하나의 명제, 하나의 행동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우유부단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세계를 변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형으로서 변혁시키겠다는 것을 뜻하고,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에만 전념을 하겠다는 것은 곧 바로 앎과 행동을 일치시켜 행복한 삶을 연출해내겠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학교 교육, 즉 그릇된 지식의 토대를 뿌리채 뽑아버리고,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 연구에 있어서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서설”을 기획했던 데카르트, 철학자로서 학문 연구 태도와 함께, 자기 자신의 행복한 삶의 윤리적 척도로서 ‘몇 가지 도덕 격률들’을 제시해보였던 데카르트, 강단철학의 길과 曲學阿世의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좋은 생활의 태도와 좋은 학습의 태도로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의 철학적 명제를 완성했던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이러한 실천 명제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신들의 행복에 비교해보는 대담한 발상과 그 실례를 과시한 바가 있다. 왜냐하면 앎과 행동의 일치는 그 주체자에게 영원불멸의 삶과 부귀영화를 가져다가 주고, 그 주체자를 신적인 존재로 수직 상승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물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오랜 훈련과 자주 반복되는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철학자들이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비결, 그리고 고통과 빈곤을 무릅쓰고 신들과 행복을 겨룰 수 있었던 비결도, 주로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연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된 한계들을 끊임없이 고찰한 결과, 자신의 생각 외에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완전히확신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은 다른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과 행운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철학을 갖고 있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렇게 처리할 수 없는 사람보다 자신들이 더 풍요롭고 더 힘이 있으며,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1: 178)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선구자이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정식화시킨 사람이다. 방법적 회의, 즉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 그의 철학적 모토요, 정신이요, 방법이긴 했지만, 그러나 그의 사유는 ‘회의를 위한 회의’나 ‘부정을 위한 부정’의 소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회의는 모든 진리와 지혜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과 감각을 의심하고, 신과 물체를 의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수학까지도 의심을 했지만, 그러나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수행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은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의 유명한 철학적 명제가 탄생하게 되고, 그의 ‘방법적 회의’는 하나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회의에 지나지 않게 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행복론이면서도 우리 인간들의 행복론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 의해서, 사유하는 인간, 즉 이성적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가 마련되고, 우리 인간들의 자기 발견과 주체성이 확립된 것이다. 그것은 원시공동체 사회 속에 저당잡혀 있거나 구속되어 있었던 인간의 자기 발견이요, 인간 해방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인간은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의 활동무대인 세계를 발견했던 근대적 인간이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신적인 존재로 수직 상승시키기도 했던 인간이다. 데카르트가 고통과 빈곤을 무릅쓰고 신들과도 행복을 겨를 수가 있었던 비결은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이 세계를 전유하고자 했던 헤겔주의자들의 ‘절대 정신’에도 해당되고, 그의 행복은 절대 정신의 소유자로서 만인들의 존경과 경의의 대상이 된다. 만일, 행복이, 네 마음 속에, 네 의지 속에 있는 것이라면 모든 전문가들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며, 그것은 또한 선악을 넘어선 행복이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행복론과 우리 인간들의 행복론을 연출해냈던 데카르트, 그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외롭고 고독하지만, 자기 자신이 좋아하고 자기 자신만이 하고 싶었던 학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이다. 그는 더 많은 고통과, 더 많은 전율을 원했던 사람이며,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용기를 지녔던 인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저주받은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며, 축복받은 사람이 저주받은 사람이다. 데카르트, 반 고호, 폴 고갱, 보들레르, 랭보 등, 저주받은 사람과 성자는 동일한 인물의 다른 두 모습일 뿐인 것이다.
“잘 모르겠소. 완전히 생소하고 환상적인 작품이었소. 창세(創世), 다시 말하면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의 정경이랄까? 남자와 여자, 즉 모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와 동시에 장엄하고 무정한, 그러면서도 사랑스럽고 잔인한 자연에 대한 찬미라고 할 수 있었을 거요. 그 그림에서 경외에 찬 마음으로 무한한 공간과 끝없는 시간을 맛보았소. 그는 우리들이 주위에서 매일 대하는 나무들...... 벤골 보리수, 홍렴화나무, 돌배나무 등을 그렸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부터 이들 나무들을 전혀 다른 각도로 보아왔던 것이오. 그들 나무 속에는 내가 막 움켜쥘 듯 하면서도 영원히 내 손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영혼과 신비가 깃들어 있었소. 그리고 색깔들도 예전의 눈에 익은 그 빛깔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지요. 모두가 자기 특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거요. 발가벗은 남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태초에 진흙으로 창조된 그들은 우리들처럼 이 지상에 속해 있었지만, 동시에 신성한 면을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그 그림 속의 인간은 그의 원시적인 본능을 지닌 모습 그대로 발가벗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인간을 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죠.”(2: 279)
四十而不惑의 나이에, 증권거래소의 안정된 직장과 처 자식을 모두 팽개쳐버리고 그림 공부에만 매달렸던 사나이, 사십이라는 뒤늦은 나이가 인생의 획기적인 대 전환점, 즉 그림 그리기에 가장 알맞은 나이라고 생각하면서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에 매달렸던 사나이, 세상의 모든 인습이나 관습을 경멸하고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창조해내기 위하여 어떠한 고통마저도 기꺼히 감수해냈던 사나이, 아름다운 환상에 취해서 무서운 정열로 불 타오르고 있었던 사나이, 타히티라는 아름다운 남국에서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펼쳐놓고 창세의 걸작품 속에서 죽어갔던 사나이, 어느 누가 폴 고갱의 아름다운 작품에 돌을 던질 수가 있겠으며, 그의 행복했던 삶을 끝끝내 불행한 삶이었다고 끌어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앎과 행동의 일치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인생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승화되지 않는 한, 결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나의 막역한 친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병고를 치르다가 죽었다 향년 35세
장의비가 없었다
동네에서 비용을 거두었다
부인이 보이지 않았다
묘지로 운구 도중
비바람이 번지고 있었다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하나 하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도망치고 말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김종삼, 「實記」 전문
천재란 하늘이 빚어낸 인물을 말하지만, 그는 우리 인간들의 상식과 평범함의 세계를 뛰어넘은 어떤 인물을 말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수많은 가능성보다는 한움큼의 확실성만을 움켜쥐려고 하지만, 천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한움큼의 확실성보다는 수많은 가능성을 향하여 걸어나갔던 사람들이다. 천재는 일상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풍습의 미덕과 질서를 파괴하는 무뢰한이자 미치광이나 바보로 취급을 받게 되어 있고, 그것이 천재의 형벌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비범한 능력과 비범한 두뇌는 신들의 질투를 받게 되어 있고, 그 ‘신들의 질투’라는 말은 대부분의 일상적인 인간들이 한 뛰어난 천재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한 채찍이 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신들의 질투란 없고, 일상적인 인간들이 그 비범한 인물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그에 대한 미안함과 속죄의식----그의 뛰어난 업적이 널리 인정되고 받아들이게 될 때쯤----속에서 ‘신들의 질투’란 말을 헌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 고호가, 폴 고갱이, 보들레르가, 니체가, 스피노자가 과연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대접을 받아왔던가? 「實記」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는 그 수많은 천재들 중의 한 사람이며, 그의 일생은 장엄하고 화려할 수도 없었다. 겨우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지만, “장의비”도 없었고, 그의 시신을 “묘지로 운구 도중” 부인도 없었고, 한 사람의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 상, 가장 훌륭한 음악을 작곡하고, 오늘날까지도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있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가 불행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음악을 사랑했고, 자기 자신의 음악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데카르트와 폴 고갱이 그러했듯이, 그는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했고, 그 모든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김종삼의 「實記」는 그 비극적인 정조에도 불구하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에게 바쳐진 ‘헌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거가 ‘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거기에서 유한성과 죽음을 터득하게 된다. 존재의 무, 유한성, 죽음 등은 우리 인간들에게 삶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고, 그 공포와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적인 장치로써 수많은 신화와 종교가 탄생하게 된다. 신화와 종교가 우리 인간들의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라면, 우리 인간들의 지식의 축적은 자기 자신의 한계와 그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고 삶의 활력과 윤기를 더해주는 것은 최고급의 지혜로써 성화되어 온 반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깎아내리고, 메마르고 건조하며, 우울하고 쓸쓸한 그 모든 것들은 배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곧 바로 죽어버리는 것이 차선’이라는 염세주의마저도 우리 인간들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켜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소유와 무집착을 역설하고 있는 종교들,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의 공산주의, 그리고 모든 ‘생의 철학’ 등의 근본 과제가 고통의 극복이라면 염세주의자들은 죽음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세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는 고통의 극복이 가능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염세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더없이 커다란 실패와 패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생을 위로하고, 삶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죽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던 것이다. 모든 사상은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며, 생명부정에의 의지인 염세주의의 유효성도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나게 된다. 모든 사상은 ‘미학’으로 꽃 피어나며, 모든 ‘미학’은 ‘사상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학’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며, 아름다움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성장, 고양, 힘의 감정 등을 뜻하지만, 추함은 쇠퇴, 위험, 무력 등을 나타낸다. 인류의 역사 상, ‘아름답다’는 말만큼 남용된 언어가 없으며, 그 아름다움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세계나 천국,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인간, 모든 것이 풍요롭고 행복한 세계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꿈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운 세계만이 에덴동산이 될 수가 있고, 아름다운 인간만이 크고 위대할 수가 있다. 아름다운 인간만이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가 있고, 아름다운 인간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 속에는 종의 건강, 종의 미래, 종의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천재란 하늘이 빚어낸 인물이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말은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들에게 일상적인 인간들이 붙여준 ‘헌사’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 모짜르트, 폴 고갱 등,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천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지만, 그 천재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생사를 넘어서서, 선악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에만 전념을 한다는 것, 바로 이 ‘투신’의 문제가 천재의 삶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짓게 된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브루노 선장이 바로 그 모범적인 예에 해당된다. 아내와 몇 명의 원주민들과 함께, 수십년 동안이나 불모의 섬을 개간하여 야자수와 관목 등을 심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출해냈던 브루노 선장,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성실한 이마의 땀방울로 자기 자신의 노동 속에 함몰되어 갔던 브루노 선장, 그 브루노 선장도 위대한 천재이며, 아름답고 행복했던 인간이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가난한 농부도, 구두수선공도, 신문배달원도, 파출부도, 일용직급노동자도, 환경미화의 청소부도, 그 어느 누구도 위대한 천재의 삶, 즉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요컨대 행복한 인간, 신적인 인간의 삶이란 직업의 귀천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또한 성공과 실패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의 더럽고 추한 천역을 아름다운 성역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이 바로 신적인 인간이며 행복한 인간인 것이다. 지혜가 있는 자는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있고, 그 목표가 없으면 어떠한 천재의 삶도 가능하지가 않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이며, 그는 평범한 인간의 삶과 그 길을 거절할 줄 알고 있다. 용기가 있는 자는 결코 한 눈을 팔지 않는 성실한 인간이며, 그는 이미 온 천하를 다 얻은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수단은 저절로 얻어지며 그는 낙천주의의 이상형의 인물로서 행복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삶의 지혜, 용기, 성실함은 최고급의 사상(예술)으로 꽃 피어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은 그 사상의 신전 앞에서 언제나 존경과 경의를 표하게 된다.
‘비상의 꿈’, 혹은 ‘비상콤플렉스’에 대하여
송찬호는 왜 스스로의 발에 날개가 아닌 족쇄(구두)를 채우며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 넣어 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는 왜 “한 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인 삶의 한 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보들레르는 왜 “날개 달린 여행자여, 그대는 얼마나 우습고 무기력한가!/ 전에는 그렇게 아름답던 게 이제는 우스꽝스럽고 추하고나”라고 뱃사람들에게 붙잡힌 알바트로스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는 왜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와 같다/ 태풍을 쫓아 다니며 사냥꾼을 비웃는다/ 그러나 야유 투성이의 땅에 떨어지면/ 그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걷지도 못한다”라고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천상의 삶은 자유와 해방과 평화의 삶이지만, 지상의 삶은 부자유와 구속과혼란 뿐인 삶이다. 송찬호도 이 지상의 삶을 벗어나 ‘언덕’을 날아오르며 ‘보리이랑’을 세어 보고 싶어하고, 보들레르도 ‘야유 투성이’의 이 지상의 삶을 벗어나 ‘태풍을 쫓아다니며 사냥꾼을 비웃을 수 있는’ ‘구름의 왕자’와도 같은 삶을 지향한다. 천상의 세계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이며, 지상의 세계는 더럽고 추한 세계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는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세계이며, 더럽고 추한 세계는 저주받은 세계이다. 천상의 세계는 전지전능한 신들과 마음씨 고운 천사들이 살고 있고, 저주받은 세계는 사악한 악마들과 구제받지 못한 영혼들이 살고 있다. 그러니까 송찬호와 보들레르는 두 발 달린 짐승(인간)으로서 하늘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며, 그 동경을 통하여 자기 자신들을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를 송찬호의 「구두」와 비교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읽고 감상해보기를 바란다.
때때로 장난하느라 선원들은
커다란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게으른 여행 친구처럼 쓰디 쓴 심연으로
미끄러지는 배를 뒤따르는 알바트로스를
갑판 위에 놔두자마자
창천의 왕자는 어색하고 부끄러워
커다란 흰날개를 노 비슷하게
불쌍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여행자여, 그대는 얼마나 우습고 무기력한가!
전에는 그렇게 아름답던 게 이제는 우스꽝스럽고 추하고나
어떤 자는 파이프로 부리를 지지고
어떤 자는 절름거리며 예전에 날아다니던 그 새를 흉내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같다
태풍을 쫓아다니며 사냥꾼을 비웃는다
그러나 야유 투성이의 땅에 떨어지면
그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걷지도 못한다.
----샤를로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전문
송찬호의 ‘날개/ 구두’에 보들레르의 ‘날개/ 잡힘’이 정확하게 대응하며,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이 지상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천상의 세계를 동경한다. 송찬호가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니면서도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할 수 있는 삶의 본능의 옹호자라면, 보들레르 역시도 “야유 투성이의 땅에 떨어”져서도 “구름의 왕자”를 꿈꾸는 삶의 본능의 옹호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다같이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니면서도 새의 육체 속에다가 발을 집어 넣어 볼 수 있는 이카루스의 후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구두」와 「알바트로스」의 반향은 낙천주의자의 영속적인 보편성이며, 그것은 초월성의 징표하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비상의 꿈의 이면에는 ‘비상콤플렉스’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만, 그들의 시는 언어의 사원(言+寺)이 되며, 그 언어의 사원은 아름다운 건축 양식과 사상의 차원에서 무한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전(사원)에는 그들의 지혜, 용기, 성실 등, 그들의 생존의 역사가 깊이 있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보들레르는----송찬호의 장인 정신은 보들레르의 그것에는 턱없이 미치지도 못하는 삼류의 그것에 불과하지만----“이 혹독한 책 속에, 나는 내 온 영혼을, 내 온 애정을, 내 온 종교를, 내 본 증오를 집어넣었소”라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대범하고 자신 있게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는 그의 종교였고, 악의 꽃은 그가 우리 인류에게 헌정한 언어의 사원이었다. 보들레르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저주받은 시인에 불과했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자연이라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서, 일체의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언어의 사제였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와 퇴폐주의와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시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고,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베를렌느, 앙드레 브로통은 모두 그가 피워낸 새싹들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시인의 생존과 그 노력의 결정체이다. 송찬호의 「구두」나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는 다같이 그들의 ‘비상콜플렉스를 넘어서서, ‘초월성의 징표’로써 아름답게 승화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그의 아버지 다에달루스와 함께 크레타 섬의 미궁--레버린스를 빠져나올 수가 있었지만, 높이 높이 날아오른다는 호기심과 그 욕망 때문에 하염없이 추락해버린 어떤 인물이고, 패이어손은 태양신의 아들로서 ‘태양마차’를 타고 드높은 상공을 비행하다가----그의 아버지 태양신의 경고마저도 잊고---- 추락을 해버린 어떤 인물이며, 무척이나 사납고 길길이 날뛰던 천마 페가수스를 길들였던 벨레로폰은 올림프스의 신전으로 날아가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욕망 때문에 추락을 해버린 어떤 인물이다. 이카루스, 패이어손, 벨레로폰은 두 발 달린 인간들로서 모두가 다같이 ‘비상콤플렉스’의 희생양들이며, 그 위대한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올림프스 신전에 살며 지상과 천상을 자유 자재롭게 날아다니는신들, 황금샌달을 신고 물 위를 걸으며 하늘을 날아 다니는 헤르메스, 물 위를 걸어다니며 수많은 이적들을 일으키고 끝끝내 하늘로 날아 올라간 예수, 축지법의 손오공, 도솔천과 극락의 세계에서 자유 자재롭게 살아가는 미륵보살과 아미타불, 그리고 브라만과 비쉬누와 시바와 알라 신들----. 신들이란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이고, 우리 인간들은 무지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신들이란 아름답고 행복한 천상의 세계에서 살고, 우리 인간들은 더럽고 추한 지상의 세계에서 산다. 비상은 신들만의 귀중한 특권이며, 우리 인간들에게는 금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한계 상황과 그 유한성을 극복하는 행위 자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나는 감히, ‘비상콜플렉스’는 ‘외디프스콤플렉스’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큰 콤플렉스라고 선언할 수가 있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아버지 살해’가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에 대한 상승 욕망 때문이지, 성적 욕망 때문이 아닌 것이다.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말이나 다윈의 ‘적자 생존’이라는 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와 상승 욕망을 증명해주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 말들은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우생학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상승 욕망은 권력 욕망이나 성적 욕망보다도 그 울림이 더 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도 않고,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종을 보존하려는 성적 욕망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즉 신적인 인간에 대한 상승 욕망이 권력 욕망이나 성적 욕망을 자라나게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외디프스콤플렉스는 조건없이 비상콤플렉스의 하위개념으로 편입되어야 하며, ‘아버지 살해’는 ‘비상콜플렉스’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실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날아오른다’는 동사는 ‘달린다’와 ‘뛴다’라는 동사와도 다르고, ‘간다’나 ‘걷는다’라는 동사와도 다르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새는 호랑이와도 다르고, 뱀과도 다르고, 백상어와도 다르다. 우리 인간들은 호랑이처럼 빠르게 달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달릴 수는 있고, 뱀처럼 재빠르고 날렵하게 기어다닐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어다닐 수는 있다. 그리고, 더욱 더 백상어처럼 멋지게 헤엄을 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헤엄을 칠 수는 있다. 그러나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다닐 수는 없다. 아니,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기는 커녕, 그 흉내조차도 거의 낼 수가 없다. 우리는 마라톤 우승자를 ‘인간기관차’라고 부르고, 백미터 경주의 우승자를 ‘인간 탄환’이라고 부른다. 인간기관차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빨리 달릴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하고, 인간탄환은 새처럼 가장 빠르게 날아다닐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백미터 우승자와 마라톤 우승자는 단순한 개인들만이 아닌 데, 왜냐하면 그 기록의 기쁨이나 그 헌사의 품격에는 모든 인간들의 염원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더 새에 가까운 인간들이고,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이상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의 거대한 콤플렉스를 형성해 왔고, 그 반대방향에서 상승주의에 대한 미학이 양식화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상승주의는 삶에의 의지이며 힘에의 의지이다. 상승주의는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가 피워낸 첫 번째 삶의 양식에 해당된다. 상승주의의 기원, 혹은 비상의 꿈의 기원이 ‘비상콤플렉스’이며, 그 비상콤플렉스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의 역사는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밤하늘, 발 밑의 우물을 보지 못하고 그를 빠뜨리게 했던 탈레스의 밤하늘, 지구를 우주에 떠 다니는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고 최초의 지동설을 역설했던 아리스타르코스의 밤하늘, 언젠가는 인공 날개를 달고 사람을 태운 기계가 하늘을 날아 다닐 것을 예언했던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 R. 베이컨의 밤하늘, 중세의 암흑기를 뚫고 1543년 5월 24일, 천제궤도의 회전에 대하여를 통하여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을 입증해주었던 폴란드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의 밤하늘, 우주공간을 자기 자신의 왕국으로 삼고 수많은 별들을 그의 신하로 삼았던 티코 브라헤의 밤하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다가 마침내 화형장의 한 줌의 잔재로 사라져간 조르다노 브루노의 밤하늘, ‘모든 행성은 타원을 그리면서 태양 둘레를 회전한다’고 역설했다가 ‘마녀 사냥’의 혹독한 고문을 겪었던 케플러의 밤하늘, 만유인력, 즉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던 뉴턴의 밤하늘,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고 태양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역설했다가 종교재판소의 심판대에 섰던 갈릴레오의 밤하늘, 적색변이를 발견하고 ‘도풀러 효과’에 의하여 은하계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허블의 밤하늘, 은하계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빅뱅 이론’으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려 했던 벨기에의 천문학자 르메트르의 밤하늘, 뉴턴의 고전역학의 거시세계와는 정반대로 미시세계를 규명할 수 있는 양자역학의 막스 플랑크의 밤하늘, 뉴턴의 역학 이론에 도전하여 ‘E=MC2’라는 방정식을 정립하고 ‘시공간의 휘어짐’을 증명해보인 아인시타인의 밤하늘----. 우리 인간들의 역사는 비상콤플렉스의 역사이며, 그 반대 방향에서 ‘상승주의’가 양식화된 역사이다. 어쨌든 이러한 하늘은 이카루스가, 패이어손이, 벨레로폰이 도전했던 하늘이며, 부처, 예수, 올림프스의 신들이 자유 자재롭게 날아다니며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異國 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에서
윤동주의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라는 시구가 우리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의 전거’가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 그것이 ‘비상의 꿈’으로 자라나 ‘상승주의의 역사’로 이어진 구체적인 전거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별은 단순히 밤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니며, 시인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운 사람들(패, 경, 옥,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등)의 총체로서 그 모든 것에 가깝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비상콤플렉스는 우리 인간들의 교통수단에도 압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 왜냐하면 배, 자전거, 기차, 자동차가 먼저 발명되었지, 비행기가 먼저 발명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의 최종적인 단계이며, 우리 인간들의 비상콤플렉스의 소산이고, 또한 초월성의 징표이기도 한 것이다. 최초의 인공 날개를 상상했던 베이컨, ‘인간은 과연 날 수 없는가’라는 주제와 끊임없이 싸우며 최초의 헬리콥터의 모형도를 설계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이트 형제 이전에 증기기관의 동력으로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했던 랑그리, 마침내 제트 엔진에 이어서 로켓 엔진으로 우주왕복선을 쏘아올린 20세기의 과학자들, 어느 덧 초속 30만km의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공간을 자유 자재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비행물체의 발명에 몰두하고 있는 21세기의 과학자들----. 두 발 달린 짐승들에게 있어서 머나 먼 천상의 세계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이며,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들의 궁전이기도 하다. 상승주의는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우리 인간들의 첫 번째 삶의 양식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비상콤플렉스를 지닌 인간으로서 우리들은 날이면 날마다 ‘비상의 꿈’을 꾸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세이레 새앙쥐처럼 눈뜨는
오물오물 폭신한 두 살배기 몸이
솜털로 보드랍게 적셔진
딸아이의 분홍 원피스를 넌다
뒷골목마다 흘리고 다녔을
자정의 취기와 어둑한 소음,
이루지 못한 욕망들이 얼룩으로 남겨진
남편 와이셔츠를 넌다
비트로도 지워지지 않는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판화로 촘촘히 찍힌
아들 운동화를 넌다
자외선이 노화의 원인인 거 알지?
언니가 보내준 챙 넓은 모자
적당히 가릴 건 가리고 살라고
적당히 눈빛을 세상으로부터 감추면
그게 노화하지 않는 거라고
내 하얀 면 모자를 넌다
빨래들이 저들끼리 빨랫줄에서
힘껏 목을 당기며 턱걸이 한 채
수다를 떤다
아침 햇살을 야금야금
쌀벌레처럼 파먹는다
더는 말고 빨래만큼만
나를 내보일 수 있다면
알몸으로 눈부시게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김명원, 「빨래를 널며」 전문
김명원의 「빨래를 널며」라는 시는 세목의 진정성 이외에도 실존의 덫인 일상성에 함몰함으로써 그 일상성을 벗어나, 자기 초월은 물론, 그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들의 존재를 신성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일상의 영역은 일과 평범함이 지배하는 영역이고, 신성의 영역은 자기 초월과 고귀함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는 우선 첫째 연에서 “세이레 새앙쥐처럼 눈뜨는” 두 살배기 딸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고, 둘째 연에서는 “자정의 취기와 어둑한 소음” 속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들”로 얼룩진 남편에게 초점을 맞춘다. 셋째 연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아들에게초점을 맞추고, 넷째 연에서는 “노화의 원인”과 그 방비에 고심하는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딸아이와 남편과 아들과, 그리고 시인의 삶은 제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의 양식은 실존의 덫에 갇힌 채, 일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두 살배기 딸아이의 얼룩과 남편의 얼룩과 아들의 얼룩,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얼룩에는 얼마나 크나 큰 아픔과 그 고통이 묻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그 아픔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것을 씻어내 버리는 행위 자체에 그 초점을 맞춘다. 빨래는 씻어냄의 행위이며, 그것은 구도자의 행위가 된다. 험담은 자기 자신과 그 험담의 대상과 그것을 듣는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파괴한다. 그러나 씻어냄은 무언의 미담이며, 자기 자신과 그 대상과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 사회를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 나가게 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결백으로부터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부터 용기가 생겨난다. 결백이란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사리사욕이나 음탕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위대한 인간들과 현자들이 선택했던 삶의 태도와 그 자세를 말한다. 씻어냄의 행위는 일상의 영역을 신성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는 행위이며, 자기 초월은 물론, 타인들을 구원하는 구도자의 행위가 된다. “빨래들이 저들끼리 빨랫줄에서/ 힘껏 목을 당기며 턱걸이 한 채/ 수다를 떤다/ 아침 햇살을 야금야금/ 쌀벌레처럼 파먹는다”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더는 말고 빨래만큼만/ 나를 내보일 수 있다면/ 알몸으로 눈부시게/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이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도덕적으로 선한 자는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신성의 영역으로 날아가고 있는 자이며, 그 이타적인 사랑을 통해서, 아름답고 행복한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는 김명원의 「빨래를 널며」라는 시를 통해서, 딸아이와 남편과 아들, 그리고 시인의 소망과 꿈이 모두 성취되는 이적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일상의 얼룩이 씻겨지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순수한 감동, 그 때묻지 않는 감정이입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언어의 사원으로 날아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김기택, 「꼽추」 전문
이미 김명원의 시에서 시사한 바가 있듯이, 비상의 꿈이 반드시 ‘날아감’을 지칭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내부 초월’이나 ‘수평적 초월’이 있듯이, 일상의 영역을 신성의 영역으로 변모시키려는 행위 자체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의 꿈에 정확하게 대응한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인간들은 하루도 날아오르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날이면 날마다 행복이 증대될 것이라는 비상의 꿈과 내일이 오면 이 아픔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간들의 삶은 유지되고 변모될 수가 없을 것이다. 김기택의 「꼽추」라는 시도 마찬가지이다. ‘꼽추 노인’은 길거리의 노숙자이고 불구자이며, 이미 생물학적 나이로 산송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김기택은 어떤 ‘미학적 거리’라는 방관자적인 위치를 벗어나 그 대상과의 일체감을 통해서, 꼽추 노인의 기형적인 육체를 아름다운 새의 몸짓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인과 꼽추 노인의 비상의 꿈이 영원불멸의 삶에 대한 동경이면서도, 유한한 인간의 자기 위로와 미래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시의 힘이고,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한계 상황과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황금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킬 수 있는 ‘황금란’, 불안과 공포와 수많은 장애물들을 잠재우고 다른 곳, 다른 세계, 아름다운 천상의 유토피아로 우리 인간들을인도해 줄 수 있는 ‘황금란’----, 이 황금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기택의 절망이 깊이는 행복의 깊이가 된다. 따라서 꼽추 노인의 끊임없는 추락마저도 아름다운 상승주의의 미학으로 양식화된다. 송찬호, 김명원, 김기택의 시들은 어떤점에서는 보들레르, 랭보, 파울 첼란,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들보다도 더 우수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렇듯이, 그 시인들의 사상의 빈약함과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에 함몰되어 종합인 시야를 지니지 못한 점이 가장 커다란 결함으로 남는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철학과 사상의 부재, 나는 감히, 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도 더 크다고 말할 수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공중곡예를 펼쳐 보이는 인간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수없이 날개를 돋아나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인간들, 지혜, 용기, 성실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하루살이나 파리처럼 가볍게 여기면서도 더욱 더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힘센 자나 실존의 일상성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며, 모든 장애를 극복해나가는 낙천주의자들의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비상의 꿈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다. 비상(상승)의 꿈은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쁨이고, 삶에의 의지가 증대되고 있다는 기쁨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 무한한 우주를 독수리의 날개짓으로 자유 자재롭게 날아 다니며 삶의 찬가를 부르는 낙천주의자들----, 비상콤플렉스를 넘어서면 ‘비상의 꿈’이 가장 화려하고 웅대하게 펼쳐진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형이상학을 옹호하면서
오늘날 학문에 있어서 ‘논리학’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크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논리학은 그러나,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학문이며 더 이상의 발전이 가능하지 않은 학문이다. 나는 여기서 논리학의중요성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학에 대한 하나의 우화를 통해서 오히려, 거꾸로,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역설해보고자 한다. 가령, 예컨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데카르트가 그의 성찰과 방법서설에서 주장했더라면, 그는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화형장에서의 한 줌의 잔재로 사라져 가버리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중세의 사변적이고 관념론적인 학문의 풍토에다가 기하학적(자연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고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을 주장했던 데카르트, 그는 정말로 인간의 육체보다도 영혼불멸을 믿었던 것이며,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고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데카르트는 그가 신의 존재를 믿고 있었든지, 아니든지 간에, 위트레이트 신학자들의 ‘무신론자’라는 혐의에 맞서서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을 역설하고, 우리 인간들의 육체를 가볍게 보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이 완전한 신이 있다는 것 혹은 현존한다는 사실을 그 어떤 기하학적 논증 못지 않게 확실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라는 말(1: 193)과 “이와는 반대로, 우리 영혼이 신체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본성상 신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들을 훨씬 잘 이해할 것이며, 아울러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원인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영혼불멸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1: 207). 하지만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반발하여, 하늘에 계신 신의 존재를 끌어내리고 ‘만물에 내재하는 신’, 즉 범신론을 주장한 바가 있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신이 존재하고 있었고, 따라서 ‘심신일원론’ 속에서만이 모든 유기체들의 존재 증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컨대 사변적 이성(경험을 초월한 사변적 이성)으로부터 인식하려는 지나친 생각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나는 ‘신’, ‘자유’, ‘영원한 삶’을 나의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3: 27)라고, 형이상학 전체에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칼날을 들이대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형이상학이 죽지는 않았지만, 매우 치명적인 중상을 입게 되었다.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세계의 해석’보다는 ‘세계의 변혁’에 더 강조점을 두었던 마르크스는 모든 종교를 이성의 치명적인 환각 상태(마약이나 알콜 중독의 상태)로 끌어내렸고, 니체는 마침내 “영혼 자신이 육체보다 더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게 되었다”라는 말과 함께, ‘신의 사망증명서’를 발급해준 바가 있다(4: 53).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시대적 정황과 그 이유가 있었겠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이 가능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의 상대적 완전성과 삶의 보충으로써만 가능했던 신이 이제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억압하고 질식시켜 왔던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이 우리 인간들의 삶에 봉사를 해야지, 우리 인간들이 신을 위해서 봉사를 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니체의 철학에는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신의 죽음은 하이데거에 의해서 형이상학의 종말로 나타났고, 그 결과, 새로운 인간 존재의 탐구가 시작되었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역사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차이의 망각의 역사’라고 설명하면서 그 존재의 탐구를 ‘탈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추구했지만, 끝끝내 어떠한 성과도 이루어낼 수가 없었다.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시를 원용하며, 이방인이 소외된 사람이거나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는 최초의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역설의 논리를 강조했지만, 그 최초의 사람은 어디까지나 떠돌이-- 나그네일 뿐이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독일어 중심주의와 독일 우월주의를 다같이 비판하면서 그 최초의 사람을 “유령”이라고 비꼬아 준 바가 있지만(5: 298), 나는 이방인이란 본질이 없는 존재, 영원히 훼손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없는 존재, 영원히 훼손된 존재는 신이 없는 시대의 우리 인간들의 존재론적 모습과 그 운명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그 떠돌이--나그네의 운명을 극복하고 어떠한 삶의 양식과 그 운명을 창조하고 개척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미, ‘탈현대 자본주의 사회이냐? 신화의 시대이냐?’라는 화두를 제1장, 「행복의 깊이」에서 던져놓은 바가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 이전에, 동양 사상에 대한 서구의 제국주의적인 침공과 그 약탈의 과정을 폭로해보고자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리스의 다신교에 철퇴를 가하고 기독교의 모태가 된 다이몬을 옹립한 결과, 중세의 암흑기를 거쳐서, 니체가 신의 사망증명서를 발급해주기까지 서구의 역사는 유일신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미셸 푸코, 들뢰즈 등의 서구의 무신론의 기원에는 인도의 ‘도덕부정론’과 ‘회의론’과 그리고 ‘유물론’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예컨대,
“푸라나에 의하면 선악은 사회적 관습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며, 사람이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거기에 필연적인 인과응보는 있을 수 없다 한다. 즉 생물이나 인간을 토막토막 짤라죽이고, 괴롭히고, 슬프게 하고, 전율케 하고, 생명을 빼앗고, 가택 침입, 약탈, 강도, 간통, 거짓말 등을 하여도 조금도 악을 행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악업에 대한 응보도 없다고 한다. 또한 제사를 행하고, 남에게 보시하고, 감관을 제어하는 극기의 생활, 참말을 하여도 선행이 아니다.”(6: 45)
라는 푸라나 카샤파의 ‘도덕부정론’은 스피노자와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를 이루고 있고, 또한,
“아지타에 의하면 地, 水, 火, 風의 4원소만이 참된 실재이며 독립상주(獨立常住)이다. 더욱이 이들 원소가 존재하고 활동하는 장소로서 허공의 존재까지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들 4원소로 구성된 인간이 죽으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地는 외계의 地의 집합으로 돌아가고, 水는 水의 집합으로, 火는 火의 집합으로, 風은 風의 집합으로 돌아가 모든 기관의 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인간 그 자체는 죽음과 함께 無가 되는 것이며 신체 이외에 사후에도 독립하여 존재하는 영혼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탄식을 하지만, 시체가 태워지고 난 후 남는 것은 검은 비둘기색의 뼈뿐이고 공물은 재가 된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신체가 파괴되면 소멸하여 사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따라서 현세나 내세는 존재하지 않으며, 선업 혹은 악업을 행하였다고 해서 그 과보를 받는 일도 없다. 보시, 제사, 공의도 무의미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부모도 없고, 또 사람들을 가르쳐 인도할 정도로 진력하는 사람, 바라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6: 46)
라는, 아지타의 유물론은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의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밖에도 산자야의 회의론, 자이나교의 불상생(不殺生), 진실어(眞實語), 부도(不盜), 불음(不婬), 무소유(無所有), 상대주의, 그리고 고타마 붓다의 제행무상(諸行無常), 무소유, 무집착, 苦를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열반과 해탈의 경지는, 칸트, 쇼펜하우어, 미셸 푸코, 데리다, 들뢰즈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오늘날의 우리 인간들이 ‘인도인’에서 파생된 새싹들로 규정하고 있지만, 인도의 사상은 무한히 넓고도 깊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덕부정론, 회의론, 유물론, 상대주의, 힌두교들의 귀족주의, 불교도들의 최초의 민주공화제 등,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인도의 사상에 그 젖줄을 대고 흡수해 들이고 있는 자양분들이 얼마나 많은 지는 감히 상상할 수 조차도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니체는 왜 그토록 인도의 사상과 부처의 생애를 그처럼 역설했으면서도 푸라나 카사파의 ‘도덕부정론’이나 아지타의 ‘유물론’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일까? 도덕군자로서의 칸트의 윤리학은 자이나교와 불교의 복사판이며, 마르크스의 유물론보다는 인도의 유물론이 앞 서 있고, 탈현대 사회의 만병통치약인 ‘상대주의’는 자이나교도들이 그처럼 역설했던 상대주의가 아니던가? 니체의 윤리학은 선악을 넘어서서의 그것이 핵심----특히 선악을 넘어선 힘(권력)에의 의지----이며, 푸라나 카샤파의 ‘도덕부정론’과 아지타의 ‘유물론’의 글도둑질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이 말이 의심스러운 독자들이 있다면, 니체의 철학과 인도의 사상을 독자 여러분들이 직접 꼼꼼하게 정독을 하고 비교 분석해 보기를 바란다. 서양의 무신론의 기원에는 이처럼 인도의 사상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고, 서양의 칸트,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등은 그 인도 사상에다가 제국주의적인 총칼을 들이대고, 그것을 약탈해간 문화적 식민주의자들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급문화인의 속성이 니체의 말대로, “위해, 폭력, 착취”를 일삼으며, 서양인을 고급문화인으로, 동양인을 원시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7: 207). 그러나 나는 지금 서양의 철학이 모조리 인도 사상의 복사판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사유는 정적인 사유이고, 서양의 사유는 동적인 사유이다. 동양의 철학은 어떠한 명제를 제시하되 그것에 대한 실험과 검증의 절차를 생략한 채, 선문답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나간 반면, 서양의 철학은 하나의 명제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그것에 대한 엄격한 실험과 검증을 통해서 구체적인 사상과 이론으로 정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학문의 성과는 서양 철학의 성과----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그것이 과학이라는 점에 있어서----이며, 어느 누구도 그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나 역시도 이 점을 전적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지만, 서양 철학의 근본 주제들이 인도 사상의 복사판이라는 사실을 아주 정직하게 폭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그 떠돌이--나그네의 운명을 극복하고 어떠한 삶의 양식과 그 운명을 창조하고 개척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의 유전자 공학의 발달은 어느 덧 새로운 종의 인간을 창조하고, 산업과학의 발달은 로봇트나 컴퓨터처럼 인공두뇌를 지닌 기계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올라와 있다. 과연 유전자 공학에 의한 새로운 종의 인간이나 인공두뇌를 지닌 기계 인간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모습이며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을까? 나는, 감히, 그것은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싶다. 거기에는 우리 인간들의 눈물도, 피도 없고, 인간다운 모습이나 아름다운 삶의 모습도 있을 수가 없다. 신의 죽음과 형이상학의 종말의 결과가 이처럼 위기의 시대를 불러왔고,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단 하나의 사상, 즉 황금 만능주의를 양성하고 가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탈현대 사회의 자본은 신의 죽음, 형이상학의 종말, 학문, 도덕, 풍습의 미덕, 인간의 죽음, 문학의 죽음, 문자 매체의 쇠퇴를 가져왔고,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을 종식시켰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말의 탈 현대적인 시대에 “모든 지시 대상은 소멸되었다”라는 보드리야르의 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8: 17). 그렇다면 이 탈 현대적인 시대에 철학예술, 혹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유신론에서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은 트로이의 왕비에서 그리스의 노예로 전락을 하게 되었고, 어째든 그 운명을 다한 것 같지만, 나는 아직도 형이상학이 모든 인본주의를 떠바쳐 주고 있는 토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신의 존재를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겠으며, 수많은 교회와 사원들과 그 신도들을 또한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은 아직도 어리고 어린 아기이며, 그 존재 증명이 판단중지된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모르고, 도덕과 종교와 법을 모르고, 또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르면 신의 존재가 증명이 된다면 어떤 종교도 가능하지 않고, 또한 정반대 방향에서 신의 부재가 증명이 된다면 어떤 종교도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형이상학을 팔아서 밥을 먹는 사제 계급이 종적을 감추게 되고, 모든 우상들의 허물이 벗겨지고, 신과의 직접적인 대면만을 하게 될 것이고, 신의 부재가 증명된다면, 모든 사원들과 교회와 사제들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되고, 그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아무런 탈도 없게 될 것이다. 유신론과 무신론, 이 두 세계는 모든 종교, 예술, 학문이 필요없는 세계이며, 우리 인간들의 존재조차도 필요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삶이 가능하려면 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하고, 없으면서도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신비주의와 애매모호한 베일의 장막 속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가 가능해진다. 신, 인간 존재의 본질, 영혼불멸, 종교, 도덕, 죽음, 행복, 미래의 운명 등,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에 단 하나의 모법답안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시와 철학 예술이 존재하고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가 가능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신, 인간 존재의 본질, 영혼불멸, 종교, 도덕, 죽음, 행복, 미래의 운명 등,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에 대한 정의(正義)는 없고, 정의(定義)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 명제들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이며, 따라서 正義는 없고 그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을 규정하는 定義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定義의 멋진 비약이 正義의 탈을 쓰고, 도덕군자로서의 칸트의 ‘황금의 도덕률’에 침을 뱉아버린다. 종교, 예술, 학문, 도덕, 법, 윤리 등은 삶의 본능을 옹호하는 수단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다 갈라 터진 손가락으로 도라지 쪼개는
한 겨울 노점상 할머니 입김이 뽀얗다
모두 키워 떠나보낸 삶이 바닥까지 드러나
끝이다 싶은 생, 건사하느라 악착같다
바람에 날리는,
백발모근에서 가끔은 새카만 움이 돋기도 한다
그루터기만 남은 갈라터진 논바닥
먹이 찾아 날아든 참새들,
부리질 하는 들판은
내어줄 것 없어 안쓰럽다
오늘 아침 신문은 한 생애
도라지 쪼개고 콩나물 팔아서
몇 억 학교재단에 맡긴
할머니의 까뭇까뭇한 머리칼로 눈부시다
늦가을 들판 매운 바람에
나는 쩌억쩍 갈라진다.
----박종국, 「늦가을, 다랭이 논」 전문
박종국의 「늦가을, 다랭이 논」은 삶과 죽음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할머니’와 그렇지 못한 ‘시인’의 대비가 돋보이는 시이며, 그 무기교의 기교 속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겨울 노점상의 할머니”는 모든 자식들을 다 키워보내고도 “끝이다 싶은 생”을 악착같이 건사는 할머니이지만, 그러나 그 할머니는 “도라지 쪼개고 콩나물 팔아서” 전 재산을 “학교 재단에 맡긴” 할머니일 수밖에 없다.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그루터기만 남은 갈라터진 논바닥”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더 이상 “내어 줄 것”이 없어 안쓰러워 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며,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끝이다 싶은 생”으로도 오히려, 거꾸로, 새로운 새싹들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 이타적인 사랑에는 기교도 필요없고, 직업의 귀천이나 남녀노소의 차별도 있을 수가 없다. 그 더럽고 추한 천역이 아름다운 성역으로 변모되면서, “늦가을 들판 매운 바람에/ 나는 쩌억쩍 갈라진다”라는 시인의 메마른 마음을 반성시키고, 「늦가을, 다랭이 논」의 공간을 대지모신의 공간으로 변모시키게 된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신이란 후세에, 추켜 올려진 아버지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제멋대로 추켜 올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기 행복의 원리’에 따라서, 존재의 근거가 무인 인간, 그 무의 결핍성 때문에 고뇌의 바다에서 좀처럼 헤쳐 나오지 못하는 인간, 그 인간들이 영원불멸의 삶을 살고, 날이면 날마다 산새와 노루가 뛰어놀고, 먹고 마실 것이 넘쳐나고, 모든 인간들과 함께, 이 지상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늦가을, 다랭이 논」의 할머니, 즉 부처와 예수에게 귀의하면 무병식재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신들에게 수많은 제물을 차려놓고 그토록 어렵고 힘든 예배의 형식을 빌려서 존경과 경의를 표하고, 자기 자신들의 소망을 기도해 오지 않았던가? 더욱이 종교의 교리는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것에 대한 어떤 억압이나 강제의 힘이 없어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송두리 채 바치고, 무조건의 복종과 충성을 맹세해 왔던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1
山기슭에 몰린 안개더미가 잔잔히 밀린다. 안개더미는 잠시 얇게 풀어지면서 山少年의 뛰는 모습을 이루더니 소년을 홀로 山 꼭대기에 남겨 두고 사라진다.
2
山 꼭대기에 걸려 출렁거리는 무지개 위에 맨발로 서서 건넛산을 향해 외치는 소년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
툭 꽃망울이 터진 노루발풀
해가 타 오른다, 山 3時
풀잎 꿈 속에 꼬부려 누어 소년은 잠이 들고 이글이글이글 풀잎 꿈 속에서소년의 꿈 속으로 불덩이가 넘어간다
----신대철, 「自然」 전문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삶은 죽음의 완성이다. 시와 예술, 그리고 삶의 본능을 옹호하는 그 모든 것들에는 어떠한 기교도 필요가 없고, 그 무기교의 기교 속에서 「늦가을, 다랭이 논」의 ‘할머니’는 가고, 「自然」의 ‘山少年’이 태어나게 된다. 즉, 옛 세대는 성화되고 새 세대는 두 발에 날개를 달고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뛰어 놀게 되는 것이다. “무기개 위에 맨발로 서서 건넛산을 향해 외치는 소년의 들뜬 목소릴 듣고/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 툭 꽃망울이 터진 노루발풀”이라는 시구가 그렇고, “소년의 꿈 속으로” “이글이글이글” “불덩이가 넘어간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시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삶의 내용을 쓰는 것이고, 철학예술도 온몸으로 온몸으로 삶의 내용을 쓰는 것이다. 모든 시와 철학예술의 터전이란 「自然」일 수밖에 없다. 자연 속의 소년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며, 두 발에 날개가 달린 인간이고, 우리 인간들이 쫓겨난 에덴동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해가 타오르는 ‘山 3時’에 잠을 자고, “무지개 위에 맨발”로 설 수 있는 소년은 모든 장애를 극복한 소년이며, 언제, 어느 때나 자유롭게 날아 다닐 수가 있으니까, 날개와 날개를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소년이다. 우리 인간들은 죽어 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 우리 인간들의 인생은 회의되거나 질문되기 이전에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승주의 미학의 토대는 형이상학이고, 우리는 형이상학의 토대 위해서만이 인공 날개가 아닌 자유로운 비상의 꿈을 펼쳐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탈현대 자본주의 시대이냐? 신화의시대이냐?’라는 화두를 던져 본만큼,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형이상학은 우리 인간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인본주의의 토대이며, 그 형이상학은 내가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낙천주의가 파생시킨 새싹에 불과하다. 형이하학(유물론)이 자연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며 형이상학(유신론)의 멱살을 움켜잡으면, 형이상학이 비 이성적인 신비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형이하학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신은 죽었다’는 말에는 ‘신은 살아있다’라고 대답을 하고, ‘신은 살아 있다’는 말에는 ‘신은 죽었다’라고,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반격을 가한다. ‘영혼불멸’이라는 말에는 ‘영혼은 없다’라고 응수를 하고, ‘종교의 무용론’에는 ‘종교의 유용론’으로 반격을 가한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무라는 말에는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대답하고, 예술의 무용론에는 예술의 유용론으로써 응답한다. 형이하학이 문명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말에는 형이상학이 그 문명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응답을 하고, 지상낙원의 건설을 역설하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래세의 천국으로 반격을 가한다. 이처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싸움은 그 끝이 없게 된다. 바로 그 싸움 속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과 예술이 있게 되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만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싸움이 종식된다면, 그때에는 이 세상도, 하나님도, 우리 인간도, 그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는 자로서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옹호없이 어떻게 인간의 삶이 가능하고, 예술이 가능하고, 행복이 가능하단 말인가?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이 않는 초월의 세계이며, 초월의 세계는 일상성의 쪽박을 떨구어버린 신성의 세계이다. 그 초월의 세계는 두 가지의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 외디프스, 프로메테우스, 반 고호, 폴 고갱, 베토벤, 알렉산더, 그리고 나폴레옹처럼 불멸의 업적을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한 종의 보존에 의해서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수없이 역설해 온 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 방법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연과학의 성과에 힘을 입어, 어떤 날짐승들보다도 더 빨리, 더 많이, 더욱 더 자유롭게 이 세상을 날아 다니게 되었고, 로봇트나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 인간에 의해서 그토록 어렵고 힘든 육체 노동마저도 대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초고속 인터넷망은 모든 사건과 소식들을 ‘실 시간 대’로 연결시켜 주고 있고, 유전자공학에 의한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은 그처럼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와 영원불멸의 삶을 안겨주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연과학의 성과에 반하여,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죽음, 형이상학의 종말, 학문, 도덕, 풍습의 미덕, 인간의 죽음, 문자 매체의 쇠퇴,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의 종식, 나날이 행복해지기 보다는 점점 더 불행해져 가고 있는 삶----, 바로 이것이, 또한 오늘날의 자연과학의 성과가 아니던가?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이상의 자연과학의 탐구를 유보시키고, 탈현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신화의 시대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살인청부업자들이며, 만지는 것마다 그 모든 것이 황금이 되게 하는 미다스 왕의 후예들일 뿐이다. 형이상학은 인본주의의 토대이며, 만일, 형이상학이 종말을 고한다면, 우리 인간들의 시도, 예술도, 삶도 그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을 말살시키는 자연과학의 날개는 가짜의 날개----옛날에는 형이상학(종교)이 자연과학의 숨통을 조인 바가 있지만, 이제는 자연과학이 형이상학의 숨통을 조여대고 있다는 점에서----이며, 형이상학만이 우리 인간들의 두 발에 날개를 달아주고,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로서, ‘무신론의 근본원인’이 되는 자연과학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형이상학의 날개를 달고 날아 다녀야 하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 인간들의 첫 번째 삶의 양식인 ‘상승주의의 미학’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승주의의 미학’에서 삶의 본능을 옹호하고, ‘하강의 깊이’에서는 죽음의 본능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우리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두 양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상의 힘; 그 독수리의 날개짓으로!
나는 지금까지 ‘상승주의 미학’의 토대는 형이상학이고, 우리는 형이상학의토대 위해서만이 인공날개가 아닌 자유로운 ‘비상의 꿈’을 펼쳐보일 수가 있다는 점을 역설해온 바가 있다. 형이하학(자연과학)은 문명과 문화의 건설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인본주의를 말살하는 인공날개를 달아주지만, 형이상학은 인본주의를 토대로 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상상력의 날개와 정신의 날개, 그리고 지혜의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상의 꿈의 기원이 비상콤플렉스이며, 우리 인간들의 역사는 그 비상콤플렉스를 극복해온 역사이긴 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더러운 천역을 위대한 성역으로 변모시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지상낙원으로 변모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를 무한히 찬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날아 다녀야 하며, 그 이상적인 모델로서의 날짐승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와도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들 중의 신인 제우스의 신조(神鳥)도 독수리이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신조(神鳥)도 독수리이다. 독수리는 새들 중의 새이며, 해마다 계절 따라 이동하는 떠돌이--철새가 아니다. 독수리는 가장 높이 자유롭게 날아 다닐 수도 있지만, 그 반면에,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탁월하게 관찰하고 통찰할 수 있는 새라고 할 수가 있다. 독수리는 그의 강력한 적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떠한 장애물이나 그 고통 앞에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용기를 잠 재우지 않는다. 독수리는 항상 정확하고 빈 틈이 없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모든 것을 발밑으로 내려다 볼 줄 아는 하늘의 제왕이다. 독수리는 삶의 지혜의 전수자이며, 하늘의 제왕이다. 만일, 우리 한국인들이 내가 그토록 역설한 대로 염세주의의 토양을 극복하고 ‘낙천주의라는 사상의 숲’에 그 둥지를 틀게 된다면,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그 먹이(지혜와 사상)를 날라다가 줄 것이다. 낙천주의자의 근본신조는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키며, 사회 자체를 변혁시키려고 노력한 인간이 그의 예언자적인 지성과 밝은 통찰력으로, 무지하고 우매한 대중들, 즉 만인들을 이끌어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낙천주의자는 그의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으로 거듭 거듭 자기 갱신을 이룩한 인간이며, 그 위대한 인간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는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그 행복과, 그가 소속된 국가와 그 구성원들의 미래의 운명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기독교, 불교, 만인 평등주의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을 더없이 비굴하고 천박하게 타락시키는 생명부정에의 의지이며, 염세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중독성 마약일 수밖에 없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에게, 더럽고 추한 것은 더럽고 추한 인간에게! 나는 독수리의 눈과 지혜로, 그리고 독수리의 가장 날카로운 부리와 그 발톱으로, 더럽고, 추하고, 이 지구상에서 생존해 있다는 것이 더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우리 한국인들에게,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마치, 최후의 진술처럼, 가장 자신 있게 들려 줄 수가 있다.
독수리는 떠돌이--철새가 아니고, 삶의 본능의 옹호자이다. 독수리는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삶의 본능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어린 양들은 독수리가 나쁘다고 말하지만, 독수리는 어린 양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고기는 맛 있고, 영양가가 풍부하고, 어린 양들의 살코기의 힘으로 그 위대한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현대시문학사에서 대단히 아쉬운 점은 이 하늘의 제왕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예컨대, 최승호는
대머리독수리는 미국의 國鳥이다.
흰 대머리의 수리,
복면을 쓴
백악관의
두리번거리는 파란 눈들,
높이 떠서 넓은 적과 먹이를 살피는 눈들.
짐승의 세계에선 오직 강한 자만이
큰 자유를 누리는 법이라고
거대한 날개의
대머리독수리떼가
발톱에 대포알을 움켜쥐고 대륙을 횡단한다.
----최승호, 「대머리독수리 1」 전문
라는 시에서처럼, 「대머리독수리」라는 연작시를 쓴 바가 있지만, 그것은 그의 배타적인 반미주의와 함께, 그의 염세주의를 되풀이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머리독수리는 미국의 國鳥이다”라는 시구가 그렇고, “거대한 날개의/ 대머리독수리떼가/ 발톱에 대포알을 움켜쥐고 대륙을 횡단한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물론 반미주의적인 정서는 아직도 유효하고, 그의 염세주의마저도 ‘실레노스의 지혜’의 문맥 내에서는 그 일면의 타당성이 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왜, 가장 영리하며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묵살의 대상이 되고, 모든 시인들의 신경질적인 강박관념의 대상으로까지 확대되어 왔던 것일까? 어느덧 우리 한국인들은 진정으로 자기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용기를 상실하고, 이처럼 무의미한 체념과 염세주의만을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과연, 우리 한국인들이 이처럼 뿌리가 깊은 염세주의를 극복하고, 적의 건강, 적의 지혜, 적의 위대함, 적의 이로움, 적의 행복, 그리고, 위대한 제국의 꿈과 그 전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한국 현대시의 주요한 흐름은 아직도 염세주의이며, 그러기에는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힘이 없고, 용기도 없고, 이처럼 망국적인 배타적 감정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영어와 영국인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글을 썼고, 알렉산더가 총과 칼의 성과가 아닌, ‘문화의 성과’----‘알렉산드리아 문화-----에 의해서 세계정복운동을 펼쳐나가려고 했듯이, 세계정복운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운동이며,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많은 이민족을 정복하고 그 영토를 빼앗는다는 것, 외부의 침입자의 궤변으로 이민족의 문화를 박멸하고 자기 문화를 강제한다는 것, 원주민을 노예계급으로 거느리며 지배계급이나 귀족계급이 된다는 것, 자기 민족은 세련된 말과 가볍고 화려한 옷과 한가함과 나태함 속에서도 예술과 취미활동을 하게 하고, 그 반면에, 이민족에게는 전면적인 관리체계로써 법률과 질서와 노동을 강요한다는 것, 바로 이러한 것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덕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줄리어스 시이저, 아우구스투스, 징기스칸, 나폴레옹 등이 그 제국을 건설했던 자들이며, 지난 20세기의 레닌, 스탈린, 히틀러, 아이젠하워, 케네디, 레이건 등도 바로 그러한 자들이고 할 수가 있다. 제국의 역사는 세계정복운동의 역사이며, 전쟁을 기피하고 적을 강력하게 해주면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다. 모든 유기체에게 있어서 자기 영역의 확대는 최고선이며, 자기 영토의 손실은 최악의 손실이 된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지나치게 평화를 사랑하고 적을 이롭게 해준 댓가로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폭력 앞에서 자기 나라와 그 주권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 한국인들도 ‘대한제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기의 몸과 꿈을 한없이 낮추고 事大主義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에 의지하여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 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그러나 하나의 말장난일 뿐, ‘당나라’를 식민지 본국으로 섬겨오는 결과를 낳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식민지가 되고, 그 몽고를 지나치게 섬긴 결과,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낳지 않았던가?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 지나쳐 ‘청나라’를 간과하고, 그 청나라의 장군 앞에서 마침내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치욕을 겪어야만 하지 않았던가? 또, 그리고, 그 청나라에 대한 충성이 지나쳐 ‘일본’을 간과하고, 대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나라를 빼앗겨야만 하는 국치를 겪어야만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은 어떠한가? 소련과 미국에 의한 한반도의 강점의 결과로 한국전쟁을 겪어야만 했고, 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모든 부패의 잔지판을 벌이고 있지 않던가? 이 모든 것이 자기 스스로 몸과 꿈을 낮추고, 세계정복운동을 펼쳐보지 못한 결과일 뿐인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총과 칼로 수많은 민심을 짓밟고 그처럼 가혹하고 잔인했던 ‘군사독재정권’을 옹호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짓밟았던 미국에게, 與野의 대선주자들의 충성의 경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대외 협상의 신조는 첫째도 事大主義이고, 둘째도 事大主義이며, 셋째도 事大主義이다. 따라서 이 사대주의가 이 땅의 지배계급의 인사들에게 그처럼 엄청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안겨주고, 그들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망각한 채, 배부른 노예계급의 안락함으로 어떠한 변화마저도 싫어한다. ‘대당절의’, ‘대원절의’, ‘대명절의’, ‘대청절의’, 친일파의 ‘대일절의’, 친미파의 ‘대미절의’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지배계급의 인사들에게는 사대주의가 최고의 사상과 이념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사상과 이념 앞에서는 국가의 이익과 미래는 없고, 사소한 개인들의 이익과 명예만이 있을 뿐이다. 동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전인 대한민국을 전쟁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당나라와 원나라와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어서 일본과 소련과 미국에게 내어준 우리 한국인들, 우리 한국인들의 근본신조는 ‘나는 눈 앞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될 것이다. 이 땅의 피 지배계급의 인사들은 염세주의로 신음을 하고 있고, 이 땅의 지배계급의 인사들은 사대주의로 디룩 디룩 살찐 돼지가 되어가고 있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에게서 성취되고, 그것은 영원한 제국의 꿈으로써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오늘날의 미 제국주의를 혐오하면서도 동경하고 있다.
꿈에서 본 몇 집밖에 안 되는 화사한 小邑을 지나면서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큰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來日에 나를 만날 수 없는
未來를 갔다
소리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보면서
돌뿌리가 많은 廣野를 지나
----김종삼, 「生日」 전문
우리 인간들이 오늘날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리고, ‘스타워즈 계획’을 세울 수가 있을 만큼 고급문화인이 된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유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해하는 자는 날개가 있고, 지혜는 가장 빠른 새’라는 힌두경전의 경구가 있는 데, 그것은 두 발 달린 인간이 그의 ‘이성’과 ‘사유’에 의하여 하늘을 날게 되었다는 사실과도 매우 일치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하여 과거의 문화유산을 축적하고, 그 문화유산의 힘으로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날아가게 된 것이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미래의 날아 다니는 인간, 즉, 새로운 인간의 이상형을 창출해내기 위한 투신의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혜, 용기, 성실은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이다. 김종삼은 그 지혜, 용기, 성실로 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 세상을 보다 넓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다 보게 되었다. 그에게는 사납고 험상궂은 날씨와 거친 파도마저도 두렵지가 않고, “돌뿌리가 많은 광야”마저도 어렵거나 힘들지가 않다. “꿈에서 본 몇 집 밖에 안 되는 화사한 소읍을 지나며”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큰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사납고 험상궂은 날씨와 거친 파도 쯤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보이고, “돌뿌리가 많은 광야”마저도 내일이면 황금의 옥토로 변모될 평야지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큰 독수리”이며, “내일에 나를 만날 수 없는/ 미래”의 인간이기도 하다. ‘생일’이 또다른 ‘나’를 탄생시키고, 또다른 ‘나’가 또다른 ‘생일’을 만들어 내면서, “화사한 소읍”은 제우스의 신전이 된다. 이처럼, 이 땅을 벗어날 수도 없고, 이 땅에 매여 살아야만 하는 인간, 그러나 그 인간이 중력의 힘을 벗어나 우주왕복선을 쏘아올리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주 정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성’이라는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인간 조건과 그 한계상황을 뚫고 날아오르기를 꿈꾸며, 그 ‘날아오름’은 이 세상의 삶의 본능의 옹호가 된다. 삶에의 의지는 비상에의 의지이며, 상승주의의 미학 속에서만이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한 찬가가 울려 퍼질 수가 있는 것이다. 너는 어떤 사유의 힘으로, 어떤 사상의 힘으로 너의 두 발에 날개를 달고, 하늘 나라의 천사처럼,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김종삼의 ‘거대한 독수리’처럼, 우리 인간들의 하늘 위로 아름답게 날아가고 있는가? 나는 우리 한국 사회처럼 신성모독이 필요한 사회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주체성을 이룩하고 고급문화를 형성해내기 위해서는 지난 시대의 모든 관습과 전통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낙천주의자의 제일 명제를 하루바삐 육화시키고, 가장 화려하고 위대하게 세계정복운동을 펼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 자신을 비롯하여 개인의 불행이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문명과 문화의 건설에만 관심이 있고, 따라서 내가 쏟아붓고 있는 노력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향상이다. 그러나, 지극히, 불행하게도 ‘한국인’이라는 가시면류관이 나의 두뇌에는 씌워져 있고, 나는 결코, 그 형벌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 한국인들은 아직도 되다가 만 민족이며, 백치와도 같은 민족이고, 영원히 치유가 불가능한 민족일는지도 모른다. 나의 우리 한국인ㄱ,ㅎ에 대한 사랑은 가시면류관의 고통을 받고 있고, ‘애국심’은 ‘악마의 화신’인 미국 대통령의 ‘좆대가리나 빨아라’라고, 민주당의 총재와 한나라당의 총재가, 이 땅의 사대주의가, 그렇게 강권을 하고 있다. 아아, 부유한 문화선진국의 국민으로서 자기 조국에 대한 애정을 망각하기란 얼마나 쉬울 것인가를, 나는 저주받은 한국인으로서 뼛속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사상은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이며, 사상의 오른쪽에는 종의 건강이, 사상의 왼쪽에는 부귀영화가 있다. 우리는 음식물을 먹고 자라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상을 먹고 자라며, 그 사상의 힘으로 위대한 문명과 문화를 건설한다. 사상만이 고귀한 명예이며 그 모든 것이다. 사상가는 독수리처럼 하늘의 제왕이며, 우리 인간들의 최후의 목적이며, 그 완성인 것이다.
참고 문헌
1, 데카르트, 방법서설, 문예출판사, 1997
2, 서머셋 모음, 달과 6펜스, 문예출판사, 1985
3, 칸트, 순수이성비판, 일신서적, 1991
4,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청하, 1980
5, 데리다, 해체, 김보현 편역, 문예출판사, 1996
6, 中村 元, 인도사상사, 김용식, 박재권 공역, 서광사, 1983
7, 니체, 선악을 넘어서, 청하, 1982
8, 쟝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민음사, 1992
*(1: 178)은 1의 책 178면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