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창세 12,13에는 의구심을 일으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가뭄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파라오 앞에서 사라를 누이로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그라르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달라’ 사라가 아내가 되었다고 해명합니다(20,12). 그의 아들 이사악도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 앞에서 레베카를 누이로 소개합니다(26,7). 두 사람 모두 위기를 면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기에, 대인답지 못함은 물론 거짓말한 듯한 점이 비윤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혹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는 구절이 아가서에 나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4,9). 여기서 “신부”는 “누이”의 병행어로 쓰여 두 호칭 사이에 일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고대 근동에서는 이복 누이와 혼인하는 근친혼이 흔했습니다(2사무 13,13 등 참조). 지금도 중동에는 근친혼의 잔재가 남아 있어 아랍인들에게 사촌은 좋은 배우자감으로 여겨집니다. 과거 신라와 고려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도 비슷한 풍습이 존재했던 때가 있습니다. 다만 사라에 비해, 레베카는 이사악의 친척이긴 했으나 이복누이는 아니었는데요(창세 24,15), 이 점을 이해하는 데는 고대 근동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도움을 줍니다. 현재 이라크에 자리한 옛 메소포타미아 성읍 누지(Nuzi)의 관습에 따르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건 그의 누이가 되는 것에 해당하였습니다. 혼인과 함께 얻게 되는 이런 이중 위상은 ‘시누이’라는 우리말 호칭도 묘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올케나 시누를 ‘sister-in-law’(법에 의한 누이)라 칭하는 영어 표현도 생각나게 하고요.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는 연인들이 서로를 ‘오빠’ ‘누이’라 칭한 흔적이 남아 있고(ANET 467),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고대 수메르에도 같은 관습이 존재하였습니다(ANET 645). 이를 고려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아내를 누이로 소개한 걸 두고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는 셈입니다.
고대 근동의 연인 또는 부부가 서로를 ‘오빠’ ‘누이’라 칭한 마음의 기저에는 자신들의 관계가 그만큼 가깝다는 걸 드러내고자 한 심리가 숨어 있습니다. 마치 친형제인 듯, 같은 살과 뼈를 나눈 사이인 듯 친근함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하와를 향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고 외친 감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이러한 친근함을 표현하며 아내를 누이라 칭한 성경 시대의 옛 관습은 오늘날 연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상기시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연인을 ‘오빠’ ‘누이’에 비하는 관습은 변하지 않은 듯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말입니다. 사실 문맥 없이 ‘오빠’라는 호칭을 들으면 그들이 친남매인지 연인 사이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집트 파라오나 그라르 임금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말을 들으며 비슷하게 헷갈리지 않았을까요?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10월 6일(나해) 연중 제27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