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최부자 집 (중요 민속자료 제27호)
경주 교촌 마을은 신라
신문왕(682년)에 설립된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이다.
신라의 국학은 고려시대에는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는데
마을 이름이 교촌으로 불린 것은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교촌마을은 신라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
곳이다.
그 경주 교촌에는 참다운 부자의 모습을 보여준 최부자의 고택이 있다.
면암 최익현,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의친왕 이강공 등 당
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던 사랑채에는 용의 정기가 스며드
는 집이란 뜻의 龍庵古宅 (용암고택), 크게 어리석다는 뜻의 大愚軒(대우헌 :
사리사욕을 따지지 않는 공적인 헌신을 강조한 말) 의 扁額편액 이 걸려 있다.
최씨 고택 사랑채에 걸려있는 龍庵古宅(용암고택), 大愚軒(대우헌) 편액.
그 옆 사랑채에는 재주가 둔하다는 뜻의 '鈍次 둔차' 편액이 걸려 있는
데, 직역하면 ‘둔한 2등’ 이란 뜻으로 1등만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 경종
을 울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둔한 2등' 이라는 '鈍次 둔차' 편액
경주 최부자는 선조들의 號호 를 통하여 부자이지만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어, 왜 4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가늠하고
도 남을 일이다.
신라의 요석 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했다고 전해지는 경주 최부자
집은 1700년쯤에 건립되었다는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
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여성들의 공간인 최부잣댁 안채.
최부잣집 종가 댁은 건축적으로 아름다운 한옥으로 이름이 자자하다.
최부자댁에서 가장 눈여겨 볼 곳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곳간이다.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곳간.
쌀 창고인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전통 한옥으로 현존
하는 목재 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여기에서 12대 4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독립운동을 후원해 큰 존경을 받았으며, 모범적인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를 실천하였다.
육훈六訓
집안을 다스리는 교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높은 관직은 난류에 휘말릴 수도)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누릴 것)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말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상부상조 하라는 뜻)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검소, 절약하라는 뜻)
육연
자신을 지키는 교육
⍟自處超然 자처초연 : 스스로는 초연하게 지내야 하며
⍟對人靄然 대인애연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해야 한다.
⍟無事澄然 무시징연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有事敢然 유사감연 :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대처하며
⍟得意淡然 득의담연 :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失意泰然 실의태연 : 실패했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3대도 부를 유지하기 힘든데, 400년 동안 유지하게
된 저변에는 가훈과 지침들이 크게 한몫했으리라.
가훈대로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는 가풍이
있다 보니 사랑채에는 항상 많은 손님들로 넘쳐나
집 근처 하인집에 머물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부잣집의 작은 쌀통에서 쌀을 한 줌 빼어 들고
하인집으로 가면 하인들은 찾은 이들에게 잠자리
와 식사를 해주었다.
이 쌀통은 위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손님들이
욕심을 부려 두 손을 넣어 쌀을 많이 움켜쥐면 손
이 빠지지 않아 적당량을 집을 수밖에 없다.
크기를 축소하여 특별 제작한 쌀통.
쌀을 쥐어 빼내는 것은 한 번만 허용된 것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끔 하려
는 지혜였으리라.
흉년이면 굶주린 백성을 위해 곳간을 열어두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즈’를 실천 했던 최부자의 흔적은,
‘부를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부의 나눔’
을 목적으로 해서 부자가 되고 그 부를 오래 유지
해 온 가문으로 많은 기업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오고 있다.
새해가 되면 정. 재계 인사들이 경주 최부잣집을
꼭 찾아 오는 것도 12대 동안 만석꾼으로 이어온
참부자의 기와 명성을 받아오기 위함이리라.
1947년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거부 최준崔浚 선
생은, 전재산을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했다.
정부에선, 조선 최고의 부자 가문이자 세계적으로
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최부자 명문가에게 사회
에 끼친 영향을 높이 평가하여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경주 최씨인 필자 어머니의 고향에 너무 늦게 닿은 발걸음이지만,
그저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