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산문)
발로 읽는 열하일기
문영 지음|푸른사상 산문선 29|147×217×14 mm|232쪽
15,500원|ISBN 979-11-308-1498-8 03810 | 2019.12.26
■ 도서 소개
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따라 삶의 가치와 열망을 발견하다
문영 시인의 산문집 『발로 읽는 열하일기』가 <푸른사상 산문선 29>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의 여정을 기록한 『열하일기』의 발자취를 따라 세 차례에 걸쳐 기행과 답사를 하면서 연암의 개혁 의지와 진보 정신을 배웠다. 열린 세계에 대한 열망을 현실에서 찾고자 한 연암의 사상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삶의 가치와 패러다임을 제시해준다.
■ 저자 소개
문 영(文英)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영남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공부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기행과 답사를 했다. 30여 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글 읽기에 몰두하며 울산 지역도서관에서 『열하일기』와 관련하여 강의하고 있다. 1988년 『심상』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그리운 화도』 『달집』 『소금의 날』 『바다, 모른다고 한다』, 비평집으로『변방의 수사학』이 있다. 울산문학상, 창릉문학상, 랑제문화상(예술), 춘포문화상(교육)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오영수문학관 문예창작(시) 지도교수로 있다. (E-mail_ youngmss@hanmail.net)
■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압록강을 건너
압록강에서 길을 묻다 / 사라진 고구려 역사의 현장 / 책문 / 봉황산성과 벽돌론 / 통원보와 초하구를 지나며/ 요동벌판과 호곡장론 / 요동 백탑과 고구려 백암성 / 태자하와 혼하, 길 / 심양고궁을 배회하다 / 요녕성 박물관과 요하문명전
제2부 심양에서 산해관으로
눈 내리는 요하벌판에서 / 의무려산에 남긴 선인들의 발자취 / 북진묘 / 장관론 / 대릉하를 건너 / 영원성의 풍경 / 만주벌판의 일출과 일몰 / 진황도와 산해관 / 산해관과 노룡두 / 맹강녀묘
제3부 북경 가는 길
노룡현의 이제묘 / 「노상봉취우기」 / 고려보에 고려가 없다 / 「호질」의 고향, 옥전 / 옥전의 풍자시 「막사장」 / 동악묘 / 유리창 / 남천주당 / 상방과 고관상대 / 공자묘와 국자감 / 옹화궁 / 만수산 / 태액지 / 천단―기년전 / 자금성
제4부 열하에서 길 찾기
이별론 / 밀운수고에서 보낸 편지 / 「일야구도하기」 / 고북구를 넘어 / 다시 고북구에서 / 니하오, 여기는 열하입니다 / 역사의 현장, 그 풍경―피서산장 (1) / 청나라 역사의 속내 들여다보기―피서산장 (2) / 보타종승지묘 / 연암과 반선라마 6세 / 열하의 태학관 / 다시 밀운수고에서 / 북경 편지―사마대 장성에서 / 짜이찌엔, 열하의 피서산장!
■ '작가의 말' 중에서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그의 나이 마흔네 살 때인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륭제 칠순 축하사절단 일행으로 다녀와서 남긴 기행문이다. 오늘날 다시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왜 『열하일기』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열하일기』가 변화를 통하여 현실의 문제점을 점검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열하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열린 세계에 대한 열망을 현실에서 찾고자 한 연암을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는 길이다. 그것은 변화를 통해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는 정신이다.
『열하일기』와 나는 언제, 어떻게 접속이 된 걸까. 어떻게 되었기에 30년이 넘는 세월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잊을 만하면 나타나 나를 흔들었던 책.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연암의 「물」을 읽고부터라고 말하면 되겠다. 교실에서인지 어두운 골방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나이였다. 1980년대 직장을 잡고 첫 월급으로 『열하일기』를 구입하여 통독했지만, 당시까지는 어설픈 접선에 지나지 않았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열하일기』 완역본과 『열하일기』 연구서와 기행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열망 없이 사는 나’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열망을 향하여 나아갔다. 글을 읽으면서 답사를 꿈꾸고 『열하일기』를 따라 걸었다. (중략)
또한, 다양성과 현장에서 우러나온 사실성, 생생한 묘사와 기발한 발상과 풍자, 일상어의 거침없는 사용 등이 글의 마력에 빠지게 한다. 이 같은 특성이 『열하일기』를 고전으로 남게 한 이유이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역사와 문학, 인문학과 자연 과학, 당대의 문화 풍속 등을 두루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공유하면서 통섭할 수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참이라면 “보는 만큼 알게 된다”는 말도 참으로 성립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한 긴 여정의 발자취가 연암의 『열하일기』이다. 그것은 열린 세계에 대한 열망과 고난을 수반한 변화를 통해 개혁하고자 한 당대의 진보성과 통한다. 이를 일러 ‘고난 속에서 빛나는 열망’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열하일기』는 상찬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이상과 패러다임 만들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연암의 『열하일기』가 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 출판사 리뷰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남긴 기행문이다. 당대에는 순정하지 않은 문체라며 금지된 글이었지만 다채로운 형식과 문체, 해학과 현장감, 진보적인 사유가 두드러진 이 놀라운 문장은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그 열풍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식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연암과 『열하일기』의 매력에 새롭게 빠져든다.
이 책 『발로 읽는 열하일기』의 저자 역시 연암과 그의 글에 매료된 이 중 한 사람이다. 저자는 『열하일기』에서 변화의 물결 속에 휩쓸리지 않고 날카로운 안목으로 현실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자 한 열망을 읽는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를 수십 년간 공부하고, 『열하일기』 속 연암의 발자취를 좇아 세 번에 걸쳐 중국을 답사하여, 이 책을 내놓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벌판을 가로지르고, 자금성을 거쳐 열하까지, 수백 년 전 연암이 갔던 길을 밟으며 저자는 연암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향해 나아간다. 연암의 독창적인 문장을 되씹고, 연암이 바라보았던 강산과 문물을 확인한다.
변화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당대의 진보 지식인 연암 박지원은 아득한 후배인 21세기 현대인들에게 떨치고 일어나 열망을 가지고 나아가라 채찍질한다. 열하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그의 눈빛을 본받아,우리 시대에 필요한 삶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라고.
■ 책 속으로
봉성시에서 통원보(通遠堡)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연암 일행은 장마철 불어난 물로 인해 통원보에서 6일간 머물렀다. 통원보는 우리나라 소읍 정도로 벽돌집이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동네다.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란 물은 온통 통원보 마을 하천으로 모여든다. 여름 장마철 냇물이 불어나면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는 지형 구조다. 지금은 하천을 정비하고 집들은 언덕에 모여 있다. 그런데 중국인은 물을 이용한 논농사는 짓지 않고 밭농사만을 하는지 들판 가운데는 옥수숫대를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연암의 글에도 밭농사를 중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연암은 이곳에 머물 적에 수수밭 농사를 짓는 이가 자기 밭에 들어온 남의 돼지를 조총으로 쏴 죽이는 광경을 본다. 농사짓는 이는 돼지 주인을 나무라면서 그 돼지마저 가져가 버린다. 그런데도 돼지 주인은 항변 한마디 못한다. 이것은 청나라 강희제가 밭농사를 소중히 여겨 마소가 곡식을 밟으면 곱절을 물리고 짐승을 함부로 풀어놓아 농사를 망치는 자는 곤장 예순 대를 친다는 법령을 제정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연암은 통원보에서 벽돌 가마와 ‘캉’(만주족의 방)을 만드는 제도인 구들 놓는 법을 관찰한다. ‘캉’은 부엌과 방이 실내에 함께 공존하는 형태로 추운 지방에 적합한 제도이다. 구들 놓는 법 또한 벽돌로 하기에 온돌 방식보다 만들기가 쉽고 편리하다. 이런 실용적인 점을 들어 연암은 오랑캐라도 앞선 문물은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통원보 휴게소에서 지도책을 구입했다. 지도에다 장소 표시를 하면서 북쪽으로 20분 정도를 가니 초하구(草河口)라는 지명이 나온다.
(30~31쪽)
1637년에 세운 심양고궁은 만주족의 소박함에다 몽골, 티베트의 양식이 어우러진 독특한 구조다. 고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되는데 정문인 대청문을 들어서면 왼편이 비룡각, 오른편이 상봉각이다. 정면으로는 숭정전, 봉황루 삼청 누각, 청녕궁 등이 일직선으로 위치했다. 연암은 대청문까지 들어왔으나 동쪽 대정전(大政殿)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안쪽은 대정전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각 다섯 채씩 도합 열 채의 건물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맨 앞의 두 채는 여러 왕이 정사를 의논하던 곳이고 나머지 여덟 채의 건물에는 팔기군의 왕들이 자리했다. 이를 합쳐 시왕정(十王亭)이라 한다. 팔기전에는 황제의 칙서·깃발·각종 무기들이 전시되었다. 수렵 민족 특유의 순발력과 기동성은 팔기군에 의해 극대화되어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원동력이 되었다.
대정전은 팔각형 정자 형태로 1624년 청 태조 누르하치가 세웠다. 이곳에서 청 태종이 정사를 논했고 3대 순치제가 제위에 올랐다. 역대 청 황제들이 동북 순례 때 여기서 모든 행사를 치렀다. 고 궁 서쪽에 있는 문소각(文遡閣) 건물 또한 청나라의 고도의 정치적 책략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륭제가 반청(反淸)의 움직임을 봉쇄하면서 문화적으로 위상을 드높인 사고전서 편찬 사업은 10년 만에 3,600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이 책을 보관하기 위해 북경·열하 등 일곱 곳에 장서각을 짓게 했는데 그중 한 곳이 심양고궁 서쪽에 있는 문소각이다. 문소각은 연암이 심양을 다녀간 다음 해인 1781년에 착공하여 1783년에 완공되었다. 이처럼 심양고궁에는 청나라의 초기 통치자들이 그들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고투했던 흔적이 살아 숨 쉰다.
심양고궁에서 나는 생각했다. 한족이 장성 안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 만주족은 변방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적은 숫자로 수억의 인구와 넓은 영토를 경영했던 그들의 통치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청나라 초기 통치자들이 발휘했던, 이민족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했던 정책과 앞선 문명을 받아들인 진취적 기상이었다. 청나라 초기 통치자들은 국제적 감각을 가진, 국가 경영의 CEO이다. 우리가 청나라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49~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