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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뷔
언젠가 이 골목길 걸었던 것 같은데 전생일까, 당신이 날 바라본 것 같았는데
멀리서 곱게 늙으며 기다린 것 같았는데
어디에서 기다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이 저녁 내 기억은 물컹한 두부 한 모
얼굴을 세숫대야 속에서 움켜쥔 것 같았는데
누구와도 눈빛을 마주치지 않겠다고 그림자 질질 끌며 걸었던 것 같은데
허공을 벗어난 벼락이 땅 위에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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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
눈물의 내시경이 내 몸속을 지나간다
그녀의 집 앞에서 흘리던 눈물인가 불 켜진 창을 향해 몰려들던 눈송이들, 그 처마에 두고 온 시퍼런 내 청춘이 시린 사랑 한 방울로 목덜미에 떨어진다 그렁그렁 외로움에 밤새 떨다 입술 깨문 밤, 사내의 쓸쓸함이 태어나던 그 골목, 기다림의 몸속에선 오래된 피가 고였다
아직도 송곳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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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金으로 읽다
난시의 가을인가, 도리마을 은행 숲에 버려진 잎들끼리 껴안고 뒹구는 땅 눈부신 페허의 풍경이 금빛으로 타오른다
너 떠나자 가을이다, 어깨를 움츠린 가을 우듬지까지 밀어올린 눈물의 뿌리들이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쌓여간다
가만히 만져보면 보풀 이는 너의 손등 추워지는 영혼마다 어깨들 감싸주듯 맨살이 맨살을 더듬는 은행 숲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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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장 파는 골목
노인의 손끝에서 이름들이 피어난다 이름 밖 나뭇결이 깎여나는 목도장 움푹 팬 골목길 안도 제 몸 깎고 피어난다
캄캄한 음각 안에 웅크려 있는 고독 나 아닌 것들이 밀칼에 밀려날 때 촘촘한 먼지 속에서 울고 있는 내 이름
노인의 이마에서 전깃줄이 흔들리고 골목에 훅, 입김 불자 길들도 흩어진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붉은 해 찍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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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비열도*
제 몸에 혼잣말을 새겨 넣는 주상절리 서툰 안부도 없이 새들은 날아간다 기러기 붉은 울음이 번져가는 저녁놀
통증을 밀어올린 꽃 대궁이 시퍼렇다 벼랑을 더듬으며 피어나는 동백꽃이 전생의 외로웠던 날들을 연실처럼 당긴다
어쩌자고 그대는 먼 곳에 떠 있는가 파도의 하얀 뼈가 부서지는 저녁바다 너무나 늦은 사랑이 창백하게 피어난다
*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 : 태안반도에서 약 55킬로미터 떨어진 우리나라 최서단 섬들. 멀리 보면 삼각형의 섬 3개가 열을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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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저녁이면 지친 삶은 음 이탈을 하곤 했다
식어버린 노을 앞에 눈감으면 환한 몸살
그대를 생각할 때면 자꾸 발을 헛디딘다
젖은 통증 몇 방울 흘러내린 창가에서
빗줄기를 튕겨봐도 조유뢰지 않는 세상
목젖이 부은 노래가 길 위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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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밤마다 입속에서 말밥굽이 울리면 내달리는 말들이 술잔 속을 건너다가 취하면 말꼬리 잡고 거꾸로도 달렸다
말의 피로 제사 지내던 머나먼 옛적부터 갑골문자 이전에도 말 타고 달린 부족 말 입에 재갈을 물린 시인들은 죽었다
말 위에서 잠든 나를 눈뜬 말이 데려왔나 천관녀의 집 앞에서 말문을 닫은 말 칼 들어 내 말을 친다 말머리가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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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보호구역 -서기 2,200년 시인들은 인디언들처럼 보호구역으로 추방되었다
배고픈 시인이 그믐달을 물어뜯는다 이빨을 숨기기엔 밤이 너무 질기다 한평생 꼬리가 없는 행간만 어슬렁거려
기껏해야 이번 생은 내 피만 핥고 간다 죽은 발톱 밑에 새 발톱이 돋을 때까지 말들의 무덤을 파서 비명碑銘 하나 세운다
몇 세기가 또 지나고 동굴 속 발자국 보며 사람들이 웅성대리라 시인이 살았다고 밤마다 혼잣말하던 만년필이 부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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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안에 갇힌 사람들
대단한 작업이거나 빈털터리 시인이거나
인정된 당신만이 괄호 안에 들어간다
이름 옆 괄호 속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당신
괄호 속이 궁금할 뿐 당신에겐 관심 없지
괄호와 악수하고 괄호와 대화한다
괄호에 갇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괄호 밖은 괄호를 쉽게 열지 못하고 괄호는 종소리처럼 괄호 밖을 밀어낸다
마침내 당신은 사라지고 괄호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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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왕조실록
그 옛날 고조선처럼 무당이 다스렸다
바야흐로 병신년丙申年이라 혼이 비정상 돼버린 우주의 기운들이 헬조선을 도와줄 때 구중궁궐 임금은 최저임금 몰랐고 한 포기 두 포기 시들어가는 3포세대三抛世代는 닭치고 개돼지처럼 ‘노오력’이 부족했다 능력 없는 흙수저들은 부모를 원망하라고 돈도 실력이라 갑질이 활개 치는 순실 4년, 그리하야 내려와라 촛불들이 타올라 우리는 민족 죽음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이러려고 태어났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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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혹은 뿔
촛불을 다른 초에 옮겨서 붙이는 밤 횃불 들고 그리던 알타미라 동굴 벽화 거대한 들소의 뿔이 불처럼 타오른다
불에 불이 붙으면 뿔이 되어 솟는다 옮겨 붙은 촛불은 뿔갈이한 사슴 되어 광화문 촛불들처럼 한세상 들이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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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거시기 꼬막
솥에서 거시기까지 삶아져 나온 꼬막들
물살이 다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바다, 개펄 깊은 곳에서 키우던 음모가 온몸에 칼금으로 깊숙이 새겨져도 아무런 말이 없다, 손톱 끝만 물어뜯는다. 수평선을 튕기던 빗살무늬 같은 외로움만 갈수록 굳어간다. 혀 깨문 꼬막들은 단 한 번 죽기 전에 피 묻은 적막을 이야기하려다가 그마저도 입 다문다. 저희끼리 몸 비빈다. 아아, 오늘도 괄약근은 벌어지지 않는다. 입 안 가득 개펄만 머금은 폐경기의 꼬막들
개펄의 자궁 냄새를 발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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