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걷이를 하기 위해 빈그릇 솥가마등을 안고 동네 우물가로
설걷이를 하러 가는 모습입니다. 가마솥 뚜겅을 머리에 쓰고
가는 모습이 설걷이를 많이 해본 솜씨 같습니다.
지게를 못지는 여자아이들은 나무를 묶어서 머리에 이고
산에서 내려오다 많이도 굴르고 다치고......
먹고 살기위해 학교 다녀오면 길거리로 구두딱이, 껌팔이,
신문팔이 무엇이든 했답니다.
구두를 닦는 아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고달퍼 보입니다.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돕고 있읍니다. 요즘 머리에 물건 이고
다닐 수 있는 어린이들은 아마 없겠지요.
부모님들은 공사장이나 들에 나가고 어린들은 학교 다녀와서
동네의 잔 일거리들은 다 하였지요.
곡괭이나 삽질도 잘했지요.
당시 정부에서 덩그러니 학교 교실 하나 지어주면 나머지
모든 공사는 학생들 차지 였습니다. 돌을 이고 지고 학교
축대 쌓는 작업을 하고 있네요. 머리에 돌을이고 있는
어린이 모습.. 돌을 어깨에 맨 아이...
배타고 나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소먹이러 가고...비록 힘들게 살았어도 국경일이면,
산골마을 독가에서도 꼭꼭 태극기 게양 했지요...
초가집 앞 텃밭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네요.
한겨울 강아지를 안고 따라로운 햇볕을 쬐고있습니다...
강아지 안으면 온몸이 따듯했지요...돌아가면서 안고,
순서를 기다리는 두어린이 표정이...*^^*
엄마가 세수시켜 줄 때면 제인 먼저 코풀어! 하시고 ...
따듯하게 물데워서 어린 동생들을 돌아가며 세수를
시키셨지요.
아파도 병원이 없어서, 너무 멀어서, 늘 집에는 아까징끼
(머큐롬)을 비치해두고 발라주시곤 했지요. 자식의 아픈
고통을 대신하듯 어머니의 표정이 너무도 안타깝게 보입니다.
이발관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동네 한 두곳 이발기계 있는
집에가서 머리를 깎고 했지요. 부실한 기계로 머리털 뽑혀서
눈물은 줄줄...
간혹 사회 복지가들이 학교 찾아오시어 사탕이나 먹을것을 전해주시고...
아이를 등에 업고 갯벌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곤 밤이면 아고고
허리야! 고통으로 잠못 이루시던 우리 어머님들 이셨습니다.
수안보 어는 산골마을 학교입니다.
부모님들 일손이 모자라 등교길 이린이들은 스스로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도강하는 모습입니다. 안전 사고도 많았었지요.
학교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입니다.
책상 걸상 무척 정겹습니다. 특별 활동시간 주산부(수판) 어린이들 입니다.
추억어린 풍금입니다. 선생님이면 누구나 풍금을 다룰 수 있어야 했지요.
양말도 신지 않은 어린이, 무척 진지해 보입니다...
비가 조금만와도 중간에 수업포기 잽싸게 개울을 건너 집으로 내 달렸지요.
물이 불으면 건너지 못했고, 빨리 집에가서 집안 비 설거지 해야지요.
모든게 공부보다 집안 일이 우선이었지요...
여자는 코고무신 남자는 검정 고무신, 한겨울 양말이 없어 발이 시린
아이들은 신발에 짚을 넣고 신었었답니다.
학교 안가는 날이면 어린이 애향단(동호회)이 골목도 쓸고
마을 어귀에 꽃길도 만들고 자기 마을 가꾸기를 했답니다.
빗자루는 요즘 보기 힘든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 입니다.
학교주변 수목원도 만들고...참으로 꿈과 희망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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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하는 여자 아이들 모습입니다. 가운데 한 아이가 올라가 앉아
중심을 잡고 누가 누가 높이뛰어 상대를 떨어뜨리나 껑충 껑충~
요즘 보기 힘든답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온동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모두의 대 잔치
였습니다... 부모님들과 함께 뭉쳐서 힘 겨루기를 했지요.
뛰어가면서 사다리 통과하기 무릅이 벗겨저서 피가 줄줄 흐르고...
기마전으로 힘 겨루기도 하고...
누가 누가 멀리 뛰나 훨훨...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것 소리치고 나면
다음날은 모두가 목이쉬어 ㅎㅎㅎ
지금의 운동회는 점심시간 지나면
끝이지만 당시는 하루종일 온마을
잔치로 해가 질때까지 했지요.
학교마다 보통 공 두개정도(배구공,축구공) 최고의 놀이감 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블로킹하는 어린이 모습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차범근, 이회택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탄생 하셨습니다.
한창 태권도 붐이 일어 학교마다 가르키는 모습입니다...
기마자세 태극1장이던가요..?
무용연습 중인 여자 아이들입니다... 특별활동 시간이면 언제나
책 걸상 뒤로 밀어 붙여놓고...
길거리 포장마차 비슷한 곳에서 아이들 간식 많이 팔았지요.
불량 식품이 너무 많아 늘 배앓이하고.....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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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0. 서울 근교, 전쟁은 모든 걸 삼켜버렸다. 학교 교실마저도 불타버렸다. 엄마가 일터로 가자 소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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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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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을 판에 핵교가 다 뭐꼬."
"갑분아, 니 오늘 학교 가지 말고 집에서 돌식이 좀 봐라."
"어무이요, 지는 오늘 학교에 꼭 가야합니다. 어제 선생님이 오늘 산수시간에는 구구단 가르쳐준다고 했어예."
"핵교? 이 가시나가 무신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노. 오늘 엄마가 이장댁 밭을 매주고 쌀 됫박이라도 얻어 와야 우리 세 식구 저녁 굶지 않는다. 굶어죽을 판에 핵교가 다 뭐꼬."
"알았어예. 어서 당겨 오이소."
남편은 전쟁터에 나간 뒤 소식도 없었다. 학교를 못 가서 훌쩍거리는 딸에게 젖먹이를 맡겨두고, 동산댁은 밭 매는 삯일을 하고자 고샅을 벗어났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어 학교에 가려는 딸을 붙잡아 동생을 맡길 수밖에 없는 어미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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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 10. 22. 서울 근교, 전쟁으로 학교 교실이 잿더미가 되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불탄 교실 터에서 노천 수업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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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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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마을을 벗어난 걸 확인한 갑분이는 동생 돌식이를 업고서 몰래 학교로 갔다. 6·25 전쟁으로 불타버린 학교. 하급생에게는 아직도 교실이 없었다. 불탄 교실 자리 맨땅에 돌멩이를 주워다놓고 앉아 수업을 받았다. 갑분이는 돌식이를 무릎에 앉히고 칠판을 바라보면서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장면은 소설이 아니라, 한국전쟁 중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초등학교 노천수업 광경이다. 1952년에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나마 임시로 지은 초가지붕 교실에서 가마니를 깔고 배웠다. 도시 학교들은 천막교실도 많았다. 폭격에 용케 남은 교실은 5~6학년 상급생들이 썼다.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면 책보를 들고 냇가로 가서 모래와 자갈을 담아다가 학교 운동장에 날랐다. 나의 모교인 구미초등학교 본관 건물은 우리들이 나른 모래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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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0. 31. 원산, 소녀들이 동구 밖에서 놀고 있다. 어른들은 전쟁에 미쳐 있지만 헐벗고 굶주린 소녀들의 입가에는 천진난만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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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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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에서 핀 꽃
나는 지난해 11월 30일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 사진더미에서 이 사진들을 찾아내고는, 이 사진 촬영지가 북한 원산이었지만 바로 우리 동네 여자친구들 모습 같아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 세대는 거의 대부분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그나마 학교를 다녔던 사람은 행복한 축에 들었다. 숱한 전쟁고아들은 해외에 입양되기도 했고, 가정부(그때는 식모라고 했음), 트럭 조수, 버스 안내양(차장이라고 했음), 넝마주이, 구두닦이, 양담배 팔이 등으로 집안을 돕고 자신의 주린 배를 채웠다. 정규 학교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못 다니고, 전수 학교나 통신 강의록으로 저 혼자 공부한 이들도 숱했다.
60년대 사진 모음
60년대의 신발장수
시장의 사기전
서울 도봉동을 지나는 소달구지
서울 비오는 종로거리
서울의 공동수도
말뚝박기(말타기)를 즐기는 아이들
찹싸~~~알~ 떠억... 장수
제주 모슬포 빨래터
대구 거리
서울 역앞
50년대 전쟁 직후
우산 고치는 아저씨
헌책방
곡마단 선전
뻥튀기
굴뚝 청소부
부산 광복동 거리
대구 서문시장
서울역 앞의 시발택시 행렬
창경원
서울역 앞의 전차
명동성당
명동거리
서울 남대문로
추억의 딸기밭
전국을 떠돌던 약장수
무료극장
당시 아동 만화들
김인순
교련 발표회
낭만의 통기타 여행
임국희
껌 광고
금성 라디오
선풍기 광고
부산 해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