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갈이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집 구석구석을 청소합니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청명해진 뒷뜰 나무들은 묵은 껍질 벗느라 술렁이고 아직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현관 밖 시멘트 계단에 앉아 누르스름한 상록수에서 떨어져 나가는 마른 먼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금시에 역연히 푸른 빛을 드러내는 이파리들 입니다 내 마음의 창도 시방 열어 제치고 군데군데 너절하게 깔려있는 묵은 생각들을 정리정돈 할까 봅니다 |
축복
살아가면서
나의 생각대로 했다
많은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순간을 스치는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했다
불행인줄도 모르고
긴 방황이 영혼을 흔든다
살아가면서 나의 생각대로 선택했던
많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뉘우쳤다
나는 그 깨달음이 고통이라고 했다
고통을 통하여 찾아온
축복인줄도 모르고
연륜
세월이 많이 흘러 생에 드리워진 노을 뒤로 해묵은 희망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대하던 고동 소리 담담히 마음의 수평선 위에 내려있고 이젠 자유롭게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봅니다
파도가 너무 무서웠던 지난 세월 눈물겹던 수많은 몸짓들과 생존의 바다 위에 떠다니던 굵은 물방울들과
영원히 가슴에 닿지 못한 채 파도로 부서진 그리움들을 보내고 나서야
때로는 햇볕을 때로는 비와 천둥으로 출렁이는 바다를 만났습니다 |
모순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 밑으로
가을 바람이 분다
으시시 추워지는 거리를 갈 곳 없이 걸어가던
젊은 인디언 한 사람이
행길에 서서 오줌을 눈다
마약에 취해 퉁퉁 부은 얼굴이 무표정하다
스웨터의 단추를 끼우며 걷던
화장만 웃는 얼굴의 여인
울고있는 뾰족구두 속의 발에
그 오줌이 튀긴다
그녀는 가을비가 내리나 하고
하늘을 쳐다본다
도무지 땅을 바라볼 수 없도록 힘 준 목들이
우루루 양복을 걸치고 나와
지나가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비도 안내리는데 약싹바른 우산을 편다
그 누구가 잘났느니 못났느니 하는 것은
참 웃기는 일이다
바람 따라 굴러다니는 거리의 휴지 처럼
존재의 허약함이 이 거리 저 거리에 굴러다니고
삶의 굴레 속에
모든 인디언들이 찌그러져
그녀가 뿌리는 가을비를 밟고 간다
착각이고 싶은 현실 속으로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 밑에는
가을 바람 영원히 그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길
집을 나섰다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지 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한다
모든 먼지가 우르르 일어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맨발의 핏빛이 흥건한 거리
모양이 다른 수많은 물방울을 몸에 달고 달려간다
문득 비가 그치기를 떠올려 보며
그리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예감 대로
폭풍은 길을 가는 누구에게나 왔다
뼈가 깍인다
남길 것도 없이 끊어진 모든 그리움이
깍인 뼈마디 마다 들어간다
아픔을 참고 견뎌본다
그러자 거리는 서서히 조용해지고
길 끝으로 시체 하나 집으로 돌아간다
살아있을 때가 좋다
느즈막한 일요일 아침 창 밖엔 눈이 내린다 커피 팟에 물을 붓고 커피가 다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바람에 몸 흔들며 내리는 수많은 눈 어디에 떨어져야할 지 모르는 몇몇 송이가 창문에 부딪히며 땅에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눈은 펄펄 날리고 있을 때가 좋다 사람도 살아갈 때가 좋다 왁자지껄 다가오는 세상에 떠밀려 울며 가더라도 그 무리의 꽁무니에 나를 겨우 잇대어 가더라도
바람 부는 거리에서 아름다운 몸짓으로 떠다니는 눈송이처럼 살아있을 때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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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폐허
일상에 망각된 자아
하늘이 높고 아름다워 더 야속한데
바람 짙은 나의 꽃밭엔
이따금 머물던 잠자리도
얇은 날개 포르르 떨다 어느새 사라지고
먼지만 폴폴 날리는 세월은 잘도 가는데
나 역풍의 거리에 서있다 할지라도
종종 꽃 피우고 싶은 여름 있거늘
가도가도 지루한 겨울 얼음밭
잠자리는 영영 길을 잃었나
쳇바퀴 돌 듯 지친 일상
낯익은 비바람 걷히고
기다리는 나의 봄은 언제 오려나
와 주기나 할 것인가
망중에 늘 초초한 삶
죽기 전에는 돌아가고픈 나의 황폐에
봄갈이를 할 수 있을까
시에게
언제부턴가 너는 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봄을 입고 흰 눈꽃 흩날리며
나의 매끄럽지 못한 마음은 아직도 열어지지 않았는데 오 월의 대지를 밟고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너의 발자욱 소리
무심한 하루가 다 저물도록 연둣빛 황홀함을 사방에 뿌리며 나의 깊은 곳까지 닿은 너의 한 조각
나의 벅찬 가슴은 이렇게 젖어 있을 뿐인데 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할 말은 차오르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난 너에게 너무 부족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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