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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와 ‘고래’ ‘적송’으로 ‘때고도 남던’ 푸른 바다, 비옥한 땅
발간일 2022.10.26 (수) 14:57
대청도
인천은 누가 뭐래도 바다를 품은 해양 도시입니다. 인천 사람들은 대대로 바다에서 삶을 길어 올렸습니다. 때로 카키, 때론 코발트블루 빛깔로 반짝이는 눈부신 인천의 바다 ‘황해’.
그 황금빛 바다 위로 168개의 보석 같은 섬이 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00개가 옹진군에 속한 섬입니다.
옹진 섬에 대대로 터전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점박이물범, 저어새, 대청부채와 같은 동식물이 공존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 ‘i-view’가 옹진 섬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두 발로 걸어 옹진 섬들을 찾아가는 ‘섬 깊고 푸른 그리움’을 연재합니다. 가슴 설레는 옹진 섬 여행.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배 한 척이 포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청록빛깔의 바다 위로 하얀 거품이 일었다. 콧속으로 바다냄새가 스며들었다. 선원이 접안시설 쪽으로 밧줄을 던졌다. 펄쩍 뛰어내린 그가 밧줄로 배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구릿빛 어깨근육이 갈라질 때마다 배 밑에서 홍어가 올라왔다. 어른 몸통만 한 크기에 미끌한 질감. ‘주낙’에 잡힌 홍어는 ‘거낙’에 찍혀 박스에 담겨졌다. 죽은 홍어의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홍어박스가 트럭 짐칸을 빈틈없이 채웠을 때 선원들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 대청도는 우리나라에서 홍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홍어의 원산지’다. 선진포항에서 한 선원이 잡아온 홍어를 박스에 담고 있다.
“하나 가져가.” 배 앞에 서서 구경을 하던 사람에게 선원이 홍어 한 마리를 건네주었다. 대청도에선 주민 모두가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 지 알고’ 지내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밥 먹었냐’는 인사를 하거나 친근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알은체를 했다. 홍어를 받은 사람이 밝은 얼굴로 부두를 빠져나갔다.
선진포항.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약 171km 떨어진 대청도의 주 항구는 활기차고 평화로웠다. ‘해성3호’를 포함해 대청도엔 지금 6척의 배가 홍어를 잡는 중이다.
‘대청도 홍어’ 전라도 쌀과 바꿔 먹고,
뱃길로 며칠가는 동안 삭혀져 ‘홍탁’ 탄생
예로부터 홍어 하면 흑산도가 유명했다. 지금은 난류의 영향으로 군산홍어가 풍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청도 홍어’가 우리나라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청도에서 잡은 홍어는 오래전부터 전남 나주 영산포나 영광 법성포로 갔다. 쌀농사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홍어를 쌀과 바꾸어 먹은 것이다. 이렇게 남쪽지역으로 내려간 홍어가 흑산도홍어로 다시 출시되기도 했다고 대청도 주민들은 말한다.
▲ 서풍받이는 고도가 약 100m에 이르는 하얀 규암 덩어리가 웅장한 수직절벽을 이루는 곳이다. 자연 상태의 암석이 매우 아름답다.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는 시간은 대엿새쯤 걸렸다. 홍어가 멀쩡할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홍어는 삭혀졌고, 마침내 콤콤한 ‘홍탁’이 탄생했다. 쫄깃한 식감과 시큼한 향기의 홍탁은 어떤 술과도 잘 어울리고 소화도 잘 돼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높은 서열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홍어를 그냥 쪄서 먹는 홍어찜 역시 쫄깃한 맛과 육질이 탱탱한 꽃게 살에 버금간다. 홍어는 ‘코-애-날개-꼬리’ 순으로 맛의 순서를 정하며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엔 임금님 진상품으로 홍어를 썼다는 기록도 나온다.
인천에서 결혼식이 열리면 대청도 사람들은 따로 부조금을 준비할 것도 없이 홍어 몇 마리를 들고 나갔다. 인천사람들은 평범한 부조금 봉투보다 값비싼 홍어를 더 선호했다. 그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홍어요리는 잔칫집에 꼭 등장하는 요리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대청도엔 ‘홍어인심’이 넘쳐 난다.
고래 한 마리 해체하는 시간만 수십일,
섬 전체가 들썩였던 ‘고래파시’ 기억
홍어보다 더 유명했던 게 ‘대청도 고래’이다.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한 때 대청도는 고래의 천국이었다. 참고래, 대왕고래, 돌고래 등이 많이 서식해 ‘고래파시’가 열릴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선진포엔 포경회사가 차려졌다. 1909년 오사카에 본점을 설립한 동양포경주식회사(東洋捕鯨株式會社)의 대청도 사업장이었다. 일본은 당시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을 독점, 초겨울~봄 5개월간 포경선 5,6척을 동원해 3,40마리의 고래를 남획했다.
▲ 농여해변은 물이 빠지면 거대한 모래섬으로 변한다.
고래파시가 열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포경장이란 작업장을 비롯해 고래를 해체하고 보관 판매하는 시설들이 즐비했다. 고래잡이 성어기인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청도엔 먹고 즐기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로 섬 전체가 들썩거렸다. 여관과 목욕탕에서부터 요정에 이르기까지 대도시에 있는 시설들이 섬 곳곳에서 영업을 했다.
1930년대까지 활기를 띤 고래파시가 사라진 시기는 1940년대이다. 1911년~1944년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은 고래만 6,576마리라니. 고래파시는 사라졌지만 아주 간혹 군함이 고래를 매달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대청도 주민 이경순(68) 씨는 “초등학교 때인 1960년대 누군가 고래를 잡아와 부웅하고 나팔소리를 듣고 부두로 나갔는데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를 정도로 거대했다”며 “고래를 해체하는 한 달 정도의 기간 내내 썩는 냄새가 섬에 진동했다”고 기억했다. 이 씨는 “언젠가 산에 올라갔는데 물을 뿜으로 고래가 지나가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먹이에 새카맣게 달라붙은 개미떼처럼, 고래 한 마리를 두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둘러싸여 있던 선진포항의 옛 모습을 상상하며 옥죽동해변으로 향한다.
마을사람들 넘어 다니던 험준한 지름길 ‘모래사구’
아이들에겐 최고 놀이터
대청도 동북쪽에 위치한 옥죽동해변의 뒤편으로 가면 모래의 세상이 펼쳐진다. ‘한국의 사하라’로 불리는 ‘옥죽동해안사구’다. 대진동·옥죽동·농여 해변에 머물던 모래들은 바람에 실려 옥죽동에 닿았다. 모래는 산이 되었고 골짜기를 이루었다. ‘대청도 처녀들은 모래 세 주발(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로 대청도엔 모래가 넘쳐 났다.
축구장 6,70개 크기의 사구였다. 경관은 뛰어났지만 생활은 불편했다. 옥죽동 마을 사람들을 위해 방풍 소나무들을 심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던 1970년대였다. 그러나 모래에 흙을 넣어 심는 방식이다 보니 소나무가 잘 자라지 않아 지금도 굵은 나무는 많지 않다.
모래사막은 마을에서 마을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자 개구쟁이들의 거대한 놀이터였다.
▲ 대청도엔 ‘한국의 사하라사막’으로 불리는 옥죽동사구가 유명하다. 이 곳에 산책로를 조성한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하고 있다.
▲ 대청도 선진동 마을의 전경
대청도 토박이 이경순(68) 씨는 “산의 3분의2가 모래에 덮여 있었는데 올라가기가 힘들지 한 번 올라가면 미끄러지면서 쭈욱 내려왔다”며 “모래사막을 오가다 보면 중간에 힘이 들어도 돌아가지도 앞으로 가지도 못해 쩔쩔매 ‘눈물고개’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대청도가 고향인 조광욱(56) 옹진군 의회사무과장은 “내가 어린 시절 모래사막은 옥죽동(대청3리), 축동(동네동, 대청6리 아랫마을) 그리고 산 넘어 답동까지 이어져 있었다”며 “두텁게 쌓여 있는 모래세상은 구르고 뛰고 모레에 파묻히고 놀던 최고의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2021년 옥죽동사구엔 철제와 나무로 만든 산책로가 설치됐다. 층계와 다리형식으로 놓인 산책로에선 모래사막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 주민들 사이에선 모래사막을 잘 살려 캠핑텐트를 치고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백패킹’ 명소로 만들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주민 백춘오(70) 씨는 “다시 나무를 걷어내고 예전처럼 모래사막을 만들어 저녁에 텐트치고 별을 볼 수 있는 명소로 만들면 주민들의 소득증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어디로 갔나,
마을을 휘감아 흐르던 ‘강틀’과 ‘다마돌’의 추억
대청도엔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휘돌아 흐르던 강줄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강을 ‘강틀’이라 불렀다. 지금 대청도에 있는 논틀이 바로 강이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 강은 지하의 용천수가 올라와 형성된 것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아주 깊지는 않았지만 물에 들어가면 바닥이 발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주민들은 대청도의 명물인 ‘적송’(붉은 색을 띤 소나무)으로 배나 관을 만들곤 했는데, 나무를 잘라 운반할 때면 강틀에 배를 띄워 옮겼다. 당시 중요한 교통로였던 셈이다. 비가 오면 강틀엔 장어나 붕어 같은 물고기가 넘쳐났고 겨울이면 썰매장으로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논으로 만들기 위해 매립을 하며 강틀은 논틀이 됐다.
▲ 대청부채는 대청도와 백령도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이다.
▲ 붉은 동백꽃도 대청도의 자랑이다.
큰모래울해변을 중심으로 150그루 정도 있는 적송과 함께 꼽을 수 있는 대청도의 보물 가운데 하나가 ‘대청부채’이다. 멸조위기에 처한 대청부채는 ‘붓꽃류’의 하나로 대청도와 백령도에서만 나는 법정보호종 식물이다. 대청도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잎이 부채살처럼 넓게 퍼진 모양이라 대청부채란 이름이 붙었다.
대청부채는 8월 하순부터 한 달 정도 꽃을 피운다. 오전엔 봉오리 상태로 있다가 오후 3시쯤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뒤 밤 10시쯤 되면 다시 꽃잎을 접는다. 이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생물시계’로도 유명하다.
백령도에 ‘콩돌’이 있다면 대청도엔 ‘다마돌’이 있었다. 회색을 띤 동글동글한 돌이었던 다마돌은 자연석답지 않게 구슬처럼 동그란 모양을 띠고 있었다. 대청도의 해안가엔 이 다마돌이 쫘악 깔려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일본인들이 내장석으로 쓰기 위해 다마돌을 몽땅 가져가버린 것이다. 대청도 주민 최창백(73) 씨는 “지금은 해변에 큰돌만 남았지만 어린 시절 다마돌로 구슬치기도 하고 팽이를 돌리며 놀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산지인 대청도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은 아름다운 섬이다. 남쪽에는 가장 높은 삼각산(343m)이 위치하고 북동쪽엔 검은낭산(206m)이 능선으로 연결된다. 서쪽해안엔 200m 정도의 고지들이 삼각산과 연결돼 전체적으로 U자형 산세를 이룬다. 검은낭산 아래 산기슭에 길이 약 1.6km, 폭 약 600m(축구장 70개 면적)의 옥죽동 사구는 ‘한국의 사하라 사막’으로 불리는 명물이다. 대청도엔 현재 편의점 2개, 식당 5개, 펜션 3개, 민박 10집이 있으며 단체관광객이 올 경우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 석양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잠시 멈춤이다. 농여해변 바다 위로 해가 서서히 잠기고 있다.
지금은 석양의 시간. 대청도의 분주한 하루를 지켜본 태양이 미래의 ‘예감’을 잔뜩 품은 채 바다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대청도의 바다에 여명이 밝아올 때, 고깃배들은 새벽공기를 가르며 먼바다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대청도 주민 인터뷰
“우리는 고향을 지키는 대청도 토박이 부부”
정창호(70), 이경순(68) 부부
“배를 타고 오가면서 자주 보다 42년을 함께 살아오고 있네요.”
정창호(70), 이경순(68) 씨는 대청도에서 태어나 성장, 연을 맺는 대청도토박이 부부다.
정 씨는 20대 초반에 행정선 임시직으로 시작해 1979년 경기도청 해양수산과 정규직으로 채용된 이래 옹진군청 어업지도선 기관장을 지낸 공무원 출신이다. 2010년 퇴직한 그는 현재 대청도에서 아내와 함께 펜션을 운영 중이다. 정 씨는 “한번 일을 시작하면 수년 동안 배에서 생활해야 했다”며 “3개월에 한 번 정도만 집에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정창호, 이경순 부부는 대청도에서 태어나 연을 맺고 지금까지 대청도를 지키며 살아오고 있는 대청도 토박이들이다.
남편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아내 이경순 씨는 고향에서 미용실을 운영했다. “대청도에서 유일한 미장원이었지요. 지금 대청도엔 미용실이 2개 있으나 이발소는 없어요.” 대청도엔 주민 편의시설이 많지 않다. 한 개 있던 이발소는 어느 순간 문을 닫았고 대신 10년 전 ‘대청목욕탕’이 생겼다. 그나마 수요일과 토요일만 문을 연다. “대청면에서 관리하는 목욕탕인데 매일 문을 열면 기름값을 당할 수가 없어요. 일주일에 두 번 이용하는 것도 우리 섬사람들은 감지덕지 하지요.”
서해5도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는 건 대청도도 마찬가지다. 보건진료소가 유일한 치료기관이다보니 응급처치는 백령도로, 큰 병은 육지로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 씨가 기억하는 오래 전의 뱃길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옛날엔 병이 나서 인천까지 가려면 24시간을 걸렸어요. 중간에 가다가 응급조치가 너무 늦어서 죽고 안개 등 기상이 악화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요. 바다에서 밤을 세우기 일쑤였어요.”
대청도에서 인천으로 가려면 ‘한려호’라는 목선을 타야 했다. 이후 13시간 걸리는 ‘황진호’가 생겼고 ‘옹진호’ ‘새경기호’ 등 성능이 개선된 배가 오가며 시간이 조금씩 단축됐다. 인천에서 학교를 다닌 이경순씨는 “한려호를 타고 밤새워 인천에 도착하면 배 굴뚝에서 나오는 불똥으로 교복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곤 했다”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엔 밤늦게 도착해 손에 도장을 받아야 이동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정 씨 부부의 표정이 똑같이 담담해진다.
“점심도 굶고 저녁도 굶고 칡뿌리, 돼지감자, 고구마 이삭, 소나무 껍질을 먹고 자랐어요. 말에게 주는 밥인 말분가루를 죽으로 쑤어 먹었는데 수수껍데기와 같은 곡식의 껍질이었지요. ‘반대기’라는 음식도 있었어요. 말분가루를 떡처럼 쪄서 먹는 건데 식감이 얼마나 깔깔한지 몰라요.”
그러다보니 어린 나이에도 어른들과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청도에서도 조기가 많이 잡혔어요. 조기를 잡아오면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식구별도 다 나와 조기배에 소금을 채워넣는 일을 밤새도록 했지요. 졸다가 엎어져 정신을 못 차리기 일쑤였지요. 멸치나 까나리 같은 미끼를 끼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요.”(이경순)
미끼 끼우기, 조기배에 소금 채워넣기, 절인 생선 가마니에 정리하기 등 정 씨 부부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들과 함께 일을 해야 했다.
“가마니에 정리하는 것을 짝을 짓는다 라고 했어요. 말하자면 네모난 모양으로 생선을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조기는 소금을 채워서 짝을 지었고 홍어는 바위같은 곳에 널어 마르면 펴서 눌러 짝을 지었어요.”(정창호)
평생 대청도에서 삶을 일궈온 정 씨는 부부는 앞으로도 고향을 지키고 기억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여생을 꾸려가겠다고 밝혔다.
글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사진 홍승훈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