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경제개발 21 - (김광모 토요칼럼 2026.8.1)
중화학의 국내외적 평가
가. 박정희 중화학의 중화학 자체 평가
1. 후진국은 중화학을 할 수 없다
6.70년대에 전 세계 선진국은 모두 중화학 국가였고 중화학 국가라야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중화학의 특징은 자본 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이어서 후진국이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진 중화학 국가라도 중화학화 정책이란 명칭 아래 모든 중화학 공업을 동시에 단지화하여 건설한 국가는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서구 중화학 국가는 어떤 국가라도 18세기 이래 약 200년의 기간에 하나둘씩 건설하여 중화학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극히 자연 발생적인 형태로 만들었지 중화학 정책을 세워 만든 국가는 하나도 없습니다
중화학은 후진국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진국은 후진국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화학을 하지 않으면 영원한 후진국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2. 박정희는 실천가능한 한국식 중화학 건설을 시도하다
서구식의 중화학을 하려면 한꺼번에 수천억불의 자금을 투자하여야 하므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모하고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발상이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망국의 길로 간다고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중화학 공장집단을 건설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3. 중화학 건설에 착수하지
않으면 영원한 중/후진국이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하여는 중화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명확했습니다.
한국이 중화학 추진의 첫째 곤란 요소인 천문학적 투자의 자금 문제와 국내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 수출 지향성 중화학을 밀고 나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망국의 길로 가는 거는 아니고 모험을 하는 것이었습니 다.
중화학이란 요약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후진국의 노동집약 조립공업을 선진국의 장치 기술집약공업으로 상향개편하는 것입니다 (공업구조 개편론)
4. 공업구조를 개편함에 있어서 따라갈 수 있는 Model이 있어야 했습니다.
인접국 일본이 지난 50년 동안에 중화학으로 수출 100억 불도 달성하고선진국이 되어 우리가 모방할 중화학 국가였습니다.
개도국 한국이 중화학을 하려면
대폭적으로 규모를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가지신 혜안으로 선진국 건설을 위한 중화학 건설을 하려면 돈이 얼마 드느냐가 아니라 실천할 수 있도록 축소하여 정부의 국고가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5 중화학 자금의 중화학 투자 총소요액을 100억 불로 확정하다.
100억 불이란 금액은 중화학 기간 10년간에 필요한 금액이므로 연평균 소요액은 10억 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제 1에서는 연평균 10억 불은 조달가능하다고 보고 기재부로 하여금 국민 투자기금법을 만들도록 하여 1973년 12월 4일 국민투자기금법 (법률 제2635)을 제정하여 조달방안을 확실히 하도록 했습니다.
첫째로 개발금융 자금, 둘째로 자금시장의 육성 셋째로 범국민적 운동에 의한 국민 저축자금으로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중화학 팀이 자신 있게 주장하는 중화학 성공의 첫째가는 요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철두철미한 미래 개척 소신에 의거 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수출 100억 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 달성하는 중화학 선언을 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아가서 중화학 정책을 국가 최고 정책으로 만들고 대통령 자신이 손수 책임을 지고 관리하는 프로젝트로 만들어 親政 親觀 한데 있습니다.
중화학 실천원칙인 "官계획 民실천" 정채책에 의해서 관계획은 청와대가 철두철미하게 담당 완비하였습니다.
경 제각의 급 중화학 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산하에 사무국으로 중화학 추진위 기획단을 만들어 청와대 병설기 구로 하여 중화학 Control Tower 역할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중화학의 단장과 부단장은 청와대의 수석비서관과 비석관이 담담했습니다.
또다시 중복합니다.
중화학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수출 100억 불은 81년 목표 달성은 3년이나 빨리 77년에 달성하였고
81년에는 200억 불을 딜성하여 목표에 비하여 2배 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정부 목표 53억 불의 4배 달성이라는 아직도 어느 누구도 인정치 않은 기적 같은 현실을 만들어 냈습니다(EPB 한국경제지표 1982.6)
나. 국제적 평가로서 총론
중화학이란 용어는 중공업과 화학공업의 합성어로 일본이 중공업과 화학 공업을 육성해서 선진국이 되어 일본만이 이웃이라고 한국의 중화학을 평가했습니다
전 세계에서는 동방의 소국 한국이 중화학을 건설한 것이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77년 미국의 동 아시아 제국의 경제개발에서 한국의 중화학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에 대하여 시비를 걸 때 지적한 것은 미사일을 비롯한 방산 육성과 핵개발을 취소하라고 한 것이고 중화학은 Brown 국방장관 말에 의하면 놀랬다고 합니다.
일본의 평가가 가장 현실적인 평가로서 건설되고 난 후의 한국의 중화학을 칭찬하여 평가했습니다
필자는 일본을 모델로 삼았다고 헀으나 일본의 평론가 들은 한국의 일본을 모델로 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한국의 중화학은 독창적으로 만든 100% 국산품으로 자랑거리라는 갓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 일본의 유명 비평가의 평가
일본의 와다나베 교수는 그의 저서 "아사아 중진국의 도전" 이란 책자에서 한국이 중공업화 함에 있어서 "후발의 유리성"을 가장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여 성공한 나라
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리성이란 선진국이 막대한 자금과 기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얻은 기술과 경영을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주워서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한국은 선진국이 개발하여 놓은 모델 중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는 취사선택을 하여 한국의 실정에 맞게 변형 또는 수정하여 건설하였다고 했습니다.
한국식 경제건설의 모델을 만들어서 추진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노무라 연구소 주임 연구원인 모리타니 저 "일본 중국 한국의 산업기술비교"의 기술비교의 비교기술론에서도 한국은 중화학과 기술 연구개발 정책에 의거 일본에 많이 접근해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경제에 대하여 자주 평론을 하는 나가 다니씨도 "아시아여 안녕"이라는 책자에서 일본이 미국등 국가와 환태평양권을 구성하여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다른 저서인 "한국이 도전해 오고 있다"라는 저서에서는 한국의 산업발전이 경이적이라고 했다. (이상의 서적들은 제가 일본에서 구입하여 현재에도 보관하고 있음)
라.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재조명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6개월의 재임기간의 경제발전 정책을 한말로 요약하면 "수출 지향성 경제 개발정책의 추진"입니다.
그는 62년부터 시작한 60년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자손 대대로 물려받은 쇄국 봉건 농본주의 국가에서 탈피하여 공업을 일으켜 공산품을 생산 "수출이 살길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수출 제일주의로 경제 성장을 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0년 후인 71에는 연평균 41.3%의 수출 성장을 이룩하여 10억 불의 고지를 정복하고 한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개도국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선진국에 진입하는 단 하나의 길인 수출 100억 불
달성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선언하였습니다.
중화학 =수출 수출= 중화학의 공식이 성립하는 글로벌 경쟁 체제입니다.
. 수출의 국제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중화학을 해야 된다는 것이고 선진국이 되려면 중화힉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화학이라는 정책은 한국이 세계 역사상 없었던 것을 처음 시도하는 것이므로 한국식 모델을 처음으로 개발하여 추진하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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