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달챙이 / 김삼복
정지 안은 그을음이 세월과 엉겨 붙어 온통 시커멓다. 아궁이 세 개가 아귀 입을 벌리고 있고 잘 마른 나뭇가지들은 헛청에 쌓여있다. 수수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어놓은 바닥은 오래 치댄 반죽처럼 찰지다. 목욕물을 데우거나 메주콩을 삶던 무쇠 솥과 들기름과 잦은 행주질로 길들여진 가마솥은 매초롬하게 윤기가 났다. 부뚜막 위 찌그러진 양푼 안에 감자 몇 알이 숨어있고 그 속에 이가 닳은 노란 놋달챙이가 수줍게 숨어 있다.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가리나무를 넣고 성냥을 푹 그어 대면 화르르 불이 번졌다. 이때 솔가지와 삭정이를 뚝뚝 분질러 덧 올린다. 불땀이 약한 장마에는 쓸려들어 갔던 연기를 다른 아궁이로 토해 냈다. 매캐한 연기로 금방 부엌은 자욱해진다. 불을 때다가 눈물을 훔쳤고 매운 냇내를 못 이겨 뒤 안으로 뛰쳐 나가기 일쑤였다.
쌀을 씻어 안치고 손을 담가 물의 양을 잰다. 김이 나고 솥뚜껑 밑에서 밥물이 넘쳐 오르기까지 이제부터 대평댁은 손이 바쁘다. 양푼 속에 들어 있는 감자 몇 개를 득득 긁어 놓고 쌀뜨물에 계란 몇 개를 넣어 휘휘 풀어 놓는다. 밥물이 끓으면 솥뚜껑을 열고 감자며 계란대접을 올려놓고 재빨리 뚜껑을 닫는다. 여름날에는 어린 호박잎과 가지를 밥 위에 얹는다.
삭정이 숯이 벌겋게 이글대면 아궁이에서 불을 빼고 잉걸불 위로 석쇠에 조기 두어 마리를 굽는다. 짭조름한 꼬순내가 퍼진 생선냄새에 누렁이가 정지문턱을 넘어오려 한다. 부지깽이로 문턱을 치는 대평댁은 아직 저 먹을 순서가 아님을 알린다. 생선 비늘을 벗기는데 놋달챙이의 날은 요긴하다. 우둘투둘한 껍질을 두어 번 긁어 대면 맨들맨들한 배를 내민다.
대나무로 엮은 살강 위로 대접과 밥그릇들이 속을 말리고 있다. 듬성듬성 뚫린 구멍사이로 젓가락이 자주 빠졌고 놋달챙이는 머리가 끼여 외발이 대롱대롱 흔들리기도 했다. 더럽고 두꺼운 껍질을 벗겨 내느라 제 잇몸이 닳아버린 고통은 예민한 날로 벼려졌고 설거지통에서 함부로 대해지면 주인의 손끝을 야무지게 베어 물기도 했다.
못밥을 내는 날, 가마솥에서 훌륭하게 눌은 누룽지가 솥 모양 그대로 박혀 있다. 솥바닥을 빙 둘러 긁어 올리며 뚝 일으켜 세우는 재주쯤은 놋달챙이에게는 식은 죽 먹기다. 늦가을 밤, 마루에 올려 있던 늙은 호박을 함박에 들여놓고 드득드득 껍질을 벗긴다. 호박범벅이 되거나 호박고지를 넣은 팥떡이 되어 돌아올 붉은 호박.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긁다가 꾸벅꾸벅 졸면 한 시도 쉴 틈이 없던 손이 잠시 휴식을 얻는다.
그사이 옆집 남창할매가 이가 다 빠진 합죽이 웃음으로 마실을 왔다. 남창할매는 빈손으로 놀러 오시는 법이 없다. 텃밭에서 기른 아욱 한 줌이나 상추 한소쿠리, 쑥버무리나 애호박전을 들고 오신다. 오늘은 손에 무엇이 들려 있나 아랫목에서 숙제를 하다 힐끔 거리기도 했다. 탁주를 즐겨 하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심심하지 않을 주전부리가 할매 집에는 항상 있었다. 호박 긁어대는 소리와 남창할아버지의 시앗 얘기가 다듬이소리처럼 죽이 맞는 밤, 졸음에 겨운 나는 눈을 꿈뻑이며 언제 주무실지 모를 엄마를 지켜보았다.
마당에서는 휘이휘이 바람소리가 떠돌고 이리저리 쓸리는 검불들과 나뭇잎들이 토방 아래로 몰리는 소리. 누런 호박이 제 붉은 살을 드러내고 얄팍얄팍하게 썰려 채반 위로 올려지던 밤이 기억난다.
용머리 고개를 넘어와 고미술품을 파는 가게를 들렀다. 고리짝 같은, 제 나름대로는 역사와 사연을 웅숭깊게 품은 물건들이 수북하다. 그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얼룩 앉은 놋숟가락 하나를 들었다. 야채 다듬이 칼이 두서너 개가 내 부엌에 걸려 있긴 하지만 이 놋숟가락을 들여 놓으면 내 현대식 정지에도 수십 년의 역사가 담겨 들어와 품위가 격상 할 것이다.
싹이 난 퍼런 감자 한 알도 내치지 않았던 검약의 미덕이 깃든 놋달챙이는 내게 언제쯤 만들어질까. 나의 놋숟가락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밥물이 오르기 전에 바쁘게 긁혀져 우리의 입속으로 들어간 수많은 열매들과, 가을밤의 호박 긁는 소리와 스산한 바람소리가 쓸려 들어온다. 수십 년 전 유년의 그리운 향기가 묻어 들어온다. 지금은 집도 주인도 없는 터에 잡풀이 우거 진 남창할매의 한 많은 시앗 얘기가 넘어 온다.
찌그러진 양푼 속에서 서럽게 닳고 있었던 못난이 숟가락과 따뜻했던 아궁이와 길이 잘 든 가마솥들. 시커먼 사각 정지 안에서 끓이고 잦힌 불목들과 함께 늙은 놋달챙이의 한 생이 서글프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대평댁 무명치마폭에 싸여 한 평생을 사랑 받았으니 그 또한 흐뭇할 것이다. 두꺼운 껍질을 제 한 몸의 날로 긁어내고 썩어 들어가 짓무른 속살 언저리를 뚝뚝 파내었던 놋달챙이. 아픈 곳과 성한 곳 그 경계에서 야무진 제 이빨을 내어 핥아주고 베어 물었던 차지 않은 달빛의 의기義氣.
나의 부엌 한 쪽에 어설프게 꽂혀 있는 놋숟가락이 역사는 품고 왔지만 쓰일 일은 좀처럼 드물다. 아직은 내 부엌에서 그야말로 데려온 자식 꼴이다. 뚝뚝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솥뚜껑 옆에서 대평댁의 부산함과 바지런한 모습이 겹치어 오지만 뜨겁지도 질펀하지도 못한 내 부엌에서 놋숟가락은 벌을 서고 있는 듯하다.
이제 온갖 채소의 껍질을 벗기고 삶고 끓였던 대평댁의 정지도 당신과 함께 늙어서 멈추어 있다. 당신만의 것, 자신의 놋달챙이를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조차 못한다. 살 수만 있다면 엄마의 푸른시절을 훔쳐 먹은 퍼런 녹을 시원하게 긁어 낼 달챙이 하나를 들여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