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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
히브리서 3:14~19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개신교란 로마 카톨릭이 성경 위에 교회의 권위를 두는 것을 반대하고, 오직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 신앙의 기초를 성경 말씀대로 믿고 생활하자는 정신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같은 개혁신앙을 갖는 신학자들도 중요한 분야에서 서로 다른 교리를 내세우는 예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냐’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틴 루터는 “크리스천은 은혜로부터 저주로 떨어질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하였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크리스천에게 현재의 구원은 확실하지만 최종의 구원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 존 칼빈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자신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세상에서 자주 넘어지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한 번 구원은 영원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구원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오늘의 말씀은 선명하게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기초를 이루지만 이 약속을 어떻게 내 안에 간직하느냐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는 말씀은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일 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내 안에 예수 안에 계셨던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시켜주십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다가 이 세상에 속한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덧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의 온전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if indeed we hold our original conviction firmly to the very end.”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if’라는 조건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참으로 시작할 때 지녔던 확신을 바로 마지막 지점에 이르기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확신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시작할 때’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의미합니다. ‘확실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세오스’은 ‘본질’ 혹은 ‘정수’를 말하는 것으로 본 절에서는 ‘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확신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우리의 신앙이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나가야 함을
히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이란 헬라어 ‘세메론 σήμερον’ 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내가 처해 있는 현재의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도 작정하는 순간에 우리 안에 성령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믿음의 확신입니다. 이것을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믿음의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한 대로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내 눈에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될 일을 현재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머물고 있었던 고향인 갈대아 우르는 현재 이라크 남부 지역에 속하며, 아브라함 당시에 학문이 발달하고 페르시아만에서 무역하는 배가 들어올 정도로 상업이 활발했던 곳으로 가장 번영하였던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무려 1,600km 다다르는 멀리 있는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미래적이었습니다.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입니다. ‘I will show you’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나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이런 아브라함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8절은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실성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모습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할 수 있습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알자’라는 단어의 원형 ‘알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할 때 ‘동침’이 ‘야다’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역시 오직 성령으로 인한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령으로 온전해야 합니다.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모독하게 되면 하나님을 격노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부드럽게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런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죄의 유혹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할 때 성령을 내 안에서 거부하고 그분의 다스림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3: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이유에 대하여 히 3: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이유는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신실성을 따라 이뤄진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광야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노예로 부렸던 애굽 사람들을 치는 하나님의 10대 재앙기적을 통해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초태생은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사람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다 죽어 나가는 마지막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서는 애굽 왕과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그들은 홍해가 5㎞나 쫙 갈라져서 양쪽이 물 벽을 이룬 상태에서 마른 땅이 된 홍해를 건넜습니다. 아침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기적도 이미 체험했습니다. 하루 1만 톤의 만나 음식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50톤을 싣는 덮개 차 200여 대 분량의 음식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목격했습니다.
이러한 많은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을 지키지 못했던 단 하나의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무려 430여 년간 긴 노예생활을 통하여 뿌리가 깊게 드리운 관념이 있다면 노예라는 굴종의 마음입니다. 당시의 노예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하면 나는 너에게 이렇게 해 줄 것이라는 약속은 그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것이 노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미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도 부모와 마찬기지로 주인에게 속한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에는 소망이 담긴 미래가 있습니다. 렘 7: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노예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계약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신 명령을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유를 주고 복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과정에서 그토록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목격하고도, 백성의 지도자였던 10정탐꾼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부정적 보고를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보고를 들은 광야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맛사와 하나님께 대드는 므리바의 죄를 범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다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신 것입니다.
노예의 관념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란 미래에 주어진 약속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도 신실함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가 처하여 있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어 순종할 수 없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에 찌들어 살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만 광야에서 하나님 은혜의 상징인 만나를 먹고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가 없는 세대는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잠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영어 성경에서 “Without vision people perish”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입니다. vision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 중에 미래를 향하여 꿈을 꾸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꿈을 꾸게 하십니다. 육체가 노쇠하여 죽음에 이를지라도 소망의 닻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나타난 능력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세상의 육체를 버리고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堅忍)’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견인’은 차를 끌고 간다고 할 때의 ‘견인’이 아니라 ‘끝까지 견딘다’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시인하고 믿은 것도 성령게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성령에 의하여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견인’입니다.
성도의 견인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께서 내게 베푸시는 은혜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구원의 과정을 이뤄간다는 것을 마음에 담는 깨어있음이 필요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이란 헬라어 ‘아가도스 ἀγαθός’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거룩한 뜻을 말합니다. 즉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별을 받아 택함을 받았습니다. ‘합력하여’라는 뜻은 ‘God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함께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은혜의 날개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누릴 소망의 날개가 있습니다. 이 두 날개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미래의 꿈을 꾸십시오! 이 미래를 잃은 사람은 구원도 잃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성령은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시고 그를 이뤄가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간직할 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