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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300년간 천연두와의 전쟁
1649년은 바로 청왕조가 북경에 진입한지 5년째 되는 해였다. 구정이 막 지난 후, 북경성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다시 누군가가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천연두(天花, 속칭 痘疫)이 발생한 것이다. 소식은 항간으로 급속히 퍼져갔다. "경성의 백성들은 우왕좌왕하며 엉망이 되었다. 정월 삼십일, 섭정왕 도르곤은 명을 내려 북경호적주민들중 천연두가 발병하지 않은 사람들 및 북경호적이 없는 사람들(천연두가 발병했든 아니든)조정의 피두(避痘)제도에 따라 성밖 20여리로 데려가도록" 하였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는 재난이 아닐 수 없다. 경성의 남성을 순시하던 어사 조개심이 1645년에 올린 상소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금이라도 열이 나거나, 옴 부스러기등이 난 백성은 쫓겨났다. 빈한한 백성들은 성밖으로 쫓겨난 후 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왕왕 어린 아이나 체력이 약한 부녀자들은 길거리에 버려지고,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백성들은 쫓겨나지만 황족과 대신들은 곳곳에 숨었다.
순치제는 일찌감치 성바깥의 남원(南苑)으로 피해 있었다. 성안에 남은 청나라 귀족 고관들은 모두 집속에 꼭꼭 틀어박혀 있으면서 전전긍긍 이 전염병이 물러가기만 기다렸다.
비록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천연두는 사방에서 발병했다.
음력 3월 18일, 순치제의 친숙부인 예친왕 도도(多鐸)가 천연두에 걸려 수십일 고생하다가 결국 마지막 숨을 거둔다. 나중에 건륭제에 의하여 '개국 여러 왕중 가장 공이 크다"고 칭해지는 걸출한 장군은 당시 나이 겨우 36세였다. 이처럼 강건하고 가장 좋은 의료조건을 갖춘 예친왕마저도 천연두를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천연두. 이 무시무시한 유령은 청왕조의 300년통치기간동안 계속 출몰했다.
천연두가 왔다.
도도가 죽기전 3,40년 전에 그의 만주족 조상들은 천연두가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사실상, 조상대대로 백산흑수에 살던 만주족들(당시 건주여진이라 칭함)은 원래 천연두라는 질병이 없었다. 그들은 대대로 동북의 날씨는 춥고, 사람은 드문 지방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천연두 병균이 살아남아서 전파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명나라말기에 중원지역에서는 여전히 "북로불출두(北虜不出痘, 북쪽 오랑캐에게는 천연두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이로써 볼 때, 중원의 한족들이 천연두 병균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명나라말기, 관내에서 대량의 파산농민들이 요동으로 이민을 갔고, 건주여진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중원지역의 선진 농경기술과 중국전통문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중원을 휩쓸던 천연두 병균도 가져왔다. 이는 접촉을 통하여 옮겨질 뿐아니라, 침이나 먼지 혹은 병균을 가진 공기를 통하여도 전염되어, 전염성이 아주 강했다.
이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병균은 사실 중국이 원산지는 아니다. 옛날사료를 보면, 기원은 북아프리카의 고대이집트였다. 기원전 1143년에 사망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천연두환자이다. 개략 기원전 250년경에 천연두 병균은 돌고돌아 흉노를 거쳐 중국에 들어온다. 1천여년간의 천연두 창궐로 중원한족들은 비록 이미 상당히 풍부한 예방경험을 직접하였지만, 여전히 3,40%에 이르는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막 천연두에 접촉한 만주족들은 이 병에 대하여 아무런 저항력이 없었다. 병에 걸린 자는 열에 여덟, 아홉이 죽어나갔다.
천연두를 방비하기 위하여, 만주족들은 엄격한 "피두제도"를 건립한다. 그들의 첫째 방법은 "도피"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면, 만주족들은 일반적으로 공공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중대한 국가행사에도 천연두가 발병한 때라면, 황족이라고 하더라도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는 사람은 모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631년 정월, 청태종의 큰형인 대패? 다이샨(代善)의 다섯째아들인 바라마(巴喇瑪)가 천연두로 죽었다. 청태종, 다이샨과 여러 패륵들은 아무도 감히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격리이다. 만주치하의 팔기군민은 일단 천연두에 걸리면 강제로 도성 바깥으로 격리시켰다. 만주족은 특히 황족에 관한 규정이 상세했다. 이미 천연두가 발생한 황족과 아직 천연두가 나타나지 않은 황족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아직 발진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는 9일 후에나 만날 수 있었다.
북경으로 들어오기 전에, 명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기 위하여, 청태종은 계속 정예기병을 보내어 산해관을 돌아 하북, 산동등지를 공략했다. 천연두를 피하기 위하여, 청태종은 항상 이미 천연두를 앓은 경험이 있는 패륵을 뽑았다. 동시에, 가능한한 천연두가 발병하기 쉬운 계절인 4월에서 8월은 피했다. 비록 매번 공격때마다 이렇게 조심하였지만, 누르하치의 두 손자 - 명장 악탁(岳托)와 그의 도앵 마첨(瑪瞻)은 여전히 산동을 노략질하는 도중에 천연두에 감염되어 젊은 나이로 죽었다.
순치의 죽음
1644년,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어린 황제인 순치제를 보좌하던 섭정왕 도르곤은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향한다. 파병명령을 받은 화석숙친왕 하오거(豪格)는 아직 천연두를 앓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스럽게 말했다. "설마 나를 일부러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닌가?"
북경으로 들어온 해에, 순치제는 7살이었다. 관외에서 출생하고 6살때 등극한 이 어린 황제는 어려서부터 여러 황족 친구들이 천연두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북경에 들어온 후에는 반드시 천연두가 유행하는 북경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생동안 고도의 경계를 한 상태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청나라의 입관전에 사두제도(査痘制度)가 있었다. 북경성에 도착한 후에는 더욱 엄격해졌다. 당시 당시 천연두는 거의 매년 반드시 발생했다. '사두(천연두조사)'의 대상은 팔기군민으로부터 북경성중민, 무역종사자, 북경으로 오는 외국사신들까지로 확대되었다. 일단 증상이 발견되면, 격리시켰고, 강제로 천연두에 걸린 주민을 도성에서 먼 곳으로 축출했거나, 아직 천연두를 앓지 않은 사람은 북경에 사신으로 오지 못하게 하였다.
청태종을 본떠서, 순치제도 남원과 서원에 각각 1곳의 피두소(避痘所)를 두었다. 조금만 조짐이 있으면 급히 그곳으로 가서 천연두를 피했다. 이런 상황은 정사(正史)에도 다섯번정도 보인다.
그러나, 천연두를 그를 그냥두지 않았다.
1660년, 순치제가 가장 총애하던 동악비(董鄂妃)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다. 3,4개월후, 다시 천연두가 북경에 만연한다. 당시 슬픔에 빠져있던 순치제는 도성을 빠져나가 천연두를 피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 점은 민간전설에서 동악비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젊은 황제의 이미지에 부합한다.
24세의 순치제는 천연두에 걸린다.
순치제는 천연두에 걸린 후, 스스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심복신하를 불러 유조(遺詔)를 내린다. 1661년 정월 7일, 순치지의 조서를 내려 사면령을 내린다. 한밤중인 자시 평생 천연두를 피해다녔던 순치제는 결국 천연두로 죽는다. 그리고 그는 임종직전에 후계자를 정해둔다.
"천연두와의 전쟁"성공, 청나라 전성기의 개막
한 황제는 천연두로 불행히 목숨을 잃었지만, 한 황제는 천연두때문에 황제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얻는다.
후계자문제를 고려할 때, 순치제가 비교적 좋아했던 아들은 둘째아들 복전(福全)이었다. 그러나, 효장황태후는 셋째아들 현엽(玄燁)을 고집한다.
현엽은 어려서부터 천연두와 싸웠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현엽은 서화문(西華門) 바깥의 피두처(避痘處, 나중에 '복우사(福佑寺)"로 개칭됨)로 보내어져 천연두를 피한다. 이렇게 방비하고 조심했지만, 두살도 되지 않아서, 현엽은 천연두에 걸린다. 다행인 것은 유모인 손씨가 잘 보살펴주는 바람에 현엽은 천연두의 사신(死神)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기는 했지만.
복전을 후계자로 할 것인가? 현엽을 후계자로 할 것인가? 병중의 순치제는 사람을 보내어 그가 존경해마지 않던 독일전도사 탕약망(湯若望)의 의견을 물어본다. 탕약망은 현엽을 후계자로 할 것을 권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고 반박하기 힘든 것이었다. 현엽은 이미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즉, 다시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순치제는 유명으로 8살도 되지 않은 현엽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그가 바로 청나라의 첫번째 "곰보황제" 강희제(康熙帝)인 것이다.
청나라왕조는 후계자를 고려할 때, 실제로 당시 중국민간의 관념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다. 당시 민간에는 심지어 이런 속담도 있었다: "아들을 낳은 것은 겨우 절반이고, 천연두를 넘겨야 비로도 다 된 것이다" 이는 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운 질병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천연두에 대한 방비는 주로 어린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연구자의 추정에 의하면, 만일 어린아이가 천연두에 걸리면 1/3이 죽는다. 그런데, 살아남으면 모두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생긴다.
천연두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중국인을 죽였을까? 지금까지 확실한 통계는 없다. 다만, 세계적인 범위내에서 말하자면, 의학사상의 한 추정으로는 1.5억명이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전형적인 사례는 1519년에 일어난다. 당시 천연두에 대하여 대체로 면역력을 가진 스페인사람들이 아메리카주의 인디안들을 정복할 때, 이 천연두를 신대륙으로 옮겨버린다. 그리하여 수천만의 인디안들이 멸종한다. 겨우 일,이백만명의 인디안들만이 살아남는다.
천연두가 미주대륙을 휩쓸 때는 청나라가 북경으로 들어오기 125년전이다. 보기에, 팔기관병들은 천화에 대한 저항력이 인디안들보다 별로 나은 점이 없었다. 순치제의 8남6녀의 자녀들 중에서 천연두로 8살이 되기 전에 죽은 황자가 4명, 황녀가 5명이었다. 반수를 넘어섰다.
팔기이외의 한족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천연두의 유린을 받았다. 당시 중국에 온 서양전도사 Dyer Ball이 산서(山西)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유효한 치료방법이 없었으므로, 50-60%의 감염자는 그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 무서운 일은, 기후가 온화한 남방지역에 천연두의 온상이었고, 한인들도 그곳을 장독(瘴毒)의 땅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했다. 천연두를 호랑이보다 무서워했던 만주족들이 감히 가서 다스릴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강희는 생각했다. 천연두는 이미 청나라통치의 중대한 위협으로 등장했으므로 반드시 대처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강희제는 태의원에 두진과(痘診科)를 두고, 널리 명의를 모았다. 북경성내에는 "사두장경(査痘章京, 장경은 벼슬이름)"을 두고, 팔기의 천연두방역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는 역사상 유명한 피두소인 승덕피서산장(承德避暑山莊)을 만든다. 이곳을 황족 유아들을 위한 전문적인 피난처로 만든다. 강희17년, 황태자인 윤잉이 천연두를 앓는다. 당시 마침 오삼계등 삼번의 난에 관건적인 시기였지만, 강희제는 태자를 돌보기 위하여 연속 12일간이나 올린 글들도 돌보지 않았다.
태자가 천연두발진이 일어난 기간동안 부위격(傅爲格)은 잘 보살펴준 공로로 인하여 무창통판으로 임명받아 나간다. 이년후 그를 다시 북경으로 불러들인다. 이 부위격은 나중에 천연두방역사상 이름을 남기는 중요한 인물이다.
부위격은 종두(種痘)의 방법을 알았다. 이것은 당시 선진적인 천연두치료방법이었다.
이것의 기원은 남방의 민간종두법이다. 취비종두법(吹鼻種痘法)이라고도 불렀다. 최초의 기원은 명나라 융경년간인데,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한묘법(旱苗法)이고, 다른 하나는 수묘법(水苗法)이다. 소위 한묘법은 천연두환자의 발진딱지를 떼어내어 갈아서 분말로 만든 다음, 장뇌, 빙편들을 추가해서 종두자의 코에 불어넣는 것이다. 수묘법은 환자의 발진딱지에 젖 또는 물을 넣고 희석시켜, 종두자의 콧속에 불어넣는 것이다. 종두법은 종두자로 하여금 경미한 천연두증상이 나타나게 한다. 그 다음 중의가 잘 치료한 다음, 천연두발진기간이 지나게 하면, 종두자는 천연두에 대하여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런 "종두법"은 100% 성공률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심지어 종두자를 죽게 만들기도 했다. 다만, 강희제는 여전히 부위격으로 하여금 황자들에게 종두실험을 하게 한다. 이후로 황자에게 종두를 시행하여 천연두를 방비하는 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종두로 인하여, 강희20년 이후에 출생한 20명의 황자들 중에서 17명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이전의 15명의 황자들 중에서는 겨우 7명만이 살아남았다.
종두법이 궁중에서 성공하자, 강희제는 대규모로 천연두예방사업을 실시한다. 궁중에서 팔기백성으로 보급시키고, 막남, 막북, 몽고대초원등 북방지역에 보급했다.
이후 100여년간, 궁중에서는 천연두에 관한 소식이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만주족들이 사방으로 천연두를 피해서 도망치던 광경이 잠시 일단락 지어진 것이다.
"천연두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1661년부터 1697년까지 짧은 30여년의 기간동안, 강희황제는 삼번을 진압하고, 대만을 수복하며, 제정러시아에 대항하고, 갈단을 평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중국통치를 안정화시켰다.
"우두(牛痘)"를 믿지 않고, "인두(人痘)"만 믿다: 청나라의 운세가 다하다.
종두법이 중국에서 성공하자 외국의 주의를 끌었다.
그때, 천연두의 위해를 당하는 나라는 청나라만이 아니었다. 유라시아의 각국은 매년 모두 수백만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따. 유효한 천연두예방기술은 세계각국에서 갈구하는 것이었다.
1688년, 러시아의 의사가 북경으로 와서 종두법(種痘法)과 검두법(檢痘法)을 배워간다. 18세기, 이 방법은 다시 러시아에서 터키로 전파된다. 영국 주터키대사부인인 몬태뉴는 1718년 영국으로 귀국한 후, 국내에서 적극 종두법을 보급한다. 이로부터 '인두(人痘)'는 영국에서 성행한다.
인두접종법은 세계각지에 전파되어 많은 생명을 살렸다. 그러나, 이 방법은 비록 가장 이상적인 의료조건하에서도, 여전히 2%의 사망률을 나타냈고, 심한 경우에는 근 절반의 종두자가 사망하기도 했다.
어릴 때 인두를 맞아본 영국의 시골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우연한 기회에 소에게도 천연두와 비슷한 우두(牛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병세는 사람의 천연두보다 훨씬 덜 심했다. 그리고 우유를 짜는 부녀자들이 쉽게 우두에 전염된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일단 우두에 걸린 후에는 다시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제나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리하여 이 우두가 그녀들에게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길러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1796년 5월 14일, 제나는 처음으로 우두에 걸린 우유짜는 여자아이의 손에서 우두장(牛痘漿)를 채취하여 아직 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8살짜리 남자아이에게 접종했다. 6주후, 제나는 일부러 이 남자아이에게 천연두를 접종했지만, 이 남자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따. 인두법보다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인 우두법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계속 완비되어 갔다.
약10년후, 포르투갈의 의사인 하비투어는 우두역묘를 마닐라에서 마카오로 가져온다. 이후, 동인도회사의 영국의사인 알렉산더 피어슨은 다시 우두역묘를 마카오에서 광저우로 가져간다. 중국에서 흘러나간 인두접종법은 개량을 거쳐 우두접종법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세계를 한 바퀴 돈 후에 다시 고향인 중국으로 왔다.
이미 인두접종법의 경험을 지닌 중국백성들은 더욱 안전하고 경제적인 우두접종법에 대하여 유례없이 환영하는 태도를 보인다. 많은 지방관리들도 우두접종의 보급에 참여한다. 그들은 많은 지방에 종두국(種痘局)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무료로 접종해준다. 1815년, 광주에 종두처가 설립되고, 1828년에는 북경에 경도종두국이 설립된다. 우두접종은 신속히 중국대지에 보급된다.
다만, 아마도 중국의 대국심리가 발동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궁중의 어의들은 서방에서 전래되어 이미 민간에서 유행하는 우두종두법을 들은척 만척 한다. 그리고 조상으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인두접종법으로 황실귀족들의 종두를 시행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천연두의 위협도 예전보다는 많이 약해졌으므로, 어의들은 날로 태만해진다. 가경제이후, 황자종두제도는 이름만 남고 형식적이 되어버린다.
함풍제가 2살 때, 종두가 거의 실패할 뻔했다. 비록 어의들이 잘 보살펴주어 목숨을 건졌지만, 얼굴에는 곰보자국이 남았고, 강희제이후 두번째의 "곰보황제"가 된다. 어의들은 여전히 이미 낙후된 인두접종법을 개량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4년 10월 30일, 함풍제와 서태후의 유일한 친아들인 19살의 동치제가 천연두에 걸렸다고 진단받는다. 동치제의 갈수록 심해지는 병세를 두고, 서태후는 그저 문무대신을 이끌고, 조상대대로 내려온 법도에 따라, 궁내외에 "두신(痘神)"에게 공물을 바치며 빌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2월 5일, 만신창이가 된 동치제는 처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양심전은 바로 113년전에 순치제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두번의 아편전쟁을 거친 청왕조는 이미 운수가 다했다.
꼬릿말
건국초기에, 일부 서방인사는 이렇게 단언한 바 있다. 천연두등 전염병은 신중구게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의 하나일 것이라고.
1950년 10월, 신중국은 우두접종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한다. 11년간의 노력끝에 1961년 6월, 중국의 마지막 천연두환자인 호소발(胡小發)이 완쾌되어 병원을 나선다. 이로부터 천연두는 중국에서 종적을 감춘다.
1979년 10월 26일, 유엔WHO는 나이로비에서 전세계에는 이미 천연두가 소멸되었다고 선언한다. 이후, 천연두병균은 8개의 실험실에만 보존되어, 연구용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