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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델의 <사라방드>, '사라방드'는 옛날 스페인의 춤곡을 말합니다. 느리고 장중한게 특징입니다.
이 음악은 영화 <새벽의 7인>에서 삽입곡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장면 두 주인공이 물이 차오르
는 성당의 지하실에서 서로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자결하는 장면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오죠
*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선 광기의 화가이자 바로크미술을 연 카라바조(1571~1610) ]
카라바조는 16세기 말, 17세기 초 활약한 화가로 강렬한 색상과 빛을 이용한 혁신적인 명암법을 창안하였는데, 그의 그림은 격정이 넘치는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시대를 초월해 보는 이를 단번에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살인죄로 쫓기다 바닷가에서 최후를 맞이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그의 삶이 관객의 흥미를 더욱 자아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과도 비견되는 그의 독창적인 명암법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업적이 결코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1571년쯤 밀라노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인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로 태어난 카라바조는 빛을 통해 그림의 혁신을 이룬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바로크 미술가로 평가됩니다. 20세기 미술 평론가 로베르 룽기는 카라바조가 빛을 사용한 것의 중요성을 르네상스 시기의 원근법의 발견과 비견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소재를 취해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전후 100여 년 동안 미술을 이끌어 온 인간적, 종교적 경험을 이상적인 형태로 꾸미는 플라톤식 이상을 버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생은 언제나 일종의 드라마이고 모든 경험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현상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매우 감성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이었습니다. 11세 때 부모를 잃고 밀라노의 어떤 화가의 도제로 들어가 수업을 받는 등 어린 시절의 고난이 그의 성격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현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찰저하게 이해, 작품에서 극적인 순간을 잡아 냈습니다.
한편 카라바조는 자신의 독창적 기법이 다른 화가들에게 널리 모방되는 등 당대 최고의 작가로 꼽혔지만 난폭할 만큼 격정적인 성격과 거칠은 인간관계 대문에 주위와는 제대로 어울리지 못해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아 소년 카라바조는 1588년 밀라노를 떠나 1592년쯤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로마의 미술계는 미켈란젤로가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며, 지적으로는 활기차고 열정적인 반종교 개혁기의 막을 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 명예와 부를 좇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가난한 미술가들을 포함해서 온갖 방문객들로 넘쳐 있었습니다.
밀라노에서 그림의 기본기를 다진 그는 로마로 들어가는 4년여 간의 여행을 통해 독창적인 자기 그림의 선과 색을 찾아냈습니다. 이상화된 세계를 그리던 당시의 화풍과는 전혀 동떨어진 사실주의적 방법을 채택한 것입니다.
로마에 들어온 지 처음 5년은 카라바조에게 있어 고통과 굴욕의 시기라고 말해집니다. 카라바조는 잡일을 통해 생활비를 벌었으며 어떤 화실에서도 몇 달을 머물지 못했습니다. 작업 스타일과 성격이 이들과는 모두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죠. 마침내 독자적으로 일을 하기로 결정하고 40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 중 하나가 교황청의 유력한 추기경 프란체스코 델 몬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 카라바조의 후원자 델 몬테 추기경
델 몬테 추기경의 도움으로 카라바조는 드디어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무질서하고 방탕한 그의 생활과는 딴판으로 우아하고 고상한 솜씨와 적절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쿠스'와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입니다.
* 바쿠스
* 과일바구니를 든 소년
카라바조는 1597년 델 몬테 추기경의 도움으로 로마의 로마의 콘타벨리 성당의 장식을 의뢰받고 성 마태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카라바조의 사실적 자연주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 연작은 1602년 완성되어 30세도 채 안 된 그를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에서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용하는 에피소드식 성인 전기의 방식을 벗어나 극적인 순간을 포착,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구도와 주제의 표면적인 모습뿐 아니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과 빛을 잡아내는 획기적이고도 충격적인 명암법을 선보였습니다.
카라바조의 빛은 자연의 그것이 아닙니다. 거의 언제나 구경꾼들의 어깨 지접에서 가득 쏟아지는 신비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카라바조의 스타일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술가들과 진보적 성직자와 지식인들은 당시로서는 거칠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카라바조의 극적 사실주의에 함축되어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의미에 매혹되었지만 교회의 성직자들과 전통적인 화가들은 자기 방어적인 과민성과 본능적인 보수성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개인적 방탕으로 인해 찬사 이상의 숱한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불구, 카라바조의 명성과 수입은 나날이 높아만 갔습니다. 카라바조는 본래의 방탕하고 격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잦은 폭행 사고로 법원과 감옥을 들락거리던 카라바조는 급기야 1606년 테니스 경기를 하다 벌어진 시비 끝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목에 현상금까지 붙은 그는 로마를 탈출, 나폴리, 시칠리를 거쳐 몰타까지 달아나고 맙니다.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피 시절에도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히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의 그림을 그리며 골리앗의 얼굴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참회의 뜻을 표했습니다. 스스로의 죄를 인정, 그림으로나마 목을 잘랐다는 표시였던 겁니다.
1601년 7월 카라바조는 교황에게 이 그림을 바치며 사면을 요청했습니다. 교황은 카라바조의 깊은 뉘우침을 읽고 그의 재능을 아껴 사면하지만 카라바조는 사소한 오해 끝에 스페인렬 포르토 에르콜레 섬의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 카라바조를 사면한 교황 바오로 5세
오해가 풀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미 자신의 짐만을 싣고 배가 로마로 떠난 뒤였습니다. 피로가 겹친 데다 극도의 좌절감에 빠진 카라바조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바닷가에서 쓰러져 버렸고, 며칠 뒤 37세도 안 된 젊은 나이로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 성 마테오의 소명>
이 작품에서 카라바조는 복음서에 있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갑자기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가운데 있는 사람 좋고 편해 보이는 중간 계급의 세금 징수인이었던 마테오는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 있는데, 그 존재만으로도 그림자에 어떤 빛을 주고 있는 듯합니다. 마테오가 본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속세를 떠난 듯한, 말랐지만 힘 있는 얼굴과 부름의 손짓, 그리스도는 교회를 상징하는 덩치 큰 성 베드로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카라바조는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던 중에 다른 사람이나 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의 방문을 믿지 않는 철저하게 현세적인 사람이었죠.
단단한 테이블과 그 아래의 근육질 다리, 거기에 달려 있는 칼이 그들이 살고 있던 세계가 아주 험한 세계였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부름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두 젊은이는 관심을 보이지만 사태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쪽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젊은이는 거의 동물적인 호기심을 보이고 있고, 전형적인 미소년인 그의 친구는 반쯤 놀란 듯한 섬세한 표정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두 사람은 아예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성인으로 보이는 뒤쪽의 늙은이는 계산에 정신이 없으며, 자신의 돈을 세고 있는 앞쪽의 젊은이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같이 보입니다. 이들 중 오직 한사람만이 그 부름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죠.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사람은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 부름의 현실성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도 놀랐습니다. 안정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이 맨발의 사제 역할을 요청받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기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제 곧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밀치고, 그리스도를 따라 지붕 없는 어둠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위험이고, 도박이며, 우리 개개인에게 던져진 질문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
카라바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잘린 목의 비참한 골리앗은 화가의 자화상이라 합니다. 그것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생활을 하던 그가 불안감과 반성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골리앗의 잘려진 목으로 표현된 카라바조의 얼굴은 자신의 죄를 뒤늦게 회개하는 모습이 처절할 정도로 잘 드러나 있고, 이를 바라보는 다윗의 얼굴에는 승자의 기쁨보다는 죽음에 대한 연민의 표정이 가득합니다.
마치 다윗으로 상징되는 교황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회개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의심하는 토마 >
세 사람의 사도들이 예수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있습니다.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당시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예의 없고 충격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죠. 하지만 성경(요한 복음 20장 27절)에는 분명하게 적혀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예수가 토마에게 말하는 장면이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경스러운 작품이 아니라 미화시키지 않은 보다 진실에 가까운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 세례 요한의 참수 >
어떤 위안이나 구원의 느낌 없이 죽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이 근대적인 작품의 크기는 가로 폭이 무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작품입니다. 모든 움직임과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한 분위기 속에서 참수 당하는 세례 요한, 얼굴을 감싸 쥔 노파의 비명소리가 가득한 느낌 속에서 망나니에게 자비는 없습니다.
한 번에 목을 베지 못하자 뒤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는 건 더욱 소름이 끼칩니다. 카라바조는 요한의 목에서 흐르는 피로 그림 하단에 서명을 했는데, 마치 한 편의 자서전을 보는 듯 합니다. 어둠 속에서 오른쪽 철창 뒤를 보면 두 사람의 또 다른 죄수가 목을 늘어뜨리고 이 공포스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 성 바울의 개종 >
이 작품은 성 바울의 개종을 그린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통상 예술계의 '악동'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거칠고, 폭력적이고, 악명 높은 카라바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한때는 악동이었던 성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깡마르고 참을성 없는 바울은 기독교도를 박해했는데, 박해를 더욱 강화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놀랍게도 하나의 비전을 보게 됩니다.
그의 앞에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광경에 눈이 먼 바울은 말에 떨어집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말에 올라탄 사람은 자신있고, 차분하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일단 높은 곳에 떨어지면 그 권력과 권위와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한번 보십시오. 다리는 힘없이 벌어져 있고, 팔은 허공을 향하고, 멀어버린 눈은 그대로 감고 있는, 완전히 무기력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볼 수 있기는커녕 이제 바로 앞에 있는 사물도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카라바조는 이런 바울을 동정심을 가지고 그려내고 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말에서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닥에 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라바조는 번뜩이는 재능으로 바울이 훨씬 더 하찮은 지위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바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말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운데의 밝은 부분을 말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 말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감정이 예민해 보이는 말은 예기치 않은 사태 때문에 자신의 배 밑에 놓이게 된 불쌍한 주인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짐승보다도 못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처한 곤경을 이해하는 말의 마음이, 지금까지 동료 인간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바울의 마음보다 더 큰 것입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마부도 인상적인데, 이 사람은 바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돌봐야 하는 말이 괜찮은지만 살피고 있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끌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쓸모없는 칼이나 갑옷 등과 함께 진실의 빛에 힘없이 노출된 바울만 남게 될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자신의 현재 모습, 그 폭력과 자만심이라는 말에서 떨어져, 완전한 밑바닥에서 진리의 빛을 받을 수 있기를 말입니다.
* 바로크 미술
'바로크'란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입니다. 바로크미술은 1600~1750년 사이의 유럽 미술양식을 말합니다.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하여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건축과 조각에 대한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르네상스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팽창하는 17세기 유럽의 시대정신과 발맞추어 외향적이고 격동적이며 회화에서는 격렬한 명암대비와 풍요로운 경향을 보입니다.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로는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카라바조가 있었고 그의 영향은 곧 스페인과 북유럽으로 퍼져 그 추종자를 ‘카라바 제스키’라 불렀습니다.
특히 루벤스, 렘브란트를 낳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등이 활동하였습니다.
첫댓글 헨델 사라방드,, 영화 새벽의 7인 삽입곡이엿군요. 바로크가 포르투칼어로 찌그러진 진주,,목잘린 골리앗 그림
카라바조의 일생 흠! 많은걸 알게 해주셔서 감사,, 기억력이 나빠 이 아름다운 글을 전부 용기에 담지 못하는 슬픔,,,
앞으로 종종 언급이 되겠지만 중세이후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간략해 봅니다.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
->현대미술(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초현실주의 등) 이 되겠네요. 말 나온김
에 음악사조도 잠깐 살펴보면 바로크->고전주의->낭만주의->근,현대음악으
로 크게 구분이 됩니다.
날씨가 따땃해지면 덕소로 나들이를 가려고 했는데 당분간 접어야 되겠네요.
다음에 봐요.
카라바조에 대하여 이것저것 구태여 암기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바로크 미
술을 연 천재화가,빛을 통한 명암법의 귀재,거칠고 야수적인 성격의 소유자 정
도로만 알고 있어도 충분할 거예요.
녜! 알것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