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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18
12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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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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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95n6BCfe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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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이 아무리 수백 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슬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 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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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례명이 왜 중요한가? 이름은 무의식을 담는 그릇>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8e5zu_NOf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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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면 아브라함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이전의 내가 잘려 죽고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할례가 신약으로 오면 세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할례를 통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신 이유는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갖게 되는 것이 본성이고 그 본성은 새로운 이름 안에 갇힙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즈카르야의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의아해합니다. 당시 요한은 흔한 이름이기는 하였으나 즈카르야 가문 이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씁니다. 그러자 묶였던 입이 열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왜 이름을 인간이 짓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그리 중요할까요?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1971년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대학교 지하에 모의 감옥을 만들고 2주 동안의 사회심리학 실험 지원자를 모집했습니다. 건강한 남자 대학생 24명을 선발해 추첨으로 교도관과 죄수로 나누었습니다. 실제 상황과 같이 연출하기 위해 어느 일요일 죄수들은 실재 범인처럼 체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실제로 하는 것처럼 알몸 검사와 분말 소독을 진행하고 발에는 쇠사슬을 채웠습니다.
1일: 교도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교도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수감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언어가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저항하는 수감자들을 전부 탈의시켜 수치심을 주었으며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2일: 새벽에 교도관들은 갑작스러운 점호를 취했고 수감자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교도관들은 아무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수용소 처벌을 감행합니다. 진짜 놀라운 사실은 이 실험을 이끄는 짐바르도 교수 자신도 교도소 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수는 실험실 감독을 강화하고 실험실을 진짜 교도소로 옮기려고 생각합니다.
3일: 수감자들이 사제와 면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단 2명만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나머지 9명은 수감자 번호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단 3일 만에 실험 참여자가 아닌 진짜 수감자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모두 초췌해졌고 건강상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5일: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교묘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합니다. 수감자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그들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따릅니다. 2주의 계획이었지만 이 실험은 어쩔 수 없이 단 5일 만에 종료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변화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실험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하는지에 따라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 보여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스로’란 말은 틀렸습니다. 그들에게 교도관의 정체성과 죄수의 번호를 붙여준 것은 하나의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믿어버림으로써 그 정체성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사실은 사제에게 자신들을 소개한 죄수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잊고 죄수 번호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이름에서 벗어나 죄수 번호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이름은 ‘무의식의 껍질’과 같습니다. 만약 요한이 아니라 즈카르야 주니어 정도로 이름을 지었다면 요한은 즈카르야 가문의 사제직을 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집단 무의식입니다.
우리 각자가 사는 세계는 이 집단 무의식으로 묶여 있습니다. 저처럼 삼용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트럼프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트럼프란 이름 안에 이미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것, 자라오면서 받아들인 것이 합쳐진 개인과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이 그 이름이라는 껍질 안에 들어있고 그 참 자신은 그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한 그 무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새로운 세례명을 가지게 된다면 그동안 트럼프로 묶여 있던 무의식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오리 부모에게서 길러진 백조인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의 이름을 가지게 되면 우아하게 하늘을 날게 됩니다. 오리 이름을 가지면 그저 오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그동안 내가 믿고 받아들인 무의식입니다. 물론 그 무의식은 나의 태어날 때의 생존 욕구와 결합하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걀 안에 노른자는 닭이 될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껍데기를 깨야 합니다. 그 껍질 안에는 나를 살게 하는 무의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요리하면 흰자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오면 달걀에서 병아리가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그때마다 이름을 바꿉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그 세례명 안에 하느님 삼위일체의 집단 무의식인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산 이들이 우리 세례명이 됩니다. 나의 세례명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그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세례명을 통해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보다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삼용이란 이름을 인간적 아버지께서 지어주셔서 그 사회 안에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요셉이란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어야 그분의 뜻 안에 살고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세례명은 세례로 하느님 가족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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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 :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교회는 성탄 바로 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배치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제시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고리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정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사 40,3)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권능의 하느님을 낳았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을 낳았다.
엘리사벳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을 화해시키는 사람을 낳았고, 마리아는 더러운 땅을 정화시키는 분을 낳았다. 늙은 여인은 선조 야곱의 집안에 등불을 밝혔고, 요한이 바로 그 등불이다(요한 5,35). 젊은 여인 동정녀 마리아는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을 낳았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더구나 하느님의 운동선수인 우리는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혜를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를 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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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구약 성경의 마지막 권인 말라키서는 대예언서에서 소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수렴합니다. 특히 “나의 사자”라는 뜻인 말라키 예언자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말라키서의 메시아 관련 내용에 감명을 받고, 말라키가 기다렸고 또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읽어 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키의 예언은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주님 성탄이 되면 가려질 조연이지만 그는 분명 대림 시기의 주인공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키는 갑자기 도래할 주님의 날을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아직 구원의 때는 이르지 않았으나 언젠가 주님의 날이 오면, 인간의 죄는 종식되고 의인들이 구원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예언은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인 셈입니다.
따라서 주님 성탄을 곧 앞두고,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의 이웃들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주님의 사자요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에게 지녔던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을 사는 우리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질문을 되새겨야겠습니다. 이 아기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18 참조). 성인이 된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처럼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요한 1,19-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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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출생>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예수님 탄생의 서막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로는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을 할 때, ‘메시아 강생 소식’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따라서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축하했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의 서막과 같은 일” 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1,59-63)
이웃과 친척들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은 일을 ‘인간 세상의 일’로만, 또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의 관습대로 아기의 이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그 아기를 하느님께서 주셨음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아기가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것, 그리고 이제 곧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는 엘리사벳의 말은,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한 말을 엘리사벳이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는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글은 쓸 수 있었으니, 천사가 한 말을 글로 써서 엘리사벳에게 전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것은 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순종은 천사의 말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처음에는 안 믿었지만,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 말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루카 1,64-65)
가브리엘 천사는 믿지 못하는 즈카르야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9-20)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말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반대로 생각하면, “이 일이 일어나는 날에는” 말을 다시 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도 표징이고, 말을 다시 하게 된 것도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
1)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다시 하게 되는 것을 표징으로 삼으셨을까?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임무가 ‘선포’ 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는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점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사제의 중요한 임무인데, 믿음이 없는 사제는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2) 즈카르야가 믿게 된 때는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였을 텐데, 왜 계속 말을 못하다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뒤에 말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아직 부족한 믿음이고, 믿음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자마자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뒤의 68절-79절의 ‘즈카르야의 노래’를 그때의 찬미로 생각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과 메시아 강생에 대한 찬미가입니다. (사람들에게 메시아 강생을 알려 주는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즈카르야가 선포한 기쁜 소식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신기한 일’에 대해서만 놀라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들으려고 하는 사람만 알아듣는 소식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즈카르야가 선포한 기쁜 소식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아기의 탄생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서 ‘주님의 손길이’ 아기를 특별히 보살피고 계신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메시아 강생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그들은 주님의 손길이 자기들을(모든 사람을) 특별히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언제나 항상 우리를(나를) 보살피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나에게) 자비를 베푸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누구에게나 기쁜 날이고, 우리가 함께 축하해야 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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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얽혀 있는 삶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인류에게 등불이 되었던 종교는 크게 4가지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창시자입니다. 조로아스터, 석가모니, 예수님, 마호메트는 조로아스터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창시자입니다. 두 번째는 경전입니다. 조로아스터교에는 아베스타, 불교에는 불경, 그리스도교에는 성경, 이슬람교에는 꾸란(코란)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회성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회성이 결여된 종교는 유사종교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불의하고 억울한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박해와 순교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현세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삶에 대한 집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하는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과 성찰로 생겨난 종교를 ‘자연종교(自然宗敎)’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하느님께서 보여주신다고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 종교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고 합니다. 조로아스터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종교입니다. 부모가 아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은총으로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자연’을 통해서입니다. 구름, 꽃, 나비, 시냇물, 바람, 햇살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술인들은 자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공감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가집니다. 잘못된 행동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예언자(預言者)’를 통해서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된 길을 갈 때면 바른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과 고통 중에 신음할 때는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매년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대림시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을 통해서 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밤을 새워 양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축하하였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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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위에서>
루가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길 위에서>
끊어지는 듯했던
길이 이어지니
기쁩니다
이어진
길이 낯서니
두렵습니다
길 이은 길이지만
옛길 끊은 새길
위에서
두렵지만
기쁨과 희망으로
한걸음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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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나쁜 목자들에 맞서 쓴 말라키 예언서(기원전 5세기)의 말씀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종교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사제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시어 정화의 불로 경신례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리면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그리고 작명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뜻합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사명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향하여 선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호의를 그의 인격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만큼 그분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는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계약을 충실하게 기억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뜻합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 이름은 주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와서 마음의 회개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백성을 하느님께 준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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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성탄절은 우리에게 누가 오는 날일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그중 몇몇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에 큰 선물 주머니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어쩌면 학생들에겐 더 친근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하면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또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젖어 성탄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안에서 태어나셔서 성당에만 계시는 분이고, 성당을 벗어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와있는 뭔가 의미가 달라진 듯한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림 제4주간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중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을 때 그의 입이 풀렸고, 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있었던 요한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나오는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 40장에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라는 내용처럼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소리로서 하느님께서는 꼭 오시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참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루카 3장 7절의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온전한 투신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합니다.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절제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온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촉구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6-28)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고,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며, 그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십니다. 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진리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도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주님 성탄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요한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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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는데, 나이마저 많았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지요.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며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아 중심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다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이 아기를 잉태할 능력이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생각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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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부터 ‘오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디지니 만화 ‘도널드 덕’과 비슷하게 생겼고, ‘오리 궁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오리처럼 엉덩이가 펑퍼짐했습니다. 수영장에서 헤엄칠 때도 오리처럼 했고, 심지어 오리의 꽥꽥대는 소리를 완벽하게 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고서 이 사람을 ‘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별명으로 ‘오리’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동물 ‘오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특징만으로 ‘오리’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다’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단편적인 그 모습이 전체의 그를 나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편협한 생각이 하느님을 향해서도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단정하는 순간,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속단으로 어리석음의 길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으로 참 지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말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잉태 후 낳기까지 말을 하지 못하면서 아마 하느님의 일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에서 친척 가운데 아무도 쓰지 않은 이름이지만 하느님의 뜻에 맞게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판에 쓰지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잉태된 요한의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예고합니다.
이제 구원 역사에서 요한이 맡은 역할에 대해 즈카르야가 예언할 수 있도록, 일찍이 천사가 묶어놓은 그의 입을 어린 아기와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아기가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이름을 받자 사람들은 기적 같은 요한의 출생에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 두려움은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 회개하고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모여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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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
아인슈타인에게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학문에서 교수님처럼 성공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칠판에 ‘S=X+Y+Z’라고 썼습니다. 이 등식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자들에게 아인슈타인은 이런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S는 성공입니다. X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Y는 지금 현재의 생활을 즐기라는 것이고, Z는 한가한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 성공의 비결입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지금 한가한 시간을 가지며 현재의 생활을 즐기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수가 잦아집니다. 따라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은 실수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성공과 가까워집니다. 또, 현재를 즐기면 미래의 현재도 즐거울 것이기에 늘 즐거운 삶이 될 수 있기에 역시 성공과 가까워집니다.
마지막으로 바쁘게 살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기에 스스로를 발전시킬 계기가 없을 것입니다. 한가한 시간은 결국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성공의 비결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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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야훼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혀가 풀렸습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성탄이 늦어진답니다. 자가격리를 하고 오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혼란 속에서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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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대체 무엇인 될 것인가?">
-모두가 하느님 섭리안에 있다-
예수님 탄생에 앞둔 하느님의 준비가 참으로 치밀합니다. 아주 단계별로 절차를 밟아갑니다. 비약이나 도약이 없는 아주 디테일에 강한 하느님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어제는 사무엘 탄생의 기쁨을 노래한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찬가와 더불어 예수님 잉태의 기쁨을 노래한 마리아의 찬가를 나눴습니다.
오늘 대림2부 일곱째 날인 예수님 탄생이 임박한 12월23일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 출생에 대한 일화를 나눕니다. 오늘로 끝나는 임마누엘 주님 오심을 간청하는 ‘오 후렴’의 기도 역시 간절합니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요,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두 말마디가 한 눈에 반갑게 들어 왔습니다. “크리스마스2020: 희망의 빛이 어둠 속에서 가장 환히 빛난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님 탄생의 큰 기쁨의 빛에 앞서 요한 세례자 출생의 빛도 주변을 환히 밝힙니다. 요한 세례자 탄생을 기뻐하는 이웃과 친척들입니다. 다음 평범한 말마디가 함께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값진지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혼자서의 기쁨보다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깨닫습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이요, 나눌수록 작아지는 슬픔이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한 사람의 탄생은 우주의 탄생과도 같은 큰 기쁨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연한 출생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서 필연적 결과임을 깨닫는 다면 낙태는 상상치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약과 계약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시며 성실히 지키시는 분입니다. 이미 요한 세례자 출생은 아주 오래 전, 제1독서 말라기에서 예언된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예수님에 앞서 파견되어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회개를 선포한 요한 세례자를 당대 예수님과 제자들은 엘리아의 재림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새삼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 역시 회개의 시기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 출생후 작명과정에서 하느님 개입의 구원 신비를 깨닫습니다. 잠시의 불신으로 벙어리가 되어 흡사 대 침묵 피정같은 기간을 지낸 즈카르야도 요한 세례자 아들의 진상眞相을 깊이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로 부르려 하는 순간 엘리사벳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자 즉시 판을 달라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는 놀라고 일거에 분위기는 반전되고 안정됩니다. 즈카르야는 그 순간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화두같은 물음은 바로 주님의 손길이 아기 요한을 보살피고 계심을 깨달았던 이웃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닌 하느님이 뜻하신 사명을 지닌 유일무이한 존재 요한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는 바 우리 각자의 인생입니다.
요한 세례자에 대한 물음은 우리에 대한 물음이 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대체 이대로 살아도 되나?” 바로 우리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대로’란 말마디와 더불어 어제 25년 만에 고백성사차 온 수녀님의 한마디 ‘그대로’란 반가운 말마디가 떠오릅니다. 아마 당시 수녀님은 수련자였을 것입니다.
“신부님, 그대로네요! 제가 행복해졌습니다!”
‘이대로’가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그대로’의 영원한 삶, 행복한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연한 인생이 아닐 것이며 분명코 우리 하나하나 주어진 주님의 뜻이, 사명이 있을 것이고 하루하루 이를 깨달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이요 대림시기 과제이겠습니다. 하여 오늘 화답송 다음 시편의 고백 기도가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의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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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탄을 지척에 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8)
오랜 시간 자녀없이 살아온 엘리사벳의 고통을 아는 이들은 모두 이 신비하고 복된 출산을 자기 일처럼 기뻐합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을 해산한 뒤 여드레째 되는 할례식 날, 명명식도 함께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그들도 함께하지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이웃과 친척들은 당시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기를 부르려 합니다. 이에 산모가 이를 강력히 거부하지요. 부부는 천사에게 들었던 모든 것을 그대로 지키고자 합니다. 이름에 깃든 소명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도록 협력합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카 1,64)
아기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이 부여되자 즈카르야는 열 달 동안 닫혔던 입이 열립니다. 그렇게 혀가 풀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 찬미입니다. 열 달 동안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참회와 간구가 세상을 향한 축복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아기의 잉태에서 시작해 할례식의 사건까지 보고 들은 이웃들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물음을 통해 세례자 요한의 소명에로 우리의 시선을 돌립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사자에 대해 언급합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요한은 주님에 앞서 세상에 온 주님의 사자입니다. 그분이 오실 길을 닦고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이 그의 소명이지요. 그는 백성을 정화하고 정련하여 주님께 맞갖는 존재로 거듭나도록 돕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영성체송)
이제 주님께서 우리 문 앞에, 인류의 문 앞에 서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의 탄생에 이어 말씀은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로 옮겨지도록 돕고 있습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에게 회개와 충실한 사랑을 촉구했던 요한의 목소리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하느님께서 가려진 신비의 장막을 여실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태를 열어 성자를 세상에 내어주실 것이고요. 그와 더불어 우리도 이 놀라운 은총의 문 앞에 서 계신 주님께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성탄은 이렇듯 하느님 한 분의 독무대가 아니라, 온 인류가 주님과 함께 엮어가는 거대한 군무의 장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설레며 채비를 차리시듯, 우리도 설렘과 기쁨으로 영육의 준비를 다하는, 기다림의 정점의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이지만 주님은 세상 어둠에 빛이 되어 주시려 한달음에 오십니다. 성탄의 의미가 더욱 확연히 드러나는 올해의 축제를 저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맞이하시길 축원합니다. 인내하며 잘 견뎌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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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빈집(廢家)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실격자입니다.”(2코린 13,5)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다리면서 위의 성경 말씀처럼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실격자입니다.”(2코린 13,5)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자이기에 믿음의 삶과는 단절되어 주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작용하지 않아 우리 영혼 구원에 제외된 실격자라 합니다. 비참한 일입니다.이번 성탄 때는 주님이 반드시 우리 안에 탄생하시어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도록 회개하며 온갖 준비를 다 해야겠습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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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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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름은 단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게 하는 것만을 넘어서,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나 사명을 결정짓는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름을 짓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로 다루어졌고, 오늘날에도 “작명소”라는 곳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그는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서 ‘새 이름’을 받음은 새로운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의 이름으로, 그의 신원과 사명이 밝혀집니다. 곧 주님 앞에서 길을 닦게 되는 엘리야로서의 예언자의 신원과 사명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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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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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57)
<세례자 요한의 탄생!>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분의 탄생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탄생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으러 오십니다. 주님 탄생에 앞선 중요한 도구로써의 '또 하나의 탄생'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3,1.23)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지금 내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또 하나의 탄생'인 '회개'라고 묵상했습니다.
어제 오후에 한 자매님께서 면담성사를 요청하셔서 성당 사무실에서 면담 고해성사를 드렸습니다. 주님 성탄은 다가오고, 도저히 이런 상태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가 없어서 성사를 요청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번 성탄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준비하시는 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물론 드러나지 않게 잘 준비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한 시간 가까이 자매님의 얘기를 주로 듣는 면담 고해성사를 마치고, 자매님께서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 성탄에 앞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그 자매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을 구원하소서."(복음환호송)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태어납시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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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ContMYn3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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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 57)
그 어떤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탄생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탄생이 모두
중요하다.
하느님
탄생의
여정 안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도 있다.
믿음을 딛고
일어서는
탄생이 있다.
우리가 모두가
바라는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탄생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의
압박과 속박의
세월을 치유하여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쏟아지는
은총이다.
은총은
기다리는
이들의 것이다.
하느님
은총에
감사하는
대림이다.
대림이 있기에
탄생이 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빛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다.
탄생 중의
탄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하느님의 때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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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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