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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Ⅰ. 조선귀족 개관
1. 이왕가(李王家) 외척(外戚) 계보도 범례: (亡)사망, (存)생존의 의미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덕종
예종
성종
연산군(~1506)
중종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장자 ― 12대손 이하전(李夏詮) ― 후작 이해창(李海昌) 창산군(昌山君)(存)
선조황제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원종
인조 인평대군(麟坪大君) ― 1대손 이연응(李沇應) ―남작 이재극(李載克)(存)
효종
현종
숙종
(황후 민씨: 민유중의 딸)
민유중(閔維重)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방계 민치구(閔致九)
민태호(閔泰鎬) 민영환(閔泳煥)(亡)
민겸호의 자
민범식(閔範植)(存)-독일
민장식(閔章植)(存)-프랑스
민광식(閔光植)(存)-중국
민승호(閔升鎬) 민치록(閔致祿)의 양자
민겸호(閔謙鎬) 민영환(亡) 민태호(閔泰鎬)의 양자
민영찬(閔泳瓚)(存) 민종식(閔從植)(存)
민홍식(閔弘植)(存)-중국
ꄡ대원군비
ꄡ심택(沈澤)의 처 심상훈(沈相薰)(亡) 양자 심리섭(沈理燮)(存)
직계 민치록(閔致祿)
민승호(亡)민치구의 자 민영익(閔泳翊)(亡) 민정식(閔庭植)(存)
민태호의 자
ꄡ 이태왕비(李太王妃) 민씨
방계 민태호1)(閔台鎬) 민영익(閔泳翊) 민승호의 양자
양자 백작 민영린(閔泳璘)(存)
서자 민영선(閔泳璇)(亡) 민위식(閔暐植)
ꄡ 전 이왕(李王)의 비
경종
영종2) 세자 장헌(莊獻)
(장조(莊祖)) 은언군(恩彦君) 상계군(常溪君) 양자 익평군 희 덕안정 재덕 자작 이완용(李完鎔) 해구(海龜)
(益平君 曦) (德安正 載悳)
은신군(恩信君) 남연군(南延君) 흥녕군 이창응 양자 이재원 자작 이기용(李埼鎔)(存)
(興寧君 李昌應)(李載元)(亡)
흥완군 이정응
(興完君 李晸應) 이재원(亡) 이창응의 양자
양자 후작 완순군 이재완
(完順君 李載完)(亡)후작 이달용(李達鎔)(存)
흥인군 이최응
(興寅君 李最應) 이재긍(李載兢)(亡) 백작 이지용(李址鎔)(存)
흥선군(興宣君)
대원군 이하응
(大院君 李昰應) 서자 이재선(李載先)(亡)
완흥군 이재면
(完興君 李載冕)(亡) 영선군 이준용
(永宣君 李埈鎔)(亡)양자 이우공(李鍝公)
ꄡ 김두한(金斗漢)의 처(存)
이매용(李坆鎔)(亡)
이재황(李載晃, 李熙3) 李太王) (고종)
장녀 남작 조경호(趙慶鎬)의 처 조한국(趙漢國)(亡) 작위사양
이녀 남작 이윤용(李允用)의 처
(庶女) 서자 이명구(李明九)(存)
삼녀 남작 조정구(趙鼎九)의 처 조남승(趙南升)(存) 중국남경
작위 사양 조남익(趙南益)(亡)
조남복(趙南復)(存) 미국 워싱턴
은전군(恩全君) 익평군 이손희 완평군 이승응 의양군 이재각
(益平君 李孫曦) (完平君 李昇應)(義陽君 李載覺)(存)
전계대원군 영평군 이경응 이재순(李載純)(亡) 후작 이해승(李海昇)(存)
(全溪大院君)
철종황제
정조
순조 명온(明溫)공주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의 처
복온(福溫)공주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처
덕온(德溫)공주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의 처 남작 윤용구(尹用求)(存) 작위사양
익종
(황후 조씨: 조만영의 딸)
조만영(趙萬永)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조병구(趙秉龜) 조성하(趙成夏)(亡) 조동면(趙東冕)(亡) 조명구(趙命九)(亡) 양자 조남석
(趙南錫)(存)
조병기(趙秉夔) 조영하(趙寧夏)(亡) 남작 조동윤(趙東潤)(亡) 조중구(趙重九)(存)
헌종
(황후 홍씨: 홍재룡의 딸)
홍재룡(洪在龍)(亡) 홍종석(洪鍾奭) ꄡ 영선군(永宣君)의 처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남작 홍순형(洪淳馨)(存) 작위 사양
철종 (庶) 영혜옹주(永惠翁主) 금릉위(錦陵尉) 후작 박영효(朴泳孝) 처
이태왕
(비 민씨: 민치록의 딸) 이왕(李王)(민씨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남길공자
(장귀인의 아들)
비(김씨) 김사준의 딸 남작 김사준(金思濬)(亡) 실작 서자 김성기(金性基)(亡)
김택기(金宅基)(存) 중추원촉탁(中樞阮囑託)
김춘기(金春基)
영친왕(英親王)
(엄비의 아들)
장빈(張嬪)
엄비(嚴妃) (엄창호의 딸)
(엄진필의 손자) 엄진필(嚴鎭弼) 엄창호(嚴昌鎬)(存) ꄡ 김영근(金永根)의 처(亡)
ꄡ 엄비
ꄡ 이용복(李容復)의 처(亡)
엄준원(嚴俊源)(存) 엄주명(嚴柱明)(예비역 중위)
엄인영(嚴仁永) 엄주익(嚴柱益)(存)
이왕
(비 사망, 민씨 민태호(閔台鎬)의 딸)
(비 윤씨: 윤택영의 딸로 윤용선의 손자임) 윤용선 윤철구(尹徹求)(亡) 자작 윤덕영(尹德榮)(存)
(尹容善)(亡)
후작 윤택영(尹澤榮)(存) ꄡ 이왕비
처 유씨(存): 유진학(兪鎭學)의 딸 유진학(亡)
유홍준(兪弘濬)(存)
윤숙영(尹肅榮)(存)
<출전 : 李王家外戚略系, '朝鮮貴族略歷'('齋藤實文書' 100-3-850)>
1) 민태호를 민치구, 민치록과 같은 항렬인 것처럼 표시한 것은 일본 측의 오류이다. 민태호(閔台鎬)는 민치오(閔致五)의 아들로서, 민치삼(閔致三)에게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차남인 민진원(閔鎭遠)의 5대손이다. 그의 딸이 순종이 왕세자였을 당시 정비로 간택된 순명효황후민씨이다.
민태호는 사대당의 영수로서 활동하였으며,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민영목(閔泳穆)·조영하(趙寧夏)·이조연(李祖淵)·한규직(韓圭稷) 등과 함께 경우궁(景祐宮)에 입궐하다가 개화당 사람들에게 참살당했다.
2) 원문 그대로 표기하였음.
3) 고종의 휘이다.
2. 조선귀족의 약력
이조(李朝) 말 조선귀족의 경력은 한·일(韓日), 청·러(淸·露) 간 외교관계 당사자 이외 외부에서는 이를 알 수 없고 착종(錯綜)되어 있다. 비밀사항이 많아 그런 것으로, 그 진상을 설명하는 것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있다.
이 편저는 '조선귀족열전' 및 ꡔ조선신사명감ꡕ을 참고로 하여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대관(大官) 혹은 그들 사이의
통역 임무를 담당하여 다소나마 그에 접촉했던 사람들의 견문을 통해 노골적으로 기탄없이 적으려 한다.
자료의 취사선택에 매우 노력했으며 또한 진위에 관해서는 다소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단 이것을 읽는 사람들이 조선귀족이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얻고, 위정(爲政)상에 얼마간의 참고가 되면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조선귀족열전 목차>
후작 이재완(李載完: 사망) 승계 이달용(李達鎔)
후작 이재각(李載覺)
후작 이해창(李海昌)
후작 이해승(李海昇)
후작 윤택영(尹澤榮)
후작 박영효(朴泳孝)
후작 이완용(李完用)
백작 이지용(李址鎔)
백작 민영린(閔泳璘: 실작, 실형)
백작 송병준(宋秉畯: 사망) 승계 송종헌(宋鐘憲)
백작 고희경(高羲敬)
자작 이완용(李完鎔)
자작 이기용(李埼鎔)
자작 박제순(朴齊純: 사망) 승계 박부양(朴富陽)
자작 조중응(趙重應: 사망) 승계 조대호(趙大鎬)
자작 민병석(閔丙奭)
자작 이용식(李容植: 실작, 실형)
자작 김윤식(金允植: 실작, 실형)
자작 권중현(權重顯)
자작 이하영(李夏榮)
자작 이근택(李根澤: 사망) 승계 이창훈(李昌薰)
자작 임선준(任善準: 사망) 승계 임선재(任宣宰)
자작 이재곤(李載崑)
자작 윤덕영(尹德榮)
자작 조민희(趙民熙)
자작 이병무(李秉武)
자작 이근명(李根命: 사망) 승계 이충세(李忠世)
자작 민영규(閔泳奎: 사망) 승계 민병삼(閔丙三)
자작 민영소(閔泳韶: 사망) 승계 민충식(閔忠植)
자작 민영휘(閔泳徽)
자작 김성근(金聲根: 사망) 승계 김호규(金虎圭)
남작 윤용구(尹用求) (작위 사양)
남작 홍순형(洪淳馨) (작위 사양)
남작 김석진(金奭鎭) (작위 사양)
남작 한창수(韓昌洙)
남작 이근상(李根湘: 사망) 승계 이장훈(李長薰)
남작 조희연(趙羲淵) 작위 반납(빈곤이 원인)
남작 박제빈(朴齊斌: 사망) 승계 박서양(朴敍陽)
남작 성기운(成岐運: 사망) 승계 성주경(成周絅)
남작 김춘희(金春熙: 사망) 승계 김교신(金敎莘)
남작 조동희(趙同熙) (예우 정지)
남작 박기양(朴箕陽)
남작 김사준(金思濬) (실작, 실형)
남작 장석주(張錫周: 사망) 승계 장인원(張寅源)
남작 민상호(閔商鎬)
남작 조동윤(趙東潤: 사망) 승계 조중구(趙重九)
남작 최석민(崔錫敏: 사망) 승계 최정원(崔正源)
남작 한규설(韓圭卨) (작위 사양)
남작 유길준(兪吉濬) (작위 사양)
남작 남연철(南延哲: 사망) 승계 남장희(南章熙)
남작 이건하(李乾夏: 사망) 승계 이완종(李完鍾)
남작 이용태(李容泰: 사망) 승계 이중환(李重桓)
남작 민영달(閔泳達) 작위 사양
남작 민영기(閔泳綺)
남작 이종건(李鍾健)
남작 이봉의(李鳳儀: 사망) 승계 이기원(李起元)
남작 윤웅렬(尹雄烈: 사망, 실작, 실형)
남작 이근호(李根澔: 사망) 승계 이동훈(李東薰)
남작 김가진(金嘉鎭) (습작 불능)
남작 정낙용(鄭洛鎔: 사망) 승계 정두화(鄭斗和)
남작 민종묵(閔種黙: 사망) 승계 민규현(閔奎鉉)
남작 이재극(李載克)
남작 이윤용(李允用)
남작 이정로(李正魯: 사망) 승계 이능세(李能世)
남작 김영철(金永哲: 사망) 승계 김영수(金英洙)
남작 이용원(李容元: 사망) 승계 이원호(李原鎬)
남작 김종한(金宗漢)
남작 조정구(趙鼎九) (작위 반환)
남작 김학진(金鶴鎭) 사망 승계 김덕한(金德漢)
남작 박용대(朴容大)
남작 조경호(趙慶鎬) (작위 사양)
남작 김사철(金思轍)
남작 김병익(金炳翊: 사망) 승계 후 작위를 잃음
남작 정한조(鄭漢朝: 사망) 승계 정천모(鄭天謨)
남작 이주영(李胄榮: 사망) 승계 이규환(李圭桓)
남작 민형식(閔炯植)
남작 이항구(李恒九)
훈1등 후작 이재완(李載完) (본관 전주, 사망)
씨는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나 이조 제22대 장조 의(莊祖 懿)황제 현손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이태왕 전하(李太王殿下)의 종형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마침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각부 요직을 역임하였다.
1899년 완순군(完順君)에 봉작(封爵)되었고, 직후에 바로 정1품 보국(輔國)에 오르고 궁내부내대신(宮內府內大臣)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9년 9월 한국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에 특진하였다.
씨는 학식이 높고 명망이 높아 이태왕 전하의 신임이 두터우므로, 1899년경 경성 주재일본공사관부 무관(武官) 노즈(野津) 대좌는 일찍이 이에 착안하여 일한외교의 친밀을 도모하기 위하여 씨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개인적으로 친교를 맺고 자주 왕래하여 세계의 대세(大勢)에서 일한관계는 지세, 인종, 문학 상 순치보차(脣齒輔車)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하며 크게 양해를 얻은 이후 일한 외교상의 커다란 효과를 올렸다.
즉, 제일은행권(第一銀行券)을 발행하여 전 조선에 통용시킨 것도 이 사람이고, 현재의 경성의 대은행인 한성은행(漢城銀行)의 기안도, 한국의 도량형(度量衡)을 일본과 일치시킨 것도,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준 것도, 영남지선(嶺南支線) 철도 부설권을 제일은행에 준 것도 모두 이 사람이었다.
실로 일본에 대한 공로가 커서 노즈 무관의 활동 또한 경탄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는 러일전쟁의 이전으로 일한 간의 관계가 가장 험악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노즈대좌는 일찍이 이씨(李氏)가 금전에 무한한 욕심이 있는 것을 간파하여 이를 활용하여 이와 같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이토(伊藤) 공이 전권대사로 발령받아 경성으로 돌아왔다.
한일의정서를 개정하고 한국의 시정개선에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였으며, 그 답례로 대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
1906년 1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
1907년 4월에 육군부장(陸軍副將)에 임명되었으며, 이태왕 전하 양위 후 승녕부(承寧府) 총관을 맡았다.
씨는 언뜻 보기에 그 풍채에 위엄과 예의가 있으며 왕족다움이 있으나 실제로는 대단한 이기주의자인데 다만 사업을
통해 금전을 얻으려 하는 탐욕주의는 없었다.
그러나 포탄을 막을 철을 제조하라고 이태왕 전하에게 비밀리에 주청하여 내탕고를 짜내어 북일영(北一營, 군기창과
같은 것)을 설립하여 10세기 이전의 활과 화살 등을 제조하고 대포 소총의 무용론을 선전하며 현대의 군비제도에 크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고(故) 민영환 씨와 궁중의 대신 대기실에서 크게 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
민영환 씨는 유럽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시정의 개선과 군제 개혁에 대해 열심히 주창하지만 이재완 씨의 반대상소에
의해 전부 부결되어 그 실행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민씨(閔氏)가 이씨에게 국가의 중신이 사리 탐욕을 위해 거짓을 고하여 국가의 대계를 방해하는 것은 과연 씨의
본의인가 하며 중지하라고 말했다.
이씨가 말하기를 나는 종제의 금전을 취하는 것이지, 남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가족사업을 하는 것으로 국정에는 관계가 없다고 폭언을 토하면서 민씨를 가리키며 당신은 세력이 대단하여 금전이나 의식주가 천하일등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큰소리를 일부러 하는 것이며 나와 같은 공복(空腹)의 정직한 자는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된다고 하며 마음대로 해보라고 말하여 이곳에서 한바탕 다툼이 일어났다.
한일합방 당시에는 처자식과 문인식객에게 자신은 종사(宗社)를 위해 이번에 순사(殉死)할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죽지 못하고 후에 후작(侯爵)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이씨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순사하려고 해도 처와 자식이 만류하여 수행하지 못했다.
참으로 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점차 나는 원래 국무대신이라는 자리에 있음으로써 망국의 죄인이 되며, 또한 나는 병합조약에 관여한 것도 있다.
나는 조선황족의 고위자라서 후작을 수여받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파탄 난 것은 고서에서도 볼수가 있는데 국가가 망하고 가정이 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 집안이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단 하나 경성에서의 전설이다.
이이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알려진 사실이다. 자산은 약 200만 원 내외이다.
1916년 동생 이재곤(李載崑)과 공모하여 이씨 집안의 통일을 꾀하기 위하여 계황당(係皇黨)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은밀히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고 김윤식, 유길준 등에게 부단히 연락을 취하던 가운데 1923년 사망했다.
이 당파는 현재 보종당(保宗黨)이라 칭하며 세력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에 상당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왕직(李王職)에서 때때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도 이 당파에 속한 중심인물들이다.
따라서 박영효 후작, 윤덕영 자작도 대체적으로 이에 찬동하였다.
고 송병준도 이 조직의 일원이다.
1922년 10월 아들 이달용(李達鎔)에게 습작되었고 현재 종4위(從四位), 훈3등(勳三等)이다.
종3위 훈1등 후작 이재각(李載覺) (육군소장 예우)씨는 경성에서 태어났다.
철종대왕(哲宗大王)의 종손(從孫)으로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 씨의 양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가문이(門地)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덕궁 이왕직 전하와 동갑이라고 하여(실은 전하보다 한 살 위이다) 갑술과(甲戌科, 전하와 동갑인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 문과에 급제하여 삼품(三品) 이하의 각 요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1899년 마침내 종2품에 오르고 의양군(義陽君)에 책봉되었다.
1910년 마침내 종1품에 오르고 대훈위금척장(大勳位金沢章)에 올라 병합에 즈음하여서는 후작을 수여받았다.
현재 경성 북부의 계동(桂洞)에 살고 있다.
씨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방탕하였으며, 도박을 좋아하고 매우 도량이 좁은 사람이었다.
철종의 계통을 이어받고 있는 일파라서 대원군과 민비의 총애가 없어 다소 불평불만이 있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세력이 별로 없었는데, 일청전쟁 이후 민비의 밀정(密偵)으로 대원군의 동향과 당시 김홍집 내각을 정탐 밀고하여 민비에게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민비 사건 이후에는 이태왕 전하의 밀정이 되어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하시는 음모에 관여한 공로로 1902년에 특명영국대사로 발령받아 런던으로, 1905년 특명일본대사로 발령받아 동경에 파견되었으며,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희망에 의해 일본 적십자사 사원이 되었고, 대사(大使)로서 동경의 적십자사 본부에서
간인노미야(閑院宮) 총재 전하 앞에서 사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금 1,000원을 기부목록에 적었다.
이에 따라 유공훈장을 수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귀국한 후에는 자신이 희망하여 입사한 것이 아니라며 상소하고 외부대신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변명을 늘어놓으며 기부금 납부에 대해 누차 재촉을 받아도 납부하지 않자 마침내 양국 간의 문제가 되었다.
통감부 시기에 들어서서 이 기부금을 궁내부(宮內府)가 변제(辨濟)하는 좋지 못한 일이 생기자 씨는 당시 대사의 교제비로서 2만 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태를 부린 것이라고 한다.
씨는 조선귀족 중에 불화를 일으키는 자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 일례를 하나 둘 들면, 그의 부인 유씨가 콜레라에 걸려 자택에서 신음하던 것을 관내의 경찰관이 발견하게 되었다.
경기도 위생과(衛生課)는 귀족의 체면을 중시하여 응급조치를 강구하려고 교섭하였는데 이재각 씨는 자신은 알지 못하는 바이며 병은 자신이 처방할 수 있다며 마음대로 약을 먹였다.
완전히 남처럼 병자를 대하면서 첩의 집에 편안히 피병해 있어서 경찰관도 크게 분노하여 후작 집안의 체면을 존중할
여지가 없다고 보고 마침내 병원으로 옮기어 일각의 노동자들과 함께 수용하였다.
이 당시 유씨 부인은 경찰관에게 매우 감사해한 뜻을 표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친형 이재현 씨의 부채 때문에 60만 원의 자산을 파산하게 되어 경성에서 조선의 내로라하는 유지들이 모여 이를 처분해 주었다.
씨에게 4,000원의 공채(公債)를 6개월간 대여하면 씨의 재산은 안전하게 정리를 하고도 30만 원이 남는다고 예상하여 정리위원이 간청했지만 듣지 않았고 결국은 파산을 당했다.
당시 위원으로 있던 은행가, 변호사, 기타 지명도가 있는 신사들 다수가 매우 격앙하여 사회의 여론에 알리려고까지
하였다.
당시 이재현 씨의 부채는 부동산(토지가옥)을 매점하여 갑자기 금융 고정이 이루어진 것이지 방탕한 생활의 결과는 아니어서 일반인의 동정을 샀다.
파산 후 3개월이 되지 않아 다시 금융 유통이 순조롭게 회복되어 많은 이익을 남기고 그 부동산은 처분하였다.
그 후 씨에 대해 몰인정한 사람이라 하여 접근해오는 사람은 적어졌다.
현재 이가종약소(李家宗約所)4)의 부총재인 이강공(李堈公, 의친왕) 전하의 추천에 의해 이에 종사했고 철종대왕 계통의 관계상 박영효 후작과 친밀하게 지냈고 술은 마시지는 않지만 이강공 전하의 술자리에 참석하는 대우를 받아 자주
출입하였다. 현재는 도박으로 자산을 거의 잃고 곤궁하게 살고 있다.
종3위 후작 이해창(李海昌) (본관 전주)
씨는 경기도 포천군 출생으로 이왕가의 먼 친척이다.
도정궁(都正宮) 경원군(慶原君)이하전(李夏詮) 씨의 양자가 되어 경성으로 왔다.
성격이 온화하고 군자의 기풍이 있으며 사람과 접할 때는 겸손하게 처신하고 근엄함이 있었다.
그래서 60년 동안 한 번도 관해(官海)의 풍파를 만난 적이 없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이해창은 귀족 중에서도 보기 드문 근검, 소박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에게 알려질 정도로 야심도 없고 세상사에 관여하는 것을 피하는 지극히 냉정한 지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천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를 하나 들수 있다.
그 양부 이하전(李夏詮) 씨는 철종이 왕위를 계승할 당시 후보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시기와 질투를 받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일생을 보내다가 왕명에 의해 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에는 더 복잡한 내막이 있다. 지금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한 바와 같이, 철종의 선대 즉 헌종(憲宗)이 붕어하자
왕실의 가까운 친척 중에 적당한 후보자를 물색할 당시, 일시(약 2개월) 왕위가 공석이 되어 김 대비(金大妃)가 수렴정
치를 하면서 잠시 여왕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서 김씨가 외척권을 주장하여 그 어떠한 후보자도 김씨의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자기들에게 맞는 사람을 선택하여 정권을 자유로이 하려고 욕심을 내었다.
결국 강화도에 칩거하는 철종(한 농가에서 생활을 함)을 경성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당시 철종은 농가의 일개 평민이었고 그 조상은 옛날에 강화도로 퇴거된 왕족의 자손이었다.
김씨가 이하전과 절친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먼 친족인 철종을 그것도 먼 섬에서 불러들인 것은 자신의 권력
으로 농단한 것임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세상에 물의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이하전 같은 명망 높은 인물을 살려두는 것은 장래의 화근을 남기는 것이라 하여 마침내 살해하게 된 것이다.
이하전 같은 명문에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자 참혹하게도 경기도 포천군에서 먼 친족인 이해창 씨를 맞이하여 양자로 삼아 이하전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4) 이씨종약소를 말함.
이렇게 하여 이해창 씨는 이름도 없는 집안에서 갑자기 대가(大家)의 후계자가 되었고 양부의 생전에 당한 일을 생각하여 항상 온화함과 미덕을 함양하여 일신의 안전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조상(문벌) 덕분으로 특별임용 발령을 받아 임관하여 구한국시대의 위풍당당한 관직을 역임하고 1907년에 이르러 시세의 변화에 편승하여 일약(一躍) 종1품에 오르게 된다.
1910년에 대훈위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을 수여받고 한일합방 당시에 조선귀족령에 의해 후작을 수여받았다. 이것은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현재는 사직동의 구(舊) 도정궁에 조용히 살며 독서와 바둑에 빠져 살고 있다.
자산은 약 340만 원 이내라 한다.
종4위 후작 이해승 (본관 전주)
씨는 경성 출생으로 육군부장 1품보국전궁내대신(一品輔國前宮內大臣)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풍선군(豊善君) 이한용(李漢鎔)이다.
영친왕(英親王)(왕세자)의 학우로 이미 수학원(修學院)에 입학, 졸업하여 조상의 후광을 업고 특별임용령에 의해 임관하게 되었다.
참봉시강(參奉侍講)5) 등을 역임하고 1910년 6월 정2품에 오르고 같은 해 8월 대훈위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을 받았다.
씨는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 씨의 어머니 홍씨(洪氏)의 여동생의 자손에 해당한다.
철종 대왕의 계통으로 박 후작과도 친척관계이다. 조선귀족 중 가장 연소자인데, 천성은 냉철하고 영리했지만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찍부터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엄한 가정교육이 없어서 그런지 방탕한 생활에 빠져 발전의 기대가 없었다.
자산은 100만 원 가까이 있었는데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박 후작은 서둘러서 재산을 정리했는데 그 결과 부동산은 전부 은행의 담보로 잡혔다.
이왕직을 비롯해 윤덕영, 송병준, 박영효 씨 등의 보증과 상당한 보조에 의해 빚 갚는 성적이 매우 양호해졌다고 한다.
5) 고종 31년(1894) 7월 22일 궁내부 관제를 제정할 때 세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옛날과 같이 시강원(侍講院)을 그대로 두고 서연관(書筵官)으로 사(師)·부(傅)·이사(貳師)·빈객(賓客)·찬선(贊善)·보덕(輔德)·필선(弼善)·진선(進善)·문학(文學)·사서(司書)·설서(說書)·자의(諮議) 등 직도 그대로 두었다.
광무 6년(1902) 3월 2일 시강원 직제를 개정하여 일강관(日講官) 5인(칙임)을 두었는데 홍문관 대학사(弘文館大學士)와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가 이것을 겸하고, 그 밑에 첨사(詹事)(칙임)·부첨사(副詹事)(주임)와 시강관(侍講官)·시독관(侍讀官)(판임)을 두었으며, 7 년(1903)에는 다시 서연관을 두어 유현(儒賢)으로 이에 임명하였다.
한일합방 당시에는 후작을 수여받게 되었다.
조부(祖父) 고 이재순 씨는 유명한 배일자(棑日者)로 세상에 알려졌었으며, 전에 일본대사로서 동경에 외유했던 적이
있다.
이태왕 전하가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실 때의 음모의 거두(巨頭)로 크게 활약했다.
종3위 훈1등 후작 윤택영(尹澤榮) (본관 해평(海平), 노론, 서인)
씨는 경성에서 태어나, 의정대신(議政大臣) 고 윤용선(尹容善) 씨의 손자로서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윤철구(尹徹求) 씨의 셋째이다.
형제가 다섯 명이었지만 장남은 일찍 죽고 둘째 형은 자작 윤덕영이다.
창덕궁 이왕비 전하의 친정아버지(國舅)에 해당한다.
씨는 연령관계상 문과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고 특별임용령에 의해 임관되었다.
시종, 영친왕부령(英親王府令), 혜민원총무(惠民院總務), 영친왕부총판(英親王府總辦) 등을 역임하고, 1905년 이왕비 전하가 자리에 오르자 지돈녕사사(知敦寧司事) 등을 거쳐 육군참장(陸軍參將), 육군부장(陸軍副將)에 임명되고 육군찬모관의 요직에 보직되었다.
이왕전하께서 제위에 오른 후 군대해산 당시 육군부장에서 해관(解官)되었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작되어 정1품 보국(輔國)에 올라 영돈녕사사(寧敦令司事)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조선 국모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통례적 순서로는 특기할 만한 것이다.
1909년에 특별히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大金尺大綬章)을 배수하였다.
씨는 천성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교묘하여 둘째 형 윤덕영 씨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경성 정치계에서 유명한 형제들이었다.
이왕비 전하의 책립에 관해 그 이면의 관계들을 개략적으로 언급하면, 이왕 전하는 어릴 적에 병을 앓아서 승계 기대는 없었다. 따라서 뒤를 이를 왕위 계승은 이강공(李堈公, 당시 의친왕(義親王)) 혹은 영친왕(英親王)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왕 전하의 심산이 영친왕에게 있었다는 것은 인정(人情)상으로 보아도 또한 장래 엄비의 세력관계에서 보아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이에 따라 이태왕 전하는 이왕전하 생전에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만년 대계를 고려해서 외척 중
가장 번성한 곳을 선정하여 결정하였다.
즉 먼저 비(妃) 전하의 집안은 민씨 집안으로 상당한 세력이 있어 안심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어 윤씨 집안의 5명의 형제 인물과 그 문하의 번영을 숙고한 후 윤비(尹妃)의 책립을 결정했다.
이 이외에 다른 변수의 관계도 존재했다.
즉 엄비(嚴妃) 입장에서는 정실 비가 아니어서 자신의 지위를 불안히 여겨 내부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고심하며 영친왕
보호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을 때 민비(당시 황태자비) 전하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궁중 내의 세력은 자연히 엄비에게 돌아가 엄비가 크게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황태자비의 재선(再選)에 즈음해서는 자기세력 범위 내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비(妃) 전하가 나이가 어느 정도 있고 지식과 양식을 갖추면 자신의 자유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미성년자 아니 최연소자를 선정하여 자신이 양육하는 방식으로하여 자기의 세력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방침이었다.
마침 영친부총판(英親府總辦) 윤택영 씨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신하를 파견하여 몰래 조사한 후
재빨리 윤택영을 몰래 만나 속마음을 알아보고 왕실과 윤씨 집안과 엄비와의 삼각동맹을 성립시켰다.
그런데 그 중간에서 두 집을 오가며 알선한 자는 당시 내부지방국장(內部地方局長)인 이용복(李容復)이었다(이용복은 엄비의 종질에 해당한다).
윤비 전하 옹립 당시의 나이는 실제 12세였다.
이리하여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옹립된 것은 실로 이상과 같은 이유였다.
또한 이 이외에도 윤택영 씨의 조부(祖父) 윤용선(尹容善) 씨가 의정대신(議政大臣)시절에 이태왕 전하에게 곤위(坤位)6)는 하루라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엄비를황후 자리에 추대하려고 상소하고 세간의 동지를 모으려 여론을
환기시켜 거의 성공할뻔했으나 지금의 이왕 전하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함으로써 엄비와 윤씨 사이에 불만을 낳게 되었고, 이것이 성공하지 못한 것도 말하자면 윤씨 형제들이 술책에 능했다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때 후작을 받았고, 현재는 200만 원 이상의 고액의 빚에 허덕이며 몸을 피해 북경에 유랑하여 아편에 중독되어 있다. 또한 옛날 부자의 그늘, 말하자면 이왕직의 친척의 채무정리가 다년간 문제가 되고 일생일대 난관이
되었다.
채권자들은 윤씨에 대해 파산선고를 신청하였다고 한다.
씨는 또한 이왕 전하의 즉위 후 왕세자 전하를 방해하고(阻外) 이강공 전하의 첫째 아들 즉 용길(勇吉) 공을 옹립하려고 구한국시대에 이왕가를 중심으로 여러 방면에 대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미연에 발각된 사실이 있다.
지금은 대세가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며, 이것을 꿈꾸는 도당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6) 왕후의 지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사편수회 고문, 종3위 후작 박영효(朴泳孝) (본관반남(蕃南), 노론)
씨는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났다.
영의정(총리대신) 박원양(朴元陽) 씨의 3남이다.
13세 때 철종대왕의 부마로 선정되어 금릉위(錦陵尉)의 영작을 받았다.
씨의 집안은 이조 때 명문의 후예였지만 중세에 실력을 잃어 단지 지조 결백한 집안이 되어 생존했다.
생부 박원양 씨도 한학 선생으로 수원군의 한 지역에서 지인들의 자녀들을 모아 곤궁한 상황 속에서도 육영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박영효 씨가 금릉위에 오르자 한 집안의 번영에 공헌한 것이 되었다.
그 문하생의 대부분은 큰 인물이 되었는데 대신 어윤중(魚允中), 신기선(申基善), 이도재(李道宰)와 같은 인물들이 그
중심인물이다.
그 후 박영효 씨의 죄에 연좌되어 망명하기도 하고 부모 형제가 함께 죄에 연좌되어 가족이 사형 선고를 받아 옥중에서 죽기도하여 일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불행을 당했다.
실로 박영효 씨의 생애는 때로는 일척건곤(一擲乾坤)7)의 쾌거를 기획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국에 망명하여 참혹하게
생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정치에 참석하여 종묘를 다루기도 하며, 때로는 배고픔을 견디며 유배지의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등 실로 파란만장했다.
아들을 아는 것은 부모에 따를 자가 없다고 했는데, 아버지 박원양은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장남 영교(泳敎)는 훗날
잘될 것 같은 희망이 있는데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차남은 의기소침하여 기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3남 영효는 견인침묵(堅忍沈黙)의 기질이 있는데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없고 혼자서 작은 간계를 부리는 등 기이한 버릇이 있다고 했다.
장래에 반드시 화를 불러 우리 집안을 쇠퇴시킬 운이 목전에 있다.
따라서 이를 구할 길은 문하생 중 유일하게 어윤중뿐이다(한 집안이 연좌죄에 의해 아버지 원양, 형 영교는 옥중에서
사망 하였다. 어윤중 씨는 옛정을 중히 여겨 홀로 시체를 가져다가 매장을 하고 몰래 유족을 도왔다. 그러다 그 일이
발각되어 어윤중 씨 또한 형을 받았다).
박영효 씨가 철종대왕의 부마가 된 것은 유명한데 그것은 대원군의 정략결혼이었다.
여하튼 이태왕 전하의 책립은 철종파의 반대에 의해 쉽지가 않았다.
조동윤(趙東潤) 남작의 생부 조영하(趙寧夏) 보국(輔國)과 음모하여 익종(翼宗) 대왕 계통을 이어 조 대비(趙大妃) 전하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겨우 책립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철종 일파에 세력이 발호하면 이태왕 전하의 위치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항상 제재를 가했다.
7)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걸음.
그 결과 철종의 사위는 이름 없는 유학자 집안의 문하생 중 한명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민씨 일가의 세력이 발호하여 대원군의 섭정은 봉환(奉還)되고 예상외의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대원군과 민비의 알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그 유명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때 민비는 민간으로 탈출하여서 여러 가지 음모와 밀책을 꾀하여 중국정부에 연락을 취했다.
그 결과 이홍장(李鴻章)은 장군(將軍) 오장경(吳長慶)에게 명령하여 일개 대대(약 1,500명)의 병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대원군을 포로로 잡고 중국정부의 보정부(保定府)에 감금하였고, 종사관(從事官) 위안 스카이(袁世凱)에게 병사 300명을 주어 경성에 잔류시키게 하였다.
민비의 복위 후 그 일파의 세력은 갑자기 흔천동지(掀天動地)의 느낌을 만나는데 당시 한정(韓廷)은 홍영식, 김옥균,
민영익(閔泳翊), 박영효 이하 다수의 청년명사의 급진파가 크게 내정 개혁을 꾀함과 동시에 대외관계에서는 중국에 대항하고 일본으로 접근을 꾀하고 있었다(일본의 충고 내용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와 같이 하여 정계의 파란은 일단락되고 1882년 박영효 씨를 대사로 김만식(金晩植)을 부대사로 하여 서광범, 민영익, 김옥균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양국의 관계를 친밀히 하고 국교를 수정(修訂)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국정의 쇄신을 꾀하고 일본에서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김옥균, 홍영식(洪英植)과 모의하여 조선우정국(朝鮮郵政局)을 설립하여 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대장으로서 사단장처럼 실권을 장악한 군사 보직)를 맡아 왕 전하에게 주상하여 국정 일신의 조칙을 내렸다고 한다.
위안 스카이가 청군을 이끌고 입궐하자 싸웠으나 패하여 많은 동지가 살해되는 바람에 잠시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 자칭하며 10년간 이국에서 빈곤과 고독을 맛보았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왕전하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아 11월에 귀국하여 같은 해 12월 김홍집 내각에 입각하여 내부대신을 맡아 시정의 일신을 꾀하였지만 평소 부친인 원양(元陽) 씨의 말처럼 잔꾀를 부리는 성격이 있어 이강공
전하의 추대(推戴) 밀책을 세우려고 일을 꾸미다가 중간에 폭로되어 다시 일본에 망명하게 되었다.
내부대신 재직 중에도 각 부서의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여 각 대신들과 협의하지 않고 민비와 결탁하여 정부각료와의
의견 교환을 소홀히 했었던 것이었다.
마침내는 민비의 이간책에 편승했다는 것을 알고, 러일전쟁 이후로는 일본 외무성의 야마자(山座) 통상국장에게 정부의 의향을 대표하여 조선의 망명자들에게 경거망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때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받고 마침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일본 정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태왕 전하에게 간청하여 몰래 귀국했다. 그리고 바로 궁내대신(宮內大臣)이 되자 이토(伊藤博文) 통감과 갈등을 일으켜 정미정변(丁未政變)으로 대신 직에서 면직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한일합방 후 유배에서 풀려 경성으로 돌아와 후작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항상 불평이 많고 또한 불평스러운 행동을 했다.
그러던 중 배일적(排日的) 언동을 하자 경성 정계의 요주의 인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독시절에 크게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만세소요 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구(舊)감정을 초월한 넓은 채용정책에 의해 중추원 고문 및 식산은행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훈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고 현재는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때는 조선내외의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큰일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평온하게 조용해진 것은 전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자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이 사람은 도량이 협소하여 여성에 가까운 점이 있다. 자산은 약 20, 30만 원 이내라고 한다.
중추원 부의장, 정3위 훈1등 후작 이완용(李完用) (본관 우봉(牛峰), 노론)경기도 광주군(廣州郡)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1품보국(一品輔國) 이호준(李鎬俊) 씨(이태왕 전하 즉위 때 알선의 공이 있어 전하가 덕을 베풀어 중용했다.
조야(朝野)에 큰 세력을 가졌고, 이완용 씨가 이태왕 전하에게 중용된 것은 원래 씨의 비범한 수완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또는 아버지 호준의 권세와 명예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의 양자로 들어가 이윤용(李允用, 후에 남작을 받음)의 동생이 된다.
이렇게 양자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유래(由來)로 조선의 관습상 양반은 서자(庶子)에게 가독(家督)8)을 상속해서는 안 된다.
즉 국가의 법제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관습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는데, 서자는 명예로운 요직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서자에게 가독을 상속시켜서는 안 된다.
자손대대로 고위 고관을 얻었던 집안도 하루아침에 문지(門地)가 부진하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다른 데서 양자(養子)를 삼아 가독을 상속시킨다.
이호준(李鎬俊) 씨도 그 일례로서, 이윤용(李允用)이라는 친자가 있었으나 서자여서 그를 제외하고 먼 친척인 이완용 씨를 양자로 들여 승계시켰다. (조선에서는 남자가 없고 여자만 있을 경우 그 여자의 사위를 양자로 삼는 일은 절대 없어서, 여자는 다른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고 다른 데서 양자를 받아들여 다른 여자와 배필을 맺어주는 제도가 있다.
그 아들이 엄마 성(姓)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8) 집안의 대를 이어갈 맏아들의 신분을 말함.
씨는 안정(安政) 5년(1858)에 태어나 188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887년 9월에 주미공사관 참찬관(參贊官)으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5월 귀국한 후 한 달이 지나 정부의 명을 받고 천진(天津) 상해 지방을 다녀왔고, 10월에는 미국 워싱턴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임명되어 약 2년간 재임했으며, 1890년 10월에 나라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1894년 8월 주일전권공사(駐日全權公使)를 임명받아 부임하여 머물다가 다음해 5월 외무협변(外務協辨)에서 일약(一躍)하여 학부대신이 되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김홍집 등이 일본당 내각을 조직하게 되어 파면징계를 받고 정치를 떠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윤용(李允用)과 함께 친러삼이(親露三李)라 불린 것은 이때의 일이다.
여우처럼 러시아공사 유베르와 결탁하여 춘천(春川)의 폭동자들이 한성(漢城)을 습격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어지럽히고 궁정(宮廷)을 놀라게 만들어 즉시 위병을 파견하여 이것을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황성(皇城) 내의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유베르는 인민의 폭동을 방비하기 위한 명목으로
러시아 수병을 경성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국왕 및 세자를 러시아공사관 내로 데리고 가서 방에 구금하였다. 러시아공사관 내에서 조칙을 발하여 일본당 내각을 전복시켜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을 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범진과 함께 내각을 조직하여 스스로 외부대신(外部大臣)이 되고 학부농상공부도지부(學部農商工部度支部)의 임시서리대신(臨時署理大臣)을 겸하며 7월에 이르러서는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래 수년간 지방 관찰사가 되고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것도 정변과 함께 여러 번 파면을 당하여 일시적으로 세력을 잃은 상태에 빠지지만, 1905년 9월에 이르러 박제순
내각이 조직될 때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5월 즉 황위 양위 3개월 전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의 추대에 의해 총리대신이 되어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고 혁신에 종사하여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단행하였다.
그는 기회를 보아 민첩하게 행동하며 결단력이 있어 한번 마음을 정하면 강담강실(剛膽堅實) 즉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생각을 결행하였다.
1907년 황위 이양 때에 엄비(嚴妃)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영친왕(이은(李垠) 전하)을 황태자로 즉위시키는 조건이라는 임기응변의 책략을 내세웠다고 한다.
이래 항상 시세에 발맞추는 행동을 취하지만 1909년 12월 흉한(兇漢) 이재명(李在明)의 난을 만나 중상을 입고 수개월의 치료를 받고 쾌유하였다. 1910년 데라우치(寺内) 총독시대 정국 세력에 순응하여 한일합방조약 체결에 연계되었으며 8월 22일을 기해 데라우치 통감과의 사이에 조인을 맺었다.
이 공적에 의해 백작을 수여받고 후에 왕세자 전하의 혼인 때에 후작을 받았다.
현재는 중추원 부의장의 직위에 있으며 조선 총독보좌로서 조선인 중 최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한국시대 대관(大官)에 있었으며 태황제(太皇帝) 내탕금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 재산은 조선인 중 최고여서 적어도 3백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중추원 고문, 종3위 훈1등 백작 이지용(李址鎔) (본관 전주, 노론, 서인)씨는 장종(莊宗) 대왕의 5대손 영의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형)의 손자로 예조판서(외무대신에 해당) 완영군(完永君) 이재경(李載競)의 양자로
이태왕 전하의 종질이다.
태어난 본가는 광주군(廣州郡) 궁촌(宮村)으로 그 생부는 이재하(李在夏)이다.
나이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씨는 대원군의 종손자였지만 고(故) 민비 전하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이지용의 부인 홍옥경 씨는 민영달(閔泳達) 부인과 자매 관계여서 민씨 집안의 보호를 받았다.
1894년 김홍집 내각 때 다수의 유학생을 동경에 파견했는데 이지용도 민비의 총애를 받아 1895년 4월 궁내부 유학생으로서 43명의 명문 중에 선발되어 신사유람단의 명의로써 동경에 파견되었다. 내각에서 먼저 파견된 유학생의 행동을
탐사 보고하며 시세의 변화를 관망하면서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 한 사람이다.
이렇게 반년을 지낼 때 경성에서는 민비사건이 일어나고 삼삼오오 숨어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를 겪었다.
이때 조선의 인심은 모두 참담했고 김홍집 내각은 국가적 미증유의 사변으로 인해 망연자실해 있었다.
이태왕 전하의 명령에 의해 충청도 보은군에 은거 중인 어윤중 씨를 불러들여 이 난국을 수습하게 하였다.
즉 군부대신(軍部大臣) 겸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맡아 즉시 왕비를 왕비직에 복위시키고 국장(國葬)을 치르도록
하여 민심을 위무하였다.
당시 책임자로서 전 군부대신(軍部大臣) 조희연(趙羲淵) 이하 당시의 훈련대(訓練隊)의 대대장(大隊長) 이하를 죄로
다스리려 하였지만 범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망명한 뒤였다.
이로써 표면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지만 의구심은 점점 높아졌고,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하여 육전대를
인천에 상륙시키고 경성에 들어와 이태왕 전하를 마침내 러시아공관으로 이어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와해되어 태반이 살육당하는 불상사를 당하였다.
이때 이지용은 이근용(李根鎔)과 연계하여 이 음모에 대한 공로가 있어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황해, 경상 두 지역의 관찰사를 거쳐 궁내부협판(宮內府協辦) 및 대신서리(大臣署理)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육군참장(陸軍參將)으로 임명되어
헌병사령관이 되었다.
후에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고 원수부검사국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이 되어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때 경성의 정계는 모두 러시아파가 점거하게 되었다.
민비의 복수를 실천하고 배일(排日)을 실시하기 위해 전 내각의 각료들 중 잔존자들 및 망명자를 잡아내어 처형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때 일본에서 고노에 아츠시마로(近衛篤麿) 공작이 조선의 정치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경성에 와서 이태왕 전하를
알현하였고, 궁내부차관이었던 이지용을 만나서 세계의 대세에서 한일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열심히 진술하자 개인적으로 큰 호감을 얻었다.
이것에는 당시 공사관부 무관(公使館附 武官) 노즈(野津) 소좌의 알선이 있었으며, 이전에 이지용을 육군장관으로 추천한 것도 노즈 씨로 하여금 일본 및 여러 외국 황족의 군적(軍籍)을 둘 것을 역설하게 한 결과였다.
이후 일본 공사관원 등과 친밀하게 교제했으며 그 결과 일본당의 주목을 받아 러시아파가 집권했을 때는 일시적으로
세력을 잃은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태왕 전하는 매우 불안해하여 이지용을 외무대신서리로 임명하여 이지용에게 일본과 교섭하도록 하여 일본의 호의를 구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그날 밤 당시의 공사관부 무관 관사(현재 헌병대사령관 관사)에 공사관부 무관 이지치 고스케(伊知地幸介) 소장과 후쿠이(福井) 해군중좌와 경성주재원 노즈 중좌 등이 회합하여 외무대신 이지용 씨를 불러 러일전쟁을 몰래 보여주고 한일의정서를 은밀히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이태왕 전하에게 시국을 급히 직접 주상하여 친일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역설하여 그 다음날
하야시(林) 공사와 의정서의 조인을 완료하고 국제공법상의 중립지대통과 권한을 얻고 전쟁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편의를 얻었다.
그 후 곧바로 외무대신으로 임명을 받아 한일조약을 7개 조약으로 개정하여 법부대신에게 전달하여 일본국보빙대사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도일하여 훈1등 욱일대수장(勳一等 旭日大綬章)을 수여받고 귀국하였으나, 그 후 조선 내에서 반감을 사서 농상공부대신으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쟁승리가 확실해지자 바로 내무대신으로 영전하였고 특명대사로서 일본에 부임하여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외교관계가 점점 복잡해져 가자 이지용 씨만을 희생양으로 하고 있어 불쌍하기도 하여 보호책으로 정계에서 은퇴시켰는데 씨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불평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노즈 대좌의 충고를 받아들여 정치와의 인연을 끊고 군인으로서 조선의 군정(軍政)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총감으로 임명되어 정계에서 벗어났다.
군대해산에 즈음해서는 부장(副將)에서 해임되고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어 이태왕 전하 양위라는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박람회 시찰관으로 세 번 일본에 건너갔다.
이태왕 전하 양위 후 다음해 2월 대훈위이화대수장을 수여받고 1910년 8월 합방 당시 과거 공로에 의해 특별히 영광스러운 백작을 수여받았다.
씨는 천성적으로 영리하고 임기응변의 수완이 좋았다. 또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아량도 있고 웅변에 매우 능했다.
그렇지만 도박을 좋아하여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명성도 크게 실추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시대에 백작의 예우를 중지하는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크게 개선하자 이를 인정하여 사이토 마코토 총독 시대에는 예우 정지를 회복하여 현재는 중추원 고문으로서 친임 대우를 받는 요직에 있다.
정4위 훈2등 백작 민영린(閔泳璘) (본관 여흥(驪興), 작위를 잃음)씨는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출생하여 보국(輔國)
민태호(閔台鎬) 씨의 양자가 되었으며 창덕궁 이왕비 전하의(윤비(尹妃) 전하의 앞의 비) 친형에 해당한다.
상해에서 사망한 민영익(閔泳翊), 민영선(閔泳璇)과 삼형제이다.
민태호 씨는 친아들인 민영익을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의 종가, 말하자면 죽동궁(竹洞宮)의 상속인으로 양자 보냈기 때문에 부득이 민영린을 양자로 받아들였다. 민영선은 현재 서자인 까닭에 상속권이 없다.
1892년 문과에 급제하여 각 부처를 역임하고 1904년 예식원부경(궁내부)을 명받아 일본국보빙대사 완순군 이재완(李載完)의 수행을 명받아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 훈2등 서보장(勳二等 瑞寶章)을 수여받았고, 1907년 일본 궁내성 사무시찰 명령을 받아 도일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는 규장각 제학으로 전임하여 고등관 1등이 되었다. 한일합방 때 고 민비의 오빠에 해당하는 관계로 조선귀족령
에 의해 백작을 수여받았다.
씨의 인간성을 보면 성품이 온후하고 그 기풍은 언뜻 보기에 귀공자와 같으나 위엄을 그 자신 스스로가 갖추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아편에 중독되어 지금은 전혀 무용의 인물이다.
1916년 아편을 흡입한 현행범으로 검사의 고소에 의해 구형을 받았다.
1919년 7월에 실작한 데다 자산도 상당히 있었으나 불량한 사람의 권유에 빠져 영리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결과
전부 탕진하여 현재는 이왕직으로부터 매월 약간의 생활비를 보조받는 형편이 되었다.
이전에 요직에 있을 때 조금도 나쁜 일을 하지 않았고 이태왕 전하에게 누누이 직언을 간하는 충실한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졌었는데, 아편에 빠진 것도 국사를 돌보지 못하는 것을 비관한 결과 세상을 걱정하여 신경병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정4위 훈1등 백작 송병준(宋秉畯) (본관 은진(恩津), 노론이라고 자칭, 사망)
씨는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경주인(京主人, 경성사람이 숙박하는 여관의 주인으로서 각 군마다 이것이 있었다.
군수 경질 때에는 여비를 먼저 받고 나중에 이자를 부과한다) 송원달(宋元達, 후에 개명하여 송□수(宋□洙)라고 함)의 양자로 함흥 관기(官妓)에게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함경도 장진군(長津)인데 태어날 때부터 영리하고 용모가 수려하여 기이한 미동자(美童子)라 불렀다.
13, 14세 때에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경성의 본가에서 냉대를 받아 분격하여 미성년 아동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계동궁 이재원 보국집안의 가업을 이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 이재원(李載元, 대원군의 중형) 씨는 그 용모의 비범함과 아름다움을 어여삐 여겨 서생으로 삼아 문지기로 삼았다.
그때 행동이 영리하여 어느 날 이재원 씨가 말하기를 너는 결코 우리 집에서 하인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르고, 분발 노력하여 훗날의 성공을 꾀하라고 하며 퇴거를 명했다(이재원 씨는 관상을 보는 사람이었다고 함).
송병준은 크게 혼란스러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 주저하고 있을 때 마침 죽동궁(竹洞宮) 민영익 씨(민비의 조카)가 당시 정계의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민씨 집안의 집사로 일하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집사가 되었다.
민씨 집안 내에서 시중을 들며 민비의 편지 등을 전달하기 위해 궁중에 출입하게 된다.
그 행동이 민첩하여 민비 전하에게 크게 총애를 받게 되고 궁중의 대전별감(大殿別監)을 명받아(봉찬의 취급을 받음,
또는 전령으로 사용함) 약방 관기의 남편(포주)이 된다.
통상적으로 대전별감은 기생 남편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하여 궁중의 여러 대신 집안들에 출입하게 되었고, 많은 대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양반이 되어 관리(官吏)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먼저 관리인 민영익에게 간청하여 무과에 응시, 이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에 임명되었고, 훈련주보(訓練主簿), 훈련판관(訓練判官), 훈련첨정(訓練僉正), 도총부도사(都總府都事),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판임관)을 역임하였다.
먼저 양반이 되는 방법을 연구하여 송씨 성을 가진 대가(大家)를 찾아가 양자가 되기로 하였다.
당시 회덕군의 은진(恩津) 송씨는 송시열 선생의 후예로서 이조에 유림의 종가로 그 이름을 떨친 명문이라는 것을 알고 이 송씨 집안에 양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열심히 지성을 들이며 노력한 결과, 송씨 집안은 크게 감동하였다.
송씨 집안은 회의를 열어 선대 중 자손이 없는 일가에 후사로서 송병준을 양자로 할 것을 정하였다.
그 후계자가 없는 일가는 우암 송시열 씨의 종증손으로 유학자의 명문이지만 예절을 논함에 일반인들과 의견을 달리
하여 조정의 죄를 사서 사약을 받은 송치중(宋致中)의 집안이었다.
이 사람은 손자까지 있었는데 증손자 단계에서 후계자가 끊길 상황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연유로 사람들은 이 집안의 후계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는데 송병준은 그 선택을 받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송병준은 오랜 세월의 희망을 달성하여 양반이 되어 관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출신이 명문 집안의 선비가 아니기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아 잘 알려진 명문 선비들과는 교유를 가질 수 없게
되자, 권세파인 고관대작에 도저히 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분개하면서도 시기가 올 것을 기다렸다.
때는 1876년 구로다(黑田) 대사를 부산에서 환영하는 접반원의 수행원이 되어 처음으로 선진국 일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매우 기뻐했다.
후에 오쿠라 요시하치로(大倉喜八郞) 씨를 알게 되어 장사용(상업) 건물을 송병준 명의로 부산에 신설하였다.
이 사업은 성공하지 못하고 끝나지만 여하튼 일본을 통해 장래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착안하게 되었고 이것은 당시의 정황 속에서는 선견지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대원군과 민비가 충돌한 것) 때 폭도들 때문에 재산이 불타게 되었다.
민영익의 문객으로 민비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잠시 난을 피해 생명을 보전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 부인들 및 그 자녀들의 피난을 도와 자신의 자택에 숨겨주고 안전하게 공사관의 도움을 요청하여 인천에서 일본으로 보내주었다.
일본인은 도미다(富田)라 칭하던 사람으로 일본으로 돌아간 후 송병준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시의 은혜에 사례를 베풀고 싶다고 하여 조선을 떠나 일본에 이주할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관계로 인연이 되어 도미다를 의지하여 도일(渡日)하여 크게 천하의 대세를 깨닫고 망명 중의 김옥균 씨를 찾아가 고견을 들었다.
다음해 1886년 망명자 밀통 혐의로 검거되는데 민씨 집안의 세력이 회복되던 시기여서 그 도움으로 바로 석방되어 중추도사(中樞都事), 친군후영대관(親軍後營隊官, 지금의 중위에 해당)을 명받았다.
이것은 고 민영환 씨 집안의 집사로 있던 관계로 민영환 씨가 알선했다.
그 이전에 민영익 씨가 갑신정변 때에 상해로 도망하였을 때 민씨 가족은 전부 민영환 씨 권세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에 민영익 집안을 떠나 민영환 집안의 집사로 옮겼다.
이때부터 궁중에 출입하여 민비의 심부름꾼으로서 상해의 민영익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민비의 총애가 이전의 배에 달하였고, 1890년 양지(陽智) 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 후 청렴결백하게 백성을 다스리고 선정(善政)을 베풀자 다음해 친군장위영령관(親軍壯衛營領館, 오늘날의 대위에
해당)에 올랐다.
1894년 청일전쟁 전 동학도의 난 때에 혁명 목적을 가지고 동학도에 침입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행동은 관리로서 또는 민비 일가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신용을 잃고 실패로 끝났다.
청일전쟁 후에는 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금전이 없으면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개성의 인삼 종자를 다량으로 밀매하여 1895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스로 노다 헤지로(野田平治郞)라 칭하며 인삼을 재배하기에 알맞은 토지를 선택하기 위해 일본 각지를 돌아 북해도, 대만에 이르기까지 족적을 남겼다.
이때 박영효 씨의 소개로 일본 제야의 명사(名士)를 방문하여 야마구치(山口)현 아무(阿武)군 하기마치(萩町)에 양잠
염색 연습소를 창립하여 조선인 남녀학생을 초청하여 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는 일본 토지에는 인삼 재배가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목적을 양잠(養蠶)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 희망은 원대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후에 오구라(大倉) 남작의 소개를 받아 데라우치 백작(당시 육군 대신)을 알게 되어 고등통역으로
병참감(兵站監) 오타니(大谷) 소장에게 소속되어 통역을 담당하면서 어용상인으로서 술집을 경영하며 무한한 야심을
품고 시세 변화를 관망했다.
당시의 경성수비대 사령관 사이토(齋藤力三郞)와 손을 잡고 친일파 조선인을 조직하여 일진회를 조직하려 하였다.
스스로가 일진회에 입회하여 다수단체를 장악하여 실세인 동학도 일파의 수장인 이용구와 암묵적 계약을 하고 거짓
사상을 선전하여 민심 규합에 노력하였는데 몇 개월 만에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공사관 방면에 크게 반대했던 것도 이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 발기회를 성대하게 용산의 평원정(平遠亭)에서 개최했다.
당시 사이토 대좌의 목적은 일진회를 정치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의철도를 신속하게 개통하여 군 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 인부(人夫)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계획은 훌륭하게 성공하여 경의철도는 예상 외로 빨리 건설되었다.
그 공은 야마네(山根) 씨의 월미도가교 설립에 비할 정도였다.
이것은 일진회 회원들도 마지막까지 알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그 후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그 단체는 점점 더 확대되어 마침내 송병준 씨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 단체로 변화하여 조선의 제반 시설에 관여하고 정부 대신을 탄핵할 뿐만 아니라 세력을 떨치고 혹은 현관(顯官)의 사택을 포위하기도 하고 혹은 궁성까지 진출하여 시위운동을 하는 등 여러 종류의 불온한 행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당시의 조선정부는 크게 공포를 느껴 그 처치를 위해 하세카와(長谷川) 군사령관에게 간청하여 그 진무(鎭撫)를 의뢰하기에 이른다.
1908년 한 사건으로 하세카와 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경성헌병대에 구금당했으나 수일 후 이토 통감의 명령으로
고야마다(小山田) 헌병대 독단(獨斷)으로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헌병대장은 바로 근신에 처해지고 마침내는 정직(停職) 처분을 받았다.
그 이후 송병준은 군사령부와는 연을 끊고 통감부의 어용이 되었다.
1907년 박제순 내각이 경질되고 이완용 내각이 조직되자 일약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묘정변에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앞장서서 단행하여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고,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평양흥업소 총재를 명받았다.
황태자 전하(이왕 세자) 일본 유학 중에 동경에 따라가 전하를 모시고 종1품에 승급하였다.
1908년 6월 내무대신으로 전직하고, 1909년 1월에 이왕 전하의 서남지방 순행에 즈음하여 열차 내에서 시종무관(侍從武官) 어담(魚潭)과 논쟁 끝에 충돌하여 격투를 벌였는데 이 일이 후세에 공개적으로 알려져 여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송병준은 내부대신을 사직하고 왕세자 전하의 내부 명으로 여론을 피하기 위해 한성(漢城) 정계를 떠나 동경으로 건너가고, 시종무관 어담은 수개월간 징계성 휴직을 당하였다.
같은 해 8월 가회동(嘉會洞) 취운정(翠雲亭)의 야회에서 오쿠보(大久保) 사령관, 총리대신 이완용 씨에게 송병준 씨의 내각 등용을 의뢰하여 바로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이토 통감이 군부대신인 이병무(李秉武)에게 의뢰하여 어담은 군부부(軍部附)에 복귀시키고 송병준씨는 계속해서 동경에 있게 했다.
1910년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귀국하자 일진회를 활용하여 병합선언을 하였으며, 합방 후에 이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왕세자 전하의 결혼 이후 이전의 이사(貮師)9) 관계에 의해 작위를 올려 백작이 되었고, 이후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언제나 이완용 후작과 세력을 경쟁했고, 이왕직에 대해서는 왕가의 외척과 결탁하여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
1919년 만세소요 후에는 내선차별철폐운동에 크게 열중하여 자신 스스로를 정무총감이 되게 하려는 운동을 하며 도쿄에 건너가 중앙정계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불행하게도 공을 이루지 못하고 1925년 봄에 남산정(南山町) 자택에서 병사했다.
학문을 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상식도 있었고 품위도 있으며 용모가 청수하여 언뜻 보아 귀공자다운 면모가 있었다.
그 시비(是非)는 잠시 제쳐두고 여하튼 이조 말의 한 명의 괴걸(怪傑)이라 불렸다.
자산은 백만 원 이상 소지하고 있으며 각종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정치운동에 경도하여 다액의 부채가 있다고 한다. 아들은 중추원 참의 송종헌(宋鐘憲)으로 작위를 승계했다.
9) 조선시대 세자시강원의 종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찬성이 겸하였다. 1392년(태조 1) 7월에 반포된 관제에는 없었으나, 태조 4년 3월의 기사에 ‘세자 이사’라는 관직이 나온다.
이왕직(李王職) 사무관(왕세자부), 정4위 훈2등 백작 고희경(高羲敬) (본관 제주,중인)씨는 경성 출생으로 고(故) 자작 고영희(高永喜) 씨의 아들이다. 1892년 관립육영공원(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894년 가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1895년 외무아문주사(外務衙門主事)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고영희 씨가 일본전권공사로 근무할 때 수행하여 동경에서 약 반년간 주재하다가 귀국하여 영어학교교관이 되었다.
1897년 궁내부 주사에 전직하여 궁내부의 시종으로 승진하였으며, 또한 궁내부 참서관 겸 예식관(禮式官)이 되었다.
1899년에 정3품에 오르고, 궁내부 예식과장에 임명되었다.
영국특파대사 의양군(義陽郡) 이재각 후작(李載覺侯)의 수행원으로 런던에 갔었고, 귀국 후에는 이태왕 전하의 신임을 크게 얻어 이왕세자 전하(당시 영친왕)의 영어 교사로 근무하며 궁중 외교의 어전 통역을 전임하였다.
구미의 여러 나라에 대한 외교문서 및 전보 등의 기밀을 맡아 이태왕 전하와 구미 여러 나라와의 비밀외교는 거의 고희경 씨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이처럼 신임이 높아져 1902년에 정2품으로 승진해서 예식원부경(禮式院副卿)이 되고 칙임관에 특진하였다.
1904년 가의(嘉義)에 오르고 예식원경에 올랐다.
당시에는 배일파로 지목을 받았지만 1906년 대사 이재완 후작을 수행하여 동경에 건너가 훈3등 욱일장을 받고 심기일전하였고 나아가 미국당에 가담하여 왕실 보호를 한다며 미국함대의 육군부대를 상륙시켜 덕수궁의 뒷문 주위에 주둔시켰다. 표
면적으로는 공사관 보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강석호(姜錫鎬)와 공모하여 미국공사 알렌과 교섭한 결과였다고 한다. 이때 이태왕 전하의 내탕금(內帑金) 과반을 소진시켰다고 전한다.
이토 통감은 씨의 호탕한 기질과 유창한 영어 실력을 보고 고희경 씨에게 통역을 맡겼다.
1907년 아버지 고영희 씨가 이완용 내각에 입각한 후 집안 번영은 말할 것도 없고 엄비의 신임은 점점 두터워져 왕세자 전하 곁의 특수한 일을 맡겼다. 이태왕 전하의 양위 후 영친왕이 황태자에 오르자 동궁대부의 자리로 특진하여 정2품에 올랐다.
그리고 왕세자 전하의 일본 유학 중 함께 동경에 주재하여 훈2등 욱일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관제개혁으로 이왕직칙임사무관이 되었고 그 후에도 여전히 왕세자의 곁에서 함께 동경에 주재하였고 친아버지는 자작을 수여받았다.
아버지 고영희 씨가 병사하여 고희경 씨가 작위를 세습하였고, 1920년 왕세자 전하의 결혼식에서 종래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히 백작으로 승진하였다.
고희경 씨의 사람됨은 조용하고 단아하며, 외교술에 가장 뛰어나 일본어는 물론 영어에 이르기까지 유창하며, 시세의
추이를 따라가는 것도 기민하고 노력가이며 아부하는것도 교묘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씨의 특유 기능을 고씨 집안의 유전적 특질이라고도 말하는데, 중인계급이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거역하지 말라는 가정교육을 받아 훈련되었기 때문이라며 질투하기도 했다.
많은 세력가에게 아부하고 세력이 없는 자들을 경멸하는 것이 있어서 동료 간의 비평은 좋지 않았다.
옛날에는 고 조동윤(趙東潤)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으며 현재에도 동료들끼리 의사소통이 없다. 조동윤이 왕세자의 곁에 있을 때 오랫동안 동경에 주재하며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 공에 상을 주지 않은 것은 씨의 시기심(猜忌
心)과 중상에 의한 것이라는 세간의 평이 있다. 자산은 수백만 원 이상이라고 하며 자식은 다섯 명이 있는데 모두 상당한 인격자들이라고 한다.
종4위 자작 이완용(李完鎔) (본관 완산, 전주, 노론, 서인)
씨는 경기도 포천군 출생으로 덕안군(德安君) 이재덕(李載德)의 양자이며, 철종 대왕 본가의 근친(近親)에 해당하여
특별임용령에 의하여 조상의 힘으로 임관하여 참봉, 군수,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 비서관, 중추원의관, 내부회계국장, 부윤, 종정원경, 돈녕원사(敦寧院事), 태복사장(太僕司長) 등을 거쳐 1907년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에 임명되어 정2품으로 특서(特敍)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정치상의 야심은 조금도 없고 단지 이왕가의 친척으로서 통례적인 명예직을 갖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왕가의 친척이라는 관계로 자작을 수여받았다.
원래 가계(家系)는 가난했는데 은사(恩賜) 공채(公債)도 사업 실패로 인해 탕진하여 지금은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작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기 어려운 경지에 빠졌다고 한다.
인간적으로는 어느 한쪽에 빠지지 않고 당도 없으며 야심이 없는 선인(善人)이라 한다.
50세가 되어도 건강은 젊은이 못지않다고 한다.
종4위 자작 이기용(李埼鎔) (본관 전주, 노론)
씨는 경성 출생으로 완림군(完林君) 이재원(李載元)의 아들이며 대원군의 이종사촌에 해당한다.
천성이 영리하나 일찍부터 엄한 아버지와 헤어져 규율적인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귀공자였기 때문에 학덕이 동시에 뛰어났다.
1906 년 사립 돈명의숙(敦明義塾)에 들어간 후에 왕세자 전하의 학우로 수학원에 전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어에 정통하였으나 연령이 어린 관계상 관의 경력에 영달(榮達)하지는 못하였다.
참봉시종 등을 거쳐 1910년 정3품에 오르고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이왕가의 친척이라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아들은 적당한 스승과 친구로 선도하여 장래에 기대가 되는 청년귀족이 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기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과 자작에 대한 공채를 전부 부정하게 탕진했다.
현재는 막대한 채무를 가지고 있는데 이왕직의 보조에 의해 겨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조상의 제사의례를 행한
다는 보종당(保宗黨)의 일파가 되었다.
천성이 영리하지만 고 송병준 등과 결탁하여 채무를 이왕직에게 정리하라는 운동을 맹렬히 벌였는데 아직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이왕직에게는 하나의 걱정거리로 존재한다.
정4위 훈1등 자작 박제순(朴齊純) (본관 반남, 사망, 노론)
씨는 경기도 용인군에서 출생했고 문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는 선비라고 세상에 알려졌다.
박영효 씨와 같은 집안으로 박씨 집안의 유학자 계통을 이어받은 사림의 일파이다.
씨는 한학에 소양이 있었고 또한 중국어에 정통해 있어서 중국의 외교관 직위에 참여했다.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로 명령받고, 천진종사관, 홍문관부교리, 사헌부장령, 천진독리통상사무, 공조참의,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호조참의, 참의내무부사, 인천부사 겸 감리통상사무 등을 거쳐 1889년 협판내무부사 종2품에 올라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5개국의 전권공사를 임명받지만 아직 부임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각 부의 참판, 목사, 부사, 감사(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청일전쟁 후에 씨는 어윤중씨의 추천으로 경성으로 소환되었다. 1894년 외부협판에 임명되어 김홍집 내각 와해 후 일시적으로 세력을 잃는데 특유의 원만함에 의해 시세에 순응하여
1898년 외부협판에 재임용되고 그 후 대신에 올랐다.
그 후에 농상공부로 옮기고 다시 외부대신으로 복귀하였다가 육군참장, 의정부찬정 등에 임명되었다.
1901년 칙명을 받아 일본의 추계 대연습에 참관하고 특히 폐하를 알현 하였으며 후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이것은 당시 경성주재 공사관부 무관 우사카와(宇佐川) 대좌(大佐)의 알선에 의해 조선무관을 일본의 육군연습에 참관시키는 것으로 그 효시가 되었다.
이것으로 한일 관계는 상당이 양호해졌고 나중에 외무대신으로 복직하여 의정서리를 겸직하였다가 1902년 내각에서
물러나 청국공사로 임명되어 북경에 부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소환되어 외부대신을 맡게 되었다.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육군부장 등을 역임하여 세번 외부대신을 역임하고 러일평화조약 후 이토 대사와 을사늑약(한일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한국 외교권은 일본 정부에게 위임되었다.
소위 5조약이라는 것이다.
당시 참정대신 신분으로 맹렬한 반대를 한 사람은 한규설(韓圭卨) 한 명뿐이라고 한다.
원래 이 회의가 공사관에서 열렸는데 심야까지 결론을 얻지 못하여 이토 대사는 하야시 공사를 동반하여 하세카와 군사령관을 대동하고 기병, 헌병, 경찰관 등의 옹호 아래 한국의 왕궁에 들어가 어전회의 형식을 빌려 박제순 외부대신의
일언 하에 조선의 운명을 정해 버리게 되었다.
그 후 바로 한규설 내각을 해체하고 스스로 참정대신이 되어 내부대신 이지용 이하를 내각으로 조직하여 1906년 훈1등 팔괘장을 수여받고 그 후 궁내대신을 겸임하여 이태왕 전하의 양위문제를 토론할 즈음에 몰래 이태왕 전하에게 밀고하고 이토 통감에게는 자신은 이태왕 전하에게 특별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양위를 압박하는 것을 할 수가 없어 이완용을 추천하여 중추원 고문으로 은퇴시켰다.
양위 후 1909년에 송병준 씨의 사직 후 다시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입각한다.
따라서 한일합방의 대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공이 있음을 인정받아 자작을 수여받았다.
1916 년 화동(花洞)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박부양(朴富陽)이 1916년 9월 작위를 세습하고 현재 5위에 이르고 있다.
자산은 30, 40만 원 내외라고 한다.
정4위 훈1등 자작 조중응(趙重應) (본관 양주(楊洲), 사망, 소론)
씨는 경성에서 태어난 조선의 소론파 명문의 후예로, 친아버지는 조완희(趙完熙)라 칭하며 양주군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한학의 선생으로 교편을 잡으며 참봉이라는 판임관으로 살았다.
조중응 씨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파의 결탁인(結託人)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했다.
당파관계상 항상 노론의 압박을 받는 것에 분개하여 기회를 얻으면 복수하려는 생각으로 자신의 집안을 상당한 견식이 있다고 과장하고 허위의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마키야마(牧山) 씨가 편찬한 '조선신사명감'에서 조중응에 대해 그럴듯하게 큰 인물임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1894년 김홍집 내각 성립에 즈음하여 김홍집 씨도 소론파였기 때문에 같은 파중의 유력한 청년의 한 사람을 내세우는 의미에서 조중응을 일본에 유람 보냈다.
귀국 후에 외무아문참의에 임명되어 1895년 외부교섭국장, 안의군수, 법부형사국장, 특별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김홍집 내각이 와해함과 동시에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이 당시의 망명도 한국 조정의 아무런 연락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길준, 조희연(趙羲淵) 씨 등과 교섭하여 스스로를 망명자로 칭하며 중간에서 여러 종류의 운동을 실시한 결과 유, 조, 박 등과 마찬가지로 외무성의 보조를 받았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의 자작도 그 지반을 견고히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일본에 망명 중에는 고마바(駒場)
농학교에서 학원외부생으로서 강습을 받았고 또 외국어학교의 조선어교사가 되었다. 일본어는 부인 광강자(光岡子)로
부터 습득하고 간단한 말은 이해했다.
러일전쟁 후 1906년에 아무런 소식도 없이 조선에 건너와 한성 정계의 흑막에 참여하여 시국 구제책을 이태왕 전하에게 몰래 진언하고 박영효 씨와 연락을 취해 한국 정부의 고관다운 운동을 하였고, 조선 양반계의 유림을 망라하여 대동학원을 발기하는 등 여러 종류의 획책을 세우고 후에 이시쓰카 에이조(石塚英蔵) 씨의 소개로 처음으로 통감부 촉탁 농사조사원의 직분을 얻었다.
이토 통감에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특기인 달변을 가지고 통감과 친교를 맺는 것에 성공하였다.
1907년 이완용 내각 조직 때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의 추천으로 법부대신이 되고 후에 법부 및 군부(軍部)를 그만두고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단행하여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1908년에 농상공부대신에 전임되고 1910년 한국대훈위이화대수장을 수여받고 한일합방 때에는 가장 분주한 공로로 자작을 수여받았다.
당시 이완용 총리대신은 해를 당하여 병상에 누워 오로지 치료에 전념했다.
아직 쾌유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거도 부자유스러워서 조중응 씨가 이를 대신하여 교섭을 실시했다.
통감부와 이완용 씨의 중요 임무는 조중응 씨가 왕래하며 한일합방의 대사를 수행했다.
합방 후에는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민간사업으로서 사회의 유지를 망라하여 단체적 민중의 힘집결을 역설하며 1918년과 1919년에 배일을 민간에게 암시하고 고취시켰다.
1919년 만세소요 후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내지사관학교 출신 육군 보병 중위 조대호(趙大鎬)는 그 아들로 1919년 9월 작위를 세습하였다.
현재 정5위이며, 자산은 50, 60만원이 있는데 부인인 광강자(光岡子)10)가 과반을 가지고 동경으로 돌아갔고 그 나머지는 조대호가 방탕하여 탕진했다고 한다.
중추원 고문, 정3위 훈1등 자작 민병석(閔丙奭) (본관 기흥, 노론, 서인)
씨는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태어난 민양식(閔兩植)의 양자이다. 문과 급제 출신자로 그의 관직 경력은 실로 경탄할
만하다.
민비전하의 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경력을 갖게 된 것은 천성이 온화하고 처세도 원만하며 사람을 받아들이는 아량도 있었기 때문이다.
187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883년에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고, 1881년에 규장각직각이 되었다.
임오군란에 민비가 난을 피해 충주에 은거할 때 민씨 집안의 일파가 결집하여 모의한 결과 중국에 특사(어윤중 씨)를
파견하여 이홍장을 움직여 대원군을 보정부에 구금시키고 민비는 황후에 복위시켜 민씨 집안의 번영은 예전보다 더했다.
이때 민병석 씨의 숙부 민응식 씨는 오로지 복위운동의 수훈이 있고 민병석 씨 또한 공로가 있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그 후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정계에 동요를 일으켰는데, 민씨 집안과 결합하여 이 난국을 견디어, 1885년에 민영익(민비의 조카) 내각에 들어가 호조참판(대장차관)이 되었다.
대원군의 일파와 수많은 획책을 세워 대원군 특별사면 운동을 벌여 특사(조영하, 조동윤 남작의 생부로 1품보국이 됨)를 중국에 파견하여 이홍장을 움직여 대원군이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 민병석 씨는 약 2년간 근신하여 칩거하였다.
1888년 예조참판이 되어 규장각직제학, 동지돈녕, 강화군수, 육영공원변리(육영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1891년에
정2품 자헌(資憲)이 되었고, 1892년 의금부사를 겸하고 1893 년에 평안감사(평안도지사)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청나라 장수 좌복위(佐復尉), 마옥곤(馬玉崑)을 도왔지만 평양이 점령됨과 동시에 대동강의 강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경성으로 보내어졌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이에 죄를 묻지 않고 민씨 집안을 관대히 다루었다. 1895년 민비사건이 일어나자 민씨 집안은 반감이 커졌고 마침내는 이태왕 전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사건을 일으켰다.
10) 일본인 부인 미쯔오카(光岡多汁)를 말함.
민병석 씨는 민씨 집안과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이 거사에 가담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궁내부특진관, 경연원시강, 시종원경, 의정부참찬, 홍문관학사, 정헌, 파리박람회특파원, 농상공부서리대신 등을 거쳐 1898년 농상공부대신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궁내대신으로 전직하고 후에 군부대신을 겸직하고 겸직이 풀린 이후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학부대신, 전권공사, 법제교정소심정관, 내부대신,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하였고 일시 내부대신을 사직했다가 1900년에 다시 입각하여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철도원총재, 원수부검사국총장, 헌병대사령관을 겸임하고 그로부터 군부대신, 탁지부대신, 서리의정, 표훈원총재, 의정부찬정,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러일전쟁 직후 1905년 일본국 시찰을 명받아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경성으로 돌아와 시찰 중의 칙명을 받아 이토 공작을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는 운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뒷이야기가 있다. 즉 일본과 조선의 책사가 서로 꾀를 내어 이태왕 전하의 친서를 이토 공작에게 전달하였다.
민병석 씨는 표면적으로는 시찰명령이었지만, 그 실체는 밀사였다.
그것은 오히려 이토 공작이 스스로 활동한 것이고 이태왕 전하는 피동이었다.
즉 당시 일본 정계는 조선 통감을 문관으로 바꾸려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지만 전승을 내세우는 군벌을 압박하기 위한 술책으로 이토 공작이 조선 황실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표명하기 위하여 친서를 공개한 것이라고 한다.
이 친서도 효력이 미약하여 이강공 전하 개선관병식(凱旋觀兵式) 배관(拜觀)의 명을 받아 도쿄에 도항하여 이태왕 전하의 간청을 메이지 일본국왕에게 알리고, 조선통감의 지위를 안전하게 하려는 몇 가지의 수단을 사용했다. 이런 종류의 밀서를 참모총장 고다마(兒玉) 대장에게 송부하여 군벌의 호의를 청했고 고다마 대장은 이것을 공개하여 외무대신에게 보내게 되었다.
이것으로 이태왕 전하와 이토 공작과의 사이는 거리가 생기고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민병석 씨는 이때 원수부 검사국총장으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건물에 화재가 일어나 그것에 책임을 지고 전라도 고군산(古郡山)에
잠시 유배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유배가 풀리고 육군부장에 임명되고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및 내대신(內大臣), 제실제도국총재(帝室制度局總裁), 궁내부특진관, 비서감경에 순차로 임명되었다.
1907년 10월 대훈이화대수장을 수여받고 정1품 보국에 올랐고, 1908년 훈1등 서보장에 올랐다. 이완용 내각의 인사
이동에 의해 이윤용을 대신하여 궁내대신이 되었다.
1909년 친서 봉정을 위해 특사로 도일하여 일본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고 1910년 친서를 가지고 이토 공작의 국장에 참석하여 어명을 대신하여 도일하였다.
한일합방 당시에는 자작을 수여받고 관제 개혁에 의해 이왕직장관에 임명되어 봉직했는데 1919년 만세소요 때 갑자기 작위를 사직하고 마침내는 관직을 사직하였다.
장관직은 그 바람대로 통제되었지만 작위 반납은 부결되어 여전히 귀족의 자리는 보유하였다.
최근1925년에는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맡고 있다.
자산은 50, 60만 원 이내라고 한다.
종4위 자작 이용직(李容稙) (본관 한산, 노론, 서인, 작위를 반납함)
씨는 경성 출생으로 조선 명문의 후예이다. 매우 과묵한 성격이어서 쉽사리 그 심중을 터놓지 않는다.
유학자로 가장하였지만 실은 이름을 매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과 출신으로 구한국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 씨의 사위이다. 조병세 씨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될 때 순직한 대신이다.
이 순직(殉職)은 이용직 씨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관력을 살펴보면 1875년 권지승문원부정자를 명받고 1877년 시강원에 진출하여 어영랑청(御營郞廳), 용강현령,
시강원문학, 내무부참의, 병형이조참의(兵刑吏曹參議), 한성부소윤, 사헌부대사헌, 한성좌윤, 의주부윤, 춘천관찰사,
중추원의관, 학부협판, 의정부참찬, 궁내부특진관, 태의원경 등에 역임하였다.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 씨가 엄비의 황후승계운동을 일으킨 동지로 연명하여 상소할 때 당시의 황태자 전하(지금의
이왕 전하)의 지위를 걱정해서 재야의 식자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용직 씨는 숙고하여 장래에 황태자 보호의 당파에 속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윤용선 의정대신의 무능과 부재를 탄핵하여 상소하였다.
이것은 민씨 집안 일파와 고 이용익과의 선동을 받아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궁정의 의결에 의해 형식상 황해도 철도(鐵島)에 유배 되었다.
이것은 조정의 말단에 있는 자가 감히 정부백관의 수장인 일국의 의정대신을 탄핵한 것은 규정에 어긋난 것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체면상의 장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씨의 상용수단이었다.
얼마 후 유배가 해지되어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903년 정1품에 오르고 다음해 학부대신에 올랐으나 바로 사퇴하고 전라도 관찰사, 장례원경 등을 거쳐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1908년 이재곤(李載崑) 씨 대신에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이완용 후작의 부인과 이용직 자작의 부인이 사촌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내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조소하여, 아버지 조병세 의정에게는 국가를 위해 순직할 것을 권유했지만 자신은 이완용 내각에 입각하여 한일합방 당시의 업적을 인정받아 이토 공작과 동반하여 김윤식 씨와 함께 동경을 유람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까지 이토 공작은 이용직 씨를 조선의 유학계의 중진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가쓰라(桂) 내각이 성립하여 조선통감부의 관제개혁 결과 이토 통감은 경질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조선의 원로 김윤식 이하 유림의 중진인 이용직 씨를 보내어 이토 통감의 유임운동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이 운동도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내 통감이 되고 이리하여 1910년 8월 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임명받았다.
후에 경학원부제학에 전직하였으나 1919년 만세소요운동 시 김윤식과 함께 조선독립 선언서를 발부하며 갑자기 배일의 기치를 올려 치안법에 의해 형을 받아 자작을 빼앗기고 형은 집행유예가 되었다.
실로 늙은 여우처럼 변화에 민감한 요물이라고 일컬어진다.
자산은 20, 30만 원 내외라고 한다.
정4위 자작 김윤식(金允植) (본관 청풍, 사망, 작위반환)
씨는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의 저명한 명문 집안으로 문과 진사급제 출신이다.
경응(慶應) 원년에 문과홍문관부수선, 진하특선교관(陳賀特宣敎官), 순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1881년 영선사(領選使)에 임명되어 학생과 장인들을 인솔하여 텐진(天津)에 건너가 공예미술에 관해 견학하고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다.
그 후 강화유수가 되고 기기국총판(機器國總辦)에 임명되었다. 1883년 특명을 가지고 정2품에 올랐으며, 다음해 공조판서,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어서 독판교섭(督辦交涉) 통상사무(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며, 1885년에는 전권대신이 되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광주유수(廣州留守)를 거쳤으나.
1887년에 참소를 당해 면천군(沔川郡)에 유배되었다.
1893년 특사를 받고 1894년에 종1품에 오르고 외무아문(外務衙門) 대사로서 김홍집 내각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이태왕 전하가 러시아국 공사관으로 파천한 것과 동시에 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과
함께 죽음은 피했지만 앞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것은 청일전쟁 후 김홍집 내각 성립 당시에 대원군은 김홍집과 함께 조선의 왕위를 이준공(李埈公)에게 맡기려고
계획을 꾸몄는데 어윤중(魚允中), 김윤식 등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고, 당시의 내각 총서 권중현(權重顯, 권재형
(權在衡)이라고도 함)은 이것을 이태왕 전하에게 밀고하여 이태왕 전하는 어, 김 두 대신은 신용할 수 있는 자들이라
하여 굳게 믿었는데 민비사변에 즈음하여 민비 국모 폐위 문서를 김윤식 씨가 작성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말해졌다.
어윤중씨는 사형에 처한다는 소식은 없었고 향리를 향해 길을 가던 중 경기도 용인군에서 인민들의 폭거에 의해 조난을 당하였다.
1901년 제주도에서 지도군(智島郡)으로 유배되어 18년을 보냈다.
1906년에 유배가 해제되어 경성으로 돌아오게 되어 제실제도국총재칙임 일등(帝室制度局總裁勅任一等)에 올랐고, 같은 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이 되었고, 1908년 4월 22일 중추원의장에 임명
되었다.
같은 해 7월 칙명을 받아 도일하여 이왕세자 전하에게 승인을 받아(이것이 이토 통감 유임운동) 귀경하여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국조보감편찬찬집관(國朝寶鑑編纂纂輯官) 겸 교정관(校正官)을 맡았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이후 조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맡고 그 후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임명되었지만 1919년 만세소요 때
이용직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서를 발부하여 하라(原) 내각 총리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치안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잃는
처분을 받았다. 80세 이상이라하여 자택에 감금시키는 형(刑)에 처했는데 그 와중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씨의 일생은 매우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근대에서 희유의 학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운양집(雲養集, 운양은 호이다)을 편찬하여 동경학사원(東京學士院)에서 수상하는 명문의 후예로서 학식이 있었고 덕망도 높았다.
정치가로서 만년에는 막을 내리고 왕년의 명성을 더럽히고 생을 마감했다.
가세는 빈곤했고 아들은 일찍 죽어서 양자가 집안을 상속해 간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고문, 정4위 훈1등 권중현(權重顯) (본관 안동)
씨는 충청도 영동군(永同郡)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소양이 있고 정부의 변화에 교묘하게 연동하여 세상에서 칭하기를
팔방미인이라 했다.
집안은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일찍 부터 재능을 갖고 있어 문필에 능하고 이를 가지고 세력을 다투었으며 총애를 받아, 김옥균, 박영효 등의 1884년 갑신정변 때에 부산 감리서 서기관이 되었다.
그 후에 일본인의 교섭이 빈번해져서 일본어는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일본의 사정에도 비교적 밝았다.
1898년 한국 정부의 명령을 받고 도일하여 체신국(遞信局) 사무를 시찰하고, 귀국 후에는 전보암호(電報暗號) 12권을 편집하고, 다음해 인천항(仁川港)방판통상사무(幇辦通常事務)에 임명되고, 같은 해 서리공사(署理公使)가 되어 동경에 주재하였다.
그러던 중 1892년에 오스트리아(당시 오지리국(墺地利國))과 수호통상항해 등 조약을 체결하고 다음해 1893년에 귀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후 김홍집 내각 때에 내각총서(內閣總書: 서기관)가 되고, 민비의 밀정으로서 정부의 행동을 은밀히 보고하여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일본공사관 및 김홍집 내각 행동의 탐사밀고 임무를 맡았던 인물은 이 권중현과 이하영(李夏榮) 두 사람뿐이며,
이것이 이 두 사람이 궁중의 신임을 얻은 주요 원인이다.
후에 내무부참의(內務部參議) 겸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原)에 임명되었는데 김홍집 내각의 와해 이후에는 군무아문협판(軍務衙門協辦), 육군참장(陸軍參將)이되었다.
그 후 법무협판 겸 고등재판소 판사를 맡았고, 1897년 칙명을 받아 일본의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귀국 후 한국 대군주(大君主) 폐하를 황제폐하로 존칭해야 한다고 상소하였기 때문에 재야의 선비를 모아 소청을 마련하였다.
이때 권중현 씨도 그 상소를 올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 공로로 1년 후 특령으로 정2품에 오르고 의정부참찬
(議政府參贊)에서 일약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에 승진하였다.
1899년 의정부찬정으로 옮긴 후 표훈원(表勳院)11) 창설로 첫 번째 부총재가 되었다.
이때까지는 모두 고 민영환 씨의 사랑을 받아서 이처럼 영달한 것이었다.
당시 민영환 씨는 구라파에서 귀국하여 이태왕 전하를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천궁(遷宮)시키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며 개혁을 도모할 때 마침 부하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신임할 수 있는 부하로서 권중현을 등용하게
되었다.
그 후 권중현이 혼자 독립하여 만사를 민씨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민씨는 매우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후 농상공부대신, 법무대신, 의정부찬정 등에 역임하고 러일전쟁 당시 육군부장에 승진하여 일본군 위문사가 되어
수행원 조성근(趙性根), 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랴오량(遼陽), 뤼순(旅順)에 부임하여 훈1등 팔괘장(勳一等 八卦章)에 오르고, 그 후 군부대신,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1907년 5월 박제순 내각 사직으로 인해 그만두고 중추원 고문을
임명받았다.
칙명에 의해 일본박람회를 시찰하였다. 이
것은 이태왕 전하 양위문제를 이완용 내각에 양여하고 정계의 풍운을 피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귀국 후에는 군대 해산 때문에 육군부장을 사직하였으며,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고, 그 후 대세를 자각하고 향리 영동군에 은거하였는데 향리의 선비들은 접근은커녕 매국적이라고 매도하여 거주하기도 힘들어 다시 경성에 돌아왔다.
1919년 독립만세소요 때는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어 갑자기 작위를 반납하고 독립파로 기울어 자작 작위를 잃게 되었다. 현재 귀족 신분은 유지되어 있고 자산은 50, 60만 원 내외라고 한다.
11) 조선 말기에 훈장·기장·상여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
총독부 중추원 고문, 정4위 훈1등 자작 이하영(李夏榮)
씨는 경상도 경주군에서 출생하여 매우 비천한 신분에서 영달(榮達)을 이룬 행운아이다.
무학으로 언문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 부모를 떠나 양산군 통도사(通度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56년 후12) 다시 부산에 표류하여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인 상점의 점원이 되어 일본어를 배웠고 또한 서양인 ‘미스노블’ 부인의 하인(심부름꾼)이 되었다.
주방에서 요리사의 조수가 되었다가 점차 향상하여 요리사가 되어 영어를 배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스노블 부인이 폐하를 알현할 때 통역을 하여 궁중에 출입하게 되었고, 미스노블 부인의 추천에 의해 1886년 외부아문주사(外部衙門主事, 지금의 판임서기(判任書記))를 명받아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무위무관인 자는 궁중의 출입을 허락받지 못하므로 미스노블 부인 수행원이라는 명예직을 받게 된 것으로 외국인의
체면을 존중하여 주어진 이름이다.
이때까지는 한국 정부에서 이하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지 못했고, 당시 서양인은 지금의 조선은행의 뒤편의 달성위궁(達成尉宮)의 기지에 병원을 세워 오로지 자선을 베풀고 한편으로는 기독교 전도에 노력하고 있었다.
이씨는 천성이 영리하였기 때문에 서양부인을 맞이하여 앞날을 맡겼다.
부인도 또한 민비를 알현 할 때마다 관리에 등용해 주기를 열심히 진언했고 마침내 그 결과 민비 전하께서도 이를 허용하여 궁중과 서양부인의 연락을 위해 이하영을 활용하도록 하였다.
1887년에는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사헌부감(司憲府監), 전환국위원(典圜局委員), 주차미국공사관서기생을 거쳐
주차미국서리전권공사로 영전하여 미국에 부임하였다.
이 모든 것은 미국 부인들이 민비 전하에게 간청한 결과로 1890년 금의환향의 목적으로 경주 군수를 하려고 운동했지만, 경주군이 일등군(一等郡)이라는 것 때문에 허락받지 못하고 경남 웅천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전북 흥덕현감에 전직하여 1894년 청일전쟁 후에는 씨가 일본어에 정통하다는 것으로 외부의 주임주사가 되어
민비의 밀정으로 하나후사(花房) 공사 및 이노우에(井上) 공사 등에게 민비의 심부름꾼으로서 수없이 많은 교섭 임무를 맡아 공사관에 출입하고 궁중의 신임이 매우 높아져 정부대신을 능가하게 되었다.
1895년 궁내부 영선사장에 임명되어 일본공사관 및 러시아공사관에 궁중의 사신으로 누누이 출입하여 정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비밀외교를 행하게 되었고 김홍집 내각은 이를 매우 우려하였지만 민비 전하의 신용이 너무 깊어서 방책이 없었다고 한다.
12) 필자가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김홍집 내각 와해에 즈음하여 궁내부 회계원장으로 옮기고 연이어 한성부 관찰사가 되어 이태왕 전하께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그 공로가 많음을 인정받아 1896년 일본주차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망명자와 일본유학생의 행동을 조사, 밀고하였다.
1897년에 영조(英照) 황태후(皇太后) 폐하 장례식에 특명대사로 참석하였다가 그 덕분으로 일본 황실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정2품에 특진하고 중추원부의장이 되었고, 그 이후 장례원경에 전직하고 후에 다시 중추원의장에 승진하였다. 후에 의정부찬정, 일본국전권대사가 되고 1899년 정헌(正憲)에 오르고, 1903년에 궁내부특진관,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는 배일자의 거두로서, 항상 일본에 망명한 여러 유학생을 일본 정부와 교섭하여 조선에 귀환시켜 형을 집행할 것을 주장하여 이태왕 전하를 기만한 불충스러운 악한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관직을 탐하게 되고 무학무지임에도 불구하고 실로 강첨무비(剛瞻無比)의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 후 통감부 고문 미국인 스티븐 씨의 추천으로 외부대신에 임명되고, 1905년 다시 훈1등 팔괘장을 수여받고 외교권을 일본에 양여할 것을 예기하여 법부대신으로 옮겨 박제순 내각 경질과 함께 재야로 물러났다.
이태왕 전하의 양위 후 중추원고문에 임명되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이때 도덕상 용서받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하영 씨가 빈천한 시절 결혼한 처와 그 적자를 이유 없이 폐하고 첩과 서자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이 때문에 실로 2년 여의 재판을 하여 부도덕한 재판을 거쳐 그 비열한 목적을 달성하였다.
즉 조선귀족령에 의해 상속할 아들을 궁내성에 신고할 때 애첩의 아들 이규원(李圭元)을 아들로 신고 하여서 문제가
되었다.
아들 이규삼(李奎三)으로부터 아버지에게 소송을 건 일이 발생하고 이 사건에 대해서는 사법당국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하영이 승소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하영 씨가 이전에 일본 공사 때에 그 후첩을 정실부인으로 사칭하여
황후폐하를 배알하게 하여 그 이후로 식사 때 동석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어서 부당하면서도 이것을 증거로 하여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이하영을 비웃는다고 한다.
자산은 백만 원 이상 있다고 하는데 계승자 이규원 씨가 인천에서 현미교환(玄米相場) 장사에 실패하여 현재 많은 빚이 있다고 한다. 현재 총독부의 중추원(친임대우(親任待遇)) 고문이다.
종4위 훈1등 자작 이근택(李根澤) (조선 무가(武家), 노론, 서인, 사망)
씨는 충청도 충주 출생으로,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 이민승(李敏承) 씨의 둘째 아들이다.
아들이 다섯 명인데 그 중 대신에 오른 것은 세 명이며 나머지 두 명도 칙임관 이상의 고위관직을 역임하는 등 한 가문의 번영이 요즘 보기 드문 집안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원래 무가의 명문의 후예로 구한국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씨는 이근택 씨의 숙부에 해당하며 성격이 영리하여 어릴 때부터 권모술수에 뛰어났는데 그 수완이 악랄하여 자신의 세력 확대를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령 그 일이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여도 그것을 돌보지 않는 등 참으로 부도덕하기 그지없는 탐관오리라는 세평을 받았다.
임오군란(1877년) 때에 민비가 난을 피해 충주군(忠州郡) 안교영(安敎榮)의 자택에서 칩거 중일 때 집 앞에 흐르는 강에서 낚시를 하며 시세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에 이근택이 나타났다.
이근택은 당시 20세 전후의 청년이었는데 민비라는 것을 모르고 매일 낚시에 따라다니며 도와주어 친절하게 대하자
민비의 마음에 크게 들어 하루는 이근택에게 당신은 양반인가 하고 묻자, 씨는 경성사람인데 지금은 병이 있어 요양을 위해 이곳에 와 있다고 말하고 또한 신분 등에 대해 속임 없이 말하자 그 후부터는 민비의 총애가 점점 깊어졌다.
씨는 또한 그 부인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지 못하지만 단지 경성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더 친절하게 대하며 인연을 맺어 민비를 숙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때 민비 나이 34세로, 얼마 안 있어 대원군은 보정부로 보내지고 제물포(인천)조약이 체결되고 민비는 환궁하였다.
씨도 함께 상경하여 1883년 12월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후에 희천군수(熙川郡守), 길주목사(吉州牧使), 당상선전관(堂上宣傳官), 무승지, 충청수사(忠淸水使), 총어병방(摠禦兵房), 한성우윤(漢城右尹), 병조참판,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중에도 수많은 죄과가 있어 파면이나 휴직 등의 징계가 있었지만 그 숙부 한규설의 큰 형인 한규직(韓圭稷)(갑신정변 때 사망)이 크나큰 세력가로서 민비의 총애가 깊었기 때문에 항상 비호해서 큰 지장은 없었지만, 나중에 폭거가 심해져 많은 인민을 살상하고 금전을 탐하는 등 매직사건 등을 수차례 일으켜 마침내는 암찰소(暗察所)의 상계에 의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후에 유배가 풀려 귀경하였고 당시의 내각에서 이전에 발휘했던 수완을 발휘하여 잠시 영락정(永樂町)에서 목면사 등의 포목점을 경영하였다.
당시 조선의 양반으로서는 상법을 실천한다는 것이 전무한 시대여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변화의 태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1896년 김홍집 내각 와해와 함께 바로 친위대(親衛隊) 제3대대장이 되고 그 후에 한성판윤(漢城判尹), 함경북도 관찰사, 중추원의관 경부협변(警部協辨), 경부대신서리, 육군참장, 평리원재판장서리(平理院裁判長署理) 등을 거쳐 1902년 정2품에 오르고 뒤이어 의정부찬정, 경위총관(警衛總管)에 발탁되고, 원수부검사국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육군부장, 군부대신 등에 올랐다.
이것은 모두 이태왕 전하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악랄한 배일정책을 알려주고 친일당과 망명자 등 이전 일본인과 관계가 있었던 자들은 전부 잡아들여 고문하고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것이 많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씨는 엄비의 여관(女官)13) 시대부터 깊이 관련되어 형제의 인연을 맺었고 특히 영친왕(지금의 왕세자 전하)출생 후에는 엄비와 결탁하여 이태왕 전하의 재혼을 막고 종래 왕실의 외척인 민씨 집안의 일파에게 압박하여 엄비의 황후
승계운동을 주장하였는데 그 세력이 실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바로 사직하고 과천군(果川郡)에 은거하였다.
당시 공사관 소속 무관(武官) 이지치(伊地知)14) 대좌 및 보좌관 노즈(野津) 중좌는 이근택 씨를 데리고 와서 이용익(李容翊)과 함께 일본에 일정기간 거주하도록 명령하여 일본의 사정을 상세히 알게 하려고 이태왕 전하의 승낙을 받아 관사에 초빙하였는데 이용익 씨는 왔지만 이근택은 은거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용익 씨만 헌병보호 아래 도쿄로 행해 출발했다.
이때 이근택을 보내지 않은 원인은 이근택 씨가 당시의 공사관의 통역관 시오카와(塩川)와 암묵의 계약이 있었고 이것으로 알선된 결과 하기하라(萩原) 서기관을 움직여 반대를 주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공사관의 주장은 일본이 외국의 대관을 위압적으로 구인(拘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으로 군인파와 반목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일외교는 모두 무관(이지치 대좌, 노즈 중좌, 경성주재원 대좌, 경성수비대사령관 사이토(齋藤) 대좌 등)이 현저하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공사관 측의 질투를 사서 상호간에 반목한 결과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더욱이 풍문에 의하면 이근택과 시오카와 사이에는 돈으로 연결된 관계가 있다는 세평이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시오카와 통역관은 파직되고 그 후 하세카와 군사령관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근택은 일본유학생 사관학교출신인 사람들과 결탁하여 윤치성(尹致晠), 이갑(李甲), 유동렬(柳東說), 노백린(盧伯麟), 김응선(金應善) 등을 사용하여 군사령부 방면의 양해를 얻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복종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등용의 기회를 얻었고 이용익도 동경에서 돌아왔다.
13) 궁중에서 임금·왕비·왕세자를 가까이 모셔 시중들던 사람.
14) 원문에는 伊知地, 오기로 보아 수정.
1905년에 호위대총관(扈衛隊總官)이 되어 궁내부특진관, 주전원경(主殿院卿),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이 되었다.
황태자비 전하 전(前) 이왕비의 장례식 후 훈1등 팔괘장을 수여받고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에 오르고 사법권 위임 후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은 후 군부대신에 전임되어 반년을 지냈다.
그러던 중 자객을 만나 거의 죽음상태에 이르렀었으나 한성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나았다.
범인 및 그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1906년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고 박제순 내각 때에 박제순 씨와 서로 맞지 않아 대신을 사직하였으나 하세카와(長谷川) 군사령관을 찾아가 진언하여 중추원 의장에 복직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옮겼다.
또한 시종무관장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후 조동윤 부장이 시종무관장에 임용되어, 이근택 씨는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한일합방 때에 조선귀족령에 의해 자작을 수여받았다.
1917년 경성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자산은 50, 60만 원 내외라고 한다.
아들 이창훈(李昌薰)이 상속하였고 1920년 2월 작위를 세습하였다. 현재 정5위이다.
종4위 훈1등 자작 임선준(任善準) (본관 풍산, 노론, 사망)
씨는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고(故) 이조참판(吏曹參判) 임대준(任大準)의 동생이다.
문과 출신으로 명문의 후예이다. 성격은 온화하고 학문에 독실했다.
어릴 때부터 수신 면학하는 것에 충실했고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관위에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빈곤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즐기고 고결한 지조를 가지고 있었다.
내무참의, 비서승, 형조참판, 현령부사(縣令府使) 등을 거쳐 성균관장이 되었다가 1907 년 이완용 내각에 입각하여 내무대신이 되었다.
임선준 씨의 친형 임대준(일찍 사망) 씨의 딸이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李升九) 씨와 결혼하여 친인척관계가 성립된 덕분이라고 한다.
같은 해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단행하여 일본국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조선 훈1등 태극장(朝鮮 勳一等 太極障)을 수여받고 종1품에 특진하였다.
1908년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 오르고 법부 및 군부를 폐지할 때 이완용 씨와 의견을 달리하여 1909년 6월 사직을 하고 재야에 돌아갔다.
1910년 8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 되어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1915년 경성 궁정동(宮井洞)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씨는 생전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경력은 눈여겨볼 만한 것이 적지만 유학자 풍은 있었다.
한 명의 옛 선비였다.
자산은 20, 30만 원 정도 있었으나 승계자인 임낙호(任洛鎬)가 방탕하여 현재는 남아 있는 재산이 없다.
임낙호가 작위를 세습하기는 했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고치지 않으면 그 지위를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종4위 훈1등 자작 이재곤(李載崑) (본관 완산, 전주, 노론)
씨는 경기도 양주군에 태어났으며 현령 이신응(李慎應)의 아들이다.
즉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의 본가로, 그의 친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받고 홍문관교리, 장례원정(掌禮院正), 고산현감, 거창부사, 나주목사, 사복사정(司僕寺正), 예조참의,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 궁내부참의, 중추원의관, 공주(公州)관찰사, 춘천관찰사, 분비서원승(分秘書院丞), 태복사장(太僕司長), 궁내부특진관, 내부협변, 법부협변, 학부협변, 서북철도국의사장(西北鐵道國議事長), 의정부찬정, 회계원경, 특명전권공사, 내장사장(內藏司長), 중추원찬의, 제실회계심사국장(帝室會計審査局長),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씨는 유학자를 가장하여 권모술수에 능한 책사로서 학식이 있었으며 고전에 정통했다.
또한 달변가였고 이에 더해 왕실의 근친으로서 그 친형인 이재완은 이태왕 전하의 사촌이라는 관계로 세력을 가졌지만 지금 나열한 것과 같은 자리가 모두 친형 이재완씨의 원조에 의한 것은 아니다.
친형 이재완 씨는 욕망이 컸지만 조금 무능에 가까워 항상 동생 이재곤 씨의 참모가 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 원래 보종당(保宗黨)이라 자칭하여 이왕가의 중심인물이 되었지만 장기인 간계를 부려 안심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가 1897년에 이태왕 전하에게 황제의 존호(尊號)를 올려 황위에 오르자 국호를 고쳐 대한이라 칭하고 연호(건양)15)를 고쳐 광무(光武)16)라 칭했다.
덕수궁의 정문을 문호(대안(大安))를 고쳐 대한(大漢)이라 칭해야 한다며 무척 노력하여 전하의 환심을 사고 그 공로로서 요직을 놓지 않고 권력의 일세를 누렸다.
이러한 개정 이유의 설명서에서 말하기를, 조선이라는 국호는 기자(箕子)를 봉했던 것에 대한 국호이기 때문에 당당한 독립국의 국호로 하기에는 부족하고 새로 한국이라고 한 것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통일한 고래(古來)의 위업을 지금
전하(殿下)는 중국의 간섭을 극복하고 독립제국의 황위에 올라, 지금까지의 왕 중 미증유의 과업을 이루었다.
15) 1896년부터 사용된 조선시대 최초의 연호.
16) 1897년에 제정된 대한제국의 연호.
따라서 삼한의 통일을 오늘날에 다시 이룬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연호를 다시 고려해야 하는데, 건양은 김홍집 등의 내각에서 사용한 창황(創皇) 근거가 없는 연호이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충분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 해의
연호에는 이전에 없었던 불상사가 많았기 때문에 길조의 연호가 아니다. 또한 광무라 바꾸는 이유는 옛날 중국의 한나라 때 광무제가 국가 중흥의 위업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하와 동일한 위상이며, 때문에 이것을 모방한 것이고 문호(대안(大安))를 대한(大漢)이라 고치는 것은 연호를 광무 즉 대한의 광무제와 동일하다는 의미라고 설명서를 작성하여 상소하였고 허락을 받았다.
이상과 같은 일은 축하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당시는 국가가 망하느냐 성하느냐의 위급한 순간으로 뜻있는 신하는 폐하를 보필하여 정치의 쇄신을 도모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왕가의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탐하여 간책을 부려 오로지 미사여구로 장식하여 전하의 환심을 사서 총애를 받으려는 욕심으로 국가의 대사를 망각한 것은 불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조직되자마자 입각하여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것은 이완용 씨가 이태왕 전하 양위의 큰 문제를 앞에 두고 새 내각을 조직하려할 때 매우 인선에 고심하였다.
즉 문제가 왕위에 관한 큰 문제이기 때문에 왕실의 중진을 견제하려는 책략으로 즉 이재완을 견제하려는 책략으로 그를 위해 친동생 이재곤을 내각대신에 임명해야 할지 혹은 이것을 없었던 것으로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이재곤과 교섭한 결과 의외로 쾌답을 얻어 이완용 씨는 거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다고 안심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입각한 이재곤은 이완용 총리대신과 함께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압박하고 이를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조선 훈1등 태극장에 올라 정1품에 특훈을 받았다.
이것으로써 옛날에 말한 국호와 연호 개정을 주장한 왕가의 친척인 이재곤은 세상 사람들 모두 그 변심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908년 칙명을 받아 왕세자 전하의 사신으로 도일하고 다음해 1월 학부대신을 사직하고 1910년 중추원고문에 임명되
었다.
한일합방에 즈음하여서는 조선귀족령에 의해 자작을 수여받았고 1919년 만세소요 때에 본색을 나타내어 급변하여 권중현과 함께 작위 반납을 신청하였으나 이를 총독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각하하였다.
현재는 그 동생의 둘째 아들 이권용(李權鎔: 스웨덴 철학박사)을 각 방면에 활동케 하여 크게 배일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왕가 종약소(宗約所)의 흑막인 보종당의 필요를 선전하여 이왕가의 결합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자산은 50, 60만 원 내외라고 한다.
중추원 고문, 종3위 훈1등 자작 윤덕영(尹德榮) (본관 해평, 노론)
씨는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고(故) 성균진사(成均進士) 윤철구(尹徹求) 씨의 둘째 아들이다.
즉 부원군 후작 윤택영(尹澤榮)의 둘째 형으로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 씨의 손자로서 창덕궁 이왕비 전하의 둘째 삼촌(仲父)에 해당한다.
문과 진사급제 출신으로 문필에 능하고 기략이 있다. 조선의 명문 중의 명사로 사람을 포용하는 아량이 없고 교만하다는 세상의 평판이 있었다.
안중에 사람이 없고 자존심은 매우 강했고 말하자면 재능이 뛰어나서 덕이 없는 사람이다.
그 관력은 대강 다음과 같다.
1894년 조선 마지막의 문과에 등제하여 다음해 비서감 우비서랑에 올라 민비의 명령에 의해 궁내부에서 파견하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 되어 이지용(李址鎔), 민영철(閔泳喆) 등과 동반하여 도일하여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민비 사건이 일어나 귀국하여 이태왕 전하가 러시아공사관에 옮긴 후 박정양(朴定陽)내각에 들어가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이 되어 6품에 올랐다.
1897년 시강원시강관(侍講院侍講官)이 되어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에 전임하고 나아가 비서원승(秘書院承), 봉상시부제조(奉常寺副提調), 농상공부참서관, 태복사장(太僕司長) 등을 거쳐 내부지방국장(內部地方局長)에 올랐다.
1900년 법부법무국장(法部法務局長), 비서경(秘書卿)에 전임하여 가의 품계(嘉義階)에 오르고 전선사 부제조(典膳司副提調)를 겸임하였으며 후에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서북철도국참사장, 경기도관찰사, 철도원부총재가 되었다.
이어서 지계아문부총재(地契衙門總裁)를 거쳐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로서 비서원경(秘書院卿)에 전임하고 내장원감독(內藏院監督), 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를 겸하고 정2품에 올랐다.
러일전쟁 개전에 즈음해서는 의정부참찬에 전임하고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을 겸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의정부찬정, 장례원경, 시종원경을 역임하고 조부 윤용선의 상(喪)을 치르면서 잠시 관직에 오르지 않고
자중하던 중 스스로가 내각을 조직하려고 정치운동을 벌였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형제들의 주택까지 잃고는 이해창가의 가옥 일부에 5명의 형제 전 가족이 모여 생활할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
윤택영 씨의 딸이 황태자비에 옹립되자 여기서 윤씨 집안의 영광과 위엄은 예전보다 더 커졌다.
씨는 바로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겸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에서 일약하여 태의원경이 되고, 정헌 품계에 올라 훈2등 태극장을 수여받고 특히 친임관 대우를 받았다.
이태왕 전하 양위 후, 윤비황후(尹妃皇后)의 자리를 계승하기에 이르자 황후궁태부(皇后宮太夫)를 겸임하고 훈1등 팔괘장에 올랐다.
1908년 시종원경에 전임하고 종1품에 오르고 다음해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고 숭록품계(崇綠階)에 올랐다.
1910년 정1품 보국의 영작을 수여받고 대훈위이화대수장을 하사 받았으며 이후 조선 궁중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궁내대신으로 윤덕영의 명령 없이는 어떤 일도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폐하의 섭정을 하듯 실권을 잡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궁내부를 폐하고 이왕직이 되자 특히 이왕 전하로부터 데라우치 총독에게 윤덕영은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나의 곁에 두고 보필해주는 임무를 맡겨야 한다고 하는 의뢰가 있어 장시사장이 되어 여전히 권리를 계승했다.
이것도 윤씨의 계략에 의해 나온 것이다.
이후 이태왕 전하가 상을 당하고 만세소요에 의해 윤씨에 대한 소문이 내외에서 일어났다. 즉 이태왕 전하를 윤씨가
독살하려 한다는 것으로 세상에 선전되어 공포를 떨칠 수 없어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피해를 보아) 작위와 관직을
사직하고 세상에 자신의 결백 입장을 밝히려 하였다.
그리고 작위 반환을 총독부에 신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지만 직위는 사직하여 5, 6년간 무관으로 지냈다.
궁중의 출입을 근신하고 때때로 전하에게 문안을 드리는 정도에 그쳤는데 1925년 7월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복직하였다.
조선귀족 중 우수한 수완가로 이왕가의 친척 중 중심인물이 되어 항상 왕가의 친척을 조종하여 통일을 꾀하고 보종당(保宗黨) 일파를 일으켜 이재곤 등과 무엇인가를 꾀하려 하였다.
송병준 백작은 생전에는 항상 백작(伯爵)모임에 가세하여 이완용과 대항하여 이완용을 고립시키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이 정략은 계속되고 있고 자산은 이백만 원 이상이라고 한다.
현재 해동은행(海東銀行)의 은행장 겸 전무중역을 맡고 있으며 뒤에서 그 권리 행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정4위 훈1등 자작 조민희(趙民熙) (본관 양주, 노론)
씨는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명문 중의 대가(大家)이다. 고(故) 의정대신(議政大臣)조병세 씨(趙秉世,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자 순직)의 조카로 이완용 부인의 친동생이다.
그 성격은 매우 온후한데 무학무능하여 도박광이었다.
문과 등제 출신으로 가문과 순번에 의해 출세한 인물이다.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명받는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副修撰), 병조좌랑친군전영군사마(兵曹佐郞親軍前營軍司馬), 양성현감(陽城), 용인현령, 부교리(副校理), 직각권(直閣圈), 병조정랑겸필선(兵曹正郞兼弼善), 응교(應敎), 대사성(大司成), 도정동부승지(都政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 공조참의, 호조참의(戶
曹參議), 돈녕부도정(政敦寧府都正), 봉산군수, 병조참의(政兵曹參) 등을 순차로 역임하고 1895년 장단(長湍) 부사로
임명받았는데 사퇴하였다.
중추원의관에 임명된 후 관세사장(關稅司長), 전주관찰사, 시종(侍從), 봉상사장(奉常司長), 비서원승겸예, 평남평북
관찰사, 부참사, 평안북도 관찰사, 궁내부특진관, 법부협판(法部協辦) 등을 거쳐 1901년 군부협판에서 프랑스주차(駐箚)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미국을 거쳐 근무지에 부임하였다.
1904년 일본주차특명전권공사로 전임되고 다음해 귀국 후 육군참령(陸軍參領)이 되어 일본국 훈3등 서보장을 수여받고 1906년 부령(副領)에 올랐다가 얼마 후 경상남도 관찰사, 비서감경, 평리원재판장이 되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이태왕 전하의 양위를 단행한 이래 덕수궁 경계에 불안을 느껴 이완용 씨와 친척관계라는 이유로 추천되어 승녕부 시종장(承寧府 侍從長)에 올라 훈1등 팔괘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승녕부시종장을 승녕부총관으로 이름을 고쳐 친임관(親任官)이 되어 궁내대신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덕수궁
전반에 걸친 권리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완용 씨 자신이 덕수궁 일에 대해 직접 관여해야 했기 때문에 조민희를 공석에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10년 종1품에 승진하고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자산은 50, 60만 원이 있는데 도박으로 탕진하고 현재는 의식이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박현행범으로 여러 번 검거되었지만 귀족이라는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었는데 멈추지 않고 더 심하게는 관아,
역소 등의 출근 중에도 사무실에서 도박장을 개설하여 밤을 새기도 한다고 한다. 이완용 씨의 부인으로부터 매월 50원의 보조를 받아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세간에는 한 사람도 동정하는 자가 없었다.
이왕부 무관, 종3위 훈1등 자작 이병무(李秉武) (본관 전주)
씨는 충청남도 공주군 출생으로 이조의 태조 이전에 분파된 실로 가난한 가문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양반이라고 칭하였다.
세 명의 형제가 있는데 첫째는 이병량(李秉兩)으로 이왕 전하의 시종이었는데 일찍 죽었고, 둘째가 이병무(李秉武)였다. 셋째는 원래 이왕부무관(李王附武官)으로 근무하고 만기 후에는 중좌(中佐)가 된 이병규(李秉規)이다.
이병규 씨가 일찍이 조선 무가의 양자가 된 인연으로 그 둘째 형인 이병무씨도 크게 출세하였다.
즉 친동생의 가문의 힘을 빌려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에 참하선전관(參下宣傳官)에 임명되고 그 후 학련무공학원술(學鍊武公學院術: 무관학교로 미국식을 따랐음)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학교가 폐교하여 후에 친군통위영대장(親軍統衛營隊官)이 되었다.
1893년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전임되어 참상선전관(參上宣傳官), 승전선전관(承傳宣傳官), 친군장위영우대부령관(親軍壯衛營右隊副領官)을 거쳐 1894년 한일양국의 국교수정 보빙(報聘)대사의화궁(大使義和宮)전하의 수행원으로서 도일하였다.
그 후 육군교도단(陸軍敎導團)에 들어가 견학하고 나중에 육군사관학교에 전교하여 이강공 전하와 병술훈련을 함께하였고 초급사관인 학술 초보를 위한 특별과정을 수학하여 1896년 귀국하자마자 군제개혁을 실시하여 육군보병대위(陸軍步兵大尉)에 올랐다.
그 후 육군무관이 되고 같은 해 육군보병참령(陸軍步兵參領)에 올랐다.
그 후 육군무관학교교두겸임(陸軍武官學校敎頭兼任)에 오르고, 북청(北靑)지방대대장,북청진위대대(鎭衛大隊) 대대장, 진위제오연대제이대대장(鎭衛第五聯隊第二大隊長) 등을 순차적으로 역임하였다.
1900년 10월 일본에 망명한 자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파직당하고 2년 이상 감옥소에서 미결수로서 구금되었다가 1902년 1월 군산에 유배되었다.
1904년 2월에 유배가 해지되어 당시의 공사관부 무관 노즈(野津) 중좌의 알선으로 육군보병참령으로 복귀하였고, 육군무관학교교관, 군제의정관(軍制議定官), 육군보병부령, 육군무관학교교장, 유년학교교장(幼年學校校長) 등을 거쳐 육군보병정령(陸軍步兵正領)으로 승급하였다.
이상은 모두 노즈 중좌의 진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유학 출신이라는 특별대우 때문이라고 한다.
1906년 2월에 훈3등 팔괘장을 수여받고, 대사 완순군 이재완 씨를 수행하여 도일하여 일본국 훈2등 서보장을 수여받고, 귀국 후 1907년 이완용 내각을 조직하자 육군부장에 승진 입각하여 군부대신이 되고, 시종무관장을 겸임하여 군부협판 육군소장 이희두(李熙斗)를 잡아들여 육군법원(육군감옥)에 투옥시켜 시종무관 육군정령 어담(魚潭)을 정직(停職)시켰다.
이 사람도 또한 육군법원에 투옥시켰는데 이 두 사람은 군대해산 후 당시의 군사령관장 하세카와(長谷川) 대장으로부터 군사령부군법회의의 판사를 파견하여 감시아래 재판을 진행하고 심사한 결과 무죄 방면(放免)이 되었다. 따라서 군부대신을 설득하여 두 사람 모두 복직되었다.
1906년 군대 해산에 대해 대신으로서 그 조치가 적절하지 못해 부하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즉 조선 전국의 모든 부대가 해산(궁성수비로서의 일개 대대, 의식용으로서의 기병 일개 중대를 제외하고)하게 되자,
군부대신으로서 하나의 입안도 내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령관 관저(대관정)에서 각 대대의 대대장을 집합시켰을 때 여단장 양성환(梁性煥) 참장(參將)에게 비밀리에 말하기를 실로 군대해산은 본 대신은 모르는 일이며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양성환은 이에 답하기를 해산 조칙(詔勅)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구 소관인가를 대신(大臣) 각하가 알지 못한다면 형식적으로라도 폐하의 확실한 표(군을 지휘하는 데에 있어서 황제가 사용하는 신호)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말하기를 군사령부와 내각이 협의한 결과 각 부대의 군사교관은 모두 알고 있으며 충분한 준비가 있었다.
또한 이것은 송병준 대신이 주장한 것이며 또한 이토 통감의 명령이기 때문에 반대하면 불이익을 가져오므로 각별히
주의하라고 하였다.
해산하도록 명받은 상황에서 군참모장(軍參謀長)의 재촉에 의해 칙서가 있었음을 훈시하고, 각 부대의 무장해제 및 훈련원의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을 각 대장에게 하달하였다.
해산에 즈음해서는 장교, 하사, 졸병에 이르기까지 배상(賠償)이 하사될 것이라고 하며 집으로 귀가시켰다.
당시의 상황 또는 이것을 볼 때 해산 단행에 전 책임을 가진 군부대신이 그 부하를 회합한 석상에서 실은 본인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이 있는 자라면 그 심리를 알기가 어렵다.
조선인에게는 큰 비난을 받았지만 조정으로부터 정2품에 특훈을 받고 군법회의 판사장을 겸임하고 정1품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의 대훈위이화대수장을 수여받고 후에 군부를 폐지하고 친위부라 개칭하여 시종무관장을 맡고 친위부장관을 겸임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고 이왕부무관(李王附武官)을 받아 현재 현역 중장이 되었다.
1920년 조선군인 대우개정 칙령에 의해 부장(副長)을 고쳐 중장(中將)으로 임명되었다. 자산은 30, 40만 원 내외라
한다.
종4위 자작 이근명(李根命) (본관 전의, 노론, 사망)
씨는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판서(判書) 효경공(孝敬公) 이시민(李時敏)의 아들이다.
성격이 온후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선비의 지조를 지키는 명문의 후예로서 문과 진사급제 출신이다.
1897년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해 한림(翰林)을 받고 통정(通政)에 의해 대사성가선(嘉善)에 오르고, 이조참판, 의주부윤(義州府尹), 좌승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춘천부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영선사장, 비서원경, 의정부찬정,
시종원경, 장례원경 등을 거쳐 정헌 품계(正憲階)에 올라 홍문관학사에 임명되었다. 1901년 태의원경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경기도관찰사에 전임되어 1903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특진하였다.
나아가 의정부의정에 임명되고 태의원경 도제조를 겸임하였다.
당시 관제상 내각은 참정대신에게 맡겨졌다. 정치에 종사하면서도 황태자 전하(이왕 전하)는 결혼에 즈음하여 고전(古典)에서도 말하는 세 대신이 필요하다고 하여 임시로 두 명의 대신을 보궐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된 사람이
재래(在來)의 의정대신인 조병세 씨이며 또 보필자로서의 두 명은 이근명(李根命), 민영규(閔泳奎)였고 이들을 가례17)대신(嘉禮大臣)이라 칭하여 이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후에 영돈녕원주사(領敦寧院主事)에 임명되었고, 이왕 전하가 결혼한 후에 의정을 그만두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민영환 씨의 순직에 의해 이후 계속해서 당시의 내각에 찬성하는 자 모두를 탄핵하여 상소하여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조약이 무효라는 운동에 노력하였는데 이미 그 당시는 경성 치안이 하세카와(長谷川) 군사령관에게 위임된 후였으므로 군사령관은 치안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씨를 헌병대에 불러들여 설교를 한 후 해산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상소에 연명하는 다수의 민중도 이근명의 퇴직에 의해 무관장군의 통솔이라 하여 사분오열하였다.
그러나 잠시 소요를 일으킨 것으로 진압되었다.
후에 훈1등 태극장을 수여받고 다음해에 봉상사도제조(奉常司都提調)에 임명되고 또한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에 전임되고, 1907년 대훈위에 오르고 이화대수장을 수여받았으며, 규장각 지후관(奎章閣 祗候官)에 임명되는 등 조선 원로의 대우를 허다히 받은 것은 재직 중 폭정을 휘두르지 않았고, 청렴한 선비로서 명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0 년 8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자작을 수여받았다.
1913년 자택에서 노령 81세에 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자산은 원래 빈곤했는데 작위를 받은 후 하사금에 의해 그에 맞는 생활을 유지하다가 지금은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장손 이충세(李忠世)가 상속하고 작위를 세습했다.
17) 왕의 성혼이나 즉위, 세자·세손·태자·태손의 성혼이나 책봉 따위의 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