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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의 싱그러움이 만산을 뒤덮는 계절이다. 내 방 창가에 있는 호접란 화분에도 봄이 왔다. 팔 년 전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시집을 내고 평창의 금당 계곡 펜션에서 지인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받은 화분이다.
그날 지인들로부터 받은 화분이 꽤 여러 개 있었는데, 다른 화분은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호접란 화분만 그래도 서운하니 가지고 가라고 해서 떠밀리듯 가져 왔었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는 화분이기에 별 생각 없이 햇볕이 잘 드는 동쪽 창가에 올려놓고 난 화분과 함께 심어놓은 키 작은 나무 이파리들이 시들해지면 물을 흠뻑 줘서 기를 살리는 게 내가 호접란을 위해 배려하는 전부였다.
사실 호접란 화분을 들여놓기 몇 년 전에 그동안 집안에 있던 화분들도 모두 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선물로 나누어 준 터였다. 화분이 싫거나 꽃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집안도 협소한데다가 외부 일정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며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시들어갈 화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호접란 화분은 내 외롭고 지친 심신의 유일한 동반자가 되었다. 외출 했다가 돌아오면 창가 책장 위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맞춰주었고, 나도 화초가 시들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적적한 방안에 화분이라도 하나 남겨 두면 방안 공기도 건조하지 않고 다행히 꽃이라도 피어 준다면 그 꽃을 보는 낙으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앞섰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겨울을 버틴 호접란은 이듬해 봄, 화분에 꽃대가 세 개씩이나 올라오더니 보랏빛 꽃망울이 움트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꽃잎을 톡톡 터뜨리면서 꽃대마다 경쟁하듯 수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내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사월에 꽃이 피기 시작해 구월이 되도록 지지 않고 꽃차례로 피어나 숨죽이며 바라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의 일정 때문에 며칠씩 외출 했다가 돌아 와도 전혀 기죽지 않은 채 당당하게 꽃잎을 피우고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인들은 이런 나를 보고 새로 들인 아내와 깨가 쏟아지는 재미가 어떠냐고 부러움 반, 질투 반 섞인 농을 자주 건네곤 했다.
어느 순간 나도 무던한 아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화분을 받은 다음해만 꽃이 피어난 것이 아니고 해마다 사월이 오면 약속을 지키기라도 작정한 듯 겨울을 견딘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라는 듯 슬며시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자줏빛 꽃봉오리를 젖망울처럼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올해로 벌써 팔 년째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없는 적적한 집에 호접란이 홀로 피어 집안을 화사하게 만들고 나를 지켜 준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외부 일정이 길어지면 호접란의 안부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예전의 선비들은 집안에 난을 들여 놓고 이파리를 하나 하나 정성들여 닦아 주며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고 선비의 인품을 수양하는 기회롤 삼았다고 한다. 난초의 대표적인 상징으로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랑과 열정, 욕망의 상징으로도 여겨져 조선 말기 흥선 대원군이 파락호 취급을 받으며 상갓집 개라는 멸시를 받을 때도 그는 화선지에 끊임없이 석파란石波蘭을 치며 바위를 뚫고 피어나는 난초의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이밖에도 난초는 희귀하고 특이한 아름다움, 새로운 시작의 상징, 명성과 깨달음, 변함없는 우정의 상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목할 점은 난초의 상징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고 문화적, 역사적, 개인적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시대와 역사적 배경에 따른 문화적 의미가 반영되어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호접란은 꽃잎이 질 때도 추하지 않다. 마치 동백꽃처럼 꽃잎이 미처 시들기도 전에 꽃의 모가지가 툭, 하고 낙하한다. 동백꽃이 가장 화려한 절정에서 붉은 입술을 내밀며 마음을 빼앗다가 한순간 미련 없이 그 모가지가 꺾이고 마는 것을 보며 옛사람들이 ‘효수 당한 꽃’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호접란도 그렇게 미련 없이 꽃송이가 지고 만다. 그 꽃잎이 너무 아깝고 애잔하여 바닥에 떨어진 것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하나씩 하나씩 모아 두기도 했었는데 막상 꽃잎을 담아 보낼 사람이 없어서 혼자 속을 끓이다가 하얀 종이에 곱게 싸서 화장을 하는 심정으로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니 어찌 각별한 애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낙하한 꽃잎 하나하나마다 함께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외로워한 흔적들이 배어 있었기에 더욱 애닯았을 것이다. 오늘도 내 방 창가에는 호접란 자줏빛 꽃잎이 부모가 집 떠난 자식을 기다리듯, 사랑하는 여인이 먼 길 돌아오는 사내를 그리워하듯,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해가 지고 달이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인내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희망이 성공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시인 아동문학가
월간 ‘시문학’ 등단, 한국시문학문인회 회장
계간 ‘P.S’ 발행인, 문화앤피플 편집위원
시집: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외 다수
kng2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