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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집회서의 말씀 44,1.9-13
1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9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10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의로운 행적이 잊히지 않았다.
11 그들의 재산은 자손과 함께 머물고 그들의 유산은 후손과 함께 머물리라.
12 그들의 자손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그들 때문에 그 자녀들도 그러하리라.
13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1-25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11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마르 11,17)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라고 말씀하신 곳이니, 당신 이름과 함께 현존하신 그분을 만나고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할 때 교회다워진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성전인 우리는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마르 11,17)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저주 받은 나무와 축복받은 나무>
오늘 주님 모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 분이 과연 주님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당신이 시장하신데 열매 맺지 않았다고 죽으라고 저주하시고, 성전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난폭하게 쫓아내십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 맞습니까?
이런 주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이런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분명 시험하고, 주님의 이런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많이 생각게 합니다.
우선 주님은 우리처럼 당신 입맛에 맞지 않아서 이러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어야 하고, 더 나아가 이런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가르침 주시려고 이러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약 아무도 없이 당신 혼자셨다면 이러셨을까 우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라고 분명히 얘기하는데, 이를 보면 제자들이 들으라고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우선 성전의 주인도 주님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도 주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천명하시고 알게 하시려고 이리하신 것일 겁니다.
두 번째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나 성전은 이런 운명이 될 거라는 경고의 뜻으로 이렇게 하신 것일 겁니다.
복음 다른 곳에서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주인이 베라고 하시자 나무 재배인이 주인에게 정성을 들여 더 가꿀 테니 한 해만 말미를 달라고 할 것이라는 비유를 주님께서 들려주시는데, 여기서 나무 재배인은 주님이시지요.
그러므로 복음서 전체적으로 볼 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없어질 운명이지만, 주님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도록 정성을 들이는 분이시고, 정성을 들이셨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열매를 맺기를 원하실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회개의 열매란 어떤 열매입니까?
사랑이고 선행일 것이고, 사랑과 선행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를 맺는 나무였습니까?
지금 우리로 치면 우리의 성당들은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입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꾼과 도둑들이 설치는 곳이었고,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 성당이나 공동체도 주님 사랑을 나누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들의 물건을 사고팔고 이익이나 나누는 곳이라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고 주님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열매 맺는 나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이란 회개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그러면 오늘 복음의 나무처럼 저주받지 않고 축복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자신들의 육신을 그 악습과 죄와 더불어 미워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오, 그런 일을 실천하고 그런 일에 항구하는 남녀들은 얼마나 복되고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주님께서는 불행해지라고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치 않으면 불행해질 거라고 경고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지만, 혹여 저주나 경고나 받고 축복은 받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무슨 숨은 뜻이 있지 않겠나?>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평상시의 삶을 볼 때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한마디 던지는 소리가 영 비위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무슨 의미를 담고 그런 소리를 하였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숨은 뜻을 찾아내면 오해와 속상함을 넘어 기쁨을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존중되었습니다.
평화와 안정, 번영의 표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꽃 피고 수많은 열매를 맺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해 주는 것으로(요엘 2,22 ; 하깨 2,19), 반면에 메마르고 열매 맺지 못함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습니다(예레 5,17. 8,13).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열매에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걸맞은 결실을 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구체적으로는 성전과 율법학자나 수석 사제,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잎은 무성하여 열매가 있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사라지듯이, 자리만 차지하고 세상과 타협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우대는 멀쩡하나 껍데기만 남아있는 하느님 경신례와 각종 행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의 겉은 화려하게 꾸몄으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현존을 보여주지 못하는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마르 11,15).
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고 힘이 있는 듯이 행동하였지만, 하느님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였으니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이 성전이라 해도, 비록 그가 하는 일이 합법적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강도일 뿐입니다.
여기서 ‘강도’는 칼을 든 개인 강도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 특히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 권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강도의 소굴을 다시 ‘기도의 집’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돈벌이와 탐욕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우리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전례의 목적, 전례의 열매>
오늘 복음은 전례가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 하는지 밝혀줍니다.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장면이고, 그 다음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장면이며,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가 왜 뿌리째 말라 죽어야만 했는지를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서술 방법을 대칭 구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이스라엘 성전 전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돈을 좋아하게 될 때 본래의 전례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전례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특별히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게 해 달라고 청하면 반드시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마지막으로 심어주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전례는 서로 돈을 좋아하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온전한 전례가 이루어지는 성당은 서로 사랑하고 청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 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과 관련된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아야만 줄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 받았다면 나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기 싫고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브라디가 수녀님을 만나서 용서를 하고 싶고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처럼, 전례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는 우리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으로 아무도 없게 하겠다는 결심이 생겨야 전례에 온전히 참여한 것입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997년 7월 12일 파키스탄 북서부 스와트 지구의 밍고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두 형제와 자매 중 장남인 수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말랄라의 아버지인 지아우딘 유사프자이는 교육 활동가이자 학교 소유주로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하는 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말랄라의 삶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봉사하여 그녀에게 교육에 대한 사랑과 학습할 권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교육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지아우딘은 탈레반의 행동에 반대하며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공개적으로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말랄라 자신의 행동 주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8년 말랄라가 겨우 11살이었을 때 그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어떻게 탈레반이 교육에 대한 기본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격려로 말랄라는 BBC에 익명의 블로그를 쓰기 시작하여 소녀들의 학교 출석을 금지한 탈레반 치하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2012년 10월, 당시 15세였던 말랄라는 그녀의 행동주의와 유명세 때문에 탈레반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한 탈레반이 그녀의 학교 버스에 올라타 그녀의 이름을 묻고 그녀의 머리에 총을 쐈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파키스탄에서 초기 치료를 받은 후 치료를 위해 영국 버밍엄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말랄라는 이 잔인한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그녀를 침묵 시키는 대신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는 그녀의 결심을 강화했습니다.
회복 후 그녀는 전 세계 소녀 교육을 옹호하면서 더욱 활기차게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2014년 17세의 말랄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억압에 맞서고 모든 어린이의 교육권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말랄라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과 지원은 그녀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말하도록 격려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극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사회의 문화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지아우딘은 그의 딸을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있는 개인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딸과 여자들의 인권 성장을 위해 자신의 딸부터 날개를 꺾지 않았고, 그것이 한 나라의 교육 제도를 변화시키는 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말랄라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불가능이 없다고 믿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없다는 내가 죽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하느님과의 만남인 미사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우리 전례도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세상 종말일 것입니다.
용서와 능력의 열매가 맺히는 전례가 되도록 힘씁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
큰 도시에서 살다가 완전 시골로 귀촌한 한 교우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적을 옮기려고 가까운 시골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실에 들러 일을 마치고 성당 온 김에 성체조배나 하고 가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이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왜 이리 추울까, 주변을 살펴보니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유리 창문마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단 몇 분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성당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가 작업복 차림에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열심히 성당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시는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홀로 성당 바닥을 박박 닦던 그분은 바로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우가 약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혹시나 오늘도 그 신부님께서 홀로 청소를 하고 계시면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성당을 찾았는데, 그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 아니 주임 신부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지극정성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그 모습이 그리도 성(聖)스러워 보이더랍니다.
마치도 그 신부님이 성전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장사꾼들 사이에서 홀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이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마치 시장 한 복판처럼 시끌벅적한 성전 마당을 둘러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환전꾼들, 고리대금업자들로 빼곡했습니다.
제단에 바쳐질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을 사고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크게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타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십니다.
갖은 물건들이 쭉 놓여있던 진열대를 둘러엎으십니다.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를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경고>
오늘 복음 이야기와 루카복음에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카 13,6-9)
여기서 ‘올해’는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를 뜻하고, ‘내년’은 심판의 날을 뜻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2베드 3,8-10)
‘지금’이라는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시간인데, 이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회개할 시간도 안 주시고 곧바로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고,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발견한 때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마르 11,20), 곧바로 심판하신 것은 아니고,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또는 신앙인입니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겉으로만 잘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즉 ‘쭉정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위선자들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주님의 심판은 인간이 정한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지금은 회개할 때가 아니라, 먹고 놀고 즐기는 때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부르심’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지금은 제가 다른 일로 바쁘니까, 나중에 좀 한가해지면 그때 다시 불러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오만한 사람의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은 여러 가지로 바빠서 신앙생활을 못한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회개, 응답에 ‘나중’이란 없습니다.
‘나중’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르 13,32-33)
‘무화과나무 이야기’ 뒤에 있는 ‘성전 정화’ 이야기도 심판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성전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일을 심판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장사를 하는 것을 금하셨을 뿐이고, 사람들을 ‘파문’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라는 말씀도 심판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라고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시키지 말고,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켜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북적대는 모습만 보면, 성전에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것으로, 또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짓이었으니, 그 성전이 바로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혹시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위선자는 아닌지, 또는 겉만 그럴듯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쭉정이’는 아닌지, 각자 스스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2베드 3,13-15ㄱ.18ㄱ)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삶 - 열매, 성전, 기도, 용서>
어제 모처럼 크게 화를 냈습니다.
결론하여 부끄러웠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하고 황당한 전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자매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상인줄 알았는데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신분열 환자였습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피해망상, 정신분열 현상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를 낼 일이 아니라 강력히 치유를 권할 내용입니다.
요즘 정신질환 환자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주변에서 자주 발견되는 우울증 환자들입니다.
자연과 날로 멀어지고 관계 불통으로 인한 원인이 크겠습니다.
정말 공부의 유무, 학식의 유무를 떠나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어느 자리에 살든지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진정 건강한 삶이겠습니다.
어제까지 퇴계평전, 율곡평전, 다산평전을 다 읽었습니다.
두고두고 읽을 평전입니다.
참으로 일류의 선비는 일류의 시인이자 성인이요 소통의 사람,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세 대학자 선비는 정말 온전한 참 사람의 전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럽고 감동적인 점은 이분들에게 한시로 나누는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깊이 공감하는 진실하고 담백하게 자연스런 한시로 나눈 대화였습니다.
어떻게 온전한 참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또한 평생여정이자 평생과제입니다.
결국 믿는 이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하느님의 자녀가,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평생 수행과 훈련의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바로 저는 오늘 복음에서 참사람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제1독서 집회서도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권하며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간단히 서술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존재감없이 살다가 사라져갔겠는지요.
요즘도 꿈과 희망을 잃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로 불행히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반면 훌륭한 삶을 살았던 이들 또한 많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개가 집회서 다음에 나오지만 미사독서에는 소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행적이 잊히지 않았다.
그들의 자손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그들 때문에 그 자녀들도 그러하리라.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교회의 자녀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한 참나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새삼 2천년 거룩한 전통에 무수한 성인들을 지닌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늘 보고 배울 삶의 좌표로 삼을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후 하루 삶의 일정을 통해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열매를 맺어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말라 버린 무화과 나무의 예화가 나옵니다.
바로 적대자들은 물론 제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함입니다.
나뭇잎들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언행불일치의 사람들,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무책임한 사람들에 대해 주님은 열매를 맺으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열매 “실(實)”자가 들어가는 말처럼, 바로 하루하루 사랑의 섬김과 책임을 다하면서 진실(眞實)하게 성실(誠實)하게 충실(忠實)하게 절실(切實)하게 주님께 불림받은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결실(結實)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비상한 열매들이 아니라 나다운 삶의 열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하고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한결같은 삶에서 자연스런 삶의 열매, 사랑의 열매이겠습니다.
둘째, “성전을 정화하라!”입니다.
보이는 성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속해 있는 우리 하나하나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나를 성령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며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두 비유 사이에 위치한 성전정화 사건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가시적 성전이 속화와 부패와 타락이라면 거기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거룩한 성전이 속화되어 있다면 각자의 성전도 속화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거룩한 공동전례가 이뤄짐과 동시에 각자의 성전도 정화되고 성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거룩한 공동전례는 물론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며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의 인도따라 경청의 분위기에서 거룩한 미사전례 참석은 물론 기본 수행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기도하라!”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될 위험이 다분합니다.
기도와 삶이 함께 가듯, 기도와 믿음도 함께 갑니다.
기도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믿음의 훈련과 습관도 절실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와 믿음입니다.
기도의 힘,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인 주님을 만나야 주님과 소통해야 비로소 온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성전정화 사건이 이어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받은 줄로 여겨라.”
아무것이나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정말 꼭 필요로 하여 청할 것은 성령이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알 수 있는 지혜이겠습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튼튼한 믿음에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기도라면 그대로 응답될 것입니다.
넷째, “용서하라!”입니다.
서로 살기 위해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우리도 주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연민과 배려, 존중과 배려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사랑의 용서입니다.
새삼 용기있는 행위가 용서요, 용서도 부단한 의식적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서로 용서를 통해 화해하고 소통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아, 이런 용서의 훈련과 습관에 앞서 부단 회개의 훈련과 습관이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정말 나부터 살기 위해 의식적 회개와 용서가 필수입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한다고 고백하며 일단 던져놓고 보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용서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까?
평생은총과 더불어 평생과제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십시오.
성령의 은총으로 자신의 성전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면서 잘 보살피고 관리하십시오.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며 믿음을 굳세게 하고, 이어 끊임없이 용서하십시오.
용서도 의식적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의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성전이 제 정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엄중히 경고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마르 1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먼저 성전을 둘러보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로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담긴 심장부라 할 수 있지요.
오늘 예수님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저 둘러보신 뒤 베타니아로 떠나십니다.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가까이 가 보셨지만"
(마르 11,13)
이튿날 베타니아를 떠나실 때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십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바로 어제 둘러보신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외적인 화려함, 형식에 치중한 율법주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성직주의는 겉보기에 뭔가 있는 것처럼 그 위용을 자랑하나 실은 정체성을 잃은 채 속이 비어가는 신기루일 따름입니다.
나무를 살피시는 예수님을 관상합니다.
그분은 시장하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기도와 정의에 너무도 허기가 지셔서 우리 주변을 맴돌며 열매 하나라도 발견해 보려 찾고 계십니다.
기대의 눈길을 쉬이 접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리저리 살피시는 건, 사실 당신 허기를 채우시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정 우리다운지 보고 싶으신 까닭입니다.
그분은 우리다움의 열매를 진심으로 갈구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마르 11,17)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성전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선 성전은 예수님의 "나의 집"입니다.
아버지께서 계시는 집이 바로 아드님의 거처이며, 우리 또한 주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또 성전은 특정한 어떤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곳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와 축복을 독점하려는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의식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열려야 하지요.
그리고 성전은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성전에서 인간은 말과 노래, 머무름과 행동 등 자신이 받은 모든 것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친밀히 연결됩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 11,24)
기도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믿는 이가 하는 겁니다.
믿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는 기도를 가장한 주술이나 흥정, 거래에 불과하지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실망과 질타에 뿌리째 말라버렸음은 의미심장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 기도의 정신을 잃어버린 공동체, 기도가 아닌 데서 성장 동력을 찾는 제도는 아무리 겉으로 승승장구 팽창하는 듯 보여도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주님에게서 수액과 양분을 받는뿌리, 곧 믿음이 말라버렸으니 사실상 주님과 연결이 끊긴 것과 다음 없지요.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마르 11,25)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이에게 먼저 용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기도가 인격적 만남인만큼, 지고지선하신 주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통교와 소통, 일치가 가능하려면 우리 쪽에서의 통회와 주님 편에서의 용서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용서하는 이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조건적이거나 한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무리 용서하신들, 용서를 모르는 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모든 일은 그저 자기 능력이거나 우연, 또는 행운 정도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그처럼 뿌리째 말라버린 존재들 사이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이들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히지 않았다."
(집회 44,10)
집회서 저자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구약 선조들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그들에게서 가장 탁월한 점으로 꼽은 것이 바로 "자비"와 "의로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고, "의로움"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자비와 의로움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 약속의 수혜자가 되어 영원히 존속하며 그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다움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말씀들이지요.
기득권 유지를 위해 율법주의와 성직주의로 탑을 쌓기 전의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던 이스라엘의 영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성령을 모신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자비로운 의인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때 가장 우리다우며, 주님과 이어진 우리의 정체성도 충만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성전이며 기도하는 영혼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각자의 성전다움으로 주님 목을 축이고 허기를 채워드릴 열매를 맺는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체코 프라하 카를대학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 방한하여 “포스트 코비드와 한국교회, 변화하는 시대의 신앙의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습 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오후’라는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의 책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몬시뇰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하며 ‘변화의 시대와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의미가 크게 다른 말입니다.
변화의 시대는 마치 날씨와 같습니다.
흐린 날, 맑은 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이 있지만 그것이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의 변화는 마치 기후와 같습니다.
온대지방, 열대지방, 한대지방, 적도, 북극과 남극은 삶에 큰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사람과 국가는 계속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국가는 쇠락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속지주의 시대에 익숙한 방법, 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의 방법, 성사와 교회 그리고 성직자의 권위로 이끄는 방법으로는 팬데믹 이후의 교회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어려워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몬시뇰은 ‘시대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는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변화와 함께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변화의 속도와 범위, 깊이는 그간 확실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전반적으로 뒤엎고 있으며 또 전통의 종교적 확신이 무너진 뒤 나아가 세속적, 인본주의적 확신마저 흔들리며 제도에 대한 신뢰와 전문가들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문 닫힌 교회’를 예언적인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개혁, 특히 영성의 심화를 거치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부분의 교회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기심과 물질주의의 유혹이 커지는 사회, 세대 간 갈등이 불러오는 반목, 군중 속 외로움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 대한 우려를 전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갈림길은 더 성숙한 형태의 그리스도교로 깊이 나아갈 기회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살아 계시고 부활하시며 변모시키시는, 보편적인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뚝 솟은 첨탑의 교회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교님의 모관과 지팡이는 더 이상 권위의 상징이 되지 못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물이 터져서 잡았던 물고기가 빠져나가듯이 젊은이들이 더 이상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는 성령의 은사가 열매 맺지 못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성소가 줄어들고 있으며 텅 빈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권위를 상실할 것 같은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오전이 제도와 조직, 성사와 교 회의 틀을 공고하게 하는 시간이었다면, 그리스도교의 오후는 그리스도와 소통하는 ‘영성’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정신적, 영성적 삶이 펼쳐져 나갈 적기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가 종말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자기 비움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쪽에서는 성당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가두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책자를 나누어주고, 입교신청서를 받았습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약장수가 약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두선교를 하는 쪽보다는 약장수가 약을 파는 쪽으로 많이 몰렸습니다.
오후가 되자 가두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약장수에게 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고, 당신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을 파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러자 약장수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 약은 가짜입니다.
몸에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은 약도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가짜 약을 진짜처럼 최선을 다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습니까!"
전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확신과 신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에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풍요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020년 조사를 보니 기아 인구가 전 세계에 자그마치 8억 1천만 명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인구 5명당 1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돌보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과 제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 옷을 나누어줄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달라고만 청합니다.
여기에 자기의 어려움마저 해결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전에, 하느님의 도구답게 살고 있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데, “제가 바빠서요.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저한테 뭐 해 준 것이 있나요?” 등의 말을 하면서 손이 되기를,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과연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께서 마침 길가에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십니다.
그 열매는 시장기를 끄기에는 충분치 않았겠지만, 허기를 잠재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열매를 기대했는데,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열리는 과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가갔을 때 그 잎이 무성했다면 이미 열매가 맺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열매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나무이지요.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우리도 열매 맺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원하셔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인데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계속 의심합니다.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으며 자신이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가 되어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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