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코드는 그림(비주얼)이다.
필자가 나누고 싶은 말은 이렇게 말해야 좀더 명확해진다. 세상을 움직이는 아주 중요하고 효과적인 코드에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 증거가 될면한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봐야 역사가 일어난다” 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강조한다. 제목만 제시하는 것으로는 인식 정도는 할 수 있어도 인간의 삶에 녹아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약간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성경도 자세히 보면 제목을 선포하고 다음의 디테일한 설명을 붙인다. 잘알려진 시편 23편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제목이다. 그 다음부터 디테일한 그림을 설명한다. 성경 뿐만아니라 모든 글이 그렇고 영향을 미치는 연설이나 말에도 이 법칙은 통한다.
장거리 연애는 결혼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이유는 보지 못해서 일게다.
2G 폰에서 스마트 폰으로 넘어어는 과정에 혁신은 터치스크린에 아이콘의 등장이다.
이것은 애플의 혁신에서 이미 나타났다. IBM 컴퓨터가 DOS 를 탑재하여 프롬프트에 텍스트로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트키를 치며 컴을 사용할 때 애플은 이미 아이콘을 보면서 클릭하여 실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DOS 운영체제를 버리고 애플을 따라서 Wondow 95가 만들어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주와 유럽등의 선진국들은 이미 이 비주얼의 가치를 좀더 일찍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미 서부 유니버샬스튜디오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 규모와 티테일과 투자를 보며 놀랐었다. 일개의 영화사 셋트장에 좋은 장면(그림, 비주얼)을 얻기위해 엄청 노력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유럽을 돌아본 소감 역시 비주얼과 관련이 깊었다. 한마디로 미술의 나라라는 생각을 해본다. 비주얼의 가치를 빨리 깨달은 것이 분명하고 지금도 전세계의 관광객들을 모으는 컨텐츠가 감히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조각, 건축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소박해 보이는 모나리자의 작은 그림 한장 앞에서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온 많은 관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 모습을 이채로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디자인이 부가가치가 멈출 줄 모르고 오른다. 그림 또는 미술작품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현상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류, 핸드백, 화장품, 성형등의 부가가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열하고 싶은 증거와 설명이 많지만 글의 길이 때문에 좀 줄이고 본래의 명제로 돌아간다.
보는 것이 결과물을 만들어 실제로 혜택을 보게 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 열매의 결정적 한방이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축구로 말하자만 수비 좋고, 인터셉터 좋아, 결국 꼴을 넣어야 이기는 것인데 그 골을 넣는 슈팅을 이 그림을 보는 것 즉 비주얼로 설명할 수 있다.
보기 위해서 몇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는 존재해야 한다. 또한 가시거리내 가까이 있어야 하고, 결정적으로 빛이라는 조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복음을 준비하셨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이룬 뜻이 그것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너무 멀리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받아 누릴자 가까이로 배달이 필요했다. 또한 봐야 역사가 시작되니 빛이 필요했고, 소경이 눈을 떠야 볼 수 있게 된다.
볼수 없이 말씀으로 만 우리에게 임하시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심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니의 형상으로 인카네이션 하신 예수님이시다.(요1: 참조)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영적 소경의 눈을 떠서 보게하심으로 천국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눈 먼자를 보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바라 보라고, 예수를 옷 입으라고 비주얼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놋뱀 처다본 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표현되었다. 주께서 나름 높은 곳인 골고다 언덕위에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보라꼬!
이런 근거로 필자는 예수님을 성 삼위 중에 비주얼을 강조하시며 담당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도 믿음으로 좋은 비주얼을 만들어 바라봐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여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이 이 비주얼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고 세계의 움직임에 비주얼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으로 상황을 초월한 좋은 비주얼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위 밝고, 화사하고, 미소짓는 얼굴을 늘 만들어 유지하는 것이다.
웃어야 웃을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먼저 웃고 그러므로 웃을 일의 역사를 경험하며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어진 예수 십자가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눈에 눈물을 씻고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비주얼을 보장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친구여러분!
믿음으로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심으로 늘 웃을이리 충만한 가정과 사업과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요 8: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김치두 복음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