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의자를 바라보는 정오
이병일
뼈가 있는 말은 애써 돌아가는 강물 같고 뼈를 때리는 말은 활시위를 떠난 촉 같다 의자가 의자를 바라보는 정오 피로 닿지 않을 곳이 없다는 사백년 된 나무 죽어 제 굳어진 심장을 꺼내볼까 나무는 죽는 것 말고도 능선이 가질 수 없는 벼랑을 끌어당긴다 벼랑을 뚫고 오는 새떼 발목이 없다 어스름 낮달 같다 뒤로 밀리는 것들아 막, 꽃을 떨군 것들아 말라비틀어진 몸도 한 손에 물병 들고 섰구나 골짜기 딛고 올라간 것들아 축축한 것의 몸을 가르면 구약전서가 나올까 천국은 여전히 멀고 요한계시록보다 교독문을 더 좋아하는 나는, 예언자가 아니지만 죽은 나무에서 걸어나오는 신을 본다 신은 벌떼에서 떨어져나온 폐허 같다 나는 복사뼈가 부러진 채로 나와 신의 바깥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부활과 구원엔 참도 거짓도 없었다 기도하며 나쁜 피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죄지으면서 죄를 씻듯이 나는 아가야, 소리와 함께 양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24년 여름호 ----------------------- 이병일 /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 시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 등. 현재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