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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집회서의 말씀 51,12ㄷ-20ㄴ
12 제가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오리다.
13 내가 아직 젊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나는 기도 가운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하였다.
14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15 꽃이 피고 포도가 익어 가는 것처럼 내 마음은 지혜 안에서 기뻐하였다.
내 발은 올바른 길을 걸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찾아다녔다.
16 나는 조금씩 귀를 기울여 지혜를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위해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17 지혜를 통하여 진전을 이루었으니 지혜를 주신 분께 영광을 드리리라.
18 사실 나는 지혜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였고 선을 추구해 왔으니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19 내 영혼은 지혜를 얻으려 애썼고 율법을 엄격하게 실천하였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펼쳐 들고 지혜를 알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20 나는 내 영혼을 지혜 쪽으로 기울였고 순결함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였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마르 11,30)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저울’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지 말게 하소서.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게 하시고,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깨우쳐 주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자기의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존경받기보다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뭔데 쓸데없이 나서서 나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느냐?’ 는 마음을 지닐 때가 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석 사제들은 ‘하늘로부터 온’ 율법에 의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받고 그곳에서 성행하는 장사꾼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확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바르고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았습니다(마르 11,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11,28)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깡그리 부정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은 “모르겠소” 하는 핑계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에게 아무리 얘기해봐야 엉뚱하게 받아들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은 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굽으면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당신이 무엇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길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의 행동으로, 때로는 불이익과 미움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응답하고 그 권위를 증언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깊은 내공>
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은 적대자들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끌어 올린 대사건이었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예수님의 표현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즉결 처분하고 싶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운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르 11,28)
고수(高手)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내를 알아차리시고 즉답을 피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크게 당황시키는 명질문을 한 가지 던집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의 날카로운 질문 앞에 하수(下手)인 그들은 무척이나 당황해합니다.
서둘러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합니다.
다들 고개를 맞대고 수군수군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혼자이시지만, 다들 당대 내놓으라 할만한 지도자들과 석학들 여러 명에 당당히 맞서십니다.
예수님의 공격 앞에 쩔쩔매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통쾌합니다.
예수님의 깊은 내공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운명은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그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 모르겠소.”(마태오 복음 21장 27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면 예수님의 권위 역시 하늘로부터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존재의 신비와 당신 권위의 원천에 대해서 적대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잠시 후 때가 되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될 것인데, 미리 그들에게 알려주는 일 자체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탁’하고 놓으신 결정적 묘수(妙手) 앞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하수 적대자들의 동요와는 달리, 여지를 남겨 두시는 여유 있는 고수(高手),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돋보입니다.
적대자들은 분명 예수님의 권한이 사탄에게서 유출되었으리라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에게 요한 세례의 유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시며,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해가십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적대자들이 스스로 물러나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습니다.
지혜와 경륜으로 가득한 예수님은 당신 특유의 대화방식을 통해, 당신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고 말씀하시며 행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아초월의 여정 -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가기(Becoming the Love of Christ)>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시편 92,2-3)
신록의 사랑으로 빛나는 예수성심성월 6월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하라있는 인생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삶의 의미이며 모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제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주님을 한결같이 치열히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참행복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 할 것입니다.
참나의 실현도 이런 주님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을 믿는 이들의 삶은 자아초월의 여정,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어감으로 참나의 실현입니다.
이런 주님 사랑을 고백한 네 편의 자작시를 시기별로 나누고 싶습니다.
수 차례 반복하여 나눴지만 늘 좋고 새롭습니다.
1.“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며 좋겠습니다”
-1997.3
2.“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1998.12.25.
3.“주님,
사랑합니다,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이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2018.10.16.
4.“나 주님이 되고 싶다
오소서, 주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2021.12.8.
이런 주님께 대한 사랑이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1886년 5월부터 시작하여 1887년 1월까지 성 가롤로 르왕가(1860-1886)를 비롯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잔인한 고문으로 화형이나 참수형으로 또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이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000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성 가롤로 르왕가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베네딕도 15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1920.6.6.), 성 바오로 6세(1964,10.18)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6월3일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외에도 23명의 성공회 신자들도 순교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절정이 사랑의 순교입니다.
순교는 주님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우리는 날로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주님을 닮아갈수록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주님 사랑의 열매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지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 역시 이런 천상적 지혜를 지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성전정화와 같은 일을 하느냐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다음 천상적 지혜가 넘치는 질문으로 역공함으로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이래저래 대답하면 궁지에 빠지겠기에 그들은 비겁하게 “모르겠소” 대답했고, 주님 역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말씀하시며 이들의 덫에 걸리지 않습니다.
결국 답은 너희들 안에 있으니 스스로 답을 찾아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에서 나온 주님의 천상적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지혜를 추구했던 아름다운 구도자의 고백입니다.
“꽃이 피고 포도가 익어 가는 것처럼, 내 마음은 지혜 안에서 기뻐하였다.
내 발은 올바른 길을 걸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찾아 다녔다.
나는 조금씩 귀를 기울여 지혜를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위해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나는 내 영혼은 지혜쪽으로 기울였고, 순결함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였다.
나 지혜를 통하여 진전을 이루었으니, 지혜를 주신 분께 영광을 드리리라.”
자비와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자아초월의 여정을 통해 날로 주님의 사랑이 되어갈 때 저절로 자비와 지혜의 사람이,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 됩니다.
천상적 지혜의 선물을 원하십니까?
한결같이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참 좋은 지혜의 선물도 받게 하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시편 8,5-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뭄 끝에 단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갈라지는 땅에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땅에 사는 생명에게는 ‘생명수’와 같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뜨거운 모래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에게 신기루가 아닌 오아시스는 생명의 물입니다.
그 오아시스에서 몸을 추스르는 상인은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가뭄 끝의 단비처럼,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처럼 제게도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잡지입니다.
‘사목정보와 꿈’입니다.
사목정보는 미래사목연구소에서 발행합니다.
꿈은 월간 꿈(CUM)에서 발행합니다.
사목정보는 사목자들에게 유익한 글들이 많습니다.
꿈은 신앙의 여정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글들이 많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신앙의 여정을 함께하는 분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되면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지친 이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위로와 힘을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웃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목정보에 실렸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부님은 봉성체를 가는 길에 냉담교우를 만났습니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냉담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판공성사 중에 전임 신부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고 그것이 상처가 되어 냉담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습니다.
‘제가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님은 ‘신부님께서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이제 성당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성당에 나왔습니다.
신부님은 본당사목지침도 정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평일미사 참례, 15분 성체조배, 성경통독, 쉬는 교우 찾기, 매일 복음 말씀 한 구절 기억하기, 탄소 중립을 통한 생태 질서 회복’을 정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유트브를 운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입소문이 나서 30,000명이 넘는 분들이 신부님의 강론을 본다고 합니다.
유트브의 수익금으로 기쁜 날 신자들에게 고기를 사드리기도 했습니다.
남는 수익금은 모두 장애인 시설에 기부하였습니다.
냉담자들은 성당으로 돌아오고, 팬데믹으로 성당을 떠났던 신자들도 다시 성당을 찾았습니다.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강론’이라는 신부님의 이야기가 제게는 ‘죽비’가 되었습니다.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사목하는 본당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말씀의 씨앗을 충실하게 뿌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결실을 맺어 주시시라 믿습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전국공용 교구사제 특별권한’을 받았습니다.
이는 1986년 한국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한국 같은 일일 생활권에서는 타 교구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때 따로 신청을 하지 않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타 교구에서 미사를 봉헌하려면 관할 교구에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에서 서류를 부르클린 교구로 보냈고, 부르클린 교구에서는 제가 2024년까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 사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으로 사람들은 치유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전해주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은 한없이 약하고, 순결하신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겸손함과 정결함,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였으며, 그분의 권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과식이 만병의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비교’랍니다.
비교는 살아가는 데 불필요한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정서를 동시에 낳습니다.
‘어떻게 저런 삶을 살 수 있지? 나 같으면 도저히 못살아.’라는 우월함.
‘나는 왜 그럴까?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사는데….’라는 열등감.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감정입니다.
여기에 ‘과거의 나’와 비교하는 것도 과거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며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행복해지려면 비교하는 습성을 줄여야 합니다.
비교를 아예 하지 않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의식적으로도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열등감이라는 부정적 정서 역시 키우지 말고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발전적인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홀로 산다면 이런 비교가 모두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혼자 살아도 앞서 말했듯이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서 계속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기 행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비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지금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 역시 이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그 어느 율법교사보다도 뛰어났지요.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엄밀히 지키는 생활 방법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권한 문제를 따지고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르 11,28)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통해 그들은 메시아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아임을 인정하지도 또 부정하지도 않기에 법적인 이유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히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라고 묻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그들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니 하느님께 불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모두가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기에 군중으로부터 자신들이 처형받아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그들의 대답은 “모르겠소.”(마르 11,33)였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답하지 못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 그러면서도 예수님께 무슨 권한이 있냐면서 따지는 이중적인 모습을 우리도 닮은 것이 아닐까요?
비교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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