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live/yauh_a8o_44?feature=share
압살롬에 대한 소개 14:25~27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 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다윗을 만나려는 압살롬 14:28~33
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
[오늘의 말씀 요약]
이스라엘에서 압살롬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압살롬은 2년간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나 그가 오지 않자 그의 밭에 불 지릅니다. 압살롬은 요압에게 자신이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고, 결국 왕의 부름을 받습니다.
----------
압살롬에 대한 소개 14:25~27
하나님이 다윗 가문에 내리신 심판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압살롬’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특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남성 중 아름다운 외모로 언급된 인물은 압살롬과 요셉입니다. 준수한 외모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았던 요셉을 뛰어넘어, 압살롬은 흠잡을 데 없는 이스라엘 최고의 미남입니다. 그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입니다. 압살롬의 외모가 강조된 것은 백성의 마음을 얻게 한 최고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은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압살롬은 누이를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딸 이름을 다말이라고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압살롬의 외모는 어떠했으며, 그의 외모가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외모나 매력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다윗을 만나려는 압살롬 14:28~33
다윗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압살롬을 2년이 넘도록 무시하고 만나 주지 않습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하지도, 그를 처벌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둡니다. 방치된 압살롬은 다윗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쌓여 반란을 결심하고 계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훈육 없는 무시로 인해 다윗은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강수를 두어 요압을 만납니다. 압살롬은 이렇게 무시당하느니 차라리 다윗이 내리는 벌을 받고 죽는 것이 낫겠다며 요압에게 다윗과의 만남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결국 다윗과 압살롬이 만나지만,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을 용서하지도 징계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둘의 만남은 형식적 만남에 그치고 맙니다.
● 더 깊은 묵상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어떤 잘못으로 불편해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절묵상:사무엘하 14장 30절
문제를 푸는 방식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이 자신을 만나 주지 않자 요압에게 이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요압이 반응이 없자 압살롬은 종들을 시켜 요압의 밭에 불을 지릅니다.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을 욕보인 이복형 암논을 죽였음에도 살인죄에 대한 뉘우침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뜻대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인생의 꼬인 문제는 자기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방식으로 접근해야 풀립니다.
가정 문제의 상당 부분은 부모가 주님께 결단한 대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지 않아서 생긴다. - 마크 홀만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죄로 가득한 제게 완전한 용서로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제 중심의 아름다움을 보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거룩하고 진실하게 나아가게 하소서. 불편한 관계가 있다면 먼저 손 내밀고, 따뜻하게 안아 주며,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54 주와 같이 되기를)
----------
진정한 회개와 용서 없이는 참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란 관계 회복(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인이었던 자아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아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자나 회개를 하는 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유익이나 목적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교훈
첫째, 죄의 문제를 적극 처리하지 않으면 더욱 큰 불행을 초래한다.
둘째, 죄를 부분적으로 용서하거나 또는 어떤 조건을 달고 용서해선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다.
가족의 연속적인 비극을 보고서도 침묵을 지키며 "언젠가는 잘 풀리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문제를 직시하고 일이 더 악화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불화의 씨는 그것을 제게하지 않는 한, 언젠가 더 큰 비극을 낳는다.
-----------
온 이스라엘은 압살롬이 다윗의 왕위를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혈과 육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혈로는 다윗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 없으니
셋째인 압살롬이 합당하다고 여겼고, 육으로는 외모가 흠이 없이 아름다웠고
그의 자녀들도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도 압살롬의 사면과 귀환에 앞장 서서 일등공신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을 외면하자
정치적 실익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자기도 압살롬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요압이 와서 왜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묻자, 압살롬은 그술까지 와서 나를 돌아오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 그술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 입맞추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정말로 압살롬이 왕이 될 줄로 더욱 오해했고,
이로 인해 반역의 불씨가 지펴졌고 재앙을 초래했습니다
이 재앙은 누구 때문이라고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먼저 혈과 육의 정욕으로 범죄했고,
암논과 압살롬이 이어서 혈과 육의 정욕으로 범죄했고,
요압이 이어서 혈과 육의 정욕으로 헛된 일을 꾸몄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혈과 육은 무익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
혈과 육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다만 혈과 육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 당할 자가 많으리니"(사66:16)
그러므로 혈과 육을 따라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살리시는 영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살리시는 영을 따라 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다윗의 명령안에
자신의 모든 지위까지도 회복할 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들로서는 돌아왔을지 몰라도,
한 나라의 왕자로서는 그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것은, 왕자라는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기대했던 것은,
자신의 권력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성찰보다는 자신의 권력에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성찰이 없을 때,
결국 우리의 마음이 쏟아지는 것은 사람앞에 높아지려 하고,
이 세상의 자랑을 취하려 합니다.
압살롬은 사람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추구할 것이나,
모든 영광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실 것입니다.
묵상
마음이 모호한 다윗,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다시 돌아온 압살롬, 죄에 대한 성찰은 없고,
자신이 아들로서, 왕자로서 권력은 되찾고 싶어합니다.
이제 압살롬은 다윗에게 도전할 것입니다.
성경은 권력과 정치의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확장해 가기 쉬운지를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더욱 커져가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조그마한 죄가 무서운 이유는,
이 죄가 더욱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오늘도 정결하기 원하는 삶의 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도 죄에 대한 민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정결하게 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
하나의 일을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가 가져올 파멸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결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지은 죄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죄로 인해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십자가도 남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죄를 알게 되고, 죄 앞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기적이요, 오직 은혜입니다.
--------
결국 요압의 건의로 그는 다윗의 앞에 다시 나아가서 무릎 꿇지만
진정한 회개와 용서, 화해가 없는 형식적인 입맞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사 시대 긴 머리가 힘의 상징이었던 삼손 역시 블레셋인들의
밀밭에 불을 지름으로 그의 분노를 표출하였지만
결국 자신이 원했던 여인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세상적 방법으로 표출하는 분노와 증오는 그 목적이 아무리 의롭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데 사용될 수 없습니다.
만일 인생의 구원을 위해 불의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와 증오를 사용하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은혜와 진리의 반석 위에
선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안에 채워가는
주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편 103:8~9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
21~22
다윗은 요압에게 넘어가는 척 압살롬을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은 돌아왔지만 죄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반역의 씨앗이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녀의 죄에 대한 다윗의 우유부단함입니다.
그 결과가 반역이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결국, 다윗의 이런 애매한 부정은 계속되는 아들들의 범죄를 초래하고
종래는 반역으로 이어져 아버지와 아들이 전쟁해야 하는 상황까지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 그럽니다. 아직 다윗은 압살롬이 장자를 죽인 것에 대해 마음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압살롬은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은 암논을 죽인 것에 대해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이 장자이기 때문에 더 애틋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모에 열광하는 사람들(25~33절)
15장의 반역이 외모에서 시작되었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버리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잘생긴 외모를 좋아합니다.
문제는 백성들의 환호입니다. 이것이 15장에서 반역을 꿈꿀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다는 표현은 제사장에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외모에 이렇게 주목하는 것은 15장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외모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여전히 외모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모를 좋아합니다
이런 열광 가운데 아버지의 외면은 압살롬을 회개로 인도하지 못하고
분노로 이끌게 한 주범이 됩니다.
더구나 요압 역시 다윗의 마음을 살핀다고 하면서도
압살롬이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외면 가운데는 압살롬이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21절에 돌아오게 한 배경에는 부모로서 다윗은 요압의 억지 중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외면한 것은 왕위 계승 서열에서 차단함으로 아직 분노가 풀리지 않았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적극적으로 찾아가 징계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면 2년간의 외면은
다윗이 내린 징계일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압에 의해 화해 아닌 화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 화해의 장면 어디에도 압살롬이 잘못을 인정했다거나
다윗이 용서를 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을 못 잊고 있고, 다윗은 암논을 못 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리는 점점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는 천차만별입니다.
다윗이 암논과 압살롬을 대하는 방법이나 요압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모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압살롬은 차라리 내가 왕께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입맞춤을 했지만, 사실은 반역의 씨앗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부닥쳐 오는 문제들 앞에 그리스도인 답게 대처하고
그리스도인 다운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마음을 새롭게 해 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만나고 싶지만 다윗은 불러 주지 않는다.
요압을 통하여 아버지 다윗을 만나도록 주선해 주길 부탁하려고 사람을 보내지만
요압마저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는다(29)
종들을 시켜서 요압의 보리 밭에 불을 놓아 버린다.(30)
아버지 다윗에 대한 거절감이 폭발해 버린 것일까?
살인자의 죄책감이 아직도 쓴뿌리로 작용을 하는 것일까?
요압에 대한 내면의 분노가 노출 된 것일까?
아마도 아버지 다윗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쌓이고 있을 것 같다.
이런 부모는 존경 받는 부모이기 보다는 복수 당하는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또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는 것이 가하니라(32)라고 말하고 있다.
압살롬의 심리 상태를 보면 아직도 살인한 행위가 의롭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오히려 지난 5년간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 다윗이 더 불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생각하는 수준이 바로 이런 정도 이지 않을까?
요압을 만나기 위해서 압살롬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29)
자기 밭에 불이 나고 나서야 항의 하기 위하여 압살롬의 집에 왔다.(31)
자기에게 조금의 손해만 있으면 당장 행동하는 인간이지만
남의 부자지간의 어려움과 상황은 애써 외면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요압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었으면 이렇게 압살롬을 방치하면 안된다.
다윗.
다윗은 딸 다말이 강간을 당해도 아무런 조취도 안하고 화만 내었고(13:21)
아들 압살롬이 살인을 하고 3년간 도망자로 살고 있을 때(13:38)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14:1)
예루살렘에 데려오는 것을 허락 했지만 2년 동안 아들 얼굴을 처다 보지도 않았다.
자녀에게 엄청난 거절감을 심어 주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살았던 다윗이다.
모든 삶의 기준이 하나님 이였던 다윗도 지금 이 순간에는 방황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로서 어떻게 이렇게 무기력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자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범죄하고 도망자로 3년간
예루살렘에 돌아 왔을 때에 2년간 5년이나 아들을 처다 보지 않은 냉정한 아버지이다.
책망할 것은 책망하고 가르칠 것은 올바로 가르쳐야 하는데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하는 과정에서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잊어 버린것 같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한가지 희망적인 내용은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었다(33)라는 내용이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의 입 맞춤처럼 배신의 입 맞춤 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먼저 아들에게 입 맞춤을 한다.
이런 화해의 포옹이 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있기를 .
------------
21-24절 :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정(情)을 따르기보다 정의를 지키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다윗은 요압이 청한 대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지만,
압살롬을 아예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왔지만,
왕으로서는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너무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정의를 위해 부정 (父情)을 억눌렀습니다.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정의를 외면하지 맙시다.
25-27절 :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의 칭송을 받을 정도로 외모가 출중했으며, 특히 머리카락이 독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마음은 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를 죽일 만큼 잔인했고,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야욕이 컸습니다.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에는 흡족했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를 판단하는 내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의 됨됨이보다 외모나 이력을 먼저 보진 않습니까?
28-32절 :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자기 잘못은 뉘우칠 줄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가지려 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태우는 불과 같습니다.
압살롬은 3년 만에 돌아왔지만 한 번도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기편이라 여긴 요압마저 그를 멀리하자,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자기 잘못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권력에 집착하는 압살롬은
결국 반란으로 온 이스라엘에 화를 가져왔습니다. 압살롬과 달리,
가지려 하기보다 빼앗은 것은 없는지 먼저 살피고, 오르려 하기보다
남을 밀쳐내진 않았는지 먼저 살피는 사람이라면 공동체에 있던 화도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33절 :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은혜를 받았으면서 딴마음을 품지 맙시다.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 입을 맞추고
아들로 다시 받아들일 때, 그 앞에 엎드린 압살롬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왕국을 차지할 야욕만 가득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의 용서는 백성을 빼앗기 위해 필요한 발판일 뿐이었습니다(15:6).
나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린 나는 무엇을 꿈꿉니까?
---------
하나님 아버지, 오직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달란트에 따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고 겸손히
그 음성에 따라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노와 증오로 우리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락하신 생명과 평안으로 나아가는
인생 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화해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합니다.
존귀하신 성호에 홀로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과 왼전한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셔서
죄와 사망에서 풀어 살리사 죄사함의 은총을 주시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옮겨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무한 감사를 드리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되고 완전한 천국 백성의 신분과 권세를 주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아들의 피값으로 보증하신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인하여 만만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자신의 씻지 못할 죄에 대하여는 사함을 받았지만
그 죄의 결과들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나타날 때
그저 지켜보고만 있으며 침묵하는 다윗 왕의 가족사.
곧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없는 인간적인 용서와 화해를
기록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자식에 대한 연민의 정과 하나님의 징계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모습과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가족의 비극이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력으로 비춰질지 ...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을 한 인간의 연약함과 번민을 보고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도 그렇게 수 년의 시간이 흐르자 자신이 회개했던
그리고 사유함의 은총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방법을 아들에게 적용할 수 없을만큼
희석되었을까요?
아니면 계속되는 가족의 비극사에 대하여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자책감에 심령이 연약해졌는가요?
다윗의 심령을 잡고 있는 복잡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들에 대해 번민했을
다윗에게 연민이 생기옵니다.
유독 혈육에 관해서 연약함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 가정사에서도 비일 비재합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자녀들의 죄 문제가 항상 있어 기도의 제목들도
연민의 정으로 넘쳐납니다
우리의 영적인 게으름과 자녀의 죄 문제 해결에 대한
연민의 정과 하나님의 징벌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침묵하므로
죄를 회개함 없이 용납하는 어리석음을 날마다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인이 결국 사회 전체에 뿌리 내려 사회를 병들게 했으며...
교회 안에서도 자녀의 세대가 그 힘을 잃고...
모이기를 힘쓰라 하신 일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 버리고
세상과 타협함의 결과가 우리의 다음 세대인 자녀 세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한 냉소와 냉랭함을 있게 하지 않았을까 뒤돌아봅니다.
우리 세대의 타락함을...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긍휼히 여겨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맘은 죄사함의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죄를 덮고 감추고 가리우는
인간적인 화해의 몸짓으로 죄 문제가 또 다른 죄를 잉태하는
일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도 깊은 영적 통회함 없이 마음에 앙금을
처리하지 못한 모습으로 인간적으로 좋은 모습들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망각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쌓인 앙금이 흐려진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님과 하나님의 시선과 법도
흐려지는 것이 아님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법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따라 살기 원하오니
나의 마음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사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에 항상있는 육신의 소욕을 성령을 따라 주의 말씀으로 제어하는
믿음을 주사 말씀을 따라 행하므로 이기게 하옵소서
말씀을 순종함으로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성령을 거스려 싸우는 어리석은 행동을 제어하사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시간을 체험하는 날들을 항상 주시옵소서
먼저 주님과의 교제 시간을 진실된 마음의 참된 회개로 부터 시작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해의 기쁨이 우러나오는 기쁨이 날마다
내 심령에 있기를 간구하고 사모합니다.
수많은 만남을 통한 교제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이루어지는 곳에서
항상 나의 주 되시고 우리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저들과 나 사이의 교제에 주께서 임재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며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으로 나를 주장하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인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옵소서
오늘도 주의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주의 말씀으로 날 인도하실 때 순종하는 복을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행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넉넉히 채워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의 고통 가운데 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긍휼과 회복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기억하고
높이는 주님의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