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에 의하면 우리의 최고신은 천신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제일 인기가 있는 실제의 신은 산신이다. 단군이 조선을 2천 년 간 통치하다가 구월산에 들어가서 산신이 된 것이 계기가 아닐까? 단군이 통치자에서 은퇴를 하였을 때 천신이 더 인기 있는 신이었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다. 지신이 더 인기가 있었으므로 지신인 산신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산신제를 지내면서 산신에다 천신까지 포함시키는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단군신화에서는 천신이 주신이면서 지신인 곰을 포함시키는 것과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신라시대의 산신은 주로 여신이었다. 선도산은 서술신모이고, 운제산은 운제신모이고, 치술령은 치술신모이고, 지리산은 노고여신이며, 영취산은 판재선녀이다. 다만 토함산 산신만은 석탈해로서 남신이다. 석탈해는 신라인이 아닌 외래의 인물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본래의 산신은 여신이었음을 강하게 사사한다. 그런 면에서 곰이든, 호랑이이든 여신의 속성을 지녔음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천신이 여신인 경우는 거의 없다. 산신제를 통하여 천신에 지내는 제사를 겸하였다. 따라서 팔공산 정상에 천신제를 올리는 제천단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은 좀 더 검토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천신제는 민간에서 지내는 제사 의례는 될 수 없다. 국가의 왕이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지역 단위에서 지내는 공동체 의례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 단위로 지낸다 하더라도 산신제에 천신까지 포함하여 봉사 대상으로 삼았다. 여신이 점거하고 있던 신라 지역의 산악에는 단군신화의 주신이었던 천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 문화는 백두대간의 동쪽 해안을 타고 유입한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문화를 갖고 온 이주민에 대하여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상하였던 토착 부족이 강하게 저항하였다(여자가 되지 않고 굴에서 뛰쳐 나갔다). 그 세력이 신라 문화의 뿌리가 되지 않았을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 신라 문화가 우리의 강토에 퍼져나갔다. 그래야만이 오늘에 호랑이가 우리의 산천을 점거하고 ,산신이 된 것에 해석이 가능해진다.
단군을 신앙하였던 곳에서는 천신제를 지낸다. 제사의 장소는 주로 산의 정상이다. 신이 하강한 곳이 바로 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신이 하강하는 장소에는 원래 신목(神木)이 있었다. 신단수라 하여 신목에서 제사의례를 올렸다. 단을 설치한 것은 나중의 일이라고 하였다. 산의 정상에서 올리던 제천 의례는 장소가 신목이 있는 산에서 올리므로 천신제는 자연스레 산신제와 합쳐지게 되었다. 신목은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고, 다시 당집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신목, 신단, 당집의 순서로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옛날에 천신 의례를 올리던 산을 밝산(白山)이라고 하였다. 즉 백산의 이름이 붙은 산이다. 그래서 천신제를 올리던 산에는 이름에 백(白)이 들어갔다. 각 지역에서 천신제를 올렸으므로 우리나라에는 ‘백’이 들어가는 산 이름이 많다. ‘백’의 이름을 가진 산 중에 백두산이 으뜸이다. 이외에도 불함산, 개마산, 도태산, 태백산, 장백산, 백악 등의 이름도 같은 뜻을 가졌다.
백산 계열은 원래 부여계 문화에서 유래한 산 이름이다. 이름으로만 본다면 우리와 가까운 태백산과 소백산은 천신제를 올린 산이 분명하다. 지금도 태백산의 정상에는 태백산사, 혹은 천황당이라고 부르는 제천의례의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 올리는 제천의례는 천신제가 주 의례이면서 산신제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취한다.
어쨌거나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백두대간을 경계로 백산이 많은 서, 북쪽 지역과 동, 남쪽 지역에는 천신제 또는 산신제에 차이가 있으리라 추측된다. 신라 문화권의 중심 지역에 있는 팔공산에도 제천 의례가 있었을까? 있었다 하더라도 산신제가 주 의례이고 천신제는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옛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신라왕이 산천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도 일성 이사금 5년 10월에 북방으로 순례를 하던 중에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림이사금 3년 3월에 우두산(牛頭山-지명)에 갔을 때 태백산에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하였다. 경주에서는 다만 산천에서만 제사를 지냈으나 북방 지방으로 순행을 가서는 태백산에서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신라 문화권과 고구려 문화권 사이에 제사의례에서 차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곰 문화권과 호랑이 문화권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경주 출신의 김부식이 신라를 역사의 전통성으로 삼고 쓴 역사서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가 없다. 삼국유사를 위시한 비 전통적인 역사서에는 단군신화를 크게 다루고 있는 것은 전통성으로 인정은 받지 못하였더라도 민간의 차원에서 단군신화는 크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문화의 중심권에 있는 팔공산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단군신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천신제는 올리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한다. 신라 계열의 의례 방식인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 방식으로 의례를 올렸을 것이다. 즉 지신 계열인 산신제를 올리면서 제천 의례도 포함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태백산의 제천단을 참고로 살펴보자. 산의 정상에서 제천의례를 치른 재천단이 있다. 본래는 태백산사 또는 천왕당이라고 불렀다. 목민심서에 의하면 영남관찰사 김치가 음사를 금한다면서 태백산사를 허물어 바렸다. 이것은 태백산사가 제천제를 올린 곳이라기 보다는 토속 신앙지로서 당집일 개연성을 말해준다. 사당의 명칭도 당집이다. 후대로 올수록 당집은 산 아래로 내려와서 마을 주민들이 산신제를 올리는 터가 되었다.
태백시에는 태백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소도동(所道洞)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현재는 태백산 등정을 할 때 출발하는 곳으로서 시립공원이다. 소도는 소도(蘇道)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예전에 솟대가 있는 장소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소도가 있는 장소는 산의 언저리이거나 수풀 속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려 시대의 영고나 동맹의 제천 의례가 소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산신제로 바뀌지 않았을까?
부계면의 한밤 마을 입구에는 숲이 가로막고 있다. 비보숲이라 하여 마을에 액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돌로 만든 솟대가 남아 있다. 솟대가 있는 이곳의 숲에는 지금도 울긋불긋한 헌겊을 매단 것을 자주 본다. 마을 동제를 지내는 장소라고 하였다. 천신제가 산신제와 습합되어 마을로 내려오면 마을의 지킴이 역할을 한다. 마을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서 동제를 지내는 성지가 된다.
팔공산 정상에 있는 돌무더기를 제천단으로 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신화적 특징은 굴이다. 굴은 구석기 시대부터 종교의례를 올리는 신앙지로 알려져 있다. 3만 년 전의 쇼베 동굴을 위시하여 많은 동굴에서 종교의례를 올린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후에 굴에 관한 전설과 신화는 수도 없이 많다. 제우스 신이 이데산의 동굴에서 자라서 올림푸스 신족의 우두머리가 된 사실도 굴 신앙과 관계있다. 팔공산에도 굴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굴 이야기는 불굴사를 말할 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