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 아는가??. 아비귀환의 구 남원역.........39
.
.
39. 붉은 꽃속에 숨겨진 처절한 구 남원역(도심속 향기원)
..
남원의 관문 구 남원역!. 사실 여행지로서의 전라도 남원은 진수성찬(珍羞盛饌)이라고 할수 있는 도
시다. 짠맛, 단맛, 신맛, 쓴맛, 감칠맛 까지 5대맛 모두를 잡아내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최고 맛의
고장 남원이다,
.
또한 예술의 혼이 담겨있는 문화유산(文化遺産)속에서 지리산의 숨결을 마주 하노라면 정갈한 먹거
리와 더불어서 예향(藝鄕)의 도시 남원,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춘향의 사랑이야기에
빠져든다. 그 역사의 현장에 구 남원역이 자리한다, 지금이야 각종 승용차로 다니지만 과거엔 열차를
이용한 여행이 주로였기 때문이다.
.
남원역 옮기기 전의 2002년의 모습
.
.
.
지리산 관광이나 남원시를 관광하기 위해 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
통되기 전에는 전북 동부권의 순창군, 장수군, 임실군과 경남 북서부권의 함양군 사람들이 서울행 열
차를 이용하기 위해 많이 이용하였던 한만은 남원역,수많은 사람들의 애환(哀歡)과 이야기를 담고 이
곳을 오가며 달리던 열차는 이제 발길을 끊고 새로운 역사로 방향을 틀어 들어온다.
.
유랑자는 남원의 페역을 따라 쓸쓸하고도 초라한 정문을 가른다. 원래 철길이란 출입 금지구역 이지
만 이제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은 습기 머금은 한 여름밤의 끈적한 바람만 운행한다. 유랑자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외줄 철로 위에서 오래 걷기 시합을 하거나, 겁도없이 철로를 베개삼아 잠을 청하기도
하곤 하였다.
.
.
.
.
철길에 귀를 대면 덜거덕 덜거덕 열차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보이지 않던 열차는 기적소리를
따라와 점점 커지다 쏜살같이 바람을 가르며 어린 유랑자 앞을 지나가곤 했다. 이제 세월은 열차보다
빠르게 흘러 인생(人生) 반환점을 돌아버린지 오래다. 추억(追憶)의 기차는 어디로 떠나 버렸을까?
.
그리고 예전 기차가 올때 철로에 누워 담력시합을 하던 소중하고 그리운 칭구들은 이제 반백이 되어
가끔씩은 안부를 묻는 정도로 세월은 훌쩍 흘러 버렸다. 비 개인 남원의 하늘이 아직도 우중충 하다.
일주일 로는 부족한 남원여행의 하루가 반나절도 지났다.
.
.
.
.
은하수(銀河水).가 흐르는 한 여름이면서 가을의 시간은 계절의 경계에 걸려있다. 화려하고 녹음 짖
은 녹색의 빛들은 조만간 붉은 색동옷으로 갈아 입을 것이다. 이제 무더운 여름보다는 여행하기 좋은
계절. 화려한 색감(色感)이 넘처나는 계절. 가을을 더 사랑해야 할 것 같다.
.
여름이 지난 그 자리엔 첫사랑의 미소와 그리움이 페역 철길 끝자락에 걸린 벤취에 앉은채로 대답이
없는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 끝도없이 펼처지는 두 줄의 철길을 타고 떠 났던 첫사랑은 돌아올 기미
도 없이 황량한 바람만 철길위를 휩쓴 시간이다.
.
.
.
.
유랑자는 잠시 객이 떠난 페역 벤취에 앉아 쓸쓸함을 소환해 한폭의 수채화를 화폭에 담아낸다. 일단
조용해 좋다. 복잡한 도심의 소음이 사라진 폐역.멍 때리기엔 역시 이곳만큼 좋은곳이 없다. 옛 영광
을 뒤로하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 선 (구)남원역은 녹슬은 철길위로 아름다운 꽃들이 계절을 바꾸
어가며 덩그라니 빈 역사의 쓸쓸함을 아름답게 채워주고 있을 뿐이다.
.
유채꽃, 양귀비, 작약, 코스모스등 봄에서 부터 가을까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환
생하고 그 모습을 고이 품은 (구)남원역은 또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탄생하고자 몸부림을 치고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남원역은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
.
.
.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고픈 몸부림으로 파 헤처지고 다듬어 지면서 ‘만인공원’이란 이름을 달
고 변신에 변신을 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남원역의 처절했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
시 이 남원역은 역사적으로도 한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초한름 개양귀비의 붉은 꽃잎이 옛 상처를 파
헤집어 놓은 듯이 붉게 피는 꽃처럼 핏빛으로 얼룩지고 물든 곳이다.
.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구 남원역 자리는 본래 남원성 북문과 만인의총이 있었던 자리였다. 지금으로
부터 423년전, 정유재란의 남원성 전투 당시 조명군이 최후의 항전을 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가 남
원성 북문이며, 이로 인해 남원성민들이 몰사한 통곡의 현장이다.
.
.
.
.
만인의총은 이 때 항전하다 전사한 조명군과 남원 주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무덤이다. 비록 남원성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남원성 전투에서의 결사항전으로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
세월이 흐른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일본놈들은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이 이곳 북문 전투에서의 후
유증으로 결국 패퇴하게 됐다”며 그 보복으로 “일제시대 때 일본은 북문을 없애고 이곳에 남원역을
건설 함으로써, 후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피로 물든 그 자리를 짓밟고 다니게 하면서 선열들의 얼
과 넋을 으깨고 늑살(勒薩)하게 만들었다”
.
.
.
.
지금은 옮겨갔지만 70여 년 동안 남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남원역의 뒤에는 조그만 철책 안에 ‘만인의총유지(萬人義塚遺址)’라는 조그만 돌 표지석이 서 있다.
그 만인의총 유지 바로 뒤쪽에서부터 남원성 북문 자리로는 남원성의 북쪽 성벽이 가로 지르고 있었다.
.
1597년(선조 30) 남원성 전투 때 남원성 북문을 지키고 있었던 장수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었고
남원성을 지키던 우리 군사들은 거의 모두가 북문을 지키다 1만여명이 모두 순절하였다. 충(忠)과 의
(義)의 고장 남원은, 실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장 많은 의병을 양산해낸 고장은 전라도 였으며
그 중에서도 남원 지방의 의병이 가장 많았다.
.
.
.
.
그런데 일제는 조선을 강점 하면서 철저한 계획하에 만인의총(萬人義塚) 있던 이 자리에 남원역을 만
들었고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남원역을 이용하면서 이 일대를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
십, 수백의 열차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굉음을 내며 이 자리를 왕래하였다.
.
한맺히게 죽어갔던 그 처절했던 영혼인들은 후손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과
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을까?? 이렇게 일본놈들은 교활하고도 교묘한 방법들을 써 가면서 우리 국
민들을 우롱하고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
.
.
.
이런 상황 속에서 어찌 친일 청산. 친일 잔재놈들을 처단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한민국 정
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토착왜구, 친일 잔재 놈들을 하루빨리 잡아내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
이미 죽은 자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해야한다는 게 대다수 국민들의 바램이자 유랑자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하다. 친일 청산을 하자는데 하지말자는 지금의 야당 ‘국개’들부터 처단해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
.
.
끝으로 1590년대의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잊었던 우리는 310여년 뒤인 1900년대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제는 남원성 북문(구 남원역)에 보복했다. 이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는 또 언제 일본에 예속
될지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과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
정유재란당시 북문에서 죽은 왜놈들은 300년도 넘은 세월이 흐른뒤에 찾아와 보복한 것을 생각할때
우리가 일본산 불매운동을 하는 이유중 하나이다. 우리는 300년이 아니라 앞으로 1.000년동안은 일
본산 불매운동을 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본차. 일본산 타고 사는 개 새기들 각성해야만 한다,
.
.
.
이러한 관점에거 생각 하건대 남원을 비롯한 전라북도와 국가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참혹했던 과거의
현장인 구 남원역 부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지금 부터라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
.
참고로 남원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비지’, 임진·정유재란 당시 남
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그리고 이에 대한 보복이 깃든 남원역 건설, 일본의 동학농민 토벌 과 관련한
교룡산성 등이 역사의 한 자락이자 남원 농민들이 내건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산물이다.
충(忠)과 의(義)의 고장 남원!,의 자랑이요 자부심 일것이다. 오늘날 만인의총(萬人義塚)의 영혼들이
그걸 증명해 주면서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는 말자......
.
할말은 너무너무 많지만 뼈 아픈 역사를 자꾸만 소환 하는것도 한여름 무더위 만큼이나 지치고 짜증 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배들이여!. 칭구들이여!,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향후 1.000년동안은 일본산
불매운동에 적극 참여 하자.
.
.
[남원 추어탕이 대중화되기까지]백과사전 참조
.
남원은 선사 시대 이래 천혜의 자연 환경인 지리산과 섬진강을 보유하는 전라도 동부 산악원의 중심
도시로 그 영역이 광대하였고 산악 문화와 농경 문화를 현재까지 아우르고 있다.
.
국내 5대강의 하나인 섬진강의 지류 요천과 축천을 중심으로 하는 청정 하천이 남원 곳곳으로 흐르
고 풍부한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어 자연스레 미꾸라지를 비롯한 민물 고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환경
을 갖추고 있다.
.
.
.
.
여기에서 남원의 추어탕 문화의 기원이 시작되었고, 양반층보다는 서민층에서 만들어 먹다가 지식인
층의 기호 식품으로 자리잡으면서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남원 지역 주민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겨
울에 대비해서 보양 음식으로 살이 통통히 오른 미꾸라지 익혀 통째로 갈아 넣고 시래기와 함께 삶아
탕을 많이 끊여 먹었다.
.
가을철에 주로 먹던 추어탕이 사계절의 보양 음식으로 이해되면서 음식으로 개발되었고, 장어와 잉
어에 버금가는 미꾸라지만의 효능도 증명이 되었다. 또 지리산 운봉에서 나는 산채·토란대, 고사리,
그리고 고랭지 푸성귀를 말린 시래기와 각종 나물들을 넣고 끌인다.
.
.
.
.
특히, 남원 추어탕에 빠져서는 안 되는 향신료 초피(전라도에서는 젠피라 부른다)를 쉽게 구할 수가
있어 남원은 어느 지역보다 손쉽게 추어탕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남원은 추어탕 문화
가 저절로 발달할 수밖에 없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남원 추어탕은 남원을 맛의 고장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하였고, 식품영양학적인 면에서도 미꾸라
지와 시래기의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인정받아 지리산을 대표하는 선도적인 사계절 보양 음식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현재 대표적인 추어탕 거리는 춘향전의 주무대인 남원 광한루원 주변에 약 20개의
식당이 모여 형성된 거리이다.
.
.
.
.
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클릭
http://cafe.daum.net/b2345/9toB/1771
.
전북 남원시 충정로 65
(지번)동충동 197-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