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6. 15. 토요일.
날씨는 흐리다.
일기예보에는 오늘 서울에서는 흐리고, 비가 내린다는 표시가 떴다.
문학카페에 오른 글을 보았다.
시 문구에서 본 '중수(中樹) 박통'.
무슨 용어인지, 어떤 내용인지를 몰라서 인터넷 어학사전으로 검색했다.
세상에나. '中樹'가 박정희를 뜻하는 호(號)이라고?
조금만 퍼 온다.
박정희
해방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 ~ 9대 대통령 등을 역임한 군인 박정희
본관은 고령(高靈). 창씨개명한 이름은 다카키마사오[高木正雄], 호는 중수(中樹).
경상북도 구미 출생.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
1)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1917. 11. 14.~ 1979. 10. 26.)
2)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다시 바꿔서 완전 일본인이 되고자 했음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갔다.
당시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 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犬馬の忠]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 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滿洲新聞)』(1939. 3. 31. 7면)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으로 복역은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뒤 현역으로 복적되었다.
광복 후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되었다.
6·25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명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이름은,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한국 광복군에 합류한 진짜 광복군 장준하가 주장한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개명이며 박정희의 일본군 시절 동료들이 증언한 이름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편입했을 때 다카기 마사오에서 완전히 일본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는데, 그 증거로 일본 백과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되어 있다.
*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돼 있다.
이 사전은 동경대학출판회가 2005년 8월15일 발간한 것이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대통령 묘소.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인다.
추가 자료.
좌익사상에 심취했던 셋째 형 박상희가 봉기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즉결처분된 것이다.
김종필의 장인이기도 한 박상희는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전제하고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남로당 군사부 책임을 맡고 있던 이재복의 자술서에 따르면, 그는 고향에 돌아온 박정희에게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며 남로당 입당을 권유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가 군에 복무할 당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을 계기로 군내의 좌익 소탕작업이 벌어지자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그해 11월 체포된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9년 1월 강제 예편되는 아픔을 겪는다. 웅비하기도 전에 또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 과정에서 그는 군부 남로당 조직을 실토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밀고). 이리하여 자기가 살아 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대한 또 하나의 정신적 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라고 서술했다.
문학지의 문학-글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자료를 검색하면 무척이나 다양한 자료가 있을 게다.
하지만 늙어가는 인생 후반기의 내 삶에서는 이런 류의 자료들은 별로이기에 이쯤에서 접는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년간 근무했던 시절이 이제는 꿈처럼 흐려지고 있다.
벚꽃 필 무렵에는 바람에 흩날리던 꽃잎도 화사했고, 아카시꽃 필 무렵에는 달콤한 꽃내음새가 무척이나 짙게 멀리 번졌다.
무궁화꽃도 피고....
이하 생략....
2024. 6. 15. 토요일.
첫댓글 불행한 시대를
살다간 이 땅의
불행한 엘리트의
삶 같습니다.
오늘 선생님의
깊고 해박한 글을
읽으면서 배우고
갑니다.
안타깝고 답답하기
만 합니다.
식민지 청년의
안타까운 삶이
가슴 아픕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1960년대 말 정치학교수들은 한국정치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지요.
엉뚱하게 외국 사례로 설명할 뿐 국내 정치현상에 대해서는 별로.....
위 시 원문에서는 박통을 기리는 내용입니다만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박통이 아니라 '우리 한글'이라고 봅니다.
학교에서 한글로 공부하기 시작했기에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제 아버지 어머니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요. 시골 산골사람 대부분은 무학자, 문맹자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학교 다니기 시작했고, 제 시골 동창생 대부분은 소학교 졸업이 끝.
박통에 대한 이미지,해석이 제각각이겠지요.
제 직장생활 마직막 1년은 서울현충원에서 보냈는데 이승만, 박정희 묘역에는 별로...
후대의 재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