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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제1독서 : 이사 52,13-12
제2독서 : 히브 4,14-16; 5,7-9
복 음 : 요한 18,1-19,42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 여인이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냅킨에 무엇이든 좋으니 아무거나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낙서라도 해주면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이에 피카소는 30초 동안 끄적이며 냅킨에 그림을 그려주고는 1만 달러를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천 만원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깜짝 놀라며 항의했지요.
“겨우 30초 동안 그렸잖아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이런 습작도 현재 몇십억에 거래되고 있지요.
따라서 1만 달러가 비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가치를 알고 있었다면 분명히 1만 달러를 기쁜 마음으로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력의 가치를 인간 세상의 눈으로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치는 노력의 강도를 통해서 더 높아집니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며 나 자신의 만족도 노력의 강도를 통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는 주님 사랑의 최고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그 사랑을 알아봤을까요?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향해서 조롱과 모욕의 말을 던지고
실제로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감히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지상에 육화되어 오셨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똑같이 되셔서 똑같은 삶을 사셨다는 것.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이처럼 하느님께서 행하신 노력의 강도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위한 노력을 하고 계신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우리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특히 하느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만을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그런 사랑을 세상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이 멀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인간의 역사와 보이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보이는 역사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악이나 죽음 등은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혼란과 비참함은
우리의 존재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당한 처사나 불의의 사고나 재난 등은
참으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고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위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8,42)
주님!
가슴이 이토록 쓰리고 아픔은
당신께서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계신 까닭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채 말입니다.
이토록 제 영혼이 떨고 있음은
당신께서 제 안에 동굴을 파고 들어와 좌정하고 계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상처에서 젖을 먹이시느라고 말입니다.
깊은 침묵의 함성으로 속삭이는 그 사랑의 숨결을 듣게 하소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년에는 ‘기생충’이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4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올해는 ‘미나리’가 미국의 영화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소수민족의 애환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미나리는 음식의 주된 재료는 아니지만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는 재료입니다.
미나리는 주된 음식을 빛나게 해 주는 재료입니다.
아구찜에도 들어가고, 매운탕에도 들어가고, 쌈의 재료도 됩니다.
싱싱함과 독특한 향으로 입맛을 더해 줍니다.
미나리와 더불어 개나리도 있습니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노랗게 피는 개나리와 함께 봄이 오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산 사람이 고향이 그리워서 개나리를 가져다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란 잎은 싱싱하게 자라는데 노란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겨울을 지나야만 노랗게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우리 말 중에 ‘비나리와 희나리’도 있습니다.
비나리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희나리는 마르지 않은 장작이라는 뜻입니다.
두 말은 가수 심수봉과 구창모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심수봉은 ‘비나리’에서 간절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구창모는 희나리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비나리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 버렸어.
나만을 사랑하면 안 될까요.
마음만 달아올라 오늘도 애타는 나의 몸짓들
따사로운 그대 눈빛 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하늘이여 저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사에 깊이 들어있습니다.
희나리의 가사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사랑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가사에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배반당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성금요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가난한 이, 아픈 이, 소외된 이, 죄인들에게는
좌절과 절망의 수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승리를 알리는 수난이요,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빛의 승리요,
죽음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는 부활의 빛임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승리요, 삶의 허무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과 구원의 여정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사명’이라는 생활성가의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죽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십자가가 사랑이다.
십자가의 여정을 통해
완성되는
사랑의 참된 여정이다.
참된 사랑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이다.
삶의 의미는
십자가의 의미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는
십자가의 운명 공동체이다.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십자가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누가 대신 져줄 수는 없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한다.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십자가로 구원하신다.
생명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아픔과 목마름에
함께 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이시다.
십자가의 여정은
우리 삶의 여정이다.
인생이 십자가이다.
우리의 하느님을
십자가에서 만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다.
사랑하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십자가는
거짓사랑을 정화한다.
참된 사랑은
십자가를 따른다.
수난도 죽음도
십자가의 은총임을 믿는다.
죽어야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이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겉옷과 속옷의 의미: 은총의 풍부함과 진리의 단일성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6시’에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십니다.
제6시는 에덴동산의 6번째 날을 상징합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 당신이 주시는
‘생명의 물’에 관한 말씀을 하신 시각도 ‘제6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신 곳도 ‘동산’이고 묻히신 곳도 ‘동산’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구약의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고 읽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는 말을 함으로써
탈출기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집에서 먹었던 파스카 예식도 함께 고려하며 읽으라고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여섯 번째 날은 ‘창조’, 곧 ‘세례’의 날입니다.
이 창조를 위해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은총’은 우리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줍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주는 음식이 은총입니다.
자녀들은 이 음식을 먹고 부모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진리’는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모범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십자가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보고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녀는 동물적인 본성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참 인간이 되어 세상에서 살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은총과 진리를 내어주는 상징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의 ‘겉옷과 속옷’으로 표현됩니다.
경비병들은 겉옷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가집니다.
겉옷은 어느 나라나 ‘신분’을 나타내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더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분, 즉 하느님 자녀로서의 천상 왕의 신분을 우리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이 은총은 마치 에덴동산의 물줄기가 4줄기로 갈라지듯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이는 은총의 충만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기에 경비병들은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집니다.
속옷은 겉옷의 본질을 말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다양하고 풍부하더라도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음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는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기에 한 교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골고타 위에 여러 여인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오직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우리에게 주시고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십니다.
각자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양하게 주장하지만
우리는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품고 있다고 믿습니다.
2004년 9월, ‘오프라 윈프리 쇼’의 19번째 시즌을 시작하면서
오프라 윈프리는 방청객 276명 모두에게
제너럴모터스(GM)의 스포츠 세단인 폰티액 G6을 한 대씩 선물했습니다.
이날 방청객이 받은 자동차의 가격은 모두 합해 7백만 달러(약 76억 원)에 이릅니다.
선물을 받은 방청객들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차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편지로 써 보낸 사람들입니다.
쇼는 윈프리가 방청객 11명을 무대로 불러내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차를 한 대씩 선물했으며, 이어 남은 방청객들에게 선물 상자를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이어 윈프리는 방청객들에게 나눠 준 상자 중 하나에 12번째 차 열쇠가 들어 있다고 말했고,
방청객들이 상자를 열었을 때 모든 상자에 자동차 열쇠가 들어 있었습니다.
윈프리는 이 쇼를 위해 제네럴모터스에 차 협찬을 의뢰했습니다.
회사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엄청난 쇼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가 아니면 회사가 그녀에게 76억 원 상당의 차를 제공하려 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만한 홍보 효과가 있으니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로부터 은총을 받기 위해 인정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차는 방청객 모두가 받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겉옷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차가 없어서 온 이들 모두가 차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아내시며
모두가 하느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마치 하느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세상 것을 잃음을 아깝게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해 주신 자녀의 자격을 박탈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차가 오프라 윈프리이기 때문에 전해질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여러 통로로 은총을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를 통해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신 교회가
참된 은총의 통로요 진리를 품고 있음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겉옷과 속옷을 입고 있습니다.
겉옷은 내가 받은 은총이고 속옷은 내가 깨우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프라 윈프리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느님 자녀로서 당당하게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이들,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은총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 은총을 내어줌은 찢어지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이럴 줄 아는 사람이 진리를 깨우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로서 은총을 받고 그것일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 금요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일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1947년, 미국 야구계에 굵직한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재키 로빈슨이라는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처음으로 입성한 것입니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로빈슨은 힘든 시련에 직면합니다.
심한 말로 모욕당하는 것은 예사였고,
백인 선수들은 고의로 몸을 부딪치고 땅바닥에 떠미는 일도 수없이 잦았습니다.
수만 명의 관중도 로빈슨 편은 없어 보였습니다.
로빈슨이 경기장에 나타나면 인종차별과 관련된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심지어 같은 팀 동료들까지도 로빈슨을 조롱했습니다.
시즌 중반쯤 지난 어느 날, 로빈슨은 더없이 힘든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쉬운 땅볼을 몇 개나 처리하지 못했고 타격도 형편없었습니다.
관중들은 다른 날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습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지쳤고 실수만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석으로 들어온 로빈슨은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팀의 주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순간 관중은 숨죽이듯 조용해졌습니다.
로빈슨은 힘이 다시 샘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훗날 로빈슨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간단한 몸짓이 나를 살렸지요.
주장은 내가 정말 우리 팀 선수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겉옷을 내어주며 자신의 능력이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속옷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속옷도 아낌없이 내어주며 다양한 은총 안에서 진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한 팀으로 만드는 힘이 더 중요합니다.
갈라지는 공동체는 은총이 많아도 그 은총이 제 역할을 발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은총을 청하는 이들이 그 은총을 주는 이 안에서 하나로 모이게 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교회가 갈라져서는 안 되고 공동체가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치된 교회를 통해 충만한 성령이 흘러나옵니다.
내가 일치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성 금요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은총의 충만함과 다양성은 모든 이들이 하나 됨을 지향해야 합니다.
품위 있는 삶과 죽음을 위하여
- 진리, 공부, 순종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요즘 참 나라 안팎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입니다.
좀처럼 악순환의 질곡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건 비단 우리의 경우뿐 아니라 온 세상 대부분 나라들이 겪는 현상입니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도 온통 부정적 어둔 뉴스들 뿐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첨단 문명의 시대라 해도 사람은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탐욕의 무지의 사람들 같습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일이 평범한 듯 하지만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중 불가의 용어가 청정욕淸靜慾입니다.
맑고 깨끗한 욕망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탐욕이 아니라 잘 살다 잘 죽고 싶은 거룩한 욕망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잘 사랑하고 싶은 욕망, 기도를 잘하고 싶은 욕망,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성인이 되고 싶은 욕망 등 끝이 없습니다.
하여 오늘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강론 제목은 ‘품위 있는 삶과 죽을을 위하여’로 정했습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는 참 좋은 욕망이 맑고 향기로운 품위 있는 삶과 죽음일 것입니다.
나라에는 국격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고,
꽃에는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습니다.
과연 내 인격의 향기는 어떠할런지요.
요즘 파스카의 봄꽃들이 한창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때되면 여지없이 만발한 봄꽃들의 향기가 수도원 공기를 가득 채워 향기를 숨 쉬는 느낌입니다.
꼬박 일년을 기다렸다가 때가 되자 일제히 피어난 파스카의 봄꽃들,
꽃처럼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인고忍苦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좋은 진리를 배웁니다.
참으로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파스카의 봄꽃들 만발한 계절에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예수님의 성삼일 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을 기리며
우리 삶과 죽음을 새롭게 점검해 보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의 수난복음이나 독서의 말씀을 통해서 잘 드러나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입니다.
그냥 기억하고 기념하라 있는 성삼일 파스카의 전례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 예수님처럼 파스카의 삶을 살라고
선물처럼 주어진 파스카 성삼일의 전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맑고 향기로운, 품위있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진리입니다.
진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명명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요,
진리의 협력자라 명명했던 베네딕도 교황 16세입니다.
진리를 향한 청정욕은 얼마든 좋습니다.
진리야 말로 구도자들이자 수행자들인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를 깨달아 알아 갈수록 마음의 순수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상 것들을 소유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점차 소유의 노예,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맛을 본 사람들은
탐욕의 맛, 세상 맛, 돈맛을 잃어 버려 무욕의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진리의 맛으로 살 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지혜의 사람, 빛의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 나를 삽니다.
“진리는 무엇이오?”
어리석은 빌라도는 진리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진리와 하나 되어 온전히 하느님의 진리를 사신 우리 파스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참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 말씀을 실행할 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사랑할 유일한 대상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영원한 목표이자 방향이 되시는 분은,
중심이자 의미가 되시는 분은 진리이신 주 예수님뿐입니다.
둘째, 공부입니다.
평생공부가 진리이신 예수님 공부입니다.
예수님 사랑, 예수님 공부, 예수님 닮기가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공부해야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 사람이 됩니다.
공부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진리 탐구와 공부에 전념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수난의 와중에서도 마음이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광란하는 폭도들의 지옥같은 현장 속에서도 요지부동 평화를 누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막연한 공부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진리 공부요, 참 사람이 되는 공부입니다.
공부에 대한 좋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요즘은 생사도 의료도 도움으로 외부 개입 여지가 있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 한 가지, 공부다.
취업이 안되는 시대라면, 공부를 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 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공부는 내 몸이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 쇳물, 망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해, 기技와 예藝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지식공부가 아니라 이런 장인이 되는 공부가 진짜 산공부입니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는 공부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수도원의 정주터가 공방工房이 됩니다.
이런 수도원 공방의 공부인工夫人의 모범이 바로 우리 수도원의 배밭과 순대방 책임을 겸한
재무 담당의 마르코 수사와 주방장과 채소밭 책임을 겸한 부원장인 스테파노 수사일 것입니다.
공부는 우리 분도수도자들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규 제4장,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는
영적 장인을 위한 구체적 공부 항목이 74개가 나오며
다음 마지막 고무적인 결론 말씀도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보라! 이런 것들이 영적 기술의 도구들이니,
우리가 이것들을 밤낮으로 끊임없이 채워 실천하고 심판의 날에 그것을 돌려드리면,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그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부지런히 실행할 장소는
수도원의 봉쇄 구역과 수도회 안에 정주하는 것이다.”
비단 정주의 분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각자 제자리에 정주하면서
공부의 장인이 되고자 영적으로 육적으로 기와 예를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는 신비가神祕家가 되고 공부에는 학자學者가 되고,
일에는 전문가專門家인 신자가 된다면 정말 영육으로 온전한 장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듯 순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우리의 수도생활을, 모든 수행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결을 사랑하고 가난을, 고독을, 침묵을, 경청을, 겸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행을 사랑하면 저절로 마음은 순수해지고 삶은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자유는 마침내 섬김의 사랑에서 완성됩니다.
침묵과 경청의 겸손도 결국은 순종을 위한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 순종할 때
마지막 죽음의 순종도 잘 하여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수난복음 전반의 예수님께 감지되는 사실은 진리에 순종입니다.
마지막 임종어가 순종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참 깊은 울림을 주는 두 말마디입니다.
“목마르다”
평생 늘 진리를, 하느님을 사랑했고 늘 목말라했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마지막 순종을 통한 사명의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역시 예수님의 순종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역시
그대로 죽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비운 수난 복음의 예수님께 대한 묘사처럼 들립니다.
사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바로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의 순종은 그대로 우리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끝기도 응송대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라는 후렴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마음 속 깊은 갈망은
참으로 하느님 자녀다운 삶, 품위있는 삶과 죽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공부에 대한 사랑, 순종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의 사람,
공부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의 우렁한 권고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이런 대사제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십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합시다.”(히브4,14-16).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