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요일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사람들의 행실을 보고 교회에 나온답니다.
주일 오후 모처럼 이발소에 앉았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단골이라서 앉아 있기만 하면 금방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특히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나 교황님 선출과 가톨릭에 관해서 은근히 잘 알고 있다고 자랑도 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합니다. 여러 번 성당에 나갈 것을 권유해 보기도 하였지만 오래 전부터 절에 다니시는 어머니 핑계를 대고 선뜻 발걸음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 성당에 나오겠다는 대답만 벌써 여러 번 받은 상태입니다. 그는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행실을 보고 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잘못 되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본을 볼 것이 있어야 그 모범을 따라서 그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종교를 선택하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느님의 성소(聖召)에 의해서 초대 받은 데 대한 올바른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초대하셨고, 그 초대에 나는 망설이고, 주저하고 마지못해서 끌려오듯 성당에 들어섰고, 억지로 기도하고, 봉사생활을 하면서 최소한의 교무금과 헌금으로 체면을 세우고, 죄를 놓고 합리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흥정하면서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 속에서도 은총과 구원을 받으려는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선교는 모든 사람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불러주신 하느님께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취임미사 강론에서 요셉 성인은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보호자로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감동 깊은 강론을 해 주셨습니다.
[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과 교회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요셉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하느님 현존의 표징들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며 자기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1독서(2사무 7,4-5.12-14.16)에서 들은 대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지은 집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말씀, 당신 계획에 충실할 것을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집을 지으십니다. 그러나 당신 성령의 인호가 새겨진 살아있는 돌로 집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호자’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느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요셉은 자신의 보호에 맡겨진 사람들을 더욱 세심히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변 사정에 밝습니다. 참으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 여러분, 요셉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든 기꺼이 응답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인 소명의 핵심을 봅니다.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를 보호합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호자’가 되는 소명은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보다 우선되는 차원으로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차원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이야기하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 준 대로 모든 피조물,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창조물 하나하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향하여, 특히 아이들, 노인들, 우리가 흔히 생각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궁핍한 이들을 향하여 사랑의 관심을 보여 주면서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가족이 서로서로를 보살핀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보호하고, 그 다음 부모로서 자녀를 돌보며, 자녀들 자신도 자기 부모를 보호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신뢰와 존중과 선으로 서로를 보호하며 참된 우정을 쌓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우리의 보호에 맡겨져 있고 우리 모두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선물의 보호자가 됩시다!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가 피조물과 우리의 형제자매를 돌보지 못할 때마다 파괴의 길이 열리고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슬프게도 역사의 모든 시기마다 죽음의 음모를 획책하고, 파괴를 일삼고, 인간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헤로데”가 존재해왔습니다.
경제, 정치, 사회생활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간곡히 요청하고자 합니다. 피조물의 “보호자”, 자연 안에 새겨진 하느님 계획의 보호자, 인간의 보호자와 자연의 보호자가 되도록 합시다. 이 세상이 나아가는 길에 파괴와 죽음의 징조가 따르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나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증오와 질투와 교만이 우리의 삶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래서 보호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마음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 안에 선의와 악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는 건설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함, 나아가 부드러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황 성하의 강론말씀이 바로 복음 선교의 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복음화 되도록 하는데 마르코 사도처럼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 선교를 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자신을 복음화하고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보호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복음 선교를 하는데 용기를 내십시오.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5,5ㄴ-14
사랑하는 여러분,
5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
12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축일4월 25일 성 마르코 (Mark)
신분 : 복음사가, 주교, 순교자
활동 연도 : +74년경
같은 이름 :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Marcus)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12. 25)과 동일 인물로 요한은 유다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던 예루살렘 가정 교회의 집주인 마리아(Maria)가 그의 어머니인 듯하다. 그는 또한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사촌이며(콜로 4,10), 키프로스(Cyprus) 태생의 레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인물로도 여겨지나(마르 14,51-52)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와 성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사도 12,25), 그다음에 성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가서 그와 같이 성 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을 수행하였다(사도 13,5). 그러나 팜필리아에서 성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사도 13,13).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성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 때문에 성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다(사도 15,36-40). 그 후 성 마르코는 성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으나(사도 15,39), 성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는 그와 함께 갇혀 있었다(콜로 4,10).
그는 분명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의 제자였는데, 성 베드로는 그를 애정 깊게 ‘나의 아들 마르코’라고 언급하였다(1베드 5,13). 또한 그는 신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예루살렘 출신의 요한 마르코임이 분명하다(사도 12,25).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났을 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12,12)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성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와 가까운 관계였다. 초대 교회 전승은 성 마르코가 사도 성 베드로의 대변인이자 통역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요한 마르코를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는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그가 비블로스(Byblos)의 주교였다고 하며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내고 있다.
어쨌든 성 마르코는 60~70년 사이에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서를 기술했는데 주로 사도 성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했다.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성 파피아스(Papias, 2월 22일) 주교는 성 마르코가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전해 들은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전해주었다. 그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150-215년)나 리옹의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도 성 마르코를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성 베드로의 순교 이후 복음서를 썼다고 전하고 있다. 클레멘스의 증언이나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마르코는 성 베드로에 의해 이집트로 파견되어 그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중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 밧줄에 목이 묶인 채 거리를 끌려다니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교도들이 성 마르코의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고, 그 틈에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성당에 모셨다고 한다. 그 후 성 마르코의 유해는 828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Venezia)로 옮겨졌다. 이를 기념해 베네치아 사람들은 성인의 이름을 딴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을 짓고 그곳에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그 후 성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상징으로 날개 달린 사자가 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의 복음서가 세례자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자 예술적으로 그 소리를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면서 생겨났다. 날개는 에제키엘(Ezechiel) 예언자가 환시로 본 네 마리 생물을 복음사가들에 적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 미술에서 그는 책 또는 두루마리나 긴 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르코 (Mark)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