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번째 이야기가 된다. 김재걸 선수 이승엽 , 김한수 , 박충식 , 진갑용, 양준혁 선수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꾸 시선은 타자쪽을 향했다. 타자를 투수보다 특별히 좋아하는건 아니다. 모굴을 해도 20승투수 없는 팀은 견디지 못해도 30홈런 이상 치는 4번타자 없이도 즐겁게 즐기는 타입이다... 등의 이야기들이.. 이번엔 어떤 선수에 대하여 글을 써볼까 고민하다가 2002년 홈런 동영상을 보면서 이선수로 결정하고 말았다... 2002년도 랑데뷰 홈런의 동영상은 많아도, 무사만루의 위기에서 150킬로의 직구만을 줄창 뿌려대며 삼성을 구했던 이 선수의 멋있었던 순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라이온즈 맨이 아닌 거인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사나이 그 눈부셨던 직구를 회상하면 노장진 선수에 대하여 이야기 해볼까 한다.
*한국의 마쓰자카*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노장진,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되야 할테지만.. 이글을 쓰는 나조차도 누가 더 뛰어나 투수인지는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걸 이야기 할려는 건 아니기에) 일본의 고교야구는 봄의 센빠쯔(선발)와 여름의 고시엔 대회 2번의 전국대회를 치룬다. 요코하마의 에이스 투수 마쓰자카는 이해 전국 4100개의 고등학교가 노리는 이 두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본열도를 놀라게 하는데, 특히나 여름 갑자원에서는 결승전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투수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일본의 봄철 고시엔과 여름 고시엔은 우리 나라로 치면 대통령배와 청룡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 대통령배와 청룡기 봉황기 많이 양보해서 황금사자기 까지만 남기고 나머지 대회는 다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시기상으로는 봉황기가 여름 고시엔과 유사하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때 최고권위의 청룡기가 가장 여름 고시엔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모두 휩쓴건 아니지만, 최고 권위의 청룡기 대회 결승에서 유일무이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투수 그가 바로 노장진이다.
1992년 당시 노장진은 최강타선으로 군림하던 선린상고를 맞이하여 29명의 타자를 상대, 15탈삼진 2사사구의 기록으로 노히트노런으로 제압, 청룡기뿐만이 아닌 아마야구 결승 최초의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우게 된다. 고교야구를 거쳐간 수많은 위대한 투수들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이 찬란한 기록의 주인공, 괴물 투수 노장진의 앞날은 거칠것이 없어 보였다.
*프로입단과 문제아의 낙인*
(빙그레 시절 노장진 선수-출처는 네이버 수호신 노장진 No.18카페)
공주고를 졸업하고 노장진 선수는 대학진학과 프로 진출을 놓고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원광대 진학을 포기하고 연고구단인 빙그레 이글스에 계약금 4천만원을 받고 입단하게 된다. 93년까지는 아직 고교생중 억대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사례가 없던 시절이었다.. 최초의 고교생 억대 계약금은 95년 입단한 LG의 조현 선수로 노장진 선수는 이보다 2년이나 일찍 프로무대를 밟았으므로 당시의 저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93년 억대 신인들이 최초로 복수로 등장한 이후 신인들의 계약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파격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고졸 신인에 대한 특급대우라고 할 수 있고 돈 5백만원 때문에 박찬호를 한양대로 보낸 빙그레 입장에서는 노장진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박찬호에게 2000만원 제시 박찬호 선수는 2천5백을 요구.)
슈퍼루키들이 프로야구판을 수놓은 93년 막강 빙그레 마운드의 신입에게는 너무 높은 기대치가 매겨져 있었다. 26경기 1완투 100이닝 93탈삼진 3승 10패 4.41의 방어율 신인으로서는 준수한 기록이었으나 주변에 큰 기대에 비하면 부족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당시 빙그레는 5년동안 4번이나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자랑하던 그 빙그레가 아니었다. 더 이상 수위타자 자리에 이정훈이 위치하지 않았고 영원할 듯 보였던 장종훈의 홈런킹 자리도 다른 이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세대교체시기에 그 기수가 되어줄 것이라는 너무 큰 기대는 20살 청년에게는 버거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큰 기대치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숙소 이탈등의 잦은 문제와 훈련 태도 불성실을 이유로 빙그레는 이해 11월 노장진 선수를 임의탈퇴 공시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노장진 선수에게는 풍운아, 문제아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게 된다.
*삼성으로의 트레이드*
임의 탈퇴 공시후 노장진 선수는 군에 입대해 유격훈련 조교를 맡았다..(해병대 상근인 권오준 선수처럼 독특한 이력이네요;) 군 생활 3년은 노장진에게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또 더 성숙해진 시간이기도 했다.
제대 후 한화 이글스의 2년 동안은 별 탈 없는 프로 생활이었지만, 성적은 신통치가 못했다. 비록 제대 후를 대비 틈틈이 몸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군대내 에서의 운동은 한계가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노장진의 문제는 기술적인 부분의 문제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터라 그 기술적 결함을 잡아주어야 할 시기를 군대에서 보낸 것은 큰 타격이었다.(파워피처인 그에게 제구력 불안은 97년 98년 내내 그를 기복이 심한 투수로 만들었다.)
그가 한화에서 기록한 2년간의 성적은 이렇다..
97년 방어율 5.47 6승 10패 133과 3분의 1이닝 91사사구 81탈삼진
98년 방어율 5.24 7승 10패 149와 3분의 1이닝 84사사구 104탈삼진
97년은 삼진보다도 사사구가 많았지만 98년 노장진은 분명 전해보다 더 낳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 문제아로 낙인찍힌 노장진은 기대치 이하의 성적을 기록 할수록 팀과의 마찰이 있다는 등, 팀에 적응을 하지 못하다는 등의 기사가 자꾸 실리게 되고 이에 한화는 노장진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한다..
때마침 투수력 강화를 도모하던 삼성과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트레이드를 단행하는데 1998년 11월 3일 최익성 박태순과 2대1 트레이드로 노장진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에궁 이제야 라이온즈맨 노장진을 다루게 되네요.)
*전성시대의 도래*
99년 노장진은 삼성의 제2선발의 중책을 맡게 된다.(당시 1선발은 김상진 선수) 김상진 노장진 김진웅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선발 로테이션과 철벽마무리 임창용의 활약으로 삼성은 매직리그 1위를 기록, 당시 처음으로 치루어진 크로스오버 토너먼트인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99년 선발투수로서의 노장진은 정말 화려하게 빛난다.. 특급투수의 지표인 15승(9패), 4.35의 방어율 188과 3분의 1이닝 173탈삼진(116사사구) 의 기록으로 각종 투수부분 기록 상위권에 랭크된다..(당시 4.35의 방어율은 조정방어율을 써본다면 아마도 3점대 초반의 방어율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공식은 모른다. 하지만 당시는 타고투저의 최고점이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롯데팬들에게는 잊혀지지 않을 그 가을 노장진은 2차전 선발로 선발승을 따내며 나름 제 몫을 다했다.. 하지만 롯데의 운빨이 하늘을 찔렀을 뿐이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자마자 15승의 특급투수가 되며 전 소속팀 한화를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든 노장진. 트레이드라는 프로선수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면서 각오를 다졌을 노장진 선수는, 결혼과 첫아이의 출산이라는 경사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더 큰 책임감을 느끼면서 야구에 집중 결국 99년 첫 10승투수의 반열 그리고 삼성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된다.
*전성시대 제 2막*
2000년도에도 변함없이 삼성의 선발 한축을 담당 11승 8패에 103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2000년 삼성의 성적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급기야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게 힘한번 못쓰고 4대0으로 스윕당하게 된다.
노장진 선수도 시즌 후 왼쪽 발목 골편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2001 시즌은 초반 장기 결장을 하였다. 시즌 중반에 돌아온 노장진 선수는 22경기에 등판 7승 2패 1세이브 방어율 4.62를 기록 삼성의 정규시즌 우승에 공헌을 한다.
2002시즌 비어있는 마무리 투수 보직을 맡아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출격하여 11승 5패 23세이브 방어율 2.53 탐삼진 146개로 프로데뷔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당시 아쉽게 규정이닝에서 6~7이닝이 부족해 방어율 타이틀을 놓쳐야 했지만 그의 팀 공헌도는 프로데뷔후 최고였고, 삼성팬들은 그런 그에게 애니콜이란 애칭을 붙여 주었다..(원조 애니콜은 임창용 선수.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니콜이란 별명이 얼마나 무책임한 야구에서 비롯되었는지 이제는 모두가 다 안다.)
당시의 노장진 투수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원래도 145~150을 상회하는 위력적인 직구가 돋보이긴 했지만 2002년의 노장진은 정말이지 영점조정이 완벽하게 끝난 완벽 제구력의 직구 머신이었다. (54개의 사사구 146개의 탈삼진은 역대 최고의 삼진대 사사구 비율, 이시즌과 2005년<-그나마도 전반기 을 제외하면 이 비율이 2.0을 넘긴 시즌이 없다는)
위력적인 직구를 스트라익존으로만 꼽아대는 그에게 강심장이란 호칭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었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LG와의 대결은 노장진대 이상훈의 대결로도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내 생각에 노장진이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뽑으라고 하면 바로 한국시리즈 4차전을 꼽고 싶다.. 4차전 3대0으로 앞서가던 삼성은 LG의 끈끈한 반격에 고전하며 3:3동점을 허용했고 7회말에는 무사만루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미 에이스 엘비라에 5회부터는 다음날 선발 임창용 카드까지 꺼내든 삼성으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한판. LG쪽으로 완전히 기울거 같았던 경기의 분위기는 노장진이 뿌려대는 150킬로의 직구로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2001년 마리아노 리베라가 월드시리즈에서 정확히 94마일 95마일을 찍어대던 그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노장진의 직구는 위력적이었다. 스피드건에는 연신 150 151의 직구가 찍혀져 나왔다. 그리고 첫 타자 내야땅볼로 홈에서 원아웃 2번째 타자 삼진 3번째타자 뜬공으로 아웃을 잡고 노장진은 특급마무리 답게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나머지 2이닝도 피아타 2개로 막아 3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그날의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때 그 만루 상황에서 한점만 내주었어도 2002년의 결과는 어찌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2002년 한국시리즈 4차전 묵직한 직구를 던지던 노장진을 잊을 수 없는 이유이다.
*또 다시 바람은 불고*
성적이 좋을때야 주변의 잡음은 사그라들기 마련이지만,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금새 주변은 시끄럽게 된다. 노장진 선수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항상 이런식 이었다.. 물론 노장진 선수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언론에 노장진은 문제아로 낙인찍혀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고 똑같은 잘못에도 노장진에게 던져지는 돌팔매의 수는 다른 선수의 그것보다는 분명히 많은편이다.
2002년 마무리임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3~4이닝을 던진 노장진 투수는 2003년 더 이상 위력적인 마무리 투수로 군림하지 못한다.. 9승 10패 21세이브 삼진도 절반 가까이 줄어 87개 마무리로선 불합격인 4.12의 방어율.
2003년말 선동렬 투수코치가 부임하고 마무리에 임창용을 쓰기로 함에 따라 노장진 선수는 다시 선발로 보직을 옮기게 된다. 겨울 선동렬 코치의 방침인 3000구 훈련도 무난히 잘 치루어 내고 선발로서 2004시즌을 맞이한 노장진 선수는 선발로서 그다지 좋은 기록을 내지 못한다.. 그리고 권오준등의 신예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그의 자리는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광주 원정경기에서 숙소에 뒤늦게 귀가 하는 사건이 터지고, 김응룡 감독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선동렬 투수코치와는 잦은 마찰이 있다는 기사들이 나기 시작하면서 여론의 집중포화가 노장진 선수에게로 가해진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 노장진 선수는 7월 12일 박석진 선수와의 트레이드로(노장진-박석진이 주축인) 롯데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거인군단의 수호신*
마무리가 취약해 에이스 손민한을 마무리로 돌려야만 했던 롯데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롯데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노장진 선수도 안정을 되찾아 후반기 17세이브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삼성으로 건너온 박석진도 알토란 같은 활약으로 이 트레이드는 윈윈 트레이드란 평가를 받게 된다.
2005시즌 롯데는 매년 계속되어온 꼴지를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초반 롯데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상위권에 위치하게 된다. 롯데의 활약으로 프로야구판이 활기를 띠게 되는데 롯데의 돌풍 중심에는 노장진 선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7회까지만 이기면 노장진이 나와서 마무리 지어 줄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마지막이 확실하다는 신뢰는 롯데를 든든한 방어벽이 있는 롯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이 되었다. 전반기 노장진은 15연속 세이브 행진을 벌이면서 1승2패 18세이브 2.45의 방어율을 기록하였다. 롯데팬들은 이런 노장진 선수를 양키스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에 비교하면서 노베라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한다. 팀은 상위권에 위치하면서 가을에도 야구하자는 롯데팬들의 염원을 이루어 줄듯 보였고, 노장진 개인으로서도 시즌 후 얻게 되는 FA에서 자신이 최대어 중에 한명임을 입증해 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롯데의 꿈도 노장진의 꿈도 모두 깨어지고 만다. 노장진 선수의 아내가 음독 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뜻밖의 가정사로 인해 그해 노장진 선수의 시즌은 끝나게 되고 롯데의 돌풍도 미풍으로 끝나고 만다.
*방황 그리고 끝나지 않은 도전*
그동안 인사도 못하고 해서 이렇게 글 한자 올립니다.
그동안 아주 많이 힘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야구 생각만큼은 아주 많이 생각이 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에 다시시작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팬 여러분들도 많이 기다렸지만 조금만 더 기달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정사로 인해 시즌을 마무리 못지고 이렇게 끝이나지만 내년을 기약
하며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리고 죄송합니다.
-2005년 노장진 선수가 팬카페에 남긴글-
불의의 가정사로 인해 2005년 시즌을 접어야 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건 역시 야구였다. 그는 천상 야구선수이기에..
그리고 2006년 1월 전지 훈련장에서 한번 더 팬카페에 글을 남기면서 올 한해 정말 열심히 하겠다는 취지의 포부를 팬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던 노장진 선수.. 하지만 시범경기가 한참 진행중이던 3월말경에 갑자기 선수단을 이탈하여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항상 문제아 낙인이 찍혀 있던 그에게 이런 기행은 언론사의 집중포화를 유도할 뿐인걸 잘 알면서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진 않는다.
뒤늦게 합류하여 42게임에 등판 3승4패 6세이브 4.66의 방어율을 거둔 2006시즌은 분명 기대했던 노장진 선수의 모습은 아니었다.. 또 시즌 막판 기아 원정에서 부산행을 지시받은 일로 진실게임 공방이 벌어지기도 하는 둥 2006시즌은 노장진 선수에게는 또 하나의 안좋았던 시즌으로 남게 될 테지만, 아직 그의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전성기는 다시는 안돌아올지도 모르고 그의 돌 직구는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노장진 선수 아직 그의 나이는 33 만으로 32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문제만 잘 해결이 된다면 다시 한번 마운드를 지배하던 그 직구를 뿌리면서 수호신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FA를 선언한 노장진 선수가 좋은 팀에 안착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좋은 투굴 할 수 있게 되기를 빈다.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 다녀 봤는데 노장진 선수는 아직 이대로 무너지기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롯데의 팬이건 삼성의 팬이건 노장진 선수가 그 기대에 꼭 부응하게 되길 바란다.
첫댓글 프런트에서 기대를 접은 것이지 현장에서의 의견은 많이 달랐던 것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