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지(蓮峰地) 이재부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 밤엔 온갖 잡생각들이 줄줄이 몰려온다. 눈을 감아도 그리운 고향이 환히 보이고, 고생하시던 부모님 생각을 하며 뒤척거린다. 구름 같이 떠다니는 삶의 흔적 속에서 힘들고, 슬펐던 사연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무나보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경사지에서 우마차를 밀고 당기던 고생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여름철엔 농사를 지으시고, 추수가 끝나면 겨우내 힘든 나무장사를 하셨다. 아침 일찍, 마차에 나무를 태산같이 싣고 충주로 팔러 가신다. 길이 험하고 도랑을 건너는 곳이 많아 학교 가는 길에 아버지를 도우려고 일찍 따라 나선다. 책보는 허리에 차고 오르막길에서는 밀고, 내리막길에서는 죽을힘을 다해서 당겨야 속도가 조절되어 위험이 덜하다고 하신다. 제일 힘들고 위험한 곳이 연봉지 도랑을 건널 때이다. 얼음이 떠다니는 개울을 건너야하는데 경사 급한 내리막길을 따라 물로 접어들고, 물을 건너면 바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옆에 돌다리가 있기는 하나, 우마차를 당기고 밀기 위하여 개울로 뛰어든다. 소가 물길 중간에 서면 오도가도 못하기 때문에 단번에 채 올려야한다. 소 고삐를 힘주어 잡고 소를 끄는 아버지는 물로 접어들어 소에 채찍을 가하고, 나는 뒤에서 미느라고 옷을 다 적신다. 왜 그렇게 발이 시리던지. 신작로에 다다를 때까지 밀어 올리고 아버지와 헤어져 학교로 갔었다.
서른 즈음에 고향을 떠나와 고희를 넘겼는데도, 고향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뒤척이다 잠이 들면 꿈길에서도 연봉지에서 허덕이며 아버지를 만난다. 물이 줄줄 흐르는 바짓가랑이를 짜주기 위하여 언 손으로 젖은 옷을 비틀어 짠다. 아버지 바지는 벌써 뻣뻣하게 얼어있다. 아버지의 남루한 모습을 보고 불쌍하여 흐느끼다가 꿈에서 깬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선잠 속에서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다가 눈을 뜨면, 꿈의 뒤끝이 허무로 다가온다. 때로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소리지르다가 내 소리에 놀라서 깬다. 그럴 때는 몸이 무겁고 두통에 시달린다. 의지가 허약한 탓이리라. 사라져 간 것들이 비운자리에서 흘러간 시간에 매달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다가 창 밖에 지나가는 겨울 바람 소리도 듣는다. 그 바람에 쓸려 가는 내 삶의 소리가 가슴에 머문다. 아버지가 우마차를 모는 소리, 자갈길에 마차바퀴 구르는 소리, 마차를 끄는 우리 집 황소의 워낭소리……. 캄캄한 겨울밤에 석유등을 들고 아버지를 기다릴 때 들리던 소리다. 연봉지 개울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등불을 들고 마중 나가 누나와 함께 떨며 기다리던 눈물 맺힌 소리다.
연봉지는 내 고향의 문턱이다. 꿈길에서나, 고향에 갈 때 마음이 주춤거리고, 시선이 머물다 간다. 고금의 사람들이 수없이 들락거리던 흔적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 지금은 큼직한 비석 두 개가 오가는 나그네의 시선을 모은다. “연봉지” 지명(地名)으로 전기(傳記)를 쓰면 몇 권의 책이 될텐데……. 변한 모습이 연봉(蓮峰)의 모습을 잃어버려서 안타깝다. 무정 세월과 인간사에 깎인 연봉이 실명(失名)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탄생과 사멸의 운명은 생명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높은 시멘트 다리가 놓여지고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변을 무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곳 지명이 왜 연봉지 인지도 모르고 지나 가리라. 내 마음이 모이는 연꽃봉오리, 연봉지! 우리 고향 사람들이 맴돌며 불러주던 이름인데, 주인 없는 빈집에 버리진 문패 같이 쓸쓸하다. 헐리고 남은 동산에 헝클어진 마른 잡초를 밟고 그리움의 고향, 옛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긴 산골을 빠져나온 설운천과 이진산을 감돌아 온 용천이 만나는 물결의 어울림 소리가 들린다. 도화동을 흘러내린 실개천도 논둑 물길을 빠져나와 함께 흘러간다. 연봉지 보다는 “연봉쟁이”로 더 많은 사람이 불러주던 곳이다. 산천의 정기가 연꽃봉오리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비나 벌같이 머물다간 요지인데, 연봉 형상 산봉우리도 세월 앞에서 속수 무책이다. 이 세상에 이름 붙여 태어나는 것들과 마모되고 소실되어 없어지는 것들 사이에는 내 이름도 끼어 있으리.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내 영혼은 고향으로 달려가, 연봉지에 서서 나무를 팔러간 아버지를 기다린다. 털털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빈 마차엔 아버지의 피곤한 인생이 실려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추위를 녹이며 소를 모는 애절한 아버지 음성이 워낭 소리에 섞여 내 가슴을 파고든다. 잠이 오지 않는 겨울밤엔 외롭게 살다 가신 아버지가 더 그립다. |
첫댓글 세상에 이름 붙여 태어나는 것들과 마모되고 소실되어 없어지는 것들 사이에는 내 이름도 끼어 있으리.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내 영혼은 고향으로 달려가, 연봉지에 서서 나무를 팔러간 아버지를 기다린다. 털털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빈 마차엔 아버지의 피곤한 인생이 실려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추위를 녹이며 소를 모는 애절한 아버지 음성이 워낭 소리에 섞여 내 가슴을 파고든다. 잠이 오지 않는 겨울밤엔 외롭게 살다 가신 아버지가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