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어즈앤스포츠=김민영 기자] '슈퍼 언더독' 박기호(49)가 프로당구 왕중왕전 월드챔피언십 8강에서 '미스터 매직' 세미 사이그너(튀르키예, 휴온스)를 세트스코어 2-2로 압박한 끝에 2-3으로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박기호에게 2023-2024시즌은 그야말로 잊지 못할 시즌이다. 무명의 박기호가 '언더독의 반란'을 넘어 '슈퍼 언더독'으로 거듭난 시즌이기 때문.
2021-2022시즌 드림투어로 PBA에 데뷔한 박기호는 첫 개막전에서 단숨에 8강에 오르며 공동5위라는 성적을 거두더니 4차전에서 덜컥 우승까지 차지하며 한 시즌 만에 1부 투어로 승격됐다.
1부 투어로 승격된 2022-2023시즌은 단 한 번 16강에 올랐으나 다비드 마르티네스(스페인, 크라운해태)에게 세트스코어 1-3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2023-2024시즌은 달랐다. 4차 '에스와이 챔피언십'과 8차 '웰컴저축은행 웰뱅 챔피언십'에서 '언더독의 반란'을 일으키며 두 차례 준결승에 오른 그는 처음으로 왕중왕전 '월드챔피언십' 출전 자격을 얻고 'SK렌터카 제주특별자치도 PBA 월드챔피언십 2024'에 출전했다.
32강에서 조재호(NH농협카드), 임성균(하이원리조트), 한동우와 조별리그전을 치른 결과 임성균을 3-0으로 제압한 그는 조재호에게 0-3 완패를 당하며 탈락 기로에 섰다.
한동우와의 16강 진출을 가리는 마지막 대결에서 박기호는 0-2로 밀리며 패색이 짙었으나 남은 세 세트를 모조리 따내며 대역전승을 거두고 조재호와 함께 2승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월드챔피언십 본선 16강에서 이상대(웰컴저축은행)를 3-2로 물리친 박기호는 8강에 올라 사이그너와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이름값만으로는 사이그너의 완승처럼 보였지만 박기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1세트를 8:15로 빼앗기자 2세트를 15:12로 차지한 박기호는 3세트를 또다시 11:15로 빼앗겼으나 4세트를 15:9로 가져오며 2-2로 맞섰다.
결국 승부는 5세트에서 갈렸다. 1이닝에 선공인 사이그너가 3득점 후 타석을 넘기자 박기호는 6점을 몰아치며 6:3으로 리드했다.
하지만 박기호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2이닝째에 사이그너는 하이런 12점을 올리고 남은 점수를 모두 획득해 단숨에 6:15로 경기를 끝냈다.
경기를 마친 박기호는 "월드챔피언십에 출전한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라며 "사실 32강전 끝나는 날에 맞춰서 비행기표를 예매해 뒀는데, 경기가 끝날 때마다 하루씩 연장했다. 이제 오늘은 진짜 집에 가야겠다"며 아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월드챔피언십에 처음 참가한 소감이 어떤가?
사실 월드챔피언십에 출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다. 처음에 PBA를 시작할 때 내가 과연 이런 큰 무대에 설 수 있는 실력이 될까라는 의심을 했는데, 시합마다 약간 운이 많이 따라줘서 올 시즌은 정말 너무 성적을 잘 내서 너무 만족하고, 이런 무대에서 대단한 선수들과 치면서 진짜 많이 배운 것 같다. 이런 경험을 밑바탕으로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노력하겠다.
8강에서 아쉽게 떨어졌다. 한 번만 더 이겼어도 준결승인데.
욕심을 내면 아쉬울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큰 욕심을 갖고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너무 만족스럽다. 세미 사이그너라는 전설적인 선수하고 세트스코어 3-2까지 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영광이다. 앞으로 열심히 하다 보면 또 좋은 성적을 내지 않을까 싶다.
8강에서 풀세트까지 가면서 사이그너를 압박했다.
매번 경기에 임할 때마다 다짐하는 게 있는데 '연습한 만큼만 하자'다. 어차피 대선수고, 누구고 간에 미리 심적으로 내가 지고 들어가면 경기에서 안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인드로 항상 경기에 임한다.
그러다 보면 운도 어느 정도 따라주고 하면 성적이 잘 나오더라. 앞으로도 이런 대선수들하고 칠 기회가 많을 텐데 지금 이런 경험들이 나에게 큰 자산이 될 것 같다.
이번에 첫 월드챔피언십에 임하면서 목표하는 바가 있었나?
성적에 대한 목표는 없었다. 정규 투어나 월드챔피언십이나 항상 내가 최선을 다해서 치다보면 성적은 자연적으로 좋게 따라 오더라. 대부분 선수들이 많이 긴장해서 자기가 할 것을 다 못해서 지는 경우가 많은데, 긴장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내려오자는 마인드로 치다 보니 잘 풀린 것 같다.
일단 월드챔피언십 32강에 들어갔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 큰 영광인데 거기서 내가 본선, 준결승, 결승까지 간다는 게 너무 욕심이다. 여기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일주일 정도 제주도에서 매일 대회를 하면서도 '내가 진짜 여기 계속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다.
사실 32강이 끝나면 그냥 집에 갈 줄 알고 비행기표도 미리 예매해 놓았다. 오늘도 마음 편하게 치려고 끝나고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한 상태다. 나름 마음 비우고 편하게 치려고 굉장히 노력을 한 거다.
예전에는 이런 게 잘 안됐었는데, 방송 경기도 많이 하고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집중력도 많이 올라가고 좋아진 것 같다. 예전에는 방송 경기하면 엄청 긴장해서 내 팔이 내 팔이 아니었다.
월드챔피언십에서 최상위권의 선수들을 만났다. 누구와의 경기가 가장 인상깊었나?
32강에 든 모든 선수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다. 인상적이지 않았던 선수를 물어보는 게 빠를 정도로 모든 선수들이 다 인상적이었다. 진짜 한 경기 한 경기 치면서 유심히 보고 많이 배우고, 정말 많은 걸 느꼈다.
직업이 프로 당구선수가 아니라 겸업을 하고 있는데 연습은 주로 언제 하나?
지금 건설업 쪽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일하면서 당구를 같이 병행하는 것 자체가 좀 어렵다. 그래도 겨울철은 비수기이기 때문에 연습에 매진할 수 있어서 연습을 열심히 했더니 성적이 좀 잘 나오는 것 같다.
평상시에는 지방으로 일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동네 조용한 당구장에서 한 2시간 정도 공을 치고 오는데, 감만 유지하는 정도로 연습을 한다. 이제까지 공을 따로 배워 본 적이 없는데, 최근에 실력 향상을 위해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더 열심히 당구를 쳐볼 생각이다.
프로 당구선수를 전업으로 할 생각은 없나?
예전에 PBA 사무국에서 대체 선수 후보자로 선정됐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나는 아직 TV에 나올 만큼, 그리고 누구에게 돈을 받으면서 공을 칠만한 실력은 아니라는 생각에 미안해서 못 가겠더라.
만약 내 스스로 이제 누구와 쳐도 실력에 자신이 생기면 그때는 기회가 된다면 당구에 매진하고 싶다. 아직은 공을 더 열심히 쳐야 할 것 같다.
이번 대회를 지켜보면서 누가 가장 기뻐했을 것 같나?
부모님일 거다. 부모님께 효도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당구를 치면서 TV에도 나오고, 성적도 나면서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부모님께 전화를 하더라. 그런 모습 보면 되게 기뻤다. 부모님이 '대견하다' 그런 전화를 하시면 좀 울컥한다.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자친구가 있는데, 항상 응원을 많이 해주고 힘이 되는 말을 많이 해준다. 누구보다도 나에게 많은 힘이 되는 사람이다.
2부 투어부터 차근차근 지금의 박기호를 만들었다. 다음 시즌 목표가 있다면?
처음에 PBA에 들어올 때만 해도 욕심이 전혀 없었는데, 막상 부딪혀보니까 '나도 되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부터 욕심이 살짝 났다. 이번 시즌에 준결승을 두 번 갔는데, 조금만 노력하면 결승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예 넘사벽은 아니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레슨도 받고 더 적극적으로 연습하고 있으니까 다음 시즌은 이번 시즌보다 더 실력이 향상될 것 같다. 일단 결승을 목표로 도전하겠다.
(사진=빌리어즈앤스포츠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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