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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토빗기의 말씀 3,1-11ㄱ.16-17ㄱ
그 무렵 나 토빗은
1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2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3 이제 주님,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살펴보아 주소서.
저의 죄로, 저와 제 조상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으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그들은 당신께 죄를 짓고
4 당신의 계명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저희를 약탈과 유배와 죽음에 넘기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흩으신 모든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와 우셋거리로 넘기셨습니다.
5 저의 죄에 따라 저를 다루실 적에 내리신 당신의 그 많은 판결들은 다 참되십니다.
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당신 앞에서 참되게 걷지 않았습니다.
6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7 바로 그날,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8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 여종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은 이미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누구의 이름도 받지 못했어요.
9 그런데 당신 남편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우리는 왜 때려요?
남편들이나 따라가시지.
그래야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나 딸을 영영 보지 않게 되죠.”
10 그날 사라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울면서, 자기 아버지 집의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고서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밖에 없었는데 그 애가 불행을 못 이겨 목을 매고 말았구려.’ 하면서, 내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만일 그렇게 되면 늙으신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시며 저승으로 내려가시게 되겠지.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11 그러면서 사라는 창 쪽으로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다.
16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17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 지혜’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왜곡된 믿음)를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지고 듭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무지’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생각’(왜곡된 신앙)에 갇혀 속박된 영적무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진정 믿으면 신적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마르 12,24)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시고,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탄식이 기도가 되는>
어제 저의 강론을 오늘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어제 토빗을 완성형 인간으로 그리고 참되고 완전한 선행의 본보기와 행복한 선행의 본보기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요지부동의 선행과 요지부동의 행복이었지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란 흔들어대도 부동 곧 끄떡없음을 말함이지요.
이것은 안빈낙도安貧樂道처럼 수행을 통해 도사 또는 완전의 경지에올라 아 무리 누가 흔들어대도 그 사랑과 행복이 끄떡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보니 거기에 하느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으로 제가 토빗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토빗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욕에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울며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선행의 대가가 이런 거라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탄식이 독백이 아니라는 점이고, 탄식이 향하는 곳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이 인간에게 모욕당하고 저 인간에게 하소연하는 식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탄식하고 그래서 탄식이 기도가 되는 그런 식입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은 여인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부인이 될 것인지 사두가이들이 묻고 주님께서 답하시는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와 같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토빗기와 주님의 대답을 연결하여 묵상하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천사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계의 재편이 저세상에서는 있게 되고, 완전히 하느님 중심의 관계로 재편될 것이며, 그래서 다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지금부터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초인으로 살지 않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천사처럼, 탄식이 기도가 되는 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 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 12,25.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는 예수님의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에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분을 죽음까지도 극복하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12,27)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손희송)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산 자의 하느님, 죽은 자의 하느님>
오늘은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사두가이들은 유대교 신봉자들이었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세적인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돈에 집중하기 위해 신을 자신들에게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있되 부활과 내세와 심판 등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말은 지금의 삶에 심판을 받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 내세에 있을 존재를 믿으면서도 그 존재의 영향은 전혀 받기 싫어하는 현시대의 사두가이들은 없을까요?
유튜브 채널 ‘MBN, 특종세상’에서 ‘빗물을 마시고 풀을 뜯어 먹는 할머니’란 사연이 방송되었습니다.
여기 나온 할머니는 몸도 불편하시면서 지붕에 주워온 것들을 올려놓고 집 안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 채우며 주위에 피해를 주며 살고 계셨습니다.
이장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문을 쇠사슬로 걸어 잠그고 못 들어오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포기한 상태입니다.
할머니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막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쇠약해서 1년 반 동안 매일 같이 절에 가서 기도하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 딸이 지금의 할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아는 할머니는 결혼도 안 하고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상실감에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심경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살아있는 어머니일까요, 죽은 어머니일까요?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더는 할머니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아무리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 드려도 할머니의 어머니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 가셨다면 지금 살아있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그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를 보내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죽은 자들의 동네로 보내버렸고 자신은 어머니의 체취가 묻은 집만을 살아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죽음으로 그분을 그렇게 완전히 보내버렸다면 그분은 실제로는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필요하게만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신다면 나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죽은 자들의 하느님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죽은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믿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달리는 상훈 씨의 사연이 있습니다.
90도로 꺾인 다리로 전북 장애인 육상 선수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어머니를 위해 달린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았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에게 어머니는 죽었던 살았던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살아있는 자입니다.
결국 우리가 죽어서 만나게 될 분이 하느님이신지, 아닌지 그 준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덕분으로 삽니다.
죽어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그래서 나도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두가이처럼 되지 말고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을 믿읍시다.
그 증거는 그분 때문에 내가 점점 더 그분 뜻에 맞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삶입니다.
이 세상은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흔들림 없는 신앙과 간절한 기도, 사심 없는 자선>
이번 주간 내내 첫 번째 독서로 토빗기가 낭독됩니다.
토빗의 인간 됨됨이는 탁월했습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이 불행한 꼴을 결코 못 넘겼습니다.
비록 유배지 생활이었지만 토빗은 가산이 넉넉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인정이 많았던지 잔치를 벌일 때 식솔들끼리만 즐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동포들 가운데 제일 가난한 사람들을 늘 잔칫상에 앉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불행을 늘 자신의 불행으로 여겼습니다.
율법까지 어겨가면서 타향에서 객사한 동포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토록 주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충실했던 의인 토빗이었지만 그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습니다.
오순절 밤, 죽은 동포를 매장하고 나서 피곤에 지친 그가 마당에서 잠을 자던 중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뜨거운 참새 똥이 그의 두 눈에 명중하고 맙니다.
그 길로 그는 시력을 잃고 4년여 동안 암흑 속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내 안나가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만 했습니다.
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품팔이, 남의 집 가사일, 허드렛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앞 못 보는 남편을 봉양했습니다.
그런 토빗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크게 비웃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해도 뭐 특별한 것 없구먼!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저 모양이군!”
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성인군자, 안에서는 무능한 남편인 토빗을 향해 아내 안나도 드디어 분노가 폭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당시 토빗이 얼마나 괴로웠던지는 그가 바친 기도를 통해서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토빗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웠던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더 낫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토빗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의도로 바친 기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토빗의 기도에는 진실성이 듬뿍 묻어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힘겨운 처지를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바로 눈앞에 주님께서 계신 것처럼, 친밀하면서도 격의 없는 기도를 열정적으로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선배로서 토빗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가지 탁월한 본보기가 있습니다.
‘한결같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신앙은 항구하고 충실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언제나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토록 충실했고 한결같았던 토빗이었기에, 주님께서는 후에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셨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축복과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개입과 축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필요한 인간 측의 노력은 흔들림 없는 신앙과 간절한 기도, 사심 없는 자선임을 토빗기는 밝히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면서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세 3,22)
아담과 하와는, 즉 인간들은 원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죄를 짓는 바람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라는 말씀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기회를 박탈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그 조치가 ‘영구 조치’ 라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사두가이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조치는 ‘모든 사람’에게 영구적으로 적용된 ‘영구 조치’가 아니라 ‘임시 조치’였을 뿐입니다.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족보’에 나오는 ‘에녹’이라는 사람이 좋은 예입니다(창세 5,22-24).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차단할 길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지도 못할 생명나무를 창조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지혜 2,23-24)
“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
(지혜 5,15)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원래 계획입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그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악인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에도 의인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막혀 있던 ‘생명나무의 길’을 다시 열어 놓으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라는 말씀은 지금의 가족이 그쪽에서는 해체된다는 뜻은 아니고, 새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가족이 가족인 줄도 모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을 초월하게 되고, 그래서 인간 세상의 온갖 다툼과 갈등 같은 것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탈출기 3장 6절의 말씀은, 탈출기 본문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으로 섬겼던 분이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고, 지금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 라는 뜻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들을 빼앗기는 무기력한 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죽어서 소멸될 존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들을 지배하는 신”이라는 뜻이고,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인간을 영원히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코린 15,13-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7-19)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건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 -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
(시편 18,29)
성모성월 5월에 이어지는 예수성심성월 6월도 참 아름답습니다.
날로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이요 일년 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밤꽃’향기가 그윽하고 얼마전에는 ‘메꽃’들을, 엊그제는 올해 처음으로 ‘달맞이꽃’을 발견했고 예전 써놨던 글도 떠올랐습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이 있으랴
꼬박 일 년 기다렸다 피어난 꽃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다
밤꽃, 붓꽃, 메꽃, 달맞이꽃...
모든 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이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
-2001.5.20.
샛노란 달맞이꽃이 참 청초하고 아름다워 병마病魔와 투쟁중인 분에게도 위로와 치유의 은총을 청하며 사진을 보냈고 반가운 답신도 받았습니다.
“올해 첫 만남의 달맞이꽃! 싱그럽고 상큼하고 예쁩니다.
정신이 번쩍듭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신부님, 달맞이꽃 위로와 축복속에 평화롭게 지내겠습니다.
살아 있음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꼭 일년 만에 때되니 피어나는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입니다.
어제 피정지도때도 반가운 꽃같은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 15명의 오전 피정 미사가 있었습니다.
휴대폰마다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드리고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에 대해 말씀드렸고, 함께 행복기도문도 읽었습니다.
미사 강론중 덕담이 생각납니다.
“글로리아 ‘천사’ 성가대같습니다.
모두 흰셔츠를 입으니 천사들 같아 눈이 부십니다.
제일 아름다운 6월 예수성심성월에, 가장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러 온 여러분은 참 행복한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은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의 요셉수도원 방문 축일같습니다.”
역시 젊음은 아름답습니다.
활짝 웃는 젊은 분들의 모습이 꽃처럼 예뻤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전례의 궁극적 목적이,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일년만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에도 수차례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사기도 일부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수없이 반복하여 나눈 기도문이지만 늘 새롭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사두가이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황당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받습니다.
후사가 없이 일곱 형제의 맞이가 죽자 그의 아내는 동생 여섯의 아내가 되었는데 부활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참 무례하고 불손한, 모욕적인 궤변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절히 부활에 대해 귀한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중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는 부활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사두가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을 근거로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살았던 이들이 부활의 삶을 산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이름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사람 눈에 죽은 형제자매들이지 주님을 믿다가 죽은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다 살아 있음을 믿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참희망이자 참기쁨임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 만나는 이들에게 절망이나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토빗서의 토빗의 살아 계신 주님을 향한 간절하고 진솔한 참회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내 안나에게 시달리다 탄식하며 울다가 바치기 시작한 토빗의 기도 시작 부분이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때 정말 너무나 부끄러워 저절로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토빗입니다.
토빗의 입에 담아 참회기도를 바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토빗에 이어 불운했던 라구엘의 딸 사라에 대한 일화가 계속됩니다.
사라 역시 최측근인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심한 모욕을 듣자 슬픔이 북바쳐 울면서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생략되었지만 ‘사라의 기도’도 ‘토빗의 기도’만큼이나 감동적입니다.
역시 사라의 첫 기도 말마디가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하느님 찬미의 사랑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행복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 갔던 ‘찬미의 백성들’ 이스라엘처럼,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 역시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의 응답을 받으니 해피엔드로 끝나는 토빗과 사라의 기도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평생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죽는 그날까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계속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시편 25,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죽음"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이슈지요.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마르 12,23)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역연혼을 들어 묻습니다.
우리가 듣기에 상당히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이 혼인의 목적은 한 집안을 지속시키고 죽은 이에게 상속인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사두가이들은 세상에서 맺은 혼인의 제도적 결속이 죽음 이후에도, 그리고 다시 살아난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지 묻습니다.
질문 의도 안에는 부활 사상을 마치 비합리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교설처럼 비하하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마르 12,25)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은 이별을 수반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좋은 연으로 맺어져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다 하더라도 유한한 인간들 사이의 육적인 상호관계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딱 거기까지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죽음 이후의 삶,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부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은 이를 천사들과 같아지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더 움켜쥐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욕망과 소유에서 자유로운 상태, 더 이상 자아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격정과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평정,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보편적 사랑으로 충만한, 담백하고 순수한 모습일 듯합니다.
"그분께서는 ...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 12,27)
지상의 여러 제도들이 그러하듯 혼인 역시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 아름답고 유익한 제도지만, 혈연 관계의 유지와 종족의 보호를 위해 불가피하게 작동되어야만 하는 배타성이 존재하지요.
어쩌면 부활의 삶은 그마저도 해제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너나 할것 없이 순수한 영으로 이어진 모습의 회복일 겁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숨 쉬고 존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과거에 살다가 언제 죽은 누구 누구'라고 하는 것은 인간만의 표현일 겁니다.
하느님은 어느 시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나 지금 숨 쉬고 살고 있는 이나, 모두를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로 당신 앞에 두고 계시지요.
그래서 그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이들의 주님이시지요.
제1독서에서는 죽음을 청하는 가련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삶의 나락에 떨어진 선한 사람 토빗과, 혼인날 번번이 신랑을 잃고 조롱을 당하는 사라는 주님께 간절히 자신들의 생명을 그만 거두어달라고 청하지요.
사람이 생명이신 하느님께 죽음을 간청할 때는, 생명을 지닌 채 견뎌야 하는 고통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위협적이고 모욕적일 때입니다.
구약의 백성은 죽음이 육체적 종말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영원한 분리라고 여겼지만, 하느님은 의인들을 죽음에 넘기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의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혜서는 전하지요. (지혜 3,1.4 참조)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복음 환호송)
예수님은 이 희망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또 몸소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부활의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하느님 눈 앞에서 연장선 안에 펼쳐져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현세에서 맺은 인연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 챙기고 돌보고 섬기는, 이리저리 엮인 우리들 말입니다.
그 중에는 너무 가깝고 잘 아는 것 같아서 예의와 존중을 잊고 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나와의 인연에 앞서 하느님 앞에 자리한 소중한 존재임을 감탄과 존경의 마음으로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그가 영영 내 소유도 아니고, 그가 내 욕망을 대신하거나 채워줄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겠지요.
언젠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형제자매요 벗으로 만날 테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30)라고 말합니다.
이는 종말의 가르침이지만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시작되었으니 인간 실존을 지닌 채로 천사들처럼 깨어서 천상의 질서를 앞당겨 살아가라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정도의 온갖 불행과 고통이 짓누르고 죽음이 우리를 덮쳐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한때 살았고, 지금 살아가며, 앞으로 살아가게 될 모든 이들과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하느님 모상이며 귀한 인격체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지상에서와 같이 천상에서도, 현세에서와 같이 부활의 삶에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우리를 이어 주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억울(抑鬱)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통이 안 되고 꽉 막힌다는 의미입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없는 한자입니다.
영어로도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이 억울함이 쌓이면 병이 되는데 ‘화병(火病)’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한국에만 있는 표현입니다.
성서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의 질투 때문에 죽었던 아벨의 ‘피’가 있습니다.
엄마와 동생의 계략으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사오도 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였지만 파라오의 명령으로 죽어야 했던 히브리인들의 남자아기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도 있습니다.
다윗의 욕망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었던 우리야도 있습니다.
아합왕의 욕심 때문에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었던 나봇도 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갖은 고난과 고통을 당해야 했던 욥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살았지만 눈이 멀었던 토빗과 열심히 살았지만 조롱을 받아야 했던 사라도 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모욕을 당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억울함을 아시고, 풀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억울함 때문에 화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억울함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잘못과 허물을 성찰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실 메시아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메시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는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풀어 주셨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직선의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환하는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함께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정점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마른 잎 다시 살아나”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 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벗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땅 위를 기어 다녀야 했던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이 언젠가 우리는 오욕과 시기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좌절과 절망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믿음과 희망의 날개를 펴서 사랑의 나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성당, 피정의 집, 성지, 성체 조배실…
이런 곳을 우리는 기도하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곳으로 떠올립니다.
실제로 이런 곳이 도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더 쉽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곳에서만 계실까요?
우리가 많이 바치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당에만 계신 분도 아니고, 피정의 집이나 성지, 성체 조배실에만 계신 분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에는 안 계신다는 것일까요?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습니까?
물론 실내에 있으면 자기 눈에 하늘이 보일 리 없겠지만, 이 건물 위에도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가 잘 보입니다.
나의 시력 때문에 잘 안 보일 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계신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려면,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두가이들은 스스로 이런 함정에 빠져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지상의 삶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살아 있는 관계에 속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람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을 세상의 논리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세상의 판단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한 원하는 참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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