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나날
최형심
달팽이는 말한다. 새와 나무 사이에 걸린 문장이 헐거워지면 당신을 잊어도 될까. 달팽이는 말한다. 왜 날짜 지난 신문 가까이 앉으면 배가 고플까. 달팽이는 말한다. 두 개의 모자를 쓰면 꽃이 될 수 있을까. 너는 말한다. 사라진 발과 사라진 손과 사라진 머리카락과 사라진 발가락에 대하여.
껍데기를 제거한 달팽이 48마리.
파슬리 2묶음, 마늘 3쪽, 아몬드가루 100g, 버터 150g, 펜넬 뿌리 2개, 처빌 1다발, 쪽파 1다발, 쑥 1다발, 올리브 오일 100ml, 라임 1개, 크랜베리 20g, 소금과 후추 약간.
붉은 피로 빚어진 짐승은 왜 지난여름 산란하지 않았을까. 도마에 젖은 손을 대면 입술만 남은 여자를 만질 수 있을까. 페루를 가본 적 없는 사람과 폐를 나누어 줄 수 없는 사람과 눈동자 아래 빗방울의 표정을 그려 넣은 사람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말할 수 없었다.
소금과 후추와 껍데기가 없는 달팽이들……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달팽이는 말한다. 왜 머리 위에 수평선을 그린 뒤부터 숨을 쉴 수 없을까. 온몸이 입술인 사람이 죽은 나무 위에 엎드려 있다. 가장 낮은 몸이 그늘을 밀어내고 있다.
젖은 등 위에 놓인 공중이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계간 《시와 사람》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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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