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퇴근 후 폰 글을 들어 봅니다.
오늘은
"곡부 공씨(공자 공씨)"의 시조라는
"공 구(bc,551~479)"에 관하여
그가 태어날 적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공 구는
여러 님들께서
다들 잘 아시다시피
"유교"의
창시자로 잘 알고 계시리라 믿으며
그 출생의 숨겨진..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그냥 쫌 숨겨져 있던..
쫌
가려져 있던 부분을 파 헤쳐볼까 합니다.
공 구는
지금으로 부터
2,574년 전에 태어나시어
약 72년 여를 사시다가
지금으로 부터
2.502년 전에
지병(기저질환)이 있었다기 보다는
거의 아픔도 고통도 없이
노환으로
아주 성스럽게
몇 마디 마지막 얘기도
하시면서 사망에 이르셨다고 합니다.
자?
그럼
공 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참!!
- 제가 쫌 모자라다가 보니 한자 변용을 잘 하지 못합니다 -
공 구의 '공' 자는 "구멍 공" 자이며,
공 구의 '구' 자는 "언덕 구" 자를 씁니다.
고로
"언덕에 난 구멍"
or
"구멍 난 언덕" 쯤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공 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
숙량흘 64살
직업은 곡부 관아의 하급 공무원 쫌
그 직급이
이방보다는 낮고
포졸보다는 높은
지금으로 치자면
한 10급 정도의 말단 공무원?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안징재 18살
직업은 동네 무당..
이 때가
춘추(bc.770~403)
전국(bc.403~221)시대
(중국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까지의 고대시대)라
성씨를 가졌던
가문도 있고
그냥
부르면 이름이고
성씨라는 것이
따로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들 대~한민국
또한
성씨없는 사람들이
차~암
많았습니다.
해방 전 까지만 하더래도
그냥
이름뿐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 구'를
"곡부 공"씨의
"공자 공"씨의 시조라고 합니다.
'공씨의 성'은
"구멍 공" 자가
거의 99%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1%정도는
"공변될 공"자로 보시면 됩니다.
숙량흘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장애를
가졌던 아들 하나와
비 장애의
딸 둘이 있었다지요.
그런데
그만
첫 번째 부인이 병으러 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홀애비로
지내기도 적적하기도 해서
후 처(재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땅한 처자가 없자
한 동네
무당
18살 안징재에게 흑심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보쌈"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용하고
깊고 깊은
어둔 밤을 틈타 "보쌈"을 하게 되었다지요.
그래서
굶주린 성욕을 채운다는 것이
그만
덜컥 임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재혼이
아닌
재혼 부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냥저냥
불륜이 아닌 불륜 쯤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10개월 뒤
낳게 되는
그 아들이
중국 교육의
토대를 마련한 "공자"가 된 '공구'가 됩니다.
그렇게
공 구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숙량흘이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스무 다섯 살의 안징재가
전 처의
자녀들까지
맡아서
공구를 공자로 키우게 됩니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 때는
신정일치제다 보니
무당이라는
직업이
성역같이 성 스럽기도 했지만
천민 중에도 최 하층 천민었습니다.)
새 날만
새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굿도 하고
주술적으로 주술도 부리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사주팔자도
봐 주는 것이
하루하루 일과이다 보니
우리의 공 구가
제례의식이니
주역에
그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그 누구보다도 깊었던 것이었습니다.
☆후 편은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