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사파이어 이수명 오전에 택배로 박스가 배달된다. 박스 속에는 책이 들어 있다. 책이 작은 조각들로 잘려 있다. 한 조각을 꺼내 펼친다. 더 절개해 도 좋다. 어느 부분이든 좋다. 어제의 박스 속에 오늘의 박스를 구겨 넣는다. 박스가 쭈그러진다. 쭈그러지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나는 손을 멈출 수밖에 검은 돌 같은 책을 멈출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스노우사파이어가 집안을 빙빙 돈다. 스노우사파이어 뒤로 몸을 숨긴다. 물을 마신다. 숨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신다. 말을 하지 않고 깨어나지 않고 마신다. 물이 될 때까지 마신다. 나에겐 인간이 없다. 인간은 저기 거리에서 신속하게 걷는 자들이다. 오후에는 실내에 들어온 파리를 내보내기로 한다. 살아남은 파리는 천장으로 벽으로 옮겨 다닌다. 파리를 쫓아다닌다. 아무 이유 없이 위반 없이 스노우사파이어가 날아다닌다. 물을 주는 순간 잎들이 사라진다. 물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죽는다. 죽은 줄 모르고 잎들이 다시 죽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ㅡ계간 《문파》 2024년 여름호, 《시인시대》 204년 가을호 ---------------------- 이수명 / 1965년 서울 출생.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