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괴롭기 위해 태어났다
괴롭지 않기를 바라면 모든 것이 똑같기를 바라지 마라. 똑같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부질없는 욕망이다. 어떤 것이나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라서 어느 것도 똑같을 수 없다. 똑같을 수 없는 것을 똑같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독선이다. 나의 독선은 항상 현상을 바르게 보지 못해 어리석은 일을 즐긴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변화를 거부하면 세상의 이치와 충돌하여 불행하다. 변화를 발견하려면 먼저 나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변화를 아는 힘이 생기면 무상의 지혜가 난다.
생명의 특성을 알아 사물의 이치에 귀의하려면 가장 먼저 무상의 지혜가 나야 한다. 무상의 지혜는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단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진실일 뿐이다. 괴로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대상이 가진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감각적 욕망을 즐기려하기 때문에 항상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무상한 것에서는 오히려 괴로움을 느낀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무상을 느끼는 것은 즐겁기 위해서가 아니고 괴롭기 위해서다. 괴로움의 지혜만이 나를 고통에서 구한다.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에서 나는 무상을 느낀다. 나의 오른발 왼발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나는 똑같지 않은 무수한 변화를 본다. 나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혼란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을 느끼면 이런 무상으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이 생긴다. 무상이 하나의 지혜로써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무상으로 인해 괴로움의 지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해서 괴로울 때의 괴로움과,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의 변화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은 전혀 다르다. 내가 얻지 못해서 오는 괴로움은 단지 고통일 뿐이다.
내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을 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잘하려고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대상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오히려 수행이 잘 안되고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두드러지게 무상이 드러난다. 몸에서 일어나는 온갖 느낌이 무상이며 매순간 변하는 호흡이 무상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이 바로 무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없애야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이 모두 무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무상의 지혜가 날 때 괴로움의 지혜가 드러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소중한 기회를 맞이한다. 이런 지혜는 모두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다.
이때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으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은 오히려 집착을 끊는 지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을 알고 무상으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대상이 언제나 항상 그대로 있기는 바라는 집착이 생긴다. 바로 이 집착이 연기를 회전시키고 새로 태어나는 업을 짓게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이 대상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해서 생긴 결과다. 내가 바라는 것이 즐거움 대신에 괴로움이라고 아는 결과가 바로 괴로움뿐인 윤회를 끊게 한다. 인간은 당초부터 즐겁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고 괴롭기 위해서 태어났다. 내가 괴롭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진실을 알 때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병고에 시달리고 생존의 위협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다 결국 차가운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있다면 짧은 순간의 한때에 불과하다. 내가 즐거움을 얻었다고 해도 즉시 괴로움으로 바뀐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우면 더 즐겁기를 바라서 괴롭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다시 즐거움이 오지 않아서 더욱 괴롭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오히려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처럼 내가 바라는 즐거움은 구조적으로 괴로움을 동반하고 있어 결코 즐거움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태어나서 죽어야 한다면 나는 괴롭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괴로움의 지혜가 나면 원래 괴로움이란 불가피한 것이라고 아는 지혜가 나서 자연스럽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혜는 진실을 아는 것이라서 괴로움의 진실을 알면 더 이상 괴로움으로 고통 받을 이유가 없어진다. 지혜는 어리석음과 욕망을 부수어 설령 죽음이 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혜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있는 현실을 수용하는 가장 합리적인 견해다.
이렇듯 몸과 마음의 느낌을 통해서 무상의 지혜가 나면 다음 단계의 괴로움의 지혜가 나서 집착이 끊어질 때 단지 집착이 끊어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집착이 끊어졌다고 해서 집착이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다. 이때 아직 남아있는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의 지혜가 성숙되어야 한다. 무상으로 시작된 지혜가 괴로움의 지혜가 되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구도 괴로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이런 노력 끝에 나타난 새로운 지혜가 무아의 지혜다.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 다는 생명이 가진 특성을 아는 지혜가 무아로 완성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으로 없앨 수 없다는 진실을 알 때 비로소 무아의 지혜가 난다. 이런 무아의 지혜가 날 때 비로소 아직 미진하게나마 남아 있는 집착이 완전히 사라진다.
인간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자양분으로 삼아 살고 있다. 이러한 번뇌의 힘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집착을 끊는 길밖에 없다.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는 갈애는 적당한 선에서 제어할 수도 있지만 집착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집착을 끊는 이러한 지혜는 반드시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얻어야 한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서 몸과 마음이 아닌 다른 것을 대상으로 삼으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밖으로 나가서 다른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내가 본다는 전제로 보기 때문에 무아의 진실이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다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고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대상의 진실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괴로움의 지혜가 나면 괴로움의 지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괴로움의 지혜만이 무아의 지혜가 나게 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오히려 내게 집착을 하도록 한다. 나에게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지고의 행복을 얻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