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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지칭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내노라하는 건설관계자와 경제학자등이 대역사의 역군으로 피땀을 흘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대통령을 꿈꾸던 朴正熙의 작품이었다. |
차창밖의 사물들이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응시하던 朴正熙는 동승한 서독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두서는 없었지만 계획단계에서 건설 관리에 이르기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朴대통령은 이날 본~쾰른 20km구간을 왕복하며 두번이나 차에서 내려 아우토반을 유심히 살펴봤다.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등은 물론이고 앞뒤 선형까지, 아우토반의 모든 것을 머리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했다. 줄곧 곁에 서있었던 나는 朴대통령이 큰 결심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백영훈의 예상대로 朴正熙는 귀국하자마자 고속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각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관한 기록을 밤늦도록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연구보고서를 제출받기도 했다. 국토를 개조해서라도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패기만만한 40대 나이 대통령의 야망이었다. 현대건설 사장 鄭周永은 한국도로공사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각하께서 밤늦게 불러 들어가보면 많은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있는 서재로 데려가 손수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보이곤 하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상하면서 여러가지 안을 제시해 의견을 묻곤 했다." 2년반동안의 연구를 끝낸 朴正熙는 67년 5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발표만 있고, 진행상황은 전혀 없이 5개월여가 흐른 10월하순 어느날 朴대통령은 "늦어도 내년초에는 착공한다.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 보고하라" 우여곡절끝에 건설계획안을 확정할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 12월15일 발족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이 올랐다.
2. 공사과정
우선 1차 공사구간인 서울~수원은 2만5천분의 1 지도에, 이와는 별도로 서울~부산까지는 5만분의 1과 2만5천분의 1 지도를 여러 장 연결해 등고선별로 색칠을 했다. 5일만에 등고선 채색작업을 끝낸 이들은 노선작업에 나섰다. 단 하나의 기준, 최소 공사비를 위해 고지는 가급적 피해 이리저리 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그리고는 수원까지 발로 답사를 해야했다. 헬기를 이용한 공중답사는 물론 지프를 타고 현장확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朴正熙가 이들에게 현장답사를 지시한 것이었다.
마침내 68년 2월1일 4백28km 대장정의 첫 삽질이 시작됐다. 공사는 글자 그대로 불도저식이었다. 1공구 공사를 하며, 2공구 3공구 설계를 해나가는 식이었다. "빨리, 빨리"는 예정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당기기 위한 구호였다. "10개월만에 수원까지 뚫어 12월21일 개통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朱源장관이 朴대통령에게 연말까지는 오산까지 개통하겠다고 보고했다. 오산 인터체인지 공사가 50%밖에 진행이 안돼 있는 상태인데, 朱장관이 일종의 충성발언을 한 것이었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워가며 포장작업을 하는데 땅이 얼어 도저히 작업이 안됐다. 그래서 볏짚을 깐 뒤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도 보고, 대형 버너 수십 개를 트럭 꽁무니에 매단 뒤 끌고 다녀도 보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녹을 리가 있나. 할 수 없이 그냥 포장을 했다. 개통식이 열리기 3시간 전에야 가까스로 차선 도색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이처럼 공사를 강행해서 2년반만인 70년 7월7일 부산까지 전노선이 완공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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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이 앞장서 팔을 걷어붙이고 경제 개발에 나설 당시 중용됐던 관료들은 대부분 겁 없이 펄펄 뛸 30대 나이였다. 朴대통령은 이들의 패기를 적적히 살려주었고, 그 때문에 시행착오를 겁내지 않는 불도저식 행정이 가능했다. 이 점은 뒤에 숱한 비판도 받았지만, 정작 지금은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가 더 높다. "우리는 허허벌판에서 밤잠 안 자가며 몸사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도대체 사회 전반에 생기 있고 힘찬 맛이 없다"라는 것이 이들의 일리있는 항변이다.
3.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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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21일 서울~수원간 개통에 이어 69년 12월 19일 대구~부산 구간이 연결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428km에 걸친 대역사가 완공을 본 것이다. 단군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으로 자동차시대의 개막, 전국토의 1일 생활권시대, 대도시 인구집중 가속화, 엄청난 지역개발, 인적.물적 자원의 지역간 유통혁명이 뒤를 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에서 수원, 천안, 대전, 김천, 대구를 지나 부산광역시에 이르는 고속도로이다. 정식명칭은 서울~부산 간 고속국도. 1968년에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이다. 1968년에 시작해 1970년에 완공했으며 총 길이가 428km, 너비 22.4m에 이른다. 남이-회덕 구간은 6차선, 반포-양재 구간은 1992년에 8차선으로 확장했다. 또한 대전엑스포를 개최함에 따라 교통량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1993년에 천안-남이 구간을 6차를, 남이-창원 구간을 4차선으로 확장했다. |
인터체인지는 위의 여러 시, 읍을 포함하여 약 30개소이고, 주행속도는 최고 시속이 고속버스, 승용차 100 km, 일반버스, 화물차 80 km이고, 최저 시속은 50 km로 제한되어 있으며, 서울시역(市域) 안에서는 전차량이 70 km로 제한되어 있다. 천안삼거리, 금강, 추풍령을 비롯한 휴게소 12개와 버스정류장 83개소 등의 편익시설이 있다. 각 영업소에는 축중기(軸重機), 도로 곳곳에는 무인속도측정기 등 사고예방시설이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에는 한국민속촌, 온양온천, 속리산국립공원, 유성온천, 덕유산국립공원, 팔공산도립공원, 경주국립공원, 주왕산국립공원, 가지산도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1968년 2월 1일 기공하여 70년 7월 7일 완공된 고속도로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과 부산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이다. 기존의 철도, 국도와의 중복을 피하면서 서울, 수원, 오산, 천안, 대전, 영동, 황간, 김천, 구미, 왜관, 대구, 영천, 경주, 언양, 양산, 부산 등 주요시, 읍을 연결하여 그들 지역을 1일 생활권으로 묶고 있다. 또한 94년 현재 1일 평균통행량은 승용차 40만 대를 포함하여 약 50만 대에 달하여 전국 13개 전체 고속도로 평균 교통량의 33.2%를 차지한다. 노선별 통행료 수입에서도 전체의 약 51%에 이르러, 고속도로 가운데 이용 차량과 통행료 수입이 가장 많다. 이용차량의 종류도 86년까지는 화물차가 절반을 차지했으나 86년 이후부터는 승용차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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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렵고 가난했던 68년대 천문학적 큰돈으로 경부고 속도로를...... 베트남전 32만 젊은전우들의 피의 댓가인것을.....그러나 지금도 냉대와 홀대속에서 수백 가지 고엽제병 으로 촛불인생 인것을 국민들은 왜?모를까? 정치인는 더욱 모르겠지........
아닙니다,,,,아는 사람들 다 알고 있습니다. 저 정신 나간 작자들이 자기들이 그러한 자리에 다녀 왔으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자기네들의 전공을 높이려 날뛸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