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토빗기의 말씀 6,10-11; 7,1.9-17; 8,4-9ㄱ
10 토비야가 메디아에 들어서서 이미 엑바타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11 라파엘이 “토비야 형제!” 하고 청년을 부르자 그가 “왜 그러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라파엘이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밤을 라구엘의 집에서 묵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그대의 친족이오.
그리고 그에게는 사라라는 딸이 있소.”
7,1 엑바타나에 들어서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나를 곧장 우리 친족 라구엘에게 데려다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토비야를 라구엘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마당 문 곁에 앉아 있는 라구엘을 보고 먼저 인사하였다.
라구엘은 “형제들, 기쁨이 충만하기를 비오! 건강히들 잘 오셨소.” 하고 답례한 다음, 그들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9 라구엘은 양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잡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들이 몸과 손을 씻고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을 때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0 라구엘이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청년에게 말하였다.
“오늘 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라.
형제야, 내 딸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나도 사라를 너 말고 다른 남자에게 줄 권리가 없다.
네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얘야, 너에게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다.
11 나는 벌써 사라를 우리 동포 일곱 남자에게 차례로 주었지만, 사라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그 밤으로 다 죽어 버렸다.
그러니 얘야, 지금은 그냥 먹고 마셔라.
주님께서 너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토비야는 말하였다.
“제 일을 결정지어 주시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그러자 라구엘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마. 모세의 책에 있는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사람이다.
하늘에서도 사라는 네 사람이라고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
너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이제부터 너는 사라의 오라비고 사라는 너의 누이다.
오늘부터 사라는 영원히 네 사람이다.
그리고 얘야, 오늘 밤에 하늘의 주님께서 너희를 잘 보살피시고, 너희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2 그러고 나서 라구엘은 자기 딸 사라를 불렀다.
사라가 오자 라구엘은 그 손을 잡고 토비야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율법에 따라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모세의 책에 쓰인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아내다.
그러니 네가 맡아서 네 아버지께 잘 데려가거라.
하늘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번영과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3 라구엘은 다시 사라의 어머니를 불러서 쓸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라를 토비야에게 아내로 준다는 혼인 계약서를 썼다.
14 그러고 나서 그들은 먹고 마시기 시작하였다.
15 라구엘은 자기 아내 아드나를 불러, “여보, 다른 방을 준비해서 사라를 그리로 데려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아드나는 가서 라구엘이 말한 대로 그 방에 잠자리를 차려 놓은 다음, 사라를 그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사라 때문에 울다가 눈물을 닦고 그에게 말하였다.
17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그러고 나서 아드나는 방을 나갔다.
8,4 부모가 방에서 나가 문을 닫자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5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도하며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였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6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7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8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
9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을 길인 계명에 대해서 묻게 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르 12,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행위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명분과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 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차지, 소유로 삼기 위해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계명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과 15장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중계명이 한 계명으로 통합되며,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이 먼저 베푼 사랑을 서로 베푸는 하느님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차지하고라도,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는 않는가?"
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맨 먼저 앞세우고 있는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오늘 나는 대체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세상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다 지나간 뒤에>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미움밖에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 사랑을 포기한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확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깨닫고 나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면 강아지라도 사랑할까 저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데, 지금은 강아지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여러 번 자기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경험을 한 다음부터,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고 버겁다고 느낀 다음부터 인간 사랑을 포기하고 강아지 사랑밖에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 왜 이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어 할까?
왜 인간은 사랑 타령을 그리도 좋아하고 많이 할까?
그 근원을 생각해보니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사랑이 거부당한 경험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거나 사랑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 그 반감으로 오히려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면서 인간에게는 꼭 뭘 바라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훌륭하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사랑을 하면 뭔가 응답이나 보답이 있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치 않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아무튼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에 실패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하느님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랑하고 싶지만 가장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보이지 않는데, 응답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느낍니까?
그러니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사랑하겠노라고 감히 까불지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전까진 사랑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 주시기를 겸손히 청하며 사랑의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현존 체험은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하늘이 보이듯 감각적 인간 사랑이라는 구름이 걷혀야 감각을 넘는 하느님 사랑이 보입니다.
엘리야는 사랑은커녕 적대자와 원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쳐 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하느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나간 뒤에야 주님은 보이고 들립니다.
거창한 기적과 함께 강하고 자극적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길 지금까지 바랐다면 그런 것들이 다 지난 뒤에야 하느님은 나타나실 겁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31)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
그러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름 피우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참 사랑의 원리>
영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1936년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39년 미국의 서사적 역사 로맨스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남부의 미인 스칼렛 오하라의 삶과 남북 전쟁 중과 이후의 격동적인 사랑의 삶을 중심으로 합니다.
스칼렛은 아일랜드 이민자 농장 소유주의 딸입니다.
그녀는 강인하고 계산적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가져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녀는 고상하고 지적인 이웃 애슐리 윌크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부하고 그의 사촌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업가 레트 버틀러가 그 대화를 우연히 듣다가 스칼렛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스칼렛은 레트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상심한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찰스는 남북 전쟁에 참여해 사망합니다.
스칼렛은 그리 슬프지 않았지만, 슬픈 척을 해야 했습니다.
스칼렛은 끊임없이 멜라니의 남편 애슐리가 전쟁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구애해 봅니다.
그러나 애슐리에겐 멜라니뿐입니다.
멜라니는 사촌 스칼렛의 마음을 알지만, 타고난 침착함으로 스칼렛과 잘 지냅니다.
스칼렛은 이제 망해버린 집안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목재상을 하는 부유한 프랭크 케네디와 혼인을 합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고 남편도 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때 스칼렛은 남편의 죽음보다는 애슐리의 부상에 더 마음 아파합니다.
스칼렛의 결단력과 힘을 좋아한 버틀러는 드디어 세 번째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 버틀러 덕분으로 보니라는 귀여운 딸도 낳습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버틀러는 잠자리도 거부하는 스칼렛 대신 딸을 보며 위안을 삼습니다.
하지만 보니도 말을 타다 목숨을 잃습니다.
상심에 빠진 스칼렛은 또 멜라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멜라니도 자신에게 큰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스칼렛은 멜라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심 없는 애슐리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결국 애슐리를 차지할 줄 알았지만, 결국 사랑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은 버틀러뿐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붙들려 하지만, 버틀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니도 없는 그 집에 살지 않겠다며 스칼렛을 떠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이런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분명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행위가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은 뱀이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존재 자체가 본성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칼렛에게 뱀은 애슐리에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남는 것은 뱀과 공허뿐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으셔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위해 사랑하셔야 했을 텐데 그러면 사랑이 이기주의가 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야 자아의 본성적인 소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를 기쁘게 하는 이기적인 거짓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과 함께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여 생명이 담긴 양식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신 하느님을 먼저 사랑합시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 뿐입니다.
나는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기쁘시게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목적이 저절로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에 모기처럼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내가 그 사랑이 되는 길은 사랑을 사랑하는 길 뿐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과의 첫사랑>
사랑에 관해서 하느님은 참으로 요구가 많으시고,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십니다.
인생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체험한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자신의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총이 오늘 우리에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이 하루를 기쁘게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큰 계명>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신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뜻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시면서 너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너도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설명합니다(로마 13,10).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완성’이라는 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 주려고 오셨습니다(요한 17,23).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믿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때 신앙생활이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코린 13,1-3)
이 말은,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기적은 기적이 아니고, 희생도 희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위선이고 가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말은 사랑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만 믿고 희생하는 위선과 교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11)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한 4,19-20)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만’ 믿고,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1코린 8,5-6)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을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 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보다 사랑이 먼저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면 ‘사랑으로’ 바쳐야 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 없이 바치는 것은 바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창세 4,3-4ㄱ)
아벨은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즉 ‘가장 좋은 것’을 바쳤는데, 그것은 ‘사랑으로’,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쳤음을 뜻합니다.
카인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소출 가운데 일부를, 사랑도,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또 억지로 바쳤을 것입니다.
바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바치는가,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찬미받으소서 -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예전 신자분과 주고 받은 문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사님은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여기서 사느냐?”는 물음입니다.
신학교 때 동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를 “수사”로 부르는 것을 좋아해 여전히 수사라 부르고, 또 많은 분들도 수사라 부르는 것이 좋다며 수사로 부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 대답 전에 묻습니다.
“형제님은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삽니까?”
거의 대부분 웃으며 대답을 못합니다.
하나 덧붙여 묻는 질문입니다.
“형제님의 삶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형제님의 아내는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형제님의 자녀들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역시 웃기만 할 뿐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결론으로 저는 주저없이 답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찬미의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삽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공통적 답변일 것입니다.
저에게 삶은 두말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찬미의 맛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삶은 하느님의 선물로 변합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삶에서 샘솟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평생 하느님 찬미의 기도를 주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이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주일마다 아침 1시간 동안 노래로 바치는 “주님을 찬미하라”로 시작하여 “주님을 찬미하라”로 끝나는 긴 다니엘의 찬미가는 사랑의 찬미, 기쁨의 찬미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들꽃같은 삶”이란 시도 생각이 납니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쓰레기 내지 않고
물주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약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도 무리를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다
탈속의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자발적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 꽃들
참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이다
가난한 부자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 2001.5.20.
무려 22년 전 시를 오늘 인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찬미받으소서-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찬미에서는 천주교, 동방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가 일치합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이나 신자들이 수도원에 와서 압도되어 감동에 젖게 하는 것이 바로 저녁 성무일도 시 하느님 찬미의 노래입니다.
“찬미받으소서”, 바로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하는 이젠 고전의 반열에 속하는 2015년 6월 16일 반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회칙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리의 빛을 발하는 고전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책자 뒷표지의 소개글입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아름다운 찬가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찬미받으소서” 회칙은 아주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영성서적입니다.
결론 부분은 생태교육과 영성에 대한 금과옥조의 실제적 처방입니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향하여, 인류와 환경 사이의 계약에 대해 교육하기, 생태적 회개등, 참으로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해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인류와 세상 피조물이 살아남기 위한 생태적 회개가, 생태적 혁명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이 참 고무적이요 좋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
(2티모 1,10)
바로 오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오늘 복음이 특히 그러합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 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둘째까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에 화답하여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며 그의 영성을 인정하십니다.
아, 이제 이웃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 모든 피조물까지 포함해야할 절체절명의 기후위기의 시대입니다.
여기에 결정적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수도원의 5마리 반려견들일 것입니다.
저렇게 사람을 따르는 개처럼 우리도 주님의 따라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 찬미는 한결같고 열렬할 수 뿐이 없고 영육의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명약은, 영약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날로 확고해지면서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이웃 형제들과의 사랑도 저절로 함께 깊어질 것입니다.
물론 자연 피조물도 이웃 사랑에 포함됩니다.
참으로 사람 형제를 비롯하여 피조물 형제들까지 망라한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제가 “찬미받으소서” 강론 제목을 택한 것은 바로 제1독서에서 토빗의 아들 토비야와 라구엘의 딸 사라가 혼인하여 합방하기전 바친 기도문에서입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멘. 아멘.”
기도문이 참 멋지고 아름답고 적절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혼부부가 첫날밤 바칠 기도문에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찬미의 삶이 이웃사랑의 기초가 됨을 깨닫고 배웁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오다 악취에 주변을 살펴보니 개천에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맑게 흐르며 찬미가를 부르던 시냇물이 말라 버린 것이며 웅덩이에 고인 썩은물에서 나는 냄새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와 시편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찬미의 강”으로 살도록 해줍니다.
이를 요약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다음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찬미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찬미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톨스토이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인생의 의미를 알고 무덤에 묻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나도 사랑해!”가 아닐까요?
1년이 넘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가 아닐까요?
오랜 가뭄으로 바싹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바라보는 농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아닐까요?
어렵게 국경을 넘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가장 얻고 싶은 것은 신분을 보장하는 “영주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요?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신문사가 재정적으로 걱정 없을 정도로 구독자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사람들의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께 병중에 있는 딸을 치유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사람들만 갈망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마음이 모질고, 하느님을 시험하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혼배 주례를 하면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생명이 넘치는 이유는 끊임없이 아래로 물을 내려 보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사해가 생명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는 이유는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부부는 받기만 하려고 해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내어 줄 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이야기 해줍니다.
또 하나 물 이야기를 해 줍니다.
두물머리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두 강은 두물머리에서 만나고 하나의 강을 이룹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혼인은 배우자가 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이제 함께 더 넓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서로만 바라보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 서로 도울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신앙인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바쳐야 할 기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에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청을 주님께 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모든 기도의 우선순위는 주님의 기도 다음 나의 청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 모든 청원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 아오스딩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실린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거기서 기인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다 성인도 “우리는 이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을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청원만을 외치는 공허한 기도가 되어서는 단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외치셨던 많은 성인·성녀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청원에 앞서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만 이루어지길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기 뜻이 먼저다 보니 하느님 뜻은 아예 보이지 않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613개 조항의 법규를 지키느라고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교 생활의 고민을 예수님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큰 계명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이는 오히려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만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면서, 쓸데없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과연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사랑 없는 종교 생활은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또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합니다.
따라서 철저히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