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불교인드라망 원문보기 글쓴이: 법계월(66기)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시방진허공계十方盡虛空界 일체존불一切尊法 온세상(十方) 다함없는 우주(虛空界)의 일체 높은 진리에 지심귀명례합니다. |
(가) 왜 우리는 진리를 높다고 하는가?
진리는 淸淨(청정 )과 진리는 光明(광명)과 진리는 平和()를
원천(源泉)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진리를 배우는 것은 행복하다.
진리를 ( )하는 것은 행복하다. - 내 것화 한다.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행복하다. - 사회화 한다.
오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
오늘 유인물에도 보면 지심귀명례 시방진허공계 일체존법 해놓았지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일체존법一切尊法 일체존법
여기서 ‘존尊’이라고 하는 말은 높다는 것입니다. 존귀하다. 라는 존尊자입니다.
존귀한 법, 거룩한 법 이런 뜻입니다.
전체 문장을 보면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돌아가 예 올립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우리가 절에 와서 예경할 때는 지심귀명례 해야 합니다.
절대 잘났다는 상을 버리고 완전히 자기 이마를 땅에 붙이고 예경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심귀명례라.
시방진허공계 일체존법이라.
이 시방은 동서남북 사유 상하 남동쪽, 남서쪽, 북동쪽, 북서쪽, 상上, 하下
그러니까 시방이지요.
‘시방’은 온 세상입니다.
‘진’은 다함없는
허공계라 했어요. 허공계는 요즘말로 하면 우주입니다. 우주...
우주의 일체 존법, 높은 진리에 지심귀명례 합니다.
전체 뜻은 이렇습니다.
뜻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온 세상 다함없는 우주의 일체 높은 진리에 지심귀명례 합니다.
여기서 진리라고 했는데 진리말씀을 포함한 진리입니다.
일체 높은 진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진리를 높다고 말하는가?
진리가 왜 높은가?
거기 ‘가’번에 보면...
진리는 청정과 진리는 광명과 진리는 평화를 원천으로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청정하고 광명하고 평화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는 높은 것입니다.
모두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우리는 진리처럼 지저분하지 않고 청정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처럼 어둡지 않고 밝아야 한다.
우리는 진리처럼 불안하지 않고 평화스러워야 한다.
예.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고 진리를 공부하고 진리적 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 보면 ...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것은 행복하다.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행복하다.
이 체험이라는 것은 ‘내 것화’ 하는 겁니다.
진리적 체험, 진리를 내 것화 한다.
잘 한 번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것은 행복하다.
이 실천한다는 것은 가정화 하고 사회화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체험하고 진리를 실천하기 때문에 수준이 굉장히 높습니다.
단순히 믿는 신의 종교와는 다릅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신을 믿는 종교는 고작 청원하고 희구합니다.
청원하는 말은 그냥 빌기만 하고 희구, 좋은 세상 가는 것 그것을 바랄뿐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교리의 깊이도 아주 얕아요.
최근에 벤처 중소기업부 후보자 박성진이라는 사람이 청문회에서 나오는 하는
말이 지구역사를 6,000년, 지구역사를 그런 공공연한 자리에 나와서
기독교는 6,000년으로 보는데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 이랬어요.
그것이 무슨 교수입니까?
요즘은 초등학교 아이들도 지구역사를 물으면 45억년 또는 50억년이라 말해요.
애들도 다 아는 그런 사실을 우주과학이 밝혀낸 이런 사실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종교가 요즘은 득세를 하고 있거든요. 큰 문제인거지요.
불교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청원하고 희구하는 것이 해결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불교에서도 청원하고 희구하지만 그런 것쯤은 다 해결되고 한걸음 더 들어가서
체주諦主하는 종교다. 이 말입니다.
이 체주라고 하는 말은 진리를 체험하고 진리적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체험하면서 진리적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종교형태를 체주하는 종교다.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는 청원과 희구를 넘어서서 체주諦主하는 아주 최상급의 종교입니다.
종교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리가 되고 현재의 내가 진리적 체험을 통해서 지리를 사회화하는
그런 활기찬 삶을 살아야 하는 그런 당위성이 바로 이 체주에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공부하는 불자들이 제대로만 한다면 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불교인들은 보면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많아요.
아주 최상급에서 불교를 믿고 중간층은 없고 옛날처럼 바라기만 하는 종교형태를 겸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다 보면 진리적 체험을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하고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공부를 좀 잘못하여 거꾸로 해서인지 이 세상이 참으로 고통스럽고 허무하고
허무해서 그냥 열심히 살 것도 없다.
모두 쓸데없는 짓이다.
이 세상이 곧 무너질 것인데 뭘 그렇게 애써서 살 이유가 뭐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수도 많아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대재벌가도 교도소 가고 대통령 했던 사람도 교도소 가고 고관대작 했었던 사람들도 잡혀가고
이런 세상을 살다보니 돈도 소용없고 벼슬도 소용없고 좋은 직장도 소용없는 것 아니냐고
지레 불교인들이 다 허무주의에 빠져요.
세상이 다 허무하구나. 그렇게 알뜰살뜰 열심히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
또 이런 종류의 법문을 스님들도 곧잘 합니다.
그런 법문을 듣고 나면 힘이 빠지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려요.
삶의 기운을 꺾는 이런 법문이 왜 나타나느냐?
법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와요.
여기에 지금 말하는 것이 ‘존법’이라.
법에 대한 이해부족입니다.
여기서는 높은 법이라. 높은 진리라 이랬거든요.
‘존법’ 높은 법이라 했는데 이 높은 법이 어찌하여 사람의 의욕과 의지를 꺾느냐 말이지요.
(다)法(법)의 종류
(ㄱ)無一정리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
유위심(有爲心) - 유위법(有爲法) ※유위법의 6속성 몽夢, 환幻 ,포泡, 영影, 로露, 전電 -금강경 6如(여)
무위심(無爲心) - 무위법(無爲法) ※무위법의 6속성 (현)現 (실)實 체(體) 본(本) (상)常 영(永) -無一이론 |
법이라고 하면 가짜의 법인 유위법(有爲法)이 있고 진짜의 법인 무위법(無爲法)이 있어요.
그런데 가짜의 법, 이 유위법을 말하다 보면 허무해지고 급기야는 우울증이 올 정도로
잘못되어 갑니다.
유위법에 빠지면 다 소용없어요.
금강경에도 보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라 했어요.
유위법으로 보면 다 허무해요.
유위법은 가짜의 법인데 가짜의 법만을 말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꿈같고 허깨비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이슬 같고 저 순간 지나가는 번갯불 같다.
세상이 그러니 열심히 살 것이 뭐있겠느냐 세상은 다 유위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거든요. 그것이 문제라.
재벌도 죽고 대통령도 죽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가족도 소용없고 가족간의 사랑도 소용없고 친구도 소용없고 친구간의
우정도 소용없고 심지어는 불교도 소용없고 부처님도 소용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것이 크게 불교를 그르치는 그런 말들입니다.
과연 무엇이 진짜 법이고 무엇이 진짜 높은 법(존법)이냐?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유위법은 가짜라. 진짜의 법은 무위법이라.
무위법을 전혀 전제하지 않고 무상을 말하면 허무에 빠져요.
아무 곳에나 갔다 부치면 될 일이 아닙니다.
진짜 법, 거룩한 정법 그러한 법이 있는데 유위법을 말하다 보면 그것이 훼손돼요.
참된 법, 무위법에서 보면 돈의 많고 적음, 벼슬의 높고 낮음, 직장의 좋고 나쁨
이런 것이 문제가 안돼요.
그래서 우리는 이 인식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뭐가 진짜 법이고 뭐가 가짜 법이냐.
거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無一정리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 설명을 위해서 뒷 페이지부터 보시면...
유위법은 삼독심이라는 유위심에서 비롯되며 반드시 유루(有漏)한다.
유루의 유자는 샐 유漏자입니다.
샌다. 새버림이 있다. 말 그대로 허망하다 이 말입니다.
유위법은 유루하기 때문에 허망합니다.
하지만 옆에 보시면...
무위법은 삼진심이라는 무위심에서 비롯되며 반드시 무루無漏한다.
새버리지 않는다.
정말 가치있고 정말 영원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위법, 이것을 늘 말해야 하는데 우리들 삶이 너무나 중생스럽다 보니
유위법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불교가 유위법인가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여기에 빠져 있다. 이 말입니다.
거기 보면 삼독심이라는 유위심에서 비롯된다 했는데 삼독심은 위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탐진치貪瞋痴, 세 가지 독의 마음이 삼독심입니다.
반면에 제가 내세우는 세 가지 참의 마음이라. 참 진眞자.
삼독심은 세 가지의 독의 마음 탐진치인데 탐은 탐욕과 인과부정의 마음이라 했어요.
우리가 탐심이라 하는데 헛된 욕망 탐욕과 인과부정의 마음을 탐이라 했고 진瞋은 성낼 진瞋자입니다.
진은 분노와 스트레스를 말해요.
치痴는 무지無智(지혜없음)와 어두운 마음을 치라 말해요.
마음의 독이지만 이것이 심해지면 이것이 심해지면 육체의 독으로 변해서 몹쓸 병도 얻게 되는 겁니다.
이 유위법은 삼독심이라는 유위심에서 비롯된다. 이랬습니다.
유위심은 결국은 허망하다.
유위심은 삼독심이라 하는데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자기 탐욕에 빠져있는 마음들, 가식, 억지, 조작,
집착심, 음녀, 시기 질투하는 마음, 중상 모략하는 마음들, 음해하는 마음 이것이 유위심이라.
이 유위심에서 유위법이 나타나요.
그래서 금강경에도 보면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것이 앞페이지를 보면 유위법의 6속성이라 나와 있어요.
금강경의 맨 끝부분이라.
결론적인 부분에서 얘기를 하다 보니 인생이 본래 허무하구나! 하고 쓸데없는 나약한 소리를
하게 된다는 거지요.
법요집 447페이지를 봐 봐요. 그런 말이 있는지...
금강경은 하루에 한 번씩 읽습니까?
좋으니까 읽으라고 했는데 읽지 않는 사람은 배짱도 좋은 사람이지.^^
금강경은 하루 한 번 이상 읽거나 사경하면 아주 좋습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읽으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또 읽는지 안쓰는지 제가 알 수도 없고..^^
본인의 생각이지요. 본인의 의지이고...
447페이지 찾았습니까?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일체의 유위법은 몽, 꿈같고 환, 허깨비 같고 포, 거품 같고 영, 그림자 같고 로, 아침이슬 같고
전, 순간 지나가는 번개와 같다. 이랬거든요.
유위법이 이렇다는 거라.
그러니까 불교공부를 잘못하다보면 인생은 허무하게 생각하기 쉽다는 거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문제있는 마음이 유위심이라.
문제있는 마음이라 했으니 문제없는 마음이 있겠지.
거울로 말하면 거울에 때가 가득 있고 온갖 칠을 해 놓았어요.
거기다 자기 얼굴을 비추면 자기 엉망진창으로 비추어지는 그런 일이 되는 거지요.
유위심에서 비롯된 유위법이니까 이 유위법은 허망하고 허무하고 다 부질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유위법은 생멸의 법이라.
유위심은 생멸의 문이라.
참으로 허망합니다.
윤회의 원동력이 유위심에서 비롯되는 거지요.
진짜가 아니요.
아주 재미있는 얘기인데 다른 시간에도 해드린 봐가 있었던 것 같고 이건 법문이니까
한 번 더 들어보세요.
부처님 경전을 읽다보면 진짜가 아니라 ‘찐짜’라는 여인이 나타나는데 그 찐짜의 한문식 이름은
‘전차마나’ 줄여서 ‘전차녀’ 이렇게 말해요.
이 유위심에서 유위법이 나온다 했는데 이 유위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유위심은 탐진치 삼독심에서 나왔다 했어요.
탐진치 삼독심에서 나오는 것은 유위심이요.
유위심에서 유위법이 나오는데 그 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
부처님 당시에 아주 많은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부처님이 훌륭하니까 온갖 사람들이 시기 질투했습니다.
당시에 바라문이라고 하는 물론 신을 정점으로 하는 종교였어요.
신을 믿는 종교인들이 불교 때문에 자기 교세가 다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불교와 바라문을 비교하는 것은 태양하고 반딧불하고 비교다. 라고 했어요.
그 정도로 부처님 법이 대단한 수승한 위세를 떨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라문이 ‘찐짜’라는 여자를 불러서 기원정사 안에 몰래 잠입을 시켰습니다.
기원정사에 들어가는데 꼭 늦은 오후에 다른 사람이 기도하고 법문 듣고 내려오는 그 시간에
기원정사에 올라간다는 거요.
왜 가느냐고 하면 철야기도 하러 올라간다는 거요.
어느 날 점점 배가 점점 불러지기 시작하는 거요.
또 어떤 때는 새벽에 내려오는 겁니다.
새벽에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 보고는 향실에서 부처님하고 놀다 왔다고 해요.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실이라고 해요.
이름이 아주 고상하지요. 향불 향香자에 방이라는 실室자라.
향실에 있다가 옵니다.
배는 점점 불러지고 참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럼 저 사람은 부처님 애를 가졌는가 하고 이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바라문 사람들이 계략을 세운 것이 적중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불교인들이 신심을 떨어지기 시작했지요.
요즘 같으면 SNS를 통하면 불교는 일시에 망해버려요.
그때 휴대폰 이런 것이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
그런데 부처님 전기를 보면 이런 일이 참 많아요.
이건 단순한 하나의 예인데 그런 얘기들이 참 많습니다.
당시 기원정사에서 96종의 외도들과 부처님이 큰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배가 불룩해진 찐짜가 나타났어요.
거기는 왕도 있었고 왕자도 있었고 장사꾼 사업가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타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훌륭한데 나한테는
왜 그렇게 야박합니까? 하고 고함을 질러대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하고 이해가 안되는 거지요.
뱃속의 아이가 당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느냐고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질러대요.
그 상황을 한 번 생각해봐요.
기원정사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여자가 나타나서 막말을
쏟아내니 부처님이 기가 찰 것 아닙니까?
당신이 능력이 없으면 기타내자도 있고 타사이왕도 있는데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해서 내방을 하나 마련해주지 하고 고함을 질러대요.
그 정도가 되면 부처님도 감당이 안되겠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한마디 해요.
“여인이여 네가 한 말은 그 진실성은 너만이 알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입을 좀 다물고 있을 줄 알았던 여자가 하는 말이
맞아, 우리사이에 있었던 일은 우리만 알뿐이지.
하고 허파를 뒤집는 소리를 해요.
부처님 전기를 읽어보면 그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 같아요.
그러자 불자들이 일어서서 이 여자를 보고 팔을 당기면서 왜 그러냐고 하자
배안에 있던 뭐가 뚝 떨어 졌어요.
그것이 큰 나무발우였어요.
나무발우를 동여매었는데 시원찮게 묶었는지 떨어지고 말았어요.
어떤 경전에서는 신장이 쥐로 변해서 그 끈을 갉아먹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여하튼 발우가 떨어지니까 본래 저런 여자라고 난리가 났겠지요.
옛날 인도는 이 발우를 사용했거든요.
나무발우를 뱃속에 넣었다가 떨어지니까 한 신도가 발우가 너의 아이냐?
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고함을 질렀어요.
그 정도가 되자면 여자는 아마 살 수가 없었을 거요.
자기 스스로도 엄청 충격을 받았을 거라.
경전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그건 좀 설화적인
부분이 있고 바라문에서도 그 여자를 보호해 주지 못했겠지요.
아마 분명히 그 길로 정신적 충격을 받고 돌아다니다가 정신병이 들어서
구신이 되지 않았느냐 그 표현이 땅이 갈라지고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얘기 전체를 생각해서 보면 아주 재미있어요.
이것이 바로 탐진치라고 하는 유위심에서 나온 유위법이라.
이 유위법은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해요.
과보가 참으로 냉정할 정도로 처참하잖아요.
현생에도 이러한 과보를 받거늘 내세에는 얼마나 더 큰 과보를 받겠는가
경전에는 그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잘난 사람은 늘 시기질투를 합니다.
얼마 전에도 북쪽에 있는 내 도반이 대구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하는 얘기가 나는 최근에 서울 강남에 가본적도 없었는데
강남에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마련해놓고 다섯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대요.^^
요즘 애치고는 많이 나았지.^^
애들 방학이 되면 미국으로 유럽으로 놀러 다닌다. 이래요.
내 도반이 대구 있는 스님에게 보았냐고 하니까 본 것은 아니더래요.
대구는 한국불교대학이 잘 하다보니까 한국불교대학 죽여라. 우학스님을 그냥 두면 안된다.
이렇게 말을 만드는 집단도 있대요.
그런 사람을 보면 무조건 입을 쥐어박아야 돼요.^^
우리절 신도중에 정말 입을 쥐어박고 돈을 칠백만원 물어 준 거사도 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자꾸 하니까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내 도반이 우학스님은 2013년부터는 문을 완전히 닫고 무문관에
있었고 지금도 무문관에 있고 5년째인데 자식이 있으면 무문관에
있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야단을 쳤답니다.
어떻게 스님이 스님에게 나쁜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엄청 야단을 쳤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경빈에 있는 돌덩어리를 보고 시기질투를 하는 사람은 없거든.
우리가 너무 잘나고 많은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다 보니 적도 많아졌어요.
내부의 적도 많고 특히 불교 내부의 적도 많아졌어요.
그 점을 늘 생각하고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전세에서 25년의 역사면 아주 짧은 역사입니다.
천년, 이천년 되었다는 역사를 자랑하는 그런 절들이 천년동안에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학교,
이서중고등학교, 어린이집, 유치원, 복지법인 산하에 많은 시설들 요양원, 무량수전,
영천 참좋은 요양병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기적이거든.
아울러서 NGO BUD에서 네팔에 여러 학교를 지어주고 이런 일은 잘 없잖아요.
이런 일은 단위 한 사찰에서 한 가지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우리는 수 백 가지를 하고 있잖아요.
감포 세계명상센터 이런 일들이 아주 불가사의한 일들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시기 질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기 질투 중상모략의 종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찐짜의 사건,
전차녀의 사건에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참으로 유위법에서 봤을 때는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이더라 그 말입니다.
세상은 유위법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유인물을 보면 ...
무위법은 삼진심 이라는 무위심에서 비롯되며 반드시 무루無漏한다.
삼진심은 뭐냐?
삼독심이라는 말은 경전에 나오지만 삼진심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세 가지 참의 마음이라.
탐심의 반대말은 청정심입니다.
청정심이라는 것은 순수하고 무집착한 마음을 말해요.
진(분노와 스트레스)의 반대말은 평화심입니다.
자비롭고 긍정적인 마음을 평화심이라 말합니다.
치심은 무지와 어두운 마음인데 반대말은 광명심을 말합니다.
지혜롭고 희망적인 마음입니다.
반야광명이라 하는데 광명은 지혜입니다.
광명은 바로 반야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고 희망적인 마음이라 이렇게 의미를 붙였어요.
삼진심三眞心 , 세 가지 참의 마음이 뭐냐?
청정심과 평화심, 광명심이다 이렇게 외우셔야 됩니다.
무위법은 삼진심이라는 무위심에서 비롯되며 무위심은 삼진심인데
무위심은 우리말로 하면 순리적이고 자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연적이고
때 묻지 않은 그런 마음이 무위심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롯된 법이 바로 무위법이라.
무위법을 우리말로 하면 함이 없는 법이라 했는데 무위법의 6속성이 있어요.
제가 앞 페이지 보라 하기 전에 눈치껏 잘 보세요.^^
그것을 ‘無一이론’이라 해서 제가 찾아서 그렇게 넣어 놓은 겁니다. 잘 봐야 돼요.
무위심, 즉 청정심과 평화심과 광명심이라고 하는 삼진심에서 비롯되는
이 무위심은 반드시 무위법을 만들어 내는데 무위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첫째 현재다. 몽(夢)이라 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라 하는데 그 마음이 청정심과 평화심과
광명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무위심이 되어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현재입니다. 현재 현現...
두 번째 유위법에서는 환(幻) 헛깨비였는데 허깨비가 아니라 현재 내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것은 실(實)제이다.
셋째 포(泡) 유위법에서는 다 물거품이라. 아무것도 소용없지요.
그렇지만 무위법에서는 체(體) 모든 것이 바탕이라.
넷째 유위법에서는 영(影) 그림자라 했는데 무위법에서는 본(本)근본이라 했어요. 근본...
다섯째 유위법에서는 로(露)아침이슬인데 무위법에서는 상(常)이라.
항상 상常자라. 항상 합니다.
여섯째 유위법에서는 전(電)순간 번갯불인데 무위법에서는 영(永)
영원할 영永자라.
무위법, 우리들이
지금 불교공부를 하고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무위심이 되고
무위심에서 바라보는 모든 진리는 다 무위법이고 모든 세상은 다 무위법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눈으로 세상을 반듯하게 보면 현재 보이는 것이 현재이고
다 실제이고 다 바탕이고 다 근본이고 다 항상이고 다 영원하더라는 말입니다.
이 무위심이야말로 적멸의 문이고 해탈의 문입니다.
그래서 진짜의 법은 무위법입니다.
진짜 진리는 무위법입니다.
진짜 진리 무위법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ㄴ) 이법(理法),교법(敎法)
이법은 현상의 본질, 진리, 원리, 이치
교법은 말이나 글의 가르침, 이법은 깨우치도록 설함이 교법이다.
※ 이법과 교법은(무위심)에서 비롯된 무위법이다.
※ 법귀의(法歸依) 법등명(法燈明)
※ 법당(法堂)
※ 법왕(法王)
※ 그 스님 법이 있다.
법의 또 다른 분류방법으로 이법(理法), 교법(敎法)이니 이런 말을 해요.
교법이라는 것은 말이나 글의 가르침, 이법을 깨우치도록 설하는 것이 교법이다.
아까 우리가 유위법이니 무위법이니 했는데 진짜의 법이 뭐라 했지요.
무위법이라.
이 유위법은 가짜입니다.
말 그대로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입니다.
경전 금강경에서 그것을 계속 얘기한 것은 유위법에서 벗어나서 무위법으로 들어가라 이 말입니다.
유위심을 버리고 무위심으로 들어가라.
실제로 참 진리의 종착역은 바로 참 진리의 법 무위법이다 이 말이지요.
문제는 이 무위법 안에 입법과 교법이 있어요.
이법은 현상의 본질이다. 이법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그대로 돌아가는 진리의 속성이 있어요.
교법은 진리가 이렇다 하고 가르치는 법이 교법이라.
그래서 교법은 말이나 글의 가르침, 이법이 이러함을 가르치도록 설함이 교법이다 이랬어요.
현상의 본질 물이다. 물은 H2O로 되어 있다.
이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물은 본래 그런 거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이치적인 법이라. 이법입니다.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거지요.
진리라는 것도 사실이라.
요즘 말로 하면 팩트(fact)같은 거라. 진리...
작물수확을 하려면 물도 주고 거름도 줘야 됩니다. 그건 진리입니다.
제가 작물을 키워보니 그래요. 진리라...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원리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치적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르고 며칠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는 것이 이치의 원리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면 얼굴이 밝고 미소를 짓지만 서로 싸우고 미워하면 얼굴이 이지러지고 상하지요.
그것이 원리의 이치라.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이치적인 법이라. 이법이라.
이것도 결국은 무위심에서 반듯하게 보여지는 것이지 유위심에서는 안 돼요.
교법은 말 그대로 부처님께서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가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할 때 가르침은 교법이라.
교법을 잘 알게 되면 이법을 깨우치게 돼요. 또 이법대로 사는 힘이 생겨요.
그래서 그 아래 보면 무위법은 무위심에서 비롯된 무위법이다 했어요.
이법과 교법은 무위심에서 비롯된 무위법이다.
무위법은 완전한 진리다. 이 말입니다.
무위심이야말로 최고인데 선禪에서는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이렇게 말해요.
무위심이 곧 무심이라.
때 없이 맑고 깨끗한 그 마음자리, 그 마음자리에서 보여지는 것이 진리인데
그게 억지로 표현해서 무위법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 보세요.
법귀의(法歸依) 법등명(法燈明) 이런 말이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으로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 했어요.
법귀의, 법에 귀의하라.
일체존법이라. 존법을 공부하고 있지요. 법은 존귀하니까 귀의하라.
법은 들불과 같은 것이니까 법에 귀의하라.
법등명, 법을 등불로 삼아라.
그리고 법당에 와서는 법을 들을 준비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법당이라.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왕입니다. 그래서 법왕입니다.
다음 또 법자가 들어가는 말이 법력法力이라는 말이 있어요.
법을 잘 알고 법에 대해서 힘이 있다면 법력이 있다 말하지요.
그 스님이 법이 있다 말하는 것은 스님이 법에 대해 잘 알고 법에 대한 힘이 있다는 거지요.
법사라 하면 법을 가르치는 스승을 법사라 하지요.
어찌보면 법이 바로 도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위심에서 비롯된 무위법은 이법과 교법으로 나누는데 결국은 한자리입니다.
(라) 이법(理法)과 교법(敎法)의 핵심
그래서 그 아래 보시면 이법과 교법의 핵심이라.
우리는 많은 교리를 배우면서 어느 것이 이법이고 어느 것이 교법인지 잘 몰라요.
이법이라 하는 것은 연기법, 인연법, 인과법, 12연기법, 법계연기법 이런 것은 이법입니다.
그대로 놓여 있는 겁니다.
누가 말하나 말하지 않아도 그대로 놓여 있는 진리라.
예를 들면 선인선과 악인악과라.
선의 원인을 심었으면 선의 과보를 받고 악의 원인을 심었으면 악의 과보를 받는다.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대로 되어 있어요.
그건 진리입니다. 리법, 두음법칙을 써서 이법 이렇게 말해요.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이런 것도 이법입니다.
이법을 깨우치도록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이 교법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삼학,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이런 것이 부처님께서
이법을 깨우치도록 하는 교법이 되는 겁니다.
불교가 이렇게 어려워서 언제 다 외웁니까?
그냥 외우면 돼요. 그러면 치매 안옵니다.
영어가 어렵잖아요.
어린 애가 영어를 공부하다가 푸념을 해요.
나는 영어를 못하는데 미국에서 안태어나 천만다행이다.^^
미국에 살았으면 영어를 잘 했겠지.
불교도 그래요. 불교공부가 어려운 것 같지만 잘난 한국불교대학에 5년, 10년,
20년 다니다 보면 여기서 말하는 교법, 이법 이 모든 것이 상식적인 말로 변해버려요.
스님들도 3학,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은 아니거든.
오래 공부하다 보니 상식적인 말로 변해버린 거지요.
그와 같이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에 꾸준히 다니다 보면 초하룻날 와서 법문 듣고
공부시간에 와서 공부하다 보면 진리적인 말들이 상식적인 말로 변해 가요.
부처님처럼 목숨 걸고 깨달은 진리를 욕심도 많지 한꺼번에 꿀꺽 삼키려고 하면 안 되는 거요.
꾸준히 다녀야 돼요.
영어하다가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거든요. 미국에 살아버리면 괜찮아요.
한국불교대학 다니다가 다니지 않으면 조금 배운 교리도 잊어버려요.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듯이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왔다갔다 가방끈만 길면 돼.^^
가방끈만 길면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평생 한국불교대학에 다니면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돼요.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귀로 들은 것이 있어서 다 알잖아요.
그것만 해도 큰 공부하는 겁니다.
(라)번에 보면 이법(理法)과 교법(敎法)의 핵심이라 했어요.
연기법에도 12연기법, 법계연기법 등 종류가 많아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기본연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 연기...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차무고피무 此無故彼無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혹시 이런 얘기는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기본연기가 있는가 하면 인연, 필연적 운명 이것이 다 인연입니다.
인과, 입력된 만큼 출력되는 것이 인과입니다.
12연기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입니다.
법계연기는 인드라망적 연기라 해서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연기가 중첩되고 중첩되고 중첩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 이런 말이 나와요.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 이것이 다 법계연기입니다.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이러한 말들은 그냥 말이지 말하기 이전에 이미 이치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이치적인 진리의 법, 이법理法이라 그렇게 말했고
부처님께서 이법을 깨닫도록 직접 우리들에게 자상한 가르침을 내리셨는데
그것이 교법敎法입니다.
거기에 보면 3학(三學)이라 되어 있지요.
삼학은 계정혜戒定慧를 3학이라 하지요.
이 원이삼점 이것은 조계종의 심벌이기도 하고 감포도량에 가보면 지붕 옆에 보면 이것이 그려져 있어요.
이것을 원이삼점의 마크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 개의 점이 많은 의미를 나타내는데 그 중에서 계정혜 3학을 말하는 비중이 큽니다.
다음에 감포도량 문수전은 네 개의 큰 기둥이 올라가고 있어요.
네 개의 큰 기둥이 가장 큰 힘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문수전 네 개의 기둥을 따서 그 의미를 붙여서 문수전이라 이름 붙였어요.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가 가장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문수의 지혜라 말하지요.
나중에 감포도량 가시게 되면 네 개의 기둥이 어디 있는지를 보시기 바라고요.
다음에 팔정도는 우리 불교대학의 마크속에 들은 것이 바로 팔정도를 나타냅니다.
불교대학의 마크를 잘 봐 봐요.
팔정도라 하면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정정(正定)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그건 들어보셔야 돼요.
우리절 마크 속에 있는 것이고 우리절의 이념이라 봐도 되는 거지요.
팔정도탑이라고 해서 감포도량 보은전과 지금 짓고 있는 이불병좌 선방 용화전과 연화전
내려가는 길에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었지요.
거기 물레방아에 팔정도를 써놓았는데 제가 아주 더운 날 2시간 걸려서
땀을 뻘뻘 흘리며 새겨놓았습니다.
감포도량에 가시면 꼭 팔정도 탑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우리가 알고 있는 육바라밀(六波羅密)
육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
육바라밀은 들어보셨습니까?
자꾸 다니다 보면 그냥 알아집니다.
부처님 교법이 많고 아주 복잡한 것 같아도 기본골격은 이 네 가지입니다.
3학,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없어요.
또 하나 우리가 ‘존법’이라.
높은 법, 존귀한 법을 얘기하면서 각 경전의 핵심 엣센스를 말하지 않을수가 없어요.
경전의 4구게를 보시겠습니다.
금강경은 늘 우리가 외우고 사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강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쯤 내용과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금강경 4구게는 세 곳에 나타난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마)각 경전의 사구게 (p143참조)
① 금강경 - 범소유상...약이색견아...일체유위법
제가 4구게의 첫머리만 가져다 놓았어요.
첫머리만 보면 끝가지 외울 수 있어야 돼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대단합니다. 이것이 금강경 4구게입니다.
어디 가서 누가 물을 수도 있어요.
금강경 4구게 외울 수 있냐고 물으면 구구단 외우듯이 줄줄 외운다면
역시 한국불교대학 수준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② ( 화엄경 )-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는 밑줄치시고...
이서중고등학교 체육관 겸 독서실 위에 ‘일체유심조’라 이렇게 써놓았어요.
그 밑에 아이들 수준에 맞게 해석하기를 ‘마음먹은 대로 된다.’ 이렇게 해놓았어요.
일체유심조,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짓는다 했는데 애들 수준에 마음먹은 대로된다. 그러면 돼요.
마음먹은 대로 되니까 열심히 공부해라 이거지요.
그러면 마음먹은 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입니다.
2번 앞에 괄호 안에는 화엄경입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라.
③ 법화경 -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상자적멸상(常自寂滅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재를 지내다 보면 많이 나오지요.
④ 열반경 -제행무상 (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이것도 재를 지내다 보면 나오지요.
⑤ 아함경 -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제법종연멸(諸法從緣滅)
아불대사문(我佛大沙門) 상작여시설(常作如是設)
모든 법은 인연따라 생겼다가 모든 법은 인연따라 없어지네.
나의 부처님 대사문이시여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네.
거기에 빠진 말 가운데 늘 우리가 잘 외우는 칠불통계라고 있어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라.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칠불통계...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이 속에 불교가 다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경전의 이러한 짤막짤막한 이런 구절 속에 엄청난 삶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부처님 말씀, 부처님께서 우리 잘 되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을 교법이라 한다 했어요.
그렇다면 이 교법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설명한 것이 (바)번에 있어요.
(바) 無一교법(敎法)의 가치(불교공부의 이유)
부처님의 말씀을 교법이라 한다 했는데 삼귀의에도 보면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라고 했지요.
거룩한 가르침이 바로 교법이고 여기서는 ‘존법’이라 했어요.
지심귀명례 시방진허공계 일체존법이라. 높을 존尊자입니다.
충분히 일체존법이라고 찬탄할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불교공부의 이유 교법의 가치입니다.
①( 正見 )의 확립
우리는 오직 부처님 말씀 불교공부를 통해서 정견이 생겨납니다.
정견이라 하면 바른 견해라는 말인데 바른 인생관, 바른 우주관, 바른 생활관, 바른 생명관
이것이 다 견해입니다.
견해는 배움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움만이 살길이다 이 말입니다.
정견의 확립이라.
부처님의 말씀을 자꾸 듣다 보면 이것이 바른 생활관, 바른 인생관이구나,
바른 우주관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돼요.
정견의 확립됩니다.
팔정도가 있지만 정견이 제일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들음으로서 정견이 생기는 것이지요.
② 깨닫게 한다(참나, 지혜, 삶의 힘)
왜 깨달음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어요.
참 나를 찾게 하고 깨달음 자체가 참 나입니다.
또 깨달음 자체가 지혜라.
깨닫게 되면 지혜가 생기고 깨닫게 되면 삶의 힘이 생겨요.
그래서 우리는 다 깨달아야 돼요. 발보리심 해야 돼요.
깨달아야 하는데 이 깨달음은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법력으로 바로 부처님 말씀
그대로 깨달아 버렸어요.
최초 5비구 아약 콘단야 등 최초 5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들음으로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교법은 직접적으로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내 말대로 잘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다
해서 깨닫는 방법까지 나오기 때문에 결국엔 깨닫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교법의 두 번째는 깨닫게 한다는 겁니다.
③ 지극한 평온을 준다.
불안하지 않고 짜증나지 않고 공포심, 두려움이 없어져요.
부처님 교법을 알게 되고 부처님 말씀을 듣게 되면...
어느 날 한 거사가 찾아와서 제가 서 있는데 와서 절을 꾸벅해요.
절을 배우지 않는 유교식으로 절을 해요.
스님께 너무 고맙다 하고 한국불교대학이 너무 고맙다는 겁니다.
제 마누라가 성질이 좋지 않았는데 한국불교대학 다니고부터는 순한 양이 되었다는 겁니다.^^
방글방글 웃고 가정에 평화가 왔다는 겁니다.
전에는 병원약도 먹고 했는데 불교대학 다니고 부터는 병원약도 끊었다는 거요.
그 소리를 듣고 나니 제가 삼배를 받아도 되겠다는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부처님 말씀 교법은 지극한 평온을 줍니다.
④ 영원한 삶을 살게 한다.
우리가 살다보면 그냥 하루살이처럼 살아 갈 때가 있거든요.
부처님 말씀을 듣다보면 영원한 삶을 살아야지.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무엇이 단편적인 것인지를 알게 돼요.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차츰차츰 영원을 향해 갑니다.
성질이 좀 더 느긋해지고 차분해지고 시기 질투하는 것에 대해 초연해집니다.
죽음이 닥친다 하더라도 초조하지 않아요.
그것은 바로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⑤ 완전한 ( 행복 )을 느끼게 한다.
완전한 행복이라.
세상에서 던져지는 대부분 다 조건적 행복입니다.
누가 돈을 좀 주면 행복하고 직급이 올라가면 행복하고 또 상대가 좀 잘해주면 행복하고 그러잖아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하고는 거리가 좀 멉니다.
그냥 진리를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이 자체가 행복입니다.
세상에 이런 말씀도 있구나. 이 얼마나 행복한 소식입니까?
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참 행복해졌다.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는 사람이 참 많아요.
⑥ 인드라망적 공동체 실현을 꿈꾸게 한다.
인드라망적 즉 중중무진이라.
중중무진연기를 인드라망 이렇게 말해요.
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몰랐습니다.
이제는 불교공부를 하다 보니 그 사람도 여기 와서 공부를 좀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에 동참하고 싶어. 이런 마음이 자꾸 일어나요.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하나의 꽃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나한테 보여 지고 나한테 잡히는 모든 것이 내일처럼 생각되어 집니다.
얼마 전에 감포도량에서 약의왕여래불 점안식이 있었는데 두 번째 하는데
9월 17일, 날을 일부러 그렇게 받으려고 해도 받기가 힘들어.
제 18호 태풍 탈림이 닥쳤는데 그 파도를 한 번 볼만 했어요.
비바람도 불고 집채만한 파도가 치고 들어오는데 그런 날 받기도 힘들어요,
앞날도 괜찮았고 뒷날도 괜찮았는데...^^
저는 파도 보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제가 해변힐링마을 해룡일출대관음사를 바닷가에 지어 놓은 거요.
파도 보려고...^^
파도 보면서 태양 떠오르는 것을 보고 기도해 봐요.
아마 기도가 저절로 될겁니다.
그런 날을 기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태풍 탈림이 닥쳤는데 거기에서도 괘불을 설치했어요.
연화봉사단, 총동문신도회, 정법호출택시 이런 거사님들 보살님들이
전부 설치를 하고 나중에 해체를 하는데 그걸 보는 것만 해도 신심이 났어요.
‘우리 한국불교대학은 절대 무너지는 일이 없겠다.’ 난파선을 일으켜 세우듯이
전체가 붙들고 그 일을 했거든요.
바람 불고 비가와도 끄떡없이 행사를 했잖아요.
제가 그걸 보고 공동체의식이 분명한 사람들이다.
내가 곧 한국불교대학이고 내가 곧 우리 전체다.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어요.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주공해구主共偕俱라.
주인정신과 공동체의식이 동시에 또렷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고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는 오백년 이상은 유지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날 태풍이 잘 왔다. 태풍이 오지 않았으면 제가 그걸 못 보았을 것 아니요.^^
우리는 절대 나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⑦ 현재적 한계 밖을 보게 한다.(실참 - 참선과 기도 등 수행으로 안내)
현재적 한계 밖을 보게 한다.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은 한계가 많고 오류가 많습니다.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참선 기도도 저절로 해지게 돼요.
참선기도 꼭 해야 됩니다.
교법의 가치 부처님께서는 늘 참선기도를 많이 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묘한 정신세계를 들어가려면 참선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다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현재 한계를 넘어 설 수도 있어요.
이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도 말하고 또는 부처님 가피를 입었다.
부처님 가피라고도 말합니다.
아무튼 부처님 교법의 가치는 현재적 한계 밖을 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사) (교)법을 배우고 (이)법을 깨닫는다.
學校覺 覺理法(학교각 각이법)
이것도 제가 만든 말입니다.
사실은 각리법이라 해도 되는데 요즘 다 이법이라 하니까 그렇게
써놓았어요. 이치 리理자라.
교법을 배우고 이법을 깨닫는 것이 불교다. 이렇게 봐도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교법, 부처님 말씀을 배워야 돼요.
참선기도를 해서 이법을 깨달아야 돼요.
이치적인 법을 깨달아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선교겸수禪敎兼修라 이런 말을 써요.
선교겸수는 선은 참선기도 등 수행이고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교, 두 개를
겸해서 닦아가야 한다. 선교겸수 해야 완전한 불교를 체득한다. 그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외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는 자세
(ㄱ) (위법망구)(爲法忘軀) - 진리(법)를 깨닫기 위해서는 몸을 잊을 잊어야
한다. 몰아적(沒我的)수행이 필요.
먼저 발보리심(발보리심發菩提心)하고, 다음은 인행(因行)이 있어야 한다.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해놓았습니다.
거기 한문을 뭐라고 읽습니까?
위법망구... 오~~~ 수준 높은 분이 많네.^^
구자는 몸 구軀자입니다.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어버려야 한다.
진리(법)를 깨닫기 위해서는 몸도 잊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몰아적 수행이 필요하다.
몰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우리가 용맹 정진한다. 는 말도 있잖아요.
기도를 좀 다부지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몸도 잊어버려야 돼요.
먼저 발보리심하고 다음은 인행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결과를 얻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원인되는 행이 있어야 되거든.
그것이 정진이잖아요.
위법망구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위법망구 위법망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해드리겠습니다.
한 수행자가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석천이 가만히 보니 저 사람이 공부를 하긴 좀 하는 것 같은데
검증을 좀 해봐야겠다 해서 제석천이 나찰의 모습을 하고 바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찰로 변한 제석천이 한마디 했어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이라.
열반경 4구게가 나왔지요.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으니 이것이 생멸의 법이라.
이것이 나고 죽는 법이라네. 이렇게 한마디 했는데
공부하는 수행자가 들었을 때는 대단한 말이에요. 이 말자체가...
그래서 너무나 큰 기쁨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
주위를 둘러봐도 험상궂게 생긴 나찰밖에 없었습니다.
이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을 나찰이라 그래요.
그래서 나찰더러 물어봤어요.
“혹시 당신이 그 말을 했느냐?” 했다고 하자
그 말씀은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은 말씀인데 뒷구절을 내가
들을 수 없겠습니까?” 분명히 뒷구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자 나찰이 하는 말이 나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파서 헛소리가 나왔을 뿐이지 뒷구절은 모르겠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수행자는 눈치를 채고 분명히 뒷구절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제자가 되겠으니 그 말을 해달라고 했어요.
나는 제자고 뭐고 지금 배가 고프다.
그러자 이 수행자는 그럼 당신은 무엇을 양식으로 합니까? 했더니...
나는 사람의 육신의 피를 빨아먹는 나찰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수행자가 내 이 무상의 몸을 버려서 영원한 진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니
그 말을 해주면 내 몸을 당신에게 보시하겠다. 이랬어요.
말 그대로 위법망구라.
자기 몸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만 생각하는 거요.
질그릇을 주고 칠보그릇을 바꾸는 일을 왜 하지 않겠는가?
나찰이 그 얘기를 듣더니 내가 말해주겠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라.
생멸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적멸이 곧 즐거움이 되리라.
앞에 열반경 4구게 한 번 보세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이 말씀까지 듣고는 수행자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나무꼭대기에 올라갔어요. 나찰은 아래에 있고...
약속대로 내 몸을 줄게 하고 떨어졌어요. 받아먹으라 이거지요.
그런데 제석천에서 변한 나찰이 다시 제석천으로 몸을 바꾸면서
그 수행자를 연꽃좌대위에 받쳐 들었다 이랬거든요.
그랬더니 모든 천신들이 나타나서 그 수행자의 발에 예배하고 존경하였다. 이런 말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위법망구의 전형적인 얘기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 위법망구의 정신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오늘 초하루인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몸도 피곤하고 절에 갈까 말까 이런 마음이 일어나요.
정규공부 시간에 몸이 좋지 않고 어디 갈일이 생겼어요.
그러면 열일 제쳐놓고 절에 와야 돼요.
몸이 조금 아프다 해서 절에 온다고 해서 죽는 일은 없어요.^^
몸살 난 몸을 이끌고 절에 와야 돼요.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이라.
불교공부를 세속의 공부하듯이 하면하고 말면 말고 그렇게 하지 말고 다부지게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공부는 말 그대로 불속에 연꽃이 피는 도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ㄴ) 단비구법(斷臂求法) - 2조 혜가
다음은 단비구법이라 했어요.
팔을 잘라서 법을 구했다.
2조 혜가의 스승은 보리달마 대사지요.
보리달마 대사께서는 9년간 동굴에서 면백했습니다.
혹시 숭산의 보리달마께서 9년간 면백했던 그 동굴을 보신 분이 있으면 손들어 봐 봐요.
아무도 없어요?
저는 몇 번 간적이 있었는데 제가 7년 무문관 정진이 2020년 2월 2일 끝납니다.
3년은 완전 폐문시간이었고 지금 5년째 하고 있는데 그것이 끝나면 숭산의 달마동굴,
달마굴을 다시 한 번 가볼 생각입니다.
그때 저를 따라 같이 좀 가세요.
단비구법의 얘기가 이 달마굴에서 비롯됩니다.
달마대사가 겨울에 눈이 펄펄 내릴 때 벽을 보고 앉아있었습니다.
신광이라고 하는 어떤 스님이 달마대사 명성을 듣고 찾아왔어요.
그 때도 달마대사는 면백을 하고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끄떡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어요.
눈이 가슴만큼 찼어요.
찾아온 신광이 할 수 없이 인기척을 냈습니다.
달마대사가 돌아보면서 하는 얘기가..
“하룻밤 눈밭에 앉아 있었다 해서 그것이 별 대수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이 신광이 자기의 팔을 자르자 그 겨울에 파초가 갑자기 자라나더니
잎을 드러냈다 했어요.
파초잎에다 자기 팔을 싸서 달마대사에게 공양 올리듯이 올렸다는 겁니다.
달마대사가 흔쾌히 만족하면서 ‘너는 법을 구할만한 그릇이 될 놈이다.’
너의 이름을 혜가라고 하리라. 해서 입실을 허락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단비구법의 설화에서도 법을 구할때는 정말 단단한 마음을 먹고
임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ㄷ) 정법유통(正法流通)의 원력(願力)
정법이 두루두루 퍼지기를 원하면서 그것을 발원하면서 공부를 해야지 공부가 잘 됩니다.
나의 이 경전공부와 마음공부가 내 가족과 내 이웃과 온 인류와 온 생명체.
온 세계의 행복이 되고 평화의 메시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발원을 해야 돼요.
나 혼자만 깨달아서는 될 일이 아니거든요.
내 가족도 깨닫고 온 세상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원력이 바로 정법유통의 원력입니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인드라망적 생각이 살아있어야 됩니다.
세계일화라. 세상은 한 꽃이다. 라는 이 생각이 살아있으면서 이 좋은 법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살아 있었을 때 공부가 됩니다.
드디어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진리는 본래 청정하고
진리는 본래 광명스럽고
진리는 본래 평화스럽다 했어요.
내가 불교공부를 하고 내가 공부한대로 수행하면 내 자신 속에 숨겨진 진리라는 속성이 드러나요.
내가 진리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진리적 체험을 하고 그 진리라는 것이 느껴지면
내가 그 진리가 되면 이 몸 이대로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청정하고 광명하고 평화스러움이 됩니다.
앞쪽에서 말한 것처럼 진리를 통해서 나는 무진한 행복을 얻게 되는 거지요.
첫페이지에 보면...
내 눈에 보여 지는 모든 것이 현現 실實 체體 본本 상常 영永 이라.
지금까지 공부하기 전까지는 세상이 몽夢 환幻 포泡 영影 로露 전電 이었는데
이제는 내 보여 지는 모든 것이 현재요. 실제요. 바탕체요. 근본이요. 항상함이요.
영원하다 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체득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사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환희롭고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거지요.
그 체득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심경을 ‘무일 자성 삼보론’에 실어 놓았습니다.
(자) 無一自性三寶論(무일 자성 삼보론)
淸淨卽心是佛寶(청정즉심시불보)
光明卽心是法寶(광명즉심시법보)
平和卽心是僧寶(평화즉심시승보)
我本來恭敬三寶(아본래공경삼보)
佛法僧卽是一體(불법승즉시일체)
아까 그랬지요.
진리의 본래 바탕이 청정하고 발고 평화스럽다 그랬지 않습니까?
큰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청정한 즉 마음이 (불보)요.
밝은 즉 마음이 법보요.
평화스러운 즉 마음이 승보이니
나 본래 공경스러운 (삼보)일세.
불 법 승이 곧 한 몸!
진리, 도(道)는 번뇌의 먹구름이 걷히면 보여지는 것이지 억지로 보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수행을 통한 (체험)이 요구된다.
오늘의 결론.
(차) 無一정법(正法)제자 4법(四法)다짐
① 敎法(교법)다짐
② 理法(이법)다짐
③ 行法(행법)다짐
④ 戒法(계법)다짐
교법다짐이라. 교법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이 교법을 다짐해야 됩니다.
불교공부가 이렇게 좋구나. 중도에 절대 나는 끝내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죽는 날까지 불교대학에 와서 공부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절대 결석하지 않겠다. 이것이 교법다짐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절대 결석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말씀을 배움에 있어 교법 다짐입니다.
이법 다짐입니다.
이법 다짐은 참선과 기도를 늘 생활화 하겠습니다. 이 말입니다.
자기 전에 반드시 30분 관음정근을 하고 관음정근을 하는 이 주인공은 무엇인가?
이 생각을 해야 돼요.
자기 전에 30분 관음정근이 아주 중요해요.
그것이 바로 이법 다짐입니다.
누가 수술을 한다 해서 내가 나중에 물어 봤어요.
수술 할 때 기도했습니까?
수술하기 전에도 기도를 했고 수술을 할 동안에도 관세음보살삼매에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이법을 체험하는 거지요. 굉장히 중요합니다.
행법 다짐입니다.
법을 행함의 다짐입니다.
온 세상, 온 생명체의 나도 필요한 존재가 아닌가?
나도 진정한 복을 지어야겠다. 진정한 작복...
정말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봉사도 하고 포교를 해야겠다.
죽는 날까지 실천해야지 이것이 바로 행법 다짐입니다.
계법 다짐입니다.
이 계자는 계합한다. 하나가 된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곧 진리이며 내가 곧 정법도량이며 내가 곧 우리절이다.
이것을 늘 절감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음 생애는 ‘나는 대보살이 되어야지. 다음 생에 태어나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우리절 어린이집, 유치원도 다니고 이서중고등학교도
다니고 그리고 대보살이 되어야지. 나는 이 몸 자체를 진리의 몸으로
세상에 회향해야지.’ 이것이 계법 다짐입니다.
언젠가는 죽을텐데 죽는 날에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우리절 납골당으로 들어와서
법문도 계속 듣고 그래서 좋은 몸을 받아야지.^^
이것이 바로 계법의 다짐입니다.
나는 죽으나 사나 불교대학 사람이다. 이 생각이 있어야지 공부가 돼요.
그러면 부처님 가피를 입지 않을 수가 없어요.
부처님이 다 해주고 싶어서 다 해주고 싶은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 계법다짐만 되면...
그래서 우리는 정말 정법제자답게 진정한 불자로 거듭 태어나야겠습니다.
오늘 초하루 법문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관세음보살()()()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