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게이징 (외 2편) —골목
김병호
하나씩 가져가세요 피아노를 버리고 화분을 버리고 의자를 버리고 당신은 오래오래 서성입니다 울음에 그은 얼굴로 우레와 폭우를 감춥니다 애써 잊어야 간신히 지켜지는 안부는 당신의 몫입니다 발목이 가늘고 입술이 얇은 당신은 낯설고 다정한 귓속말로 묻습니다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는 마음이 있냐고, 한낮에 겹겹의 별자리를 긋는 마음을 아냐고 돌연하고도 뜻밖인 궁리도 없이 밀어내야 하는 당신의 눈빛이 반짝입니다 사랑을 용서해야 하는 마음을, 당신은 아직 모릅니다 마음에서 놓여날 수 없는, 이미 저편의 일입니다 ⸺⸺⸺⸺⸺ * 슈게이징(Shoegazing)은 198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인디 록의 한 장르. 몽환적인 사운드 질감과 극도로 내밀하고 폐쇄적인 태도가 특징. 신발(shoe)+뚫어지게 보다(gaze)의 합성어로, 관객과 소통하려는 의지 없이, 죽어라 자기 발만 내려다보면서 연주하는 무대매너 때문에 붙은 장르 명이다. 나라서적 서성거리는 사람들 얇은 표정으로 오목해진 걸음들 너무 오래 기다리거나 아예 오지 않은, 그이들은 지금쯤 어디에 닿아 있을까 입김 덧쌓인 창유리로 이별은 흘러 캐럴을 연주하는 금관악기처럼 반짝이다 고이는데 검은 목폴라 속의 짧은 목례 같은 시간들 당신은 서둘러 어른이 되고 나는 이제야 당신의 침묵을 읽는데 창문을 열면 처음인 듯 눈이 내리고 당신이 가져갔던 시간 속으로도 내리고 어제는 오월 오늘은 십일월인,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 맴돌던 말랑한 구름이 된다 내 청춘의 심장부가 있다면 충장로 우체국 맞은편 새로 태어난 행성처럼 반짝이며 금 간 스노우볼처럼 반짝이며 당신이 있던 곳 짧은 서정시처럼 눈이 내리지만 나의 몫은 아니었던, 숲으로 행진 저 고양이는 단 두 개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협할 때와 짐짓 무시할 때의 표정인데 길고 뻣뻣한 수염의 각도만으로 신박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담벼락을 등지고 울음도 없이 버티는 저 자세는 어느새 폐허를 건너온 연대連帶이고 표정 하나 없이 살다, 다 잃고 돌아온 나의 오늘 밤은 표류에 가까워 여리고 홀연한 대치, 시커먼 벚나무를 사이에 둔 눈빛만 환하다 오늘이 꺾어 신은 운동화 뒤축 같은 부끄러움이라면 내일은 저 벚나무 그루터기쯤이 되겠다 메마른 발자국 가득한 들판을 떠돌며 수염 하나로 어둠과 싸우는 저 투지를 죽은 자리만 떠돌아 죽어서도 떼어낼 수 없는 저 울음을 나의 전생이라 하면 안 될까 숲으로 난 검고 축축한 발자국들이 얼어붙어 있다 그럼, 같이 갈래? ―시집 『슈게이징』 2024.10 --------------------- 김병호 / 1971년 광주 출생.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 .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詩로여는세상》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