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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토빗기의 말씀 11,5-17
그 무렵
5 안나는 자리를 잡고서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토비야가 오는 것을 알아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 하고 말하였다.
7 토비야가 아버지에게 가까이 이르기 전에 라파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8 물고기 쓸개를 저분 눈에 발라 드리시오.
그 약은 눈의 하얀 막이 오그라들다가 벗겨지게 할 것이오.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께서 시력을 되찾아 빛을 보게 될 것이오.”
9 안나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얘야, 내가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하면서 울었다.
10 토빗도 일어서서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섰다.
토비야가 그에게 마주 갔다.
11 물고기 쓸개를 손에 든 토비야는 아버지를 붙들고 그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 약을 아버지에게 바르고서는 잠시 그대로 두었다.
12·13 이윽고 토비야는 양손으로 아버지의 눈가에서부터 하얀 막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14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15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는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돈을 가져온 것과 라구엘의 딸 사라를 어떻게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 사라도 오고 있는데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6 기쁨에 넘친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갔다.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오는데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힘차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7 그때에 토빗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서 밝혔다.
이어서 자기 아들 토비야의 아내인 사라에게 다가가 그를 축복하며 말하였다.
“얘야, 잘 왔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축복 속에 기뻐하며 네 집으로 어서 들어가거라.
얘야, 들어가거라.”
그날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십니다.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마르 12,35)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한 이들로서, 율법을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고,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신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 이사 9,2-7;11,1;12,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 새 예루살렘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인식 자아 인식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곧 당신 자신을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7)
이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곧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인격은 다윗에 종속되지 않으며, 메시아로서의 구원사업도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여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말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마르 12,27).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참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 12,37)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서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행복한 말로는>
오늘 저는 토빗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오늘 토빗기와 다른 결론 곧 Happy Ending이 아니라 Sad Ending으로 끝내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 토빗기를 좋아할까?
또 이런 성찰도 해봤습니다.
토빗기의 이런 얘기와 이런 결말은 그리스도교적인가?
먼저 슬픈 얘기로 끝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악인들의 말로가 불쌍하고 불행한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하지만, 착한 사람의 말로는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지상정은 그리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선 선인과 마찬가지로 악인에게도 빛을 주신다고 주님께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또 그리스도의 얘기는 토빗과 달리 Sad Ending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야말로 토빗보다 더 큰 사랑을 하셨고, 인간을 위해 온갖 좋은 일을 하셨건만, 제자들의 배반까지 당하시며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제자들이 박해도 받겠지만, 현세에서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긴 하셨지요.
그러니 이것이 완전히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럴지라도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이 세상에 Happy Ending이 아니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Happy Ending이지요.
어제는 제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분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90을 넘기셨고 치매도 점점 심해지셔서 더 늦기 전에 만나려고 지인들과 함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 것인데, 그분이 기억은 헝클어지셨어도 도리나 예의나 관점은 또렷하셨습니다.
그런데 얘기 중에 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죽어서 천당 가는 문제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천당 가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당신도 천당 갈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당 가고픈 마음이 없으시냐고, 천당 가고 싶으시면 지금부터 그렇게 기도하고 청하면 된다고 하니 가고 싶으신지에 대한 답은 않고 자격이 없다고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이것이 겸손의 말씀인지 포기의 말씀인지 몰라 순간 당황하였고, 겸손의 말씀이 아니라 천당 포기의 말씀이라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그런 신앙인과 신앙생활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진정 Sad Ending보다 Happy Ending이 좋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말로가 무엇인지 생각해야겠습니다.
토빗처럼 되는 것, 곧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인지 오늘 토빗기를 통해 깊이 생각게 되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문을 열어 놓아야 더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유식한 무지를 속히 버려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으며 하느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마르 12,36) 하고 말하였는데, 첫 번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주님께’의 ‘내’는 다윗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주님’은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뿐 아니라 유다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였습니다(2사무 7,12-16. 22,51; 호세 3,5; 예레 30,9)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윗의 메시아인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에 앉게 하여 모든 권능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하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메시아는 ‘위대한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자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핏줄과 족보에 따른 메시아, 다윗의 왕정 이념에 따른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뛰어넘어선 권위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잘 먹고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마침내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추종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학자들이 망신당해서?
아니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끌려서?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갖게 되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바람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원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 내가 만든 하느님 상을 살펴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나보다 먼저 태어났느냐 나중에 태어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깨달음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참된 깨달음 안에는 나이의 앞뒤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로 기억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선생은 학생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제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한 다음, 내친김에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바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없다는 논리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 맞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다윗의 후손께 호산나를 외쳐도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육체적으로는 구약의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일지라도 내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란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을 거야!”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놔야 합니다.
며칠 전에 축구 선수 박주호 선수가 은퇴하였습니다.
그는 축구 선수이기도 하지만 세 아이를 둔 가장입니다.
일정에 따라 한두 달 집을 비우는 일도 있어서 가족에게 계속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기자가 장녀 나은이와 남동생 건우의 반응을 물었습니다.
나은이는 아빠가 은퇴한다고 하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돈을 어떻게 벌 거야?”
저도 아버지가 일을 가지 않으면 불안해져서 아버지에게 일 가라고 종용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아버지를 가스라이팅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이들 아버지의 정체성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 가스라이팅 당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건우는 남자답게 요즘 축구에 많이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은퇴한다고 말했을 때 “왜 축구를 그만 둬?” 하며 울려고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앞으로 너와 축구를 더 많이 할게”라며 건우를 달랬고, 나은이에게는 “앞으로는 다른 일 해볼게”라고 말했더니 안심하더랍니다.
요즘 식당에 가보면 아이들이 상전인 경우가 많습니다.
옆 식탁에 어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아이들은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고 난리를 피웁니다.
하지만 부모는 제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애걸하며 부탁합니다.
그런 식으로 교육이 될까요?
부모는 부모이기도 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육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테너이고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1958년 9월 2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작은 마을 라자티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시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선천성 녹내장을 가지고 태어났고, 12살 때 축구 사고로 조금이나마 볼 수 있던 시력도 잃습니다.
그의 부모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아이를 지우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에디 보첼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아이라며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믿음과 사랑에 따른 이러한 결정은 다양한 인터뷰에서 보첼리에 의해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음성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음성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심각한 선천성 녹내장을 안고 태어났던 보첼리.
다행히 한쪽 눈에는 약간의 시력이 살아 있었습니다.
부모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청각이 예민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음악을 시키기로 합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피아노와 플루트, 색소폰을 배우게 했습니다.
목소리가 아름다웠던 보첼리는 ‘노래 잘하는 소년’이 되어 학교와 성당에서 인정받으며 성가대 독창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하던 도중 골키퍼를 맡고 있던 보첼리에게 날아온 공이 그만 눈에 맞는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한쪽 시력마저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갈망하고 꿈꿔왔던 오페라 가수의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눈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는 공연은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부모는 그의 재능을 더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2세에 시력을 잃었음에도 전혀 그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활동에 참여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평범한 삶을 살고 꿈을 향해 일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격려는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가 되는 길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보첼리의 부모, 알레산드로와 에디는 모두 이탈리아 문화와 전통에 깊숙이 박힌 로마 가톨릭의 강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시력이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껴 그에게 가스라이팅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첼리의 부모는 반은 자녀에게 속해 있고 반은 하느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은 그래서 심리적으로 자녀들에게 조종 당하지 않으며 당당한 교육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반신이 없는 아이, 제니퍼 브리커를 입양한 샤론과 제랄드 브리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제니퍼에게 지나친 연민을 느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딸로 여기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제니퍼는 자서전에서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믿음과 용기를 찾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장애를 지는 아이에게 잔인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믿는 부모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자녀를 교육합니다.
자녀가 울고 원망하더라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연민에 빠지지 않고 빠지게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훌륭한 교육자는 반은 학생에게 반은 자신의 스승에게 속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또한 하느님께도 속해있음을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드립시다!>
저희 살레시오회는 철저하게도 중앙집권제입니다.
총장님, 그의 대리자 관구장님을 예수님, 돈보스코의 대리자로 여기고 철저히 순명합니다.
가끔 전 세계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보내주시는 서한은 교과서 중의 교과서로 여깁니다.
읽고 또 읽고 마음에 새기고 구체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최근 내려오는 지침이나 과제 가운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르코 복음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마르 12,37)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왕 다윗왕과는 비교 조차 안될 정도로 크고 높으신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가,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가, 하느님은 오늘 내 삶 안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한번 점검해 볼 일입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깊숙이 숨어있는가 하면,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이타성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약해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별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때로 얼마나 선해질 수도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런 우리 인간이기에 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위한 노력,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 육체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죽기 살기로 달달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 내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무한 경쟁 체제, 일렬로 줄 세우기 문화 앞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나만 잘 풀리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의 영역, 신앙이 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신앙과 배려에 대해, 가난과 겸손의 덕에 대해 이야기 하면 웃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 참으로 다양한 도전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더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그분의 참되심을, 결국 그분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해오고 등한시해왔던 하느님의 위치를 다시금 재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치를 자리 매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하느님, 우리 뇌리 속에서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번 삶의 중심으로, 정신이나 사고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메시아’를 뜻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구원은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 또 다윗 왕조가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는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말씀하셨다.”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신 분”이라는 신앙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라는 말씀은 메시아께서 모든 적대자들을 제압하실 것이고, 온 세상을 지배하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라는 말씀은 “다윗은 이미 ‘메시아는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이라고 신앙고백을 했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메시아는 다윗 왕실만을 위한 메시아도 아니고,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도 아니다. 메시아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메시아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사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과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만일에 메시아가 다윗 왕실과 기득권층 사람들만을 위한 메시아라면, 백성들이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만일에 메시아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라면,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고, 유대교의 한 분파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5-26)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면...
그러나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교만한 기득권층 사람들은 끝까지 교만을 버리지 않고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교만이 걸림돌이 되어서 구원을 가로막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갈라 3,26-29)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떤 편견도 차별도 특혜도 없습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유식한 사람도 없고 무식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되고, 지금의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편견을 버려야 하고, 온갖 부당한 차별과 특혜를 없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할 일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회개는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는 버려야 할 것을 모두 버릴 때 이루어집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자기보다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작은 이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작은 이’가 아닌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낮추어서 ‘작은 이’가 된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낮추기를 거부하고, ‘작은 이’가 되기를 거부하고, 기득권을 버리기를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끌어내려지기 전에 먼저 스스로 낮추어야 하고(루카 1,52), 빈손으로 내쳐지기 전에 먼저 스스로 버려야 합니다(루카 1,53).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찬미가 답이다- 찬미 예찬>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여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시편 146,1-2)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좋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본기도 중 첫 말마디는 늘 들어도 좋습니다.
"말씀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없애시는 하느님!"
무지의 병에 대한 근본적 치유제는 하느님의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간밤에 내린 많은 비로 메마른 대지는 촉촉이 젖었고, 초목들은 기뻐 환호하며, 우렁차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소리는 흡사 찬미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하늘 은총의 봄비라 부르고 싶습니다.
찬미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믿음, 찬미의 기적, 찬미의 축복, 찬미의 기쁨, 찬미의 치유, 찬미의 노동, 찬미의 성화(聖化) 등 끝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 찬미가 답이요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찬미가 답이다-찬미 예찬-”으로 정했습니다.
예전 “찬미하라”라는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내 슬픔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불행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아픔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병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어둠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불안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절망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불운을 행운으로 바꾸는, 파스카의 신비를 실현시켜주는 찬미의 은총입니다.
이렇게 모든 부정적 감정을 찬미로 하느님께 들어 올릴 때 찬미의 기적, 찬미의 치유, 찬미의 성화이니 이 또한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엊그제부터 배밭 배봉지 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자매님들이 흰봉투로 배열매를 쌀 때마다 하늘에 흰별들이 떠오르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별을 다는 성모님 어머니들”이란 글도 써봤습니다.
몇 년 전에도 나눴던 깨달음입니다.
“하늘에 가득 달린 흰별들 같다
배밭나무들 하늘마다
하나, 둘, 셋...떠오르기 시작한 무수한 흰별들
성모님 어머니들 사다리 오르내리며
묵묵히, 인내로이
배열매에 흰봉투를 쌀 때 마다 떠오르는 하늘의 흰별들
하늘에 별을 다는 어머니들
성모님 어머니들 마음 하늘 안에
하나, 둘, 셋....무수히 떠오르는 흰별들
희망의 별, 기쁨의 별, 찬미의 별, 감사의 별, 사랑의 별 형형색색이겠다.”
- 2023.6.8
이런 노동이라면 찬미의 노동, 노동의 찬미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살림살이를 위해 온힘을 다해 사는 어머니들을 보면 또 하나의 성모님같다는 확신이 듭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 내용도 감동적이요 아름답습니다.
토빗의 시종일관 한결같은 “찬미의 믿음”이 참 위대해 보입니다.
토빗이 시력을 되찾으니 말그대로 찬미의 믿음, 찬미의 기적입니다.
토빗이 그 아들 토비야의 목을 껴안고 울면서 바치는 찬미의 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예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내 눈에 빛인 네가!’라는 말마디도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 하나하나도 하느님의 빛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찬미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도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 토빗으로부터 하느님 찬미를 보고 배운 아들 토비야임이 분명합니다.
시아버지 토빗의 며느리 사라를 향한 축복의 말도 참 좋습니다.
토빗의 너그럽고 관대한 시아버지다운 마음은 바로 하느님 찬미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찬미의 축복, 축복의 사람, 토빗입니다.
오늘 복음에 인용되는 다윗 역시 성령의 사람이자 찬미의 사람입니다.
다윗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에 인용되는 시편110장은 다윗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바치는 고백입니다.
“주님(하느님)께서 내 주님(예수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초대교회 신자들이 시편 110장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발견한 태초부터 선재(先在)하시는 다윗의 주님,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이들 덕분에 예수님이 다윗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성독(聖讀)의 달인(達人)들”인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성령의 사람들, 찬미의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찬미가 답입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믿음, 찬미의 기적, 찬미의 기쁨, 찬미의 축복 등 “찬미 예찬”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항구히, 충실히 “찬미의 여정”을 살아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
(시편 100.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2월에 LA에 왔을 때 신부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유학 중에 공부하면서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무척 바쁘셨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미국성당에서 주일과 평일 미사를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작년 12월부터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LA 교구에서는 신부님께 한인성당의 사목을 정식으로 제안하였고, 신부님은 미국성당을 나와서 한인성당의 사제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학교 공부도 다 마쳤고, 이제 한인성당의 사목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을 두 번 만났지만 말씀과 행동이 참 겸손하였습니다.
오랜 수도생활 속에서 얻어진 영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겸손과 영성으로 신부님께서 뿌리는 말씀의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교우들도 하느님 품으로 가신 전임 신부님께서 영성이 깊은 사제를 선물로 보내 주셨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진리의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3년 전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2020년 8월은 코로나 팬데믹이 정점에 이를 때였습니다.
신문홍보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르클린 한인성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한국에 가셨는데 11월까지만 미사를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미사를 도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가신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다시 본당으로 복귀할 수 없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제게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도와주도록 제안을 하였고, 저와 서울대교구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을 정식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일미사만 도와드렸는데 지금은 사목회도 함께하고, 야유회도 같이 갑니다.
장례미사와 연도도 같이합니다.
팬데믹이 풀리면서 신문홍보를 갈 때면 주일미사를 손님신부님께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신부님처럼 겸손하거나 영성이 깊지 않아서 많이 부족하지만 3년 동안 교우들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는 분명 다릅니다.
본당신부는 책임과 권한이 있습니다.
본당신부는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합니다.
본당의 재정을 충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경청해야 합니다.
함께 사는 수도자와 동료사제들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본당신부가 권한만 내세우고 책임에 소홀하다면 나쁜 소작인이 될 것입니다.
손님신부는 권한은 없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지금 본당신부가 없는 공동체에게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는 직책에는 차이가 있지만 하느님께서 맡겨 주시는 사명은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모든 사제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다투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툼의 원인과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제 귀에 들렸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너 몇 살이냐?’
그러자 조금 젊은 분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벼슬입니까?’
어른을 잘 섬기고,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시비를 가리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구교우 집안이라는 말, 세례를 받은 연도가 빠르다는 말, 교육을 받은 기수가 빠르다는 말, 성직자 집안 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옳고 그름을 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다윗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다니엘을 선택하셔서 수산나의 무죄함을 밝혀 주셨습니다.
진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배움의 깊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직책을 가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느 곳에 있어도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교만함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라는 직책이 본질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춘기인 자녀 때문에 힘들다는 부모가 많습니다.
그렇게 착했던 아이가 갑자기 반항적으로 변하고 툭하면 짜증만 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달라진 아이의 모습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사춘기는 청소년들이 아동기를 벗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갑작스러운 호르몬 변화로 합리적 판단과 대인관계능력, 실행 능력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만 날뛰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도 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감성적으로 만취 상태.’
편도체의 안정화가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특히 부모의 폭력성이 그대로 전이되는 시기이기에, 따뜻한 말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신앙생활도 좋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부모와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신앙생활에도 부정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비슷한 또래들과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때로는 탈선해서 삐뚤어 나가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전문가들은 사춘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참과 거짓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적성에 맞는 일들인지 질문하여 스스로를 잘 알아가야 한다.
둘째, 본인이 생활해왔던 일상의 패턴을 잃지 말고 유지해야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자신이 잘하는 것과 관심 있는 것들을 이끌고 나갈 자신이 있는지를 생각한다.
셋째, 지금 하기 싫고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추후 중요한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새로운 경험이나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모두 겪은 사춘기인데도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만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전지전능하신 주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세속적으로 판단하면 할수록 주님은 더 알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도 주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념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서 율법학자들이 강조하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해 새롭고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해주십니다.
다윗의 자손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이유는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왕, 지상에서 위풍을 떨칠 세속적인 왕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왕이 메시아가 아님을 밝히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세속의 임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주님을 알아가고 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들을 잘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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