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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찾은 지성소 (시2-42)
2026년 3월 1일 (주일)
찬양 : 날마다 숨쉬는 순간 마다
본문 : 시42:1-11절
☞ https://youtu.be/DcdhUE5F6LY?si=LYn5wVIKXOX7h3PO
거룩한 주일 아침 이 문구가 나를 사로잡는다.
<주님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다.>
통해서, 그리고 안에서
진정한 신앙은 나 홀로 있는 시간과 더불어
함께 있는 시간의 균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나 홀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방식임을 기억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은 시편 42편의 말씀이다. 시편 42편은 신앙의 가장 깊은 어둠, 즉 '영혼의 밤'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가장 정직한 위로를 주는 시편이라 생각한다.
학자들은 이 시의 배경을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요단강 너머 헤르몬 산지 부근으로 피신했을 때(6절), 그와 동행했던 찬양을 맡았던 고라 자손의 관점으로 본다.
여기 6절에 나오는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은 예루살렘 성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척박한 변방이다. 예루살렘, 즉 시온이 영광과 임재의 '중심'이라면, 이곳은 생존조차 불투명한 '경계'다. 이런 느낌을 담은 구절이 있다. 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헤르몬산의 눈이 녹아 급류가 되어 쏟아지는 거친 물소리다. 시인은 이 소리를 들으며 마치 하나님 심판의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즉, '자연의 위협'조차 '영적 고립감'으로 치환되는 처절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다윗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던 성소에서 가장 멀리 영적인 유배를 당한 상태에서 어느 때에나 성소에서 주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하는 갈망이 담긴 시다.
특히 고라 자손 즉 누구보다 성소에서 가까이 머물며 문을 지키며 찬양하던 이들이 성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에 던져지고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 불분명한 순간을 맞은 것이다.
이들에게 예배의 부재는 곧 존재 이유의 상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상실은 이들에게 갈망을 만들어 내고 있다. 1-2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늘 일어나면 성전의 문을 지키며 시간마다 찬양을 하던 이들은
어쩌면 이런 갈급함보다는 의무감으로 성전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약없이 떨어짐을 당했을 때
이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생기고
진실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기 시작했다.
역설이다. 가장 멀리 떨어졌는데, 어쩌면 이들은 가장 가까이 하나님을 향하고, 가장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서 가장 분명한 얼굴을 향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묵상하게 된다.
팀 켈러 목사님은 <고통에 답하다>란 책에서
고난이 우리를 자족이라는 우상에서 해방시킨다고 했다.
지금 나는 은퇴의 시점과 더불어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나며
진정한 변방목사로 거듭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중심에 거할 수 있는 선물을 거두워 가심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분 자체를 갈망하는 진정한 선물을 갈망하게 하신다. 오늘 고라자손은 이 자리에서 제사와 절기와 성소는 잃어버렸지만, 그 상실이 비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처럼 달려가는 갈망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고난만이 주는 힘,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붙잡음의 힘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고라자손에게 가장 거룩한 지성소가 아닐까?
앞에서 고난이 진정한 복을 발견하는 은혜이며, 우리를 새롭게 하는 영적 수술대라는 시편 기자의 계속된 선포가 겹쳐지면 내게 큰 울림을 전하고 있다.
고난의 현실은 진실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10절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뼈를 때리는 소리>
아내가 허리가 아파서 예전에 뼈주사라는 것을 맞았다. 그리고는 그 주사 맞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뼈에 주사를 찌르는 것이 가지는 고통이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지금 자신이 내 뼈를 주사 바늘이 아니라 칼로 찌름을 당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고백할 수 없었던 입에 발린 찬양에서 가슴을 터지고 나오는 깊은 산골의 시원한 샘물 같은 찬양의 가사를 고백한다.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 낙심과 불안과 절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잊었던 갈망이 솟아나고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그는 정수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말이 아니라
깊은 산속 바위틈을 헤치고 흐르는
얼음보다 더 시원한 생수를 길어 올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찬양을 올리는 대원이 된 것이다.
은퇴라는 나의 자리가 이런 자리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도 지금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 은퇴라는 자리에 와서야 이제는 안다. 그 얄팍한 선물이 아무것도 아님을 오직 하나님 그분을 뵙고 그분의 소리를 들을 때에야 내 영혼에 진정한 자유와 영광이 회복됨을 말이다. 나는 지금 진정한 변방목사로 거듭나고 있는 중임을 깨닫는다.
거룩한 주일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넘어서서 진실로 고라자손의 갈망이 담긴 진정한 예배자로 그분을 뵈온 자만이 올리는 거룩한 찬양이 고백되는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에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며 내 삶을 마치기를 다짐한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은퇴를 주셔서 저로 진정한 갈망을 회복하게 하시고,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니 감격입니다. 이제 진실로 주님을 보고 그를 통하여 흐르는 생수를 먹고 생수를 흘려보내는 종이 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변방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 가장 크게 보이는 '지성소'다.>
적용 질문
1. 지금 내 손에서 떠나간 '선물'이 오히려 '선물을 주시는 분'을 만날 기회임을 믿으시나요?
2.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세상의 조롱이나 내면의 불안이 뼈를 찌르는 칼처럼 들려올 때, 시인처럼 내 영혼을 향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당당히 설교(Self-talk)하고 있나요?
3. 성소에서 멀어진 후 고라 자손이 회복했던 '목마른 사슴의 갈망'을 회복하기 위해,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