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번에 토욜날 방언기도 많은 시간 한 후 갑자기 생각난 방언에 대한 말씀:
대부분의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는
‘일만 마디 방언으로’에 대한 오해 풀기(간단하게 재정리해서 다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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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19
위 말씀을 보고 우리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평소 우리가 생활 가운데 방언 기도 하는 생활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위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위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위 말씀의 뜻은
우리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가르침 받는 사람을 앞에 놓고
그 뜻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깨달은 것을
다섯 마디 말로 하는 것이 더 낫다 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도님에게 아무도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외)
방언으로 말하여 가르치면
그 성도님이 상대방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분 앞에서 일만 마디 아니 십만 마디 백만 마디를 해도 상대방은
내가 방언으로 말하여 가르치는 것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깨달은 것을 다섯 마디 하는 게 더 낫다.
그럼 그 사람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
여기서 더 확실한 것은
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19
에서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이라는 표현이
우리가 평소 생활 가운데 방언 기도 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일만 마디 방언 기도 생활하는’ 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이라는
표현은 그 의미가 아니라
내가 어떤 예를 들어 어떤 초신자에게
내가 깨달은 것을 나누려고 할 때
내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초신자 성도에게
그 사람 앞에서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여 가르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깨달은 것을
다섯 마디를 말하여 가르치는 것이 더 낫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방언 기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보다
방언 기도를 아주 많이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8
여기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에서
‘방언을 더 말하므로’는
‘방언 기도를 더 하므로’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주제 말씀인
그런데 19절의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의 의미는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여 가르치는’의 의미일 것이다.
포인트는 이거다.
19절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19
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다.
남을 앞에 놓고 가르치려고 할 때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말해야 알아듣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앞에 놓고
상대방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 방언을 한들
상대방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는 것이다.
헛수고인 것이다.
평소 생활 가운데 규칙적으로 방언 기도 하는 생활하여
날마다 성령충만 한 삶 살아갑시다^^
매일 아침 두 시간 기도하지 못하면 그 날은 마귀가 승리한다.
나는 일이 너무 많아 매일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다.
- 루터 믿음의 선배님 -
첫댓글 귀한 말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