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시사저널, 1996.12.26(!)
정권을 바꾼 ‘슈피겔 사건’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80025
2차대전 이후 서독을 신탁통치한 연합국의 주요 과업 중 하나는 민주 언론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
영국 제도를 본따 도입한 공영 방송 ‘ARD’와 <타임>을 모방한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대표적 민주 언론으로 독일의 민주 국가 재탄생 공헌.
정치·경제·사회 분야 전반에 내재한 문제점들을 심층 보도해 국민으로부터 신뢰.
한국기자협회 기고글 발췌
슈피겔사건과 언론의 책임, 2020.10.14
장성준 라이프치히대 커뮤니케이션학 박사과정·언론학 박사
https://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48310
발단은 1962년 10월 10일자 ‘제한된 방어 태세’ 기사.
‘펠랙스 62’라는 이름으로 그해 가을 실시된 나토와 독일군의 대규모 합동 군사작전 분석, 독일 국방전략 비판.
연방군은 유럽 내에서 전략적 핵무기가 사용된 전쟁에 대응하지 못할 것.
이로 인해 동유럽 국가들의 군사행동이 발생하면 수백만명의 독일인이 희생될 것이라는 내용.
<슈피겔>로서는 이 기사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10월27일, <슈피겔>은 검찰의 기습 공격에 쑥밭이 되었다.
함부르크와 본의 사옥에 난입한 무장 경찰은 수많은 자료를 압수하고 상주 시작. 발행인 아우그스타인과 기자 체포.
검찰이 발표한 기록에 따르면, <슈피겔>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대한 문제를 보도해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
관련 언론인은 국가모독죄 및 허위보도죄와 뇌물증여죄가 적용되어 긴급 구속.
출처: https://www.google.com/imgres?imgurl=https%3A%2F%2Fc8.alamy.com%2Fcomp%2FCPGYCT%2Fgeorgraphy-travel-germany-politics-spiegel-affair-police-in-front-CPGYCT.jpg&tbnid=Pm1PSv7RU5XdYM&vet=1&imgrefurl=https%3A%2F%2Fwww.alamy.com%2Fstock-photo%2Fspiegel-affair.html%3Fblackwhite%3D1&docid=tlvdggIMD4VnUM&w=1300&h=922&hl=ko&source=sh%2Fx%2Fim%2Fm4%2F7&kgs=0378ca809265c0f2
전후 최대 필화 사건으로, 독일 국민의 분노는 동시 다발로 폭발.
학생과 시민의 가두 시위, 국내외 사회단체들의 항의 성명, 언론매체들의 비난 줄줄이.
출처: https://www.dw.com/en/a-scandal-rocks-the-young-federal-republic/a-16295037
미국·영국 언론까지 독일 정부의 언론 자유 침해에 심각한 우려 표명.
프란츠 요셉 스트라우스 국방장관은 개입설을 부인하다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도 안된 12월 결국 쫓겨났다.
위키백과 발췌
슈피겔사건, 2022.2.12 최종수정
https://ko.m.wikipedia.org/wiki/%EC%8A%88%ED%94%BC%EA%B2%94_%EC%82%AC%EA%B1%B4
(보도) 다음날 연방 검사는 국가 기밀이 누설된 것인지 심의 시작, 국방장관에게 기밀이 새어나간 적 있는지 물었다.
10월 19일 국방부는 슈피겔이 밝혀서는 안 되는 국가의 비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답.
10월 23일 연방법원 판사는 슈피겔 사주 루돌프 아우크슈타인Rudolph Augstein과 편집자에 대해 영장 발부.
10월 26 ~ 27일 사이 밤에 함부르크와 본에 있는 편집실 수색, 함부르크 본사는 11월 26일까지 폐쇄.
아우크슈타인과 몇 명의 편집자들이 체포.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던 국방부 출입 기자이자 편집국장 콘라트 알러스Conrad Ahlers는 스페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 송환.
불법적인 체포 명령은 국방장관 슈트라우스가 내린 것.
영장이 발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밤중에 저명한 언론인들을 체포한 사실이 밝혀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10월 25일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권력을 남용했다고 밝힌 슈피겔의 기사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주장.
11월 7일 아데나워 수상이 슈피겔이 돈 때문에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더욱이 법무장관이 언론인 체포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내무장관은 자신이 위법행동을 했음을 인정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사과하는 사태로 확대
슈트라우스가 이 사건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의회에서 거짓말했음이 밝혀졌다.
의회는 슈트라우스에게 사임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에리히 멘데Erich Mende는 자유민주당은 더 이상 슈트라우스와 함께 정부(연정)에 남을 수 없다 선언, 자민당 소속 장관 다섯 명 사퇴.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소속 장관들도 차례로 사퇴. 그리하여 아데나워는 슈트라우스를 제외시키고 다시 자민당과 새 연립정부 구성
정치 권력과의 긴장 관계는 수년간 지속.
109일간 발행인이 수감되고 한달 이상 경찰이 상주하는 상태에서 검열을 거쳐야만 발행할 수.
‘언론 자유냐 국가 모독이냐’ 장기간 뜨거운 논쟁 일으킨 <슈피겔> 사건은
1965년 5월 13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피소된 발행인과 편집인에 대한 재판을 기각함으로써 일단락.
<슈피겔> 측 평
‘검찰총수가 사인한 사건을 법원이 거부하기는 역사상 처음’
이듬해 헌재는 <슈피겔>이 신청한 헌법소원의 판결에서
‘공권력에 의해 구속되거나 검열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언론은 자유 민주국가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
유권 해석, 언론의 자유 보장 재확인.
이 사건으로 49년부터 독일을 이끌어 온 아데나워 총리는 63년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60년대 말에는 정권이 기민당에서 자민당으로 넘어가는 데 일조.
한국기자협회 기고글 발췌
https://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48310
10월 26일 연방사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연방형사경찰청과 지방경찰이 함부르크와 본 슈피겔 사무실 압수수색.
관련자들의 체포 사실과 더불어 ‘국민 위기감 조성, 기밀 누설, 뇌물 증여’ 등 혐의가 알려지자 시민사회와 언론계 거센 반발.
독일 밖 정치권과 언론계도 우려 성명.
언론사들을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강화되자 사민당 요청에 따라 11월 7~9일 간 연방 하원 청문회.
그 과정에서 민주헌법의 원칙에 어긋나는 조치들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연정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12월 내각이 새롭게 구성되는 등 파급력은 실로 엄청났.
본래 보수적이던 독일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된 본격 시작점이 된 사건이라고 합니다.
68 운동에도 모티브를 제공할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전후 최초로 광범위하게 발생한 시민의 저항행동이었다는 점,
그리고 독일의 68 운동에서 강조된 언론의 자유 문제가 처음 제기된 사건이라는 점에서요.
뿐만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라면 나치를 겪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인데
윤의 계엄령만큼이나 PTSD를 자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한글로 옮겨진 내용 말고 원 자료를 확인하고 싶은데 독일어 자료를 볼줄 모르고 해서 쉽진 않군요
슈트라우스 장관이 불법적인 지시를 전화 등을 통해 사법부에게 직접 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판사가 영장을 발부하지 않을 수 없게끔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무언가 나쁜 의도를 갖고 불법적인 행동을 주동했다는 것이겠죠.
슈트라우스라는 사람이 엄청난 대정치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유력한 인사였나 봅니다.
만약 독일 시민사회가 굴복하고 넘어갔다면 지금의 독일은 없고 일본 유사국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회를 통한 간접 민주주의가 일반화되고 행정체제가 관료화된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대중이 거리, 광장과 같은 장소에 모여 집단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가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Strauß는 바이에른 지역정당 기사련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대충 DJP 시절 김종필 포지션이라고 보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