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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를 인생 후렴구 (시2-43)
2026년 3월 2일 (월요일)
찬양 : 비 준비하시니
본문 : 시43:1-5절
☞ https://youtu.be/5agql4e9Q8w?si=FiUUie8E8isqe7GO
지금 세상은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들의 긴장은 생명의 긴장이지만, 세상은 전쟁을 '지표'와 '수치(유가, 환율)'로 읽어내며 자신의 안락함이 침해받을까 전전긍긍한다.
이것이 삶을 직면하는 자와 관망하는 자의 차이다.
삶을 직면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터치되지만,
관망하는 삶은 생명이 아니라 겉옷을 터치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오늘 3월의 첫 주간을 시작하면서 말씀앞에 서는 나는
생명의 터치가 일어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의 별명이 변방목사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내 삶의 모델이기도 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이란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존재"라고 했다. 세상이 유류값을 걱정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살필 때, 진정 그리스도의 사람은 '생명의 터치'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내 몸처럼 느끼는 대리적 책임을 가진 기도여야 한다.
문제는 오늘 아침 나는 그런 생명의 터치를 구하는 그 절박함을 느끼지 못한 채
겉옷을 만지는 사람이 되어 있음에 가슴이 아프다.
주님 ~ 이 종을 돌이켜 주소서.
진정한 변방의 목사로 서게 하소서.
나의 좁아진 시선과 닫힌 마음을 여소서.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전 존재가 흔들림을 당하며 이런 고백을 외친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삶에서 가장 심각한 오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우리의 한계점이다.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는 현실이 주는 분명한 싸인이 있다. 최첨단 무기를 가진 힘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시인은 이런 세상에 버려졌지만, 힘이 정의라고 믿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정을 향해 치고 올라가 내 송사를 변호해 달라고 외친다.
그는 외치고 있다.
세상은 나를 지표로만 평가하지만, 나의 하나님은 생명의 가치로 아시는 분이시오니 불의한 세상에서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인 ‘헷세드(인자)’가 사라지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밀려난 시인은 하나님의 법정에 탄원서를 넣은 것이다. 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인은 이런 상황에 당당히 선언한다. 나의 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어찌하여>를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버리시고 슬프게 다니게 하시느냐고 외친다.
나는 신앙은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온 땅과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비전이란 그림을 가지고
이 땅이 주장하고 보여주는 현실에 저항하여
하나님 나라 즉 생명을 귀히 여기는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시인은 지금 밀려났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붙들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올라가 외치는 진정한 기도의 자리에 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다.
세상은 누구의 기술과 무기가 강하냐를 측정하며 승패를 가늠하지만, 시인은 오직 생명이 흐르는 나라를 꿈꾸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 3-4절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의 진리, 주께서 계시는 곳, 하나님의 제단, 큰 기쁨의 하나님께>
그의 가슴을 적시는 단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시인도 사람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지만, 하늘 법정의 판결문은 미사일의 속도보다 느리게 배달되는 것처럼 보인다.
무기가 승패를 가르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빛과 진리'는 너무나 고요하고 더디게 오는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어찌하여'라는 탄식의 늪에 빠집니다.
이것은 불신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존재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기다림'의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낙심의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다시 소망을 끌어올립니다. 세상의 수치는 유가를 읽지만, 시인의 영혼은 여전히 '내 하나님'을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도 인생의 옷을 입었기에 감정에 휩싸인다. 그를 뒤덮는 감정의 파도는 엄청나서 그로 불안과 낙심이라는 감정으로 포기라는 결정을 내리라고 외친다.
그러나 시인은 스스로에게 외친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상황은 그대로이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이미 하늘법정에서 내려진 것임을 확신하며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희생자를 싸매줄 뿐만 아니라, 그 수레바퀴의 축 자체를 붙드는 저항"을 원하신다. "힘의 논리에 저항하여 생명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 바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이다.
변방목사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세상의 강력함앞에 무력해 보일 때
나도 낙심과 불안에 떨면서 포기라는 결정의 자리에 설 때가 종종있다.
그러나 나도 어찌하여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선다.
그리고 나도 고백한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히리로다.>
이 구절은 시편 42-43편의 후렴구처럼 사용되고 있다. 모든 과정은 이 고백을 위한 단계에 불과하도록 시인은 배치했던 것이다. 오늘 나도 이 고백을 나의 인생 후렴구로 삼아 내 삶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을 계단으로 삼아 이 찬양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다짐한다.
불안과 낙심이 나를 흔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그만>'이라고 가장 크게 외치는 오늘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절망의 소음을 뚫고 내 인생의 후렴구를 다시 부를 것이다.
'주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비록 원수의 억압으로 슬프게 다니는 현실일지라도, 나는 당신의 빛과 진리를 따라 여전히 찬송할 것입니다. 3월의 첫 주, 지표와 수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나의 큰 기쁨이신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겠습니다. 주님, 이 흔들리는 자의 믿음의 저항을 담은 찬양을 받으소서.
한줄 묵상 :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는 용광로이다.>
적용 질문
1. 오늘 내 영혼을 흔드는 가장 큰 소음은 무엇입니까?
2. 오늘 흔들리는 삶에서 외쳐야 할 나의 후렴구는 무엇인가?
3. 내 영혼을 다해 이 상황에서 부르고 싶은 찬양은 어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