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성도를 하나의 껍데기로 사용하시는가? 아브라함언약에서 거룩한 씨와 거룩한 땅은, 인간에게서는 찾을수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이기에 인간속에서 거룩을 찾을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원체 거룩을 좋아 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거룩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원래 창조할 때의 뜻이 거룩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시면 모든 제사가 다 거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정결화 작업이라고 하는데, 성막, 제단, 모두가 다 정결해야 합니다. ‘레위기’에서 거룩인것과 거룩 아닌것이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인간이 손댄것은 다 거룩하지 않습니다. 또 인간에게서 나온 모든 배설물들, 땀이라든지, 오줌이라든지 각종 배설물들, 각종 더러운것들. 그리고 죽음과 인간의 죽음의 흔적들,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 하나님의 거룩에 손대면 그 모두는 다 속된 것이고 더러운 것이라고 간주되는 겁니다.
이 말은 죽음으로 치닫는 인간에게 있어서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기를 관리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세력화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자기절제하고, 자기중심을 잡고, 관리하고 통제한다고 하는데, 연세 많아 보세요. 나이 많아 보세요. 안됩니다. 되지를 않아요. 설교시간에 여러분들이 젊을때 설교하고 나이들어서 하는 설교하고 다릅니다.
나이 들어서 설교해 보세요.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마태복음 7장인지, 8장인지. 다음에 내가 인용해야 할 그 본문이 요한복음이었는지, 사도행전 이었는지. 그런 것을 저도 실수 많이 한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상대방에게 예의 바르게 대한다고 마음은 굴뚝 같은데, 불쑥 말을 함부로 하고 보니, 삐져서 그 다음주부터는 교회도 안나오고.
분명히 그런 뜻이 아닌데, 젊었을때는 기침을 해도 점잖게 했는데, 연세가 들고 나서는 “콜록~ 콜록~”(남들 보기에 신경쓰일 정도로). 죽음의 흔적이에요. 죽음의 흔적. 거룩은 요구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늘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연세가 많아지고 기력이 쇠해지면, 이제는 무슨 여력이 남아야 남을 사랑하죠. 자기 몸도 제대로 간수 못하는 주제에, 남을사랑할수 있는 힘이 어디서 생깁니까?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여러 가지 죽음의 흔적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속된 것으로 더럽게 만드는 거예요. 그것을 정화하고 씻는 작업이 뭐냐? ‘피’. 그리고 그피는 아무피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정한 거룩한 제물의 ‘피’로 인간의 모든 죽음을 씻어 주는 겁니다. 어떻게 피가 인간의 죽음의 흔적을 씻어 줍니까?
그것은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저쪽의 더러운 생명을 이쪽 깨끗한 생명으로 치환한다, 교체한다, 덮어 씌운다는 그런 의미에서 피로 씻어 내는 거예요.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학자들은 ‘생명은 피에 있다’는 말을 해석을 못해가지고, 생명은 피에 있다는 이것을 히브리사상으로 어떻게 해석하면 되느냐?
아하! “옛날에는 살아 있는 생물들은 피가 순환하기에 그 순환하는 것을 통해서, 생명은 피에 있다고 은유적으로 이야기 한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김지찬>교수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김지찬> 교수 같은 경우에는 “토론을 합시다. 누가 맞는지. 양자가 시간을 정해놓고 당신이 말하는 문예학적, 구조학적 해석법이 맞는지, 그 허점이 무엇이지를 토론합시다” 하고 학생들을 통해서 전달을 했는데, “학위 없는인간 하고 뭘 하겠나!” 이렇게 나오는 모양이죠.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언어학적, 기호학적, 구조주의적 해석법이 맞는지를 한번 보자는 거죠. 나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죠. 인간이 이미 죽음의 세력에 놓여 있기 때문에, 거룩을 유지할만한 힘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젊을때 말씀 지켜서 순종한다고 하지요. 연세 많을 때는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예배 시간이 11시 같으면 11시에 드리는 예배 시간을 지키지 못해요. 안됩니다.
그리고 본인만 못지키면 되는데, 특히 연세 많으신 분들이 심적으로 괴로운 것이 젊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자신이 초라해졌다는 그것이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워! 미워! 미워!.” 아직 장로님은 그정도 수준까지는 안되셨습니다만 나중에 한 80정도 되시면, 어지간히 깨끗하게 살고, 신사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데, 이제는 젊은 분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제는 그 넓다는 품위마저 유지 못할 처참한 지경에 놓인다는 이것이 스스로 미워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소리가 나오죠. 그런데 의학을 왜 발달시켰습니까? 인간들의 수명이 늘어나서 노인들이 해마다 6~7%씩 증가하는데, 국민연금 가지고 생활하는데 50만원 넣어 놓고서 200만원을 타먹게 되면 그 150만원은 누가 보태주는 겁니까? 다 젊은 사람들이 낸 세금에서 나오는 거예요.
내돈 내놓고 내돈 타먹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돈 내고 자기돈 타게 되면 그만큼 못타먹습니다. 그것이 국민복지정책에 의해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같은 국가들이 옛날부터 다 하고 있는 그런 정책에 의해서, 자식이 부모를 모실 입장이 못되기 때문에 - 왜냐하면 다 맞벌이를 해야 되고 그래야 국민소득을 올리니까 - 국가에서 부모 섬김을 대신해 주는 거예요.
노인들을 모시는 실버사업을 통해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서 국가의 남아 도는 인력을 그쪽으로 집어 넣으면서 세금을 더 많이 확보할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 젊은이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세금을 보충해서 연세 많은 분들의 복지를 대처하는 그런 정책으로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즉 ‘하나님을 믿기에 내 믿음으로 거룩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면서 남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남에게 짐이나 되지 말라고 하세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안됩니다. 죽음이 이미 세력화 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습니다.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버리지 왜 버리지 않느냐? 인간을 껍데기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왕 버린몸,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 말에 대단히 분노하고 기분나빠 합니다. “인간이 로봇이냐? 인간이 껍데기라니! 내가 그것밖에 안되는가? 나도 알만큼 알고, 선한일을 한다면 하는 놈인데 나를 껍데기로 사용하다니.”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제가 누구 예를 들었습니까? 욥의 예를 들었잖아요. 욥이 고난 받을때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욥아! 회개해라. 회개! 아직도 네 잘못을 모르겠는가? 하나님은 착하신 하나님이고, 실수가 없으신 분이고, 의로운 분인줄 안다. 그런데 너는 자꾸 네가 의롭다고 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의로운데 그러면 의로운 분이 의로운 인간에게 징벌을 준다고? 그러면 둘중의 하나는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그러면 하나님보고 우리가 거짓말쟁이라고 이야기 해야 될까? 그것은 너도 원치 않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분이 아니라면 모순이 생겼다. 그 모순의 원인은 네가 거짓말 한것에 있네. 그러니까 네가 잘못했잖아. 잘못했으면 회개해야지.”
이것이 욥의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논리에 빈틈이 없어요. 유명한 말이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입니다. 그 앞에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의로우면”이라는 조건입니다. “네가 바르게 살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그런 이야기, 그 유명한 이야기를 기독교 가정 집집마다 현판으로 걸어 놓고서 그것이 옳은 것인줄로 알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욥의 부인되시는 그 사모님이 충분히 이해가 가죠. ‘그렇게 훌륭한 남편과 함께 살면서도 그렇게도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이 여자는 지옥에 가도 마땅하다’고 총각때는 그렇게 생각 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아! 아내가 충분히 그럴만 하다 얼마나 그동안 참고 참았겠느냐?’
소크라테스 부인이 악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악처가 될 수밖에 없지요. 훌륭한 남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시대에 역행하면서 자기는 하고 싶은 일을 소신대로 하는 것이지만, 그 남편을 믿고 살아가는 아내는 뭐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아내로서의 자신은 완전히 붕 떠버렸다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 죽는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자기 아내를 걱정해서 “수탉값이나 갚아다오”라고 했다는 말이 있잖아요.
결국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것. 그리고 빈껍데기에 축복이 회복되어도 그 빈껍데기가 잘나서 축복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축복의 축복다움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도 주실 자유가 있고 축복을 주실 자유도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껍데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어차피 거룩하지 않기에, 욥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사용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학자들은 지혜문서라고 하는데, 지혜문서의 특징은 무시간적입니다. 구속사가 없지요. 그러면 지혜문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구속사는 인간과 더불어서 구원을 위해서 같이 노력하는 그러한 입장이라면, 지혜문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뜻을 그대로 담는, 그야말로 인간을 껍데기로 사용해서 그냥 담아내는 겁니다.
지혜문서 가운데서 잠언서든 전도서든.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해서 인간을 모두 껍데기로 만들어 놓습니다. 잠언서 같은 경우에도 “가난한자를 멸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치 않는다. 왜? 이 세상에는 부자로 지은자가 따로 있고, 가난하도록 지은자가 따로 있으니까 가난하다고 무시하면 가난한자를 지으신 자를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도 결국 보면 인간은 하나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거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그런식의 사상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이 지혜의 문서에 의하면 참된 믿음이고, 그것이 참된 신앙적인 삶입니다.
가진 힘을 자랑하지 말고, 내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난시간에 야곱을 봤습니다. 야곱을 지난시간에 그냥 전체적으로 봤는데, 자세히 들어가 보면 야곱의 ‘자율성’이 나오는데 제가 그것을 아직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의지’. 전에 이야기 했지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고요.
인간에게는 의지만 있다고요. 자유의지라는 것은 뭐냐? 자율성을 말하지요. 정말 자유가 되려면 어느정도가 되어야 자유가 되느냐 하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까지 내 맘대로 골라야지만 자유가 되는데 인간에게는 선택할수 있는 항목이 제한되어 있어요. 지금 이 집에서 10킬로미터 반경내에 적당한 신부감이 있다고 볼때, 누군가를 신부감으로 선택할까 말까, 하고 있는데 그 옆에 시력이 좋은 사람은 40킬로미터 반경까지 내다 보면서 “너는 왜 그렇게 자유가 없어. 32킬로미터 지점에 괜찮은 아가씨가 있는 것을 왜 그렇게 못보느냐”고 하는거죠.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서 골라잡아야 하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제한된 범위내에서 골라잡는 것은 자율성의 발휘이지 진정한 자유가 아닌 거예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이런 거예요. 10킬로미터 내에서 아가씨를 하나 뽑았는데, 이 아가씨가 아주 무서운 아가씨입니다. 아주 남편을 잡는 여자입니다. 남편이 술만 먹으면 남편을 두들겨 패는 그런 무서운 여자죠.
이럴 경우에 자기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되죠. 내가 왜 저런 여자를 만나서 선택을 했느냐 하고 후회를 하게 되죠. 자유라는 것은 자기 선택에 후회가 없을 경우를 자유라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선택을 했는데 나에게 괴로움이 온다는 것은, 선택에 착오가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자유에 착오가 있다는 말은 누가 그 사람에게 자유에 착오가 있도록 만든 겁니까? 본인의 능력이 미약하고 제한되도록 누가 관여했냐? 이 말이죠.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고, 어디에 갇혀있는 셈이죠.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겁니다. 그러면 누가 나라를 우물 안에 집어넣었냐 말이죠. 우물 안에서 개구리가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갈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자유라고 볼 수 없지요. 우물 밖으로 나가서 세상 전부를 알아야 자유인데, 인간은 우물 안에 있으면서도 그걸 자꾸만 자유!, 자유!, 자유라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곱의 자율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합니다. 왜 이것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이것이 조금 어려우니까 잠이 오더라도 조금만, 한 5분만 참으세요. 이것은 제일 중요한 것인데. 야곱의 자율성이 밭에다가 ‘마늘 심을까? 파 심을까? 어떤 아내를 얻을까?’ 그런 것이 아니고, 야곱의 자율성이 어디에 적용되는 자율성이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까?’ 그것과 연관된 자율성이어서 중요한 자율성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축복의 구원이다. 마치 옛날 아브라함처럼, 마치 내 아버지 이삭처럼 이제 나의 시대가 왔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장자다. 누구든지 내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내게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는다.” 이것은 창세기 27:29절에 나오는 이야기죠.
(창세기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야곱의 자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야곱의 심정을 잘 파악해야 돼요. 창세기 27장 29절에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여기서 “만민이 너를 섬기고”에서 ‘너’에 줄을 딱 긋고 여기서 ‘너’는 누구입니까? 라고 국어 시험에 나온다면? 1) 야곱 2)에서 3) 이삭 4) 요셉. 누구겠습니까? 자, 국어 수능시험이고 지문이 이렇게 나온다면요? 누구겠습니까?
이문제가 수능시험이라면 나중에 재판이 걸리게 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만일 1) 번의 야곱이냐 4)번의 요셉이냐 어떤것이 정답이냐 하는 것을 놓고 재판을 할거예요. 우리도 지금 헷갈리잖아요. 만일 1) 번의 야곱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성립이 안되요. 왜냐하면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라고 했는데 야곱은 형제들이 없어요. 형제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이 답이 만약에 4) 번의 요셉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이 축복은 지금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야곱 본인이 받고 있는 겁니다. 왜 성경이 우리를 이렇게 헷갈리게 만듭니까? 성경인데. 하나님이시여. 왜 우리를 이렇게 헷갈리게 만드십니까? 문자의 해독을 할줄 아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말이죠.
그냥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예배 잘 드리면 복 받는다고 하면 끝날 것을 가지고요. 분명히 자식 낳고 싶으면 자식을 그냥 낳게 해주면 될것을 가지고, “두 아이가 싸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강한자가 어린자를 섬기겠다”는 식으로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는가 말입니다. 좀 간단간단하게 넘어 가면 좋잖아요. 식품에 이스트 넣는 것 같이 그냥 확 집어 넣으면 될것을 가지고.
다시 문제 봅시다. 1)번 야곱. 2)번 에서. 3)번 이삭 4)번 요셉. 여기서 “너”가 누구입니까? 이 축복은 누가 준비한 겁니까? 이삭이 준비한 거죠. 이삭이 누구에게 내려 주려고요? 에서한테 내려 주려고 한거죠. “너”가 누구냐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네 개가 다 정답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은 1)번이라고 하죠. 에서는 당연히 2)번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니까 에서는 야곱을 쫒아가서 죽이고서라도 다시 그 복을 빼앗아 오려고 하죠.
3)번 이삭은 그 복이 원래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내려준 것이고 또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받은 그 축복이 이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에게 인수인계 되었고 받은 것이고, 이제는 이삭의 것이 야곱에게 인수인계되었기 때문에 결국 야곱이란 누구입니까? 이삭자신의 과거모습이죠. 이삭이죠. 요셉입장에서는 이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 것이니까 자기 것이라고 할 테죠.
우리 집 애가 이름이 진주인데, 그 애가 용돈같은 것이나 그밖에 집에 있는 돈을 잘 쓰지 않아요. “얘야 너는 왜 그렇게 돈을 달라는 소리도 잘 안하고, 왜 그렇게 돈을 잘 안쓰려고 하느냐?” 하니까 “내 돈을 어떻게 써요? 내 돈을!” 아이가 하나뿐이라 다른 형제가 없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돈이 전부 다 자기것이니까요. 자기돈이니까 아껴야지 함부로 쓰면 안되잖아요.
형제간이 둘이 되면, 누가 더 아버지 어머니의 것을 빼앗아 먹느냐? 이런 싸움이 벌어지고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더 큰 싸움이 벌어지겠지요. 아버지에게 집이 있는데, 그 집을 어떤 형제가 탐을 내서 먼저 그것을 담보로 돈을 빼내어 써버렸느냐? 그걸 가지고 형제간에 대판 싸우고, 추석이나 설이 되면 술먹고 서로 칼부림하고 그러잖아요. 오랜만에 열 댓시간씩 차를 타고 와서는 제사 드리기도 전에 술먹고 한판 싸우기부터 하잖아요.
“나는 니 형이 아니다. 니는 나가 죽으라카이.” 동서간에는 더 싸우죠. 그런 집이 제가 보기에는 한 80%가 넘어요. 물론 목사님의 가정에서는 “나는 이제 돈을 포기했습니다. 한푼도 안받습니다.” 하고 이미 포기했지만, 다른 불신자의 가정에서는 형제들간에 누가 더 아버지의 재산을 많이 가져가는가? 형제간에 재산쟁탈전이 벌어져요.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모셨거든.”
“그러면 안된다. 아버지가 유언에서 똑같이 나누라고 했거든.”
“그러면 내가 아버지 모실 때 한푼 보태준것 있나?”
“아버지가 형은 대학이라도 가르쳤잖아. 나는 대학을 안했으니까 재산이라도 있어야지.”
“네가 공부 지질이도 못해서 대학을 못간것이지.”
이러면서 집안이 한바탕 난리가 납니다. 직장이 변변치 못한 자식은 또 어머니가 감싸고 돕니다.
“야야! 쟈는 변변한 직장이 없잖아. 그래서 유산이라도 좀 나눠준다.”
“어머니! 그런법이 어디 있습니까? 요새 직장이 얼마나 힘든데요. 하나도 도와주지 마소.”
“야아! 가는 그래도 직장이 없고 그러이 사업이라도.”
“사업하다가 몇 번 때려 먹었습니까?”
그러한 문제가요. 제가 한 80%쯤 될거라고 했지만 제가 점수를 너무 후하게 줬습니다. 한 90%쯤 될겁니다. 전부 다예요. 전부 다! 또 딸이라고 와가지고
“어므이 지는 요”
“니는 출가외인 아이가?”
“어므이. 출가외인이 어디있어요. 요즘 우리 그이 얼마나 힘든데. 아들만 자식인가? 좀 주이소. 어므이 아플때 누가 와서 돌봅니까? 딸이 와서 돌보지”
“야야! 니는 출가외인인데.”
“출가외인 그런것은 옛날 사고방식이고 나는 도저히 못삽니다. 나 이혼해 불고 엄마집에 올거야.”
이런 경우가요. 점점 올가간다. 95%입니다. 그러니까 이 축복권. 이 축복권이 왜 좋으냐 하면, 하나님이 거저 주는 재산이거든요. 분명히 이것은 이삭이 소와 양과 가축이 놀라운 기적으로 증식되는 겁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그만큼 증식될 수가 없는 겁니다. 야곱이 무슨 수완이 좋아서 그렇게 된것이 아닙니다. 그냥 축복해 줘서 받은 것 뿐이에요.
야곱의 입장에서는 노하우가 있지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서 그 앞에서 가축들이 새끼를 낳으면 전부 색깔이 변화가 일어나고 유전자 조작이 일어나가지고 아롱지고 점박힌 놈이 태어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모든 재산을 인수인계하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이죠. 축복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이런 축복권이 있는 것을 다 뻔히 아는 이상, 이것을 야곱의 자율성이 노리지 않을수가 없지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이 축복의 내용, 하나님의 맹세의 내용을 놓고, 야곱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 해석,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때에, 자기 좋으라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자율성, 곧 인간의 선택입니다. 이 야곱의 자율성은 누구와의 경쟁관계에 있느냐 하면, 싸움을 하게 되는데, 에서의 선택과 충돌하기 전에, 먼저 이삭의 선택, 이삭의 자율성과 충돌했어요.
지금 이런 식으로 이삭과 야곱의 관계를 설명한 논문은 없습니다. 이삭이 분명히 에서에게 자기의 축복권을 밀어 주기 위해서 이삭은 이삭 나름대로 집어서 선택했고, 야곱과 리브가는 “당신 그렇게 나오면 우리는 이렇게 나간다. 당신 백날 해봐라. 눈이 어두운데. 우리는 이렇게 속이겠다”는 인간의 자율성이죠.
결국 인간이 왜 거룩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말씀을 아무리 주고 아무리 순종하라고 강요해도 이미 인간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 자기 유리한쪽으로 자율성을 발휘할 만반의 준비가 있는 이상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다 왜곡되게 우리에게 적용된다 이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내용이에요. 창세기에서 뭘 봅니까? 이걸 봐야지요. 우리 자신의 실상을 봐야지요.
“어? 당신이 그렇게 나옵니까? 에서를 밀어요? 그럼 막가자는 이야기네 뭐. 그럼 나는 일방적으로 야곱이를 밀겠어.”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죠. 그러니까 에서쪽에서 “어? 이놈이 내 축복을 빼앗아 갔어! 좋다 그럼 내가 너를 죽이고 말리라.” 죽이려고 따라 오잖아요. 그러니까 야곱은 그에 대처해서 하나님의 축복, 열두 아들과 많은 재산은 일단 빼돌리고, 자기하고 단독적으로 만나서 담판짓자는 것이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준비태세였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찾아올줄 알았죠. 그런데 나타난것은 에서가 아니고, 다른 말로 하면, 에서의 자율성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누구의 자율성?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율성이 등장하면서 여기서 야곱은 비로서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적의 문을 열리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그 대적이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관계였음을 비로서 알게 된 겁니다.
이 내막이 호세아 12:1장에 나온다. 이런것이 성경에서 참 어려운 겁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면 어떤 사람은 “당신이 일부러 유식한체 하기 위해서 성경을 비비 꼬고, 사람을 헷갈리게 하려고 어렵게 강의하는데, 성경을 그렇게 어렵게 가르치면 누가 구원을 받겠느냐? 그렇게 어렵게 하는것 자체가 엉터리 해석이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를 할수도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 보세요. 아까 “너”가 누구냐? 그것을 보자는 말이죠. 제가 크로스 빌리지에 이런 답변을 했잖아요. “이미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잖아요. ‘행함에 의지하는 자는 넘어진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저쪽에서 이상한 사람이 말하기를 “왜 목사님은 행함과 믿음을 구분합니까?”라고 나오잖아요.
나는 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을 구분했으므로 구분하니까, 저쪽에서 복잡하다고 행함과 믿음이 따로 없다고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답변하기를 그렇다면 그것을 나한테 따지지 말고 누구에게 따져야 합니까? 사도바울에게 따지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성경은 쉬울것이다. 내가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해놓고는 자기가 아는것만 골라내 놓고는 ‘성경이 쉽다’고 하거든요.
성경을 성경대로 보자고 그렇게 외치면서도 사실은 성경을 가져다 버리고 자기가 주장할것만 골라서 주장하는 식이 된다는 말이죠. 사나이로서 사나이답지 못한 아주 비겁한 짓입니다. 또 그렇게 잘못하는 숙녀가 있다면 그것은 숙녀가 숙녀답지 못한 거죠. 여기 우리가 공부하는 수양관에서 잊지 못할 것은, 화장실에 보니까 지팡이를 들고 있는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신사양반과, 또 옛날 서양여자들 치마 뒷꼭지가 톡 튀어나온 그런 옷을 입은 숙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옛날 서양 여자들은 치마가 퍼지도록 그 안에 뼈대같은 것을 넣었거든요. 어릴때는 서양여자들이 엉덩이가 큰줄 알았거든요. 나중에 풍속도라든지 서양역사를 공부하다 보니까, 안에 치마를 부풀게 하는 구조물을 넣은 거예요. 얼마나 속았는지. 지금도 동구라파나 러시아 남쪽지방에 가보면 조그만 애들이 이 속에서 몇 명이 논다는 겁니다.
워낙 치마를 크게 부풀려 놓으니까. <토스토에프스키> 작품에 보면 자기 자식들이 열두명이 이 속에 들어가서 논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동구라파, 알바니아 이런데서는 여자들이 치마를 여섯 개, 일곱 개씩 입는다는 이야기도 나오죠. 물론 목욕은 전혀 안하죠. 왜? 추워서 그런답니다. 그것은 다른 이야기고 하여튼.
하나님의 자율성에 의해서 밝혀지는 이 원수라는 개념에 있어서, 야곱은 자기가 원수를 쳐야할 중차대한 사명을 받은자라고 간주를 했는데, 막상 이 축복의 당사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도록 인수인계하도록 허락해서 나에게 축복이 오도록 유도하신 그 하나님을 만나 보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싸우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호세아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호세아 12:2-6)
2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 저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라
야곱이 이기는데 왜 웁니까? 상대를 잘못 봤다는 거죠. 내가 이겨야 될 분이 아닌데 이겼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배은 망덕한 놈이 다 있느냐 하고 울면서 “제가 상대를 잘못골랐습니다.” 하는 거죠. 왜 잘못골랐어요. 야곱이는 그 상대가 에서인줄 알았죠. 왜 에서인줄 알았습니까? 어릴때부터 날때부터 엄마 뱃속에서부터 그의 적이 있었어요. 그의 적이 누구입니까?
철떡깥이 그의 원수는 누구였습니까? 에서였다는 말이죠. 원수는 에서인데 하나님이 그 에서편에 설줄이야 누가 알아냐 말이죠. 하나님이 자기편에 야곱편에 설줄을 알았죠. 태중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운 것은, 지난시간에 이야기를 했지만, 아브라함의 자식 둘이 서로 싸우는 것하고 똑같아요. 사실은 저희들끼리 싸운적은 없지요. 저희들 부모가 싸운거죠.
이스마엘과 이삭의 그 싸움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택한 백성과 택하지 않은 백성이 서로싸우는 것을 원수개념으로 집어넣어요. 그중의 한 예가 사무엘상 1장입니다. 사무엘 상 1장에 보면 거기에 대적이 브닌나로 나옵니다. 그 브닌나는 누구의 대적이다? 하나님의 대적으로서 등장해요. 브닌나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자식이 있어요. 그런데 그와 싸우려고 하는 한나에게는 무엇이 없습니까?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잉태치 못한자가 오히려 축복받은 여자다. 왜? 비어 있다는거죠. 비어 있는 껍데기인데 거기에 뭐가 담긴다? 하나님의 만든 성령의 피조물로서 자기가 채택될수 있으니까 자식 없는 여자가 자식 많은 여자보다 더 복되고 더 많은 자식을 가질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쉬운 말입니까?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는 말이 쉬운 말이에요?
어떻게 성경을 그렇게 인간들이 납득하기 쉬운것만 연구한다고 해서 그게 내용이 됩니까? 전체를 다 봐야지요. 그 말은 기존의 인간의 모든 것은 인정치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한나가 불렀던 찬송가가 그대로 - 컨닝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포크레인 가지고 콕 집어서 그대로 옮겨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대로 인수인계한것 같아요.
누가복음에 보면 거의 몇자 틀리지 않습니다. 거의 똑같아요.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나서 불렀던 찬송이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그대로 인계되듯이 “권세 있는 자를 물리치시고” 하는 그 말씀이 죽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한나가 단순히 자식이 없어서 탄식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모르면서, 자식을 가졌다는 것으로, 자식없는 여인을 구박하는 정신상태가 이스라엘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비언약적이고 악마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한나는 자기가 낳은 자식인 사무엘을 하나님께 도로 바치잖아요. 그렇게 바쳐진 사무엘로 말미암아 기존의 모든 세력을 다 뒤집어지죠. 자! 계속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야곱의 자율성.’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내렸다.’ 맞지요? 그 다음에 야곱에게 축복을 내렸으면 그냥 축복을 주면 될터인데, 하나님께서 창 28장에서 꿈에 나타나서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그때까지는 좋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왜 축복을 내려 준 그 당사자와 싸우냐 이말이죠. 그것은 야곱이 뭔가를 곡해하고 있어요. 왜 곡해 하는가? 야곱은 나름대로의 자율성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자율성은 어디서 나왔나? 하나님의 원수됨, 하나님의 원수됨의 근원에서 치고 들어왔고, 야곱은 그것을 그대로 이용해서 하나님의 맹세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맹세를 그에게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맹세를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여기 밑에 있고, 하나님은 위에 계시다고 할때, 하나님은 이 맹세를 타고 인간에게 내려오지요. 야곱은 밑에서 자기가 갖고 있던 원래의 근원적인 죄악성을 그대로 가지고 맹세를 타고 신을 마중나가기 위해서 올라가고 이 충돌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지고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현장이라는 말이죠. 울면서! 이미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아 놓고서도 울면서 그제서야 비로서 하는 말이 “축복해주세요 안해주면 저는 죽은자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떨어진 인간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브니엘’,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죽고 산것만 해도 왠 축복이냐? 그래서 비로서 내가 생명을 얻었다고 한겁니다.
생명이라는 뉘앙스를 그때 처음으로 비칩니다. 축복은 재산도 아니고, 열두 자식도 아니고 ‘생명’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 남을수 있는 그 생명. 이제 남은 과제는 내가 낳고 축복해준 그 자식을 어떻게 생명의 자식으로 바꾸느냐? 그것이 창세기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합니다.
창세기의 뒷부분은 ‘열두아들 사람만들기’예요. 거기서 한아들을 왕창 밟지요. 누구를 밟습니까? 요셉을 밟지요. 요셉은 난데없이 본인이 꿈꾸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꿈꾸고 있는데 그 꿈 때문에 밟히는 겁니다.
“형님! 제가 꿈을 꾸었거든요.”
“저놈 밟아라!!!”
“이상하다. 내꿈이 어렵나?”
“형님 제가 꿈을 또 꾸었거든요.”
“또 밟아라!!!”
“이상하다. 왜 꿈을 이야기 하면 밟지???”
“형님! 또 꿈을 꾸었는데요.”
“저놈 죽여라!!!”
“죽이면 뭐하냐? 종으로 팔아라.” 그래서 팔려가 버렸잖아요. 그래서 요셉은 가만히 아무 죄도 없이 멍청히 있다가 얻어 맞고 당합니다. 자기가 ‘이쯤 되면 총리 대신이 될 때가 되었는데’ 한것이 아니라 가만있는데 오라고 해서 갔고, 가보니까 총리대신을 하라고 했고, 그거 하고 싶어서 한것도 아니고, 꿈도 바로가 꾸었는데, 그 꿈의 적용과 혜택은 자기와 자기 형제들과 자기 아버지가 혜택을 받고요. 웃기지요?
꿈은 바로왕이 꾸었는데, 혜택은 누가 입고? 요셉과 자기 형제와 아버지가 혜택을 받고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여기 먼저 보내어 진것은 하나님께서 저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고 하죠. 창세기 45:8에 나옵니다.
(창세기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자녀만들기.’ 그 자녀 만들기에 왜 달라들어서 밟아야 되는가? 밟는게 뭡니까? 하나님의 원수됨, 그 원수됨을 실체를 들추어 내서, 우리의 자율성은 이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율성, - 여기서는 요셉의 자율성이죠. 사실은 요셉의 것은 아니에요 - 인간의 자율성, 이 두 자율성을 만나게 함으로써 그 가운데 원수관계가 없어지고 원수에서 화목관계로, 생명관계로 바뀌게 하는 이 원칙이 야곱의 언약입니다.
이 야곱의 언약을 통째로 실시하는 국가가 이스라엘이며, 그 새이스라엘, 참이스라엘이 누구냐?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리스도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에요. 그 똑같은 현상이. 바로 야곱의 언약이 지금도 속에서 벌어지고, 터져줘야 여러분은 성도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저는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구원받고 안받고는 여러분 속에서 무엇이 터져 나오는가?” 말이죠.
"나는 죽을뻔 했는데 하나님이 축복주시고, 생명주셔서 하나님덕분에 내가 살았지 내가 잘나서 내 자율성으로 산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했을때 그 사람은 야곱언약이 그 사람을 통하여 표출되고, 그 후손들에게 후배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어려운 것이 없지요? 어렵지 않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맘껏 발휘하세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들어 있는 것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신겁니다. 이것을 위선적으로 ‘아니야. 절제해야돼. 자기절제가 돼야지’ 라고들 하는데요. 제가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다시 이야기 합니다. 자기절제, 자기관리 좋아요. 그런데 연세 많아 보세요. 안됩니다. 안돼요. 밥먹었다. 한시 넘어 두시가 다 되어 간다. 오는 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오는잠을.
대화가 안되는데 잠이 와서. 자야지. 엎어져서 자야죠. 어쩔수가 없어요. 이것은 뭐 어쩔수가 없는거예요. 교인들이 하도 이런 오해를 많이 해요. 인사치레인지 오해인지 저는 구분이 잘 안갑니다만. “목사님! 많이 바쁘시죠? 손목사님! 바쁘시죠? 이목사님! 바쁘시죠?” 바쁘기는 뭘 바빠요? 아침먹고 자고, 점심먹고 자고, 컴퓨터 게임하고 그러는데. 예? 컴퓨터 열어서 고스톱치고 다 그러고 있는데.
하지만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님은. 이것은 핑계가 아니고 진짜입니다. 복음을 아는 목사님은 게임을 하면서도 설교만 생각한다는 사실. 이거 아멘!!! 고스톱을 치면서도, 설교에서 예화거리를 찾는다는 사실. 오늘 이 은혜로 이시간을 끝내고 십분 쉬고 다음 강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