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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년은 묵었을거여. 용마루의 흙빛이 청회색인디 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 아니라 통으로 짓고 조각한 말허자면 그 와쟁이 친구의 손찌검이 와닿는 지왓장이여. 적어도 저런 지붕 아래에서는 살어야 한 백년 삭을 맛 아니여?
선친이 30년 막바지 양노원 하심서 줏어 온 어떤 노인이 맨들었다는 호랑이 나무조각인디 그 노인 앵기는 것마다 두부모처럼 숭성숭성 썰어 분다는...
사람이란, 지 몸 하나 형체는 사라져버려도 뭣인가 남든단 말이여... 남은 거이 물질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징후 같은 거.
지금도 살아 있는 거 맨키로 쓱쓱 버혀나간 저 칼의 속도와 느낌의 여백 같은 거...
놋그릇 왼쪽 둘이 울 할머니 오른쪽 둘이 할아버지 거. 하난 밥그릇, 또 하난 국그릇. 안 계시는 분이니 숟,젓가락은 뺐지뭐.
열면 까만 고봉밥 뜨면 보릿국 쑥국...
이 조부모님의 그릇을 하마터면 대동아전쟁물자로 공출 당할뻔 했다잖은가! 정지바닥에 파묻었다 살아난 목심!
우리 집에 초대된 일이 종종 있었던 교회 선교사들은 이 고봉밥그릇이 더러워보였던지 가운데만 쏙 파먹었고, 반찬은 고기와 시금치나물만 달랑 해치웠지. 그날부로 난 미국사람들이 싫어졌는디 내 나이 열살 무렵...
부엌에서 해우(김)가 올라오는 아침 밥상이 생각난다. 우리 오형제에게 깜푸른 해우 전지 한 장씩이 돌려지면 우린 그걸 잘게 찢어 밥 한그릇을 해치웠지. 아내 쪽은 칠남맨데 밥풀 묻은 숟가락으로 엉덩이 뒤쪽에 감춘 여동생의 김쪼가리를 슬쩍 붙여간 사건도 있었다니! 윽, 싱싱한 옛 웃음이 절로 터진다. 그 김에 바르던 꼬수운 들기름을 담았던 조고이 바로 한 100년 묵은 백자 종재기다.
어머니가 시집 올 때 가져온 태극 상자와 내 헌 옷가지를 두들겨 팬 다듬잇방망이.
하오에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내던지고 마루에 누울 때 아득히 날아가는 할머니의 다듬잇소리는 이쪽 손은 닥닥닥... 저쪽 손은 따당따당 불방울이 튀는 난타로 이 내 코를 드르릉 잠들게 했던...
네 번 이사한 절굿대.
광주 학동 644-3번지. 유년의 에덴으로 처음 와서, 양림동 천변 가 비좁은 양옥으로, 학동시장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 세 번째 집 허름한 한옥으로. 그리고 지금 내가 깃들어 사는 이곳 남구 압촌동으로.
지금도 허리와 공이가 반들거리는 저 절굿대는 내 어깨를 많이 닮았단 생각. 김치를 담그는 어머니가 부르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지. 어머니의 칭찬과, 들들 가는 내 힘자랑에 곧 김치가닥을 볼떼기찜질 할 그 매운 맛의 유혹에 따라.
젖은 고추를 통마늘과 함께 갈다가 미끈하게 돌확에 붙으면 멸치젓과 밥풀을 넣었고, 맨 뒤엔 통깨를 넣고 갈지. 내 평생을 찢어먹인 저 절굿공이. 나는 간이 맛있는 잎은 내 입으로 뜯고 심심한 쭉대기는 진형이 혜형이 여동생의 숟가락 위에 얹어주는 얌체짓을 무척 즐겼다.(지금도 기회 있으면 저지르고 함께 웃는다^^)
이놈의 허리를 우아래로 잡으면 꿈속에서도 두팔이 빙빙 돈다.
케냐에서 목회를 하는 사촌 형이 선물한 지팡이다. 두번을 떨어뜨려 붙여논 것이지만 유미주의자인 내 눈을 아직도 붙드는 물건이다. 케냐보다 더 까만 아프리카를 본다.
나를 씻긴 빨래판이다 할미는 이 빨래판 위에서 한을 삭였다 내 어미는 이 빨래판 위에서 마음을 닦았다
나는 무엇을 씻을까... 닳고 해져 사라져버린 지문처럼 내 무명無明의 숱한 발가락과 손모가지와 혓바닥을? 아무 샘 가에서라도 앉아 주무르자. 두드리고 행구고 탈탈 털어 널자.
누워서 앉아서 서서 바라보던 쥐그림이 그려진 항아리지. 쥐 뒤 그림의 풀은 바늘골풀?
그 왼쪽의 것은 거칠고 투박하기가 호박 같지만 소년시절 열대어를 키우며 내가 애지중지했던 물건이다.
내가 중3 때 관절염 수술로 입원해 있을 적 때마침 찾아온 고물장수에게 여러 개의 골동품이 팔려나갔다는데 그 시기에 사라졌던 물건이다. 화가를 꿈꾸던 내 눈에 얼매나 밟혔던지 아버지 앞에서 공연히 따지며 꽁알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 돈으로 병원에 있는 내 간식과 반찬을 대었단다.
세월 가고, 스무 해를 넘겼을까, 시 쓰는 친구 곽재구가 한창 개미시장(예술의 거리)을 다닐 때 종종 그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는데 드뎌 그 곳 한 골동품 가게에서 이 녀석을 만나고 말았다. 가위 초등시절의 짝꿍처럼 놀라왔으니!
내가 해직 되어 피차 백수이던 시절임에도, 재구씨는 선뜻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값을 치르고 퍼억, 내 품에 안겨 주었다. 쩝...
할머니 시집 오면서 가져온 장이다. 내 삶의 연극 소품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장이기도 하다. 이제, 아래 서랍에는 아버지가 즐겨 쓰셨던 집안의 연장들을 넣었고, 그 위 여닫이에는 배틀 도구, 갓, 족두리... 그 윗 서랍 둘에는 엽전, 낡은 손목시계, 이발소 면도기, 뿔테 안경, 이 빠진 하모니카... 맨 위 여닫이엔 아버지의 침통, 뜸통, 낡은 의학서적들을 차곡차곡 개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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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 한번 소개했던 글 같은디.. 창고에서 퍼왔네. 토인... 만든 공력 못잖게 눈과 손으로 기른 공덕도 큰 것이 생활자기인 것 같데... 안긍가? 그나저나 곽재구 보고싶넹~
생활자기같은 공예품은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죠.특히 다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곽시인 어디 가셨나요?
어디 한가한 시간 좀 있으면 데려다 쓰고 싶네만... 하고 싶은 일들을 놓고 직장에 묶여 있는 맛인데 어느새 풀들은 자라고 꽃은 또 피니 이 봄을 어이 할까... 아무래도 붓을 잡아야겠지. 재구씨도 나처럼 맘 바쁠거여. 모르고 사는 것이 만나고 사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는 걸 피차 아는 바...
언젠가 봤네요..내 소실적 생각함시롱~ ㅎㅎ보고 싶으면 우연히라도 만날수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