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에서 안암동 체험실로 가는 길이었다. 옷 가계를 지날 무렵 언뜻 보도블록 틈바귀 사이로 초록빛 생생한 야생초가 자라난 것이 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면서 물끄러미 보았는데, 어쩜! 그렇게 생생한 초록빛일수가 있을까? 공해에 찌들어 지저분할 대로 지저분한 서울의 공기를 마셨음에도 너무나 생생한 초록빛 잡초였다. 민들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랴! 식물이 절대로 자라지 못할 길가의 보도블록 틈이었는데도 겨자씨 한줌도 안 되는 흙먼지 속에서 아무도 심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는 무심함 속에서도 생명이 질기게 자라난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생생한 초록빛 야생초!
어쩌면 우리들 자립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장애인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잡초처럼 끈질긴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양지바른 베란다에 놓여져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살아가길 거부한, 그것이 잡초들의 생명력이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집안에만 갇혀 없는 듯한 존재가 되어 죽은 듯 살아가고 장애인 시설에서 평생 아무런 희망도 못 가진 체 죽어 가야하며 간혹 가다 주어지는, 동정과 시혜의 산물로 장애인의 날이거나 특별한 행사 때마다 베풀어지는 여러 가지의 장애인들을 위한다는 공연과 나들이. 동정과 시혜를 베푸는 이들에게 사진 한번 폼 나게 찍어주고 한날 신나게 놀다가 때가 되면 또다시 갇히어 언제 또 베풀어질지도 모를 동정과 시혜의 나날을 무작정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베란다에 놓여진 화분 속 꽃의 삶, 우리 장애인들의 지금까지에 삶은 이렇게 수동적이었다.
난 신물이 난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시설 안에서도 적지 않은 나의 친구들이 자유를 꿈꾸며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이들에게 그 달콤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회는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론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는다. 양치기가 교묘하게 양들을 우리 속에 몰아넣듯 사회복지제도의 함정들을 곳곳에 파놓고 우리들이 그곳을 피하다 보면 어느새 사회와 동떨어진 삶의 우리 속에 갇히고 만다.
잡초는 제거 되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왜냐하면 잡초는 미관상으로나 용도 면으로나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고 또 다른 식물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엔 우리 장애인들은 가족들의 돌봄 속에나 또는 장애인 시설 속에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막연히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장애인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같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거리의 대부분은 장애인이 혼자 휠체어를 타고 나다니는 꼴을 못 본다. 휠체어가 가야할 길들을 높은 턱으로 막고 계단으로 봉쇄한다. 아직도 우리나라 지하철역엔 장애인 승강기나 리프트 시설이 설치되 있는 곳은 4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동사무소엔 의무적으로 설치 되야 할 경사로 시설조차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거리엔 장애인들을 좀처럼 볼 수 없다. (물론 우리 같은 잡초 장애인들이 무대뽀 정신으로 거리를 헤집고 다니긴 하지만 아주 작은 수에 불과) 그러므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접해볼 기회가 적다.
그렇지만 희망은 있다.
내가 회원으로 다니고 있는 피노키오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피노키오는 동대문사회복지관 내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들과 비장애인들은 복지관 어디서나 자주 부딪치게 된다. 2년 전 처음 복지관 내에 피노키오가 설립될 당시 비장애인들이 우리 장애인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휠체어가 지나가면 미리부터 멀찍이 한꺼번에 우르르 피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동네 사람 누구도 휠체어를 의식하지 않고 옆으로 지나쳐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간혹 나 혼자 휠체어를 밀고 산책을 나가다가 도랑에 빠질 때가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도움을 청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달려와 도움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에게 휠체어는 이미 낮선 물건이 아니라 우리들의 필수적인 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또 오히려 그것을 타고 길거리를 지날 때 비켜달라고 말해야만 비켜준다. 함께 다니는 어떤 장애인은 그게 더 기분 좋다고 말한다.
장애인은 있어도 장애가 없는 세상!
그것은 사회 속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별달리 느끼지 못할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하다 못해 연필을 깎다 잘못해 엄지손가락을 비어서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없게 되는 것도 장애가 될 수 있다면 누군가 그 사람의 손이 되어 문자 메시지를 보내준다면 좀 불편할지언정 장애는 심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식물들도 잡초를 잡초라고 부르지도 않고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잡초인가는 사람들이 결정해 놓았으니까.
첫댓글 박정혁씨 글 읽고 사회에 참여하는것이 우리가 살아있다는것을 스슷로 증명하는.. 아무튼 글 사회속에서 장애인은 존재하는것이 옳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하는 방법은 세상속에 살 때 변할 수 있고 나의 변함에 세상이 바뀜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소금이 녹아서 짠 맛을 내듯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