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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96주(2011.9.14)
노자 도덕경 4-5장 해설
이태호(한국과정사상연구소 연구원)
1. 노자 도덕경 해석의 다양함과 어려움
노자 도덕경에 있어서의 궁극자를 살펴보려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과업이 있다. 그것은 도덕경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책이 완성본으로 전해져 오지 않고 여러 본으로 전해져 왔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같은 本이라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을 두고 많은 해설서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용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부분으로서 몇 가지 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C. 168년으로 추정되는 한묘(漢墓)에서 발견된 백서(帛書)4)의 갑본(甲本)과 을본(乙本)이 그것이다. 갑본은 소전체(小篆體)5)로 쓰여졌고, 을본은 예서체(隸書體)6)로 쓰여졌다. 이들 백서의 제목은 모두 『德道經』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B.C. 300년경으로 추정되는 죽간본이 초묘(楚墓)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은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으로 불린다.7) 이 간본(簡本)에는 갑, 을, 병 3본의 각각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적인 부분에서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A.D. 244년에 천재 소년이었던 왕필(王弼, 226-249)이 해설한 왕필본이다. 이 책명은 『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이다. 그리고 하상공(河上公, B.C. 180-157 漢文帝의 在任期間 또는 A.D. 460년경)의 『도덕진경주(道德眞經注)』8)이다. 왕필본과 하상공본은 전체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본 모두 도덕경을 상편(앞의 37장)과 하편(뒤의 44장)으로 구분하였다. 하상공본에는 앞의 37장을 도경(道經)이라 하고, 뒤의 44장을 덕경(德經)이라 하였으며, 각 장마다 장명(章名)이 붙어 있다.
2. 도덕경의 해석을 통한 노자의 궁극자
가. 25장 해석을 통한 노자의 궁극자
이 논문에서는 김학목의 번역9)을 주 텍스트로 삼았다. 그는 왕필의 도덕경 주(註)를 연구해서 「왕필의 노자 주에서 유무에 대한 고찰」, 「왕필의 노자 주에서 자연과 명교(名敎)에 대한 고찰」, 「왕필의 노자 주에서 無와 자연에 대한 고찰」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책에는 왕필이 쓴 노자지략(老子指略)과 배위(裵頠)의 숭유론(崇有論)이 있고, 저자 자신의 논문인 「위진현학(魏晉玄學)에서 지(知)와 무(無)에 대한 고찰」이 있다. 그는 25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유물혼성, 선천지생. 숙혜료혜, 독립불개,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오부지기명, 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廖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뒤섞여 있는 것이 있어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니, 적막하고 쓸쓸하게 홀로 있어도 바꾸지 않고 두루 운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그것에 도(道)라고 별명을 붙이고, 억지로 크다(大)고 이름 붙였다. 크다는 것은 간다는 것(逝)을 말하고, 간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遠)을 말하고, 멀어진다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反)을 말한다. 그러므로 도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다. 그러니 우주에는 네 개의 큰 것(四大)이 있고, 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10)
참고로 했던 번역서도 몇 가지 있다. 그 중에는 전 서울대 교수였던 김학주의 신완역(新完譯) 『노자』가 있다.11) 그는 왕필의 노자 주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백서노자(帛書老子)와 당사본노자(唐寫本老子)를 참고로 집필하였다. 이 책 서두에는 해제(解題)로서 노자의 생애와 사상과 현실적 의의 등이 있으며, 말미에는 원문 노자(原文老子)와 영문 노자(英文 老子)가 실려 있다.
A.D. 244년 경에 왕필(王弼)이 쓴 왕본(王本)을 중심에 두고, 1973년~1974년 사이에 발견된 것으로 B.C. 168년에 쓰여진 백서(帛書) 중 소전체(小篆體)인 갑본(甲本)과 예서체(隸書體)인 을본(乙本)을 참조하고, 1993년에 발견된 것으로 B.C. 300년 경으로 추정되는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인 간서(簡書) 혹은 간본(簡本)까지 검토하여 자신의 기철학적 입장에서 번역한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가 있다. 이 책은 처음에 상하 두 권으로 출판했으나 나중에는 1,2,3권으로 증편되었다.12) 이 책을 통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저자의 풍부한 관점을 접하게 되었다.
周天의 大家라고 불리는 眞陽선생이 제자의 청을 받아들여 번역한 『진양풀이 도덕경』이 있다. 그는 도덕경의 핵심이 道를 닦는 구체적인 근본과정과 그 효과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도덕경은 하등 난해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번역은 한문 원문과 함께 자신의 한글 번역을 인터넷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다운받아 참조하였다. 특히 컴퓨터로 전 용어들을 빠르게 검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다.
정치사상 전공인 정달현이 번역한 『노자』13)가 있다. 그는 장기근 역의 『노자』14)
원문을 참조하였고, 2007년도에 발행된 중국 호남 인민 출판사의 영문번역판, 호남 인민 출판사와 연변 인민 출판사의 한국어 번역판에 있는 원문 및 왕필(王弼)본과 하상공(河上公) 본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는 노자 책을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과 더불어 정치론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가 인용한 25장에는 대부분의 원문에 적혀 있는 왕(王)이 없고 모두 인(人)으로 대체되고 있다.
유물혼성, 선천지생. 숙혜료혜, 독립이불개,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오부지기명, 강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고도대, 천대, 지대, 인역대. 역중유사대, 이인거기일언.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廖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 域中有四大, 而人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마구 뒤섞여 있는 어떤 것(物)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고요하고 형체가 없어 볼 수 없지만 홀로 서 있고 변하지 않으며, 번져 나가고 멈추지 않아, 하늘과 땅의 어미라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억지로 도라는 글자로 나타내었고, 억지로 크다고 으름 붙였다. 크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이고, 흐른다는 것은 멀리 간다는 것이고, 멀리 간다는 것은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도는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 우주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사람도 그 중 하나이다. 사람은 땅을 다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自然, 그 스스로)을 따른다.
위의 여러 번역을 종합하여 보면, 노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중요하고 큰 것은 사람과 땅과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중 하늘과 땅은 여러 번역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으나 사람은, 위의 번역처럼 왕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도 있고 사람 그대로 번역한 것도 있다.15) 왕을 사람의 대표로 본다면 하늘, 땅, 사람이 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다.
노자는 큰 天地人에다 道를 넣어서 四大를 말하고 있다. 道가 큰 이유를 위(25장)에서 밝히고 있다. 道는 가는 것(逝)이고, 가는 것(逝)은 멀다는 것(遠)이고 멀다는 것(遠)은 되돌아간다는 것(反)이라고 한다.16) 道는 멀리 가서는 반드시 되돌아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멀리 간다는 것은 서거(逝去)한다는 것으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7) 그런데 천지인이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되돌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다가 원래 있던 곳인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18)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일은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터전으로 딛고 있는 땅의 이치를 본 받은 것이다. 즉 땅도 생겨서 살다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19) 여기에는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에 차이가 있다.20) 땅이 서거하여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본 받은 것이다. 하늘도 다만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에 차이가 있다.21)
노자가 말하는 땅과 하늘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구(地球)와 천체(天體)로서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본 받아야 하는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후대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다듬어지는 음(陰)의 기운과 양(陽)의 기운으로서의 속성도 있다. 도덕경에 음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42장이 처음이자 끝인데, 그곳에는 “만물은 음(陰)을 지고 양(陽)을 안으며 충기(沖氣)로서 조화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이 구절 바로 앞에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노자가 말하는 존재의 궁극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궁극적인 것을 나타내는 자연, 도, 무, 유(自然, 道, 無, 有)는 무엇인가. 그리고 42장에서 말하는 1,2,3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등을 알아보기 위해 42장에서 道와 관련된 원문과 번역을 검토해 본다. 42장을 상세히 검토하기 위해서는 40장의 원문과 번역도 함께 검토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 40장과 42장 해석을 통한 노자의 궁극자
반자, 도지동. 약자, 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되돌아가는 것[反]이 道의 움직임이다. 유약한 것이 道의 작용이다. 천하 만물은 있음[有]에서 나오고, 있음은 없음[無]에서 나온다.(40장)
“되돌아가는 것이 道의 움직임”이라면 어디로 되돌아가는가? 그 다음 구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천하 만물은 있음에서 나오고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천하 만물은 결국 있음을 거쳐 없음으로 되돌아간다. 되돌아가는 것이니까 당연히 처음 발생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이 말은 처음 발생의 상태가 없음이고,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천하 만물로 진행된다.
이 진행의 구체적인 용례로 노자는 유약함을 들고 있다. “유약한 것이 道의 작용이다.” 어린아이는 유약하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강건해진다. 새싹은 유약하고 성인목으로 자라면서 강건해진다. 천하 만물은 강건해진 것이 극에 이르면 없음으로 돌아간다. 즉 죽는다. 죽은 이후에는 다시 부드럽게 태어난다. 부드럽게 태어나서 다시 강건해지고, 그 강건해짐이 극에 이르면 죽는다. 이런 과정process을 되풀이하는 것이 道이다. 이 道는 42장에서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
道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 만물은 음(陰)을 등에 지고 양(陽)을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 비어 있는 기[충기(沖氣)]로 조화를 이룬다. ⋯⋯(42장)
42장은 앞의 40장과 진행방향을 달리한 것이다. 앞의 40장에서는 만물은 有에서 나왔고 有는 無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42장에서는 道에서 하나,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한다. 42장에는 중간에 하나, 둘, 셋이 있지만, 40장의 진행방향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道에서 하나가 나온다면 그 하나는 無이다. 여기서 無는 다음 문장에 나오는 텅빈 기운인 충기(沖氣)이다. 충기는 오늘날 언어로 표현한다면, 기운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음기와 양기를 담아서 조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텅빈 기운인 충기가 없다면 음과 양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만물이 생겨날 수가 없다. 하나에서 둘이 나온다면 그것은 無에서 有가 나오는 것인데, 이때의 有는 다음 문장에 나오는 음기와 양기를 말하기 때문에 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가슴에 안는다.”는 말은 모든 만물에게는 반드시 음과 양 둘이 함께 있다(有하다)는 것이다. 손바닥과 손등이 함께 있어야 손이 되고, 종이도 앞과 뒤가 함께 있어야 한다.
둘에서 셋이 나온다는 것은 음기와 양기 둘에다 충기를 합쳐 말한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만물은 陰을 등에 지고 陽을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 비어 있는 기[沖氣]로 조화를 이룬다.”는 말이다. 음기와 양기 두 기운에다 충기가 하나 더 있어야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밀가루와 물이 있어도 그것을 섞을 수 있는 그릇(빈 공간)이 있어야 반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반죽이 바로 만물이다. 그래서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하였다.
道에서 無가 나온다고 할 때의 無는 충기(沖氣)이다. 도덕경 11장에 그 사례가 적혀 있다. 천지가 氣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도 빈 곳이 있어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는데, ‘바퀴통의 구멍’[無]이 있기 때문에 (수레)가 수레로서의 효용을 가지게 된다. ⋯⋯ 그러므로 ‘공간을 차지한 것’[有]들이 ‘이롭게 되는 것’[利]은 ‘공간[無]이 효용이 되기 때문이다.22)
도덕경 40장과 42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진행방향은 道 → 無(1) → 有(2, 3) → 萬物이다. ( ) 안의 숫자 1은 충기(沖氣), 2는 양기(陽氣)와 음기(陰氣), 3은 충기, 양기, 음기를 나타낸다.이제 25장과 비교 검토해서 道의 진행방향을 살펴보고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道가 무엇인지, 자연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겠다.
다. 40장, 42장, 25장의 종합적인 해석을 통한 노자의 궁극자
뒤섞여 있는 것이 있어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니, 적막하고 쓸쓸하게 홀로 있어도 바꾸지 않고 두루 운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그것에 道라고 별명을 붙이고, 억지로 크다(大)고 이름 붙였다. 크다는 것은 간다는 것(逝)을 말하고, 간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遠)을 말하고, 멀어진다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反)을 말한다. 그러므로 道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다. 그러니 우주에는 네 개의 큰 것(四大)이 있고, 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저절로 그렇게 됨을 본받는다.(25장)23)
25장에서는 진행방향이 사람 → 땅 → 하늘 → 道 → 자연이다. 그런데 이것은 본받는 자를 앞에 두고 본이 되는 대상을 뒤로 둔 것이다. 본이 되는 대상이 더 궁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40장과 42장에서 정리한 것(道 → 無(1) → 有(2, 3) → 萬物)과 비교하기 위해 진행방향을 역으로 하여 자연 → 道 → 하늘 → 땅 → 사람으로 둔다.
40장과 42장에 없던 자연이 25장에는 있다. 이것은 道가 어디서 나왔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그 답변이 자연이 道를 낳았다(自然生道)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경에 자연생도(自然生道)는 없다. 가장 궁극적인 道의 탄생원인에 대해 왜 도덕경은 분명히 하지 않는가? 道보다 앞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절이 25장 ‘道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이다.
도덕경에 왜 도법자연(道法自然)은 있는데 자연생도(自然生道)라는 말은 없는가? 자연생도라는 말은 할 수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연이 道를 낳았다고 한다면 자연은 무엇이 낳았는가 라는 무한소급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어디선가 끊어야 하는데 도덕경은 道를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둘째, 도덕경에 나타나는 자연은 물리적 자연이 아니다. 물리적 자연이라면 그것은 음과 양의 속성을 지닌 有에 해당한다.
그래서 도덕경의 자연(自然)은 한자풀이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도법자연이라는 말은, 道는 누구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道 스스로가 그러해서 더 이상 소급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자연을 실천적인 德과 관련지어 해석할 때는 인위적(人爲的)으로 고치려 하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진 상태인 ‘있는 그대로 두라’는 무위(無爲)의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도덕경에서는 道가 가장 궁극적인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24)
25장에서 천지인(天地人) 등이 차례로 본받아서 마지막에는 天이 道를 본받는다는 것은 40장과 42장의 도식과는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는가? 天은 양기(陽氣)의 대표이고 地는 음기(陰氣)의 대표이다. 그래서 이들을 크다고 하였다. 5장에 “하늘과 땅 사이는 아마 풀무와 피리와 같겠지! 비어 있으면서도 다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나오는구나.”25) 여기서 하늘은 양기이고 땅은 음기이며, 그 사이가 음이나 양의 기운이 비어 있는 충기인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4장에 “도는 비어 있지만 작용하니 차지 않는 듯하다”26) 이 말은 충기가 있어서 道의 작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과 충기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구체적인 인간은 양기든 음기든 氣로 가득 차 있는데 텅빈 기운인 충기를 닮은 부분이 있어야 道에 가깝고 4大에 들지 않겠는가. 도덕경은 인간이 4大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를 조금 더 분명히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왕을 사례로 들고 있다. 16장에 “항상 됨을 아는 경지가 되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이에 공평해지고, 공평하면 이에 왕이 되고, 왕이 되면 이에 하늘처럼 되고, 하늘처럼 되면 이에 도를 체득하게 되고, 도를 체득하면 영원하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27)
그리고 39장에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기초로 한다. 이 때문에 왕들이 스스로 ‘고아가 된 자’[孤], ‘덕이 적은 자’[寡], ‘선하지 않은 자’[不穀]라고 했으니, 이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28)
도덕경은 만물 중에 인간이 道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중에 왕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왕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대목이다. 도덕경은 춘추전국시대의 혼탁한 세상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정치철학이기도 하기 때문에 왕에게 가능성을 제시하여 道를 실행하도록 권유하고 싶은 노자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29)
하늘의 道를 실행할 수 있는 왕을 비롯한 인간은 스스로 道를 이해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에 道에 가깝다고 하고, 인간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노자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지혜로운 자로서 충기(沖氣)인 無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道에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無보다 有를 소중하게 여기며 다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툼을 멈추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인간에게 道를 실행하라는 의미로 무위(無爲)를 인간의 덕(德)으로 강조한 것이다. 어쨌든 道를 이해하고 실행 가능한 인간은 천지와 더불어 3大에 들고 道와 더불어 4大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노자의 道는 無에서 有를 거쳐 만물에 이르고 그 만물은 다시 無로 되돌아간다는 과정을 말한다. 이 道는 스스로 그러하기(道法自然) 때문에 道를 넘어 더 이상의 궁극자는 없다.
3. 노자 도덕경 4-5장 번역
가. 김학묵 번역
제4장 : 도충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좌기예, 해기분, 회기광, 동기진.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는 비어 있지만 작용하니, 차지 않는 듯하다. 깊으면서 고요하니 만물의 근본인 듯하다. 날카로움을 꺾고 분란을 풀어주며, 빛나는 것을 부드럽게 하고 더러움과 함께 한다. 깊으면서 맑으니 존재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니, 조물주(帝)보다 앞서 있는 듯하다.
제5장 :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다언삭궁, 불여수중.(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龠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하찮은 꼴이나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하찮은 꼴이나 개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아마 풀무나 피리와 같겠지. 비어 있으면서도 다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나오는구나. 말이 많으면 궁하게 될 수이니, (풀무나 피리처럼) 빈속을 지키고 있는 것만 못하다.
나. 이태호 번역
제4장(無源) : 도충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좌기예, 해기분, 회기광, 동기진.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는 비어 있기 때문에 쓰임이 있고, 그것에 무엇이 담긴다 해도 늘 채워지지 않는 빔이 유지되면서 쓰임이 지속된다. 그 깊이를 알 수 없구나! 그래서 도는 마치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워진 것을 풀며, 빛을 합치게 하고, 먼지와 함께 한다. 도는 모든 것을 (과정으로) 빠져들게 하는구나! 마치 늘 있는 듯하다. (도는 마치 항상 즐기고 있는 것 같구나!) 나는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지만, 만물을 다스리는 상제보다도 먼저인 것은 안다.
제5장(虛用) :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다언삭궁, 불여수중.(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龠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하늘과 땅의 사이는 마치 풀무와 피리의 가운데가 비어 있는 것과 같다. 비어 있어 굽어지지 않고, 움직이면 점점 더 바람과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풀무와 피리도 너무 세게 하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듯이) 말도 너무 많으면 자주 막히게 되니, (풀무와 피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가운데를 비워두는 것처럼) 가운데 빔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或 혹 : 혹, 혹은, 있다, 늘, 언제나
淵 연 : 못, 소, 물건이 많이 모이는 곳, 깊다.
似 사 : 같다, 닮다, 잇다.
挫 좌 : 꺽다, 창피를 주다, 묶다, 격박하다.
解 해 : 풀다, 가르다, 흩뿌리다.
紛 분 : 어지러워지다, 어지러워진 모양, 섞이다.
湛 담 : 즐기다, 빠지다, 탐닉하다, 술에 빠지다, 맑다.
橐 탁 : 전대, 풀무, 사물의 소리
籥 약 : 피리, 구멍이 셋 또는 여섯, 자물쇠, 열쇠, 잠그다, 채우다.
屈 굴 : 굽히다, 굽다, 물러나다, 베다, 자르다.
愈 유 : 더욱, 점점 더, 낫다, 뛰어나다, 병이 낫다.
數 삭 : 자주, 세다, 셈, 계산하다.
4. 노자 도덕경 4-5장 해설
그릇이 작은 사람은 쉽게 바닥을 드러낸다. 이 사람은 있는 재주 없는 재주를 다 드러내어 잘 나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그릇이 큰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능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의 깊이를 모르겠다고 한다. 그릇이 큰 사람은 여유(餘裕)가 있다. 자신의 능력 중 일부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능력 중에서 사용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록 여유가 있는 것이다.
장관을 수행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장관이 되었을 때, 그릇이 작은 사람은 기뻐 날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중에도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축하한다면서 아부를 한다. 그러나 장관을 하고도 남을 그릇이 되는 사람은 본인에게 장관의 요청이 왔을 때, 당연히 사양한다. 인생을 피곤하게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그 사람의 능력을 알고 간곡히 부탁하고, 주변에서도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는 있다. 그가 수락할 때도 마지못해 하면서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리고 그만한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 장관에 임명되는 것을 보고는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장관이 된 본인은 잘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전 혼을 쏟아 붓는데도 결과는 시원찮게 나온다.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본인도 건강을 상하거나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된다. 장관에 물러난 뒤에도 욕을 얻어먹게 된다.
노자가 보기에,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보다 많이 부족한 일을 하면서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긴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사회에 쓰이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이 사람은 출세 성공을 위해서 능력을 기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재미있게 할 뿐이다.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대인관계나 일에 있어서도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는다.(挫其銳) 자신이 이권이나 좋은 자리를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어난 분란을 해결할 수 있다.(解其紛) 자신을 빛나게 하지 않고 남을 빛나게 하기 때문에 조화시킬 수 있다.(和其光)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름도 없는 티끌처럼 조용히 지낸다.(同其塵)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운동 시합에 나가기 전에 시합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시합에 이겨야만 병든 어머님을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 간절히 빌었다. 그 시합의 상대방도 같은 종교 신자여서 자신이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시합에 이겨야 빚을 갚고 장가를 갈 수 있다고 간절히 빌었다. 양쪽의 기도(기원, 소원)를 접한 종교의 대상은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천지는 어질지 않고 성인도 어질지 않다. 노자는 인위적인 어짐(仁)이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좋지 않다고 본다. 자연은 천둥, 번개, 폭풍, 가뭄, 홍수, 태풍 등을 일으키면서 여지없이 파괴시키기도 하는 등 냉정해 보인다. 그런데 냉정해 보이지만 자연은 자연치유력을 발휘하여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의 몸도 자연이다. 감기가 걸리고, 여러 가지 고통과 병 등에 노출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자연치유력과 관련된다. 즉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과 관련된다.
감기나 병이 있다는 것은 쉬어라는 자연의 명령이다. 에너지를 채우지 말고 비우라는 자연의 명령이다. 노자는 권력, 금력, 명예, 명성, 학벌 등으로 자신의 생명의 그릇을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고 상당량을 비워두라고 말한다. 비워야만 풀무로 바람을 계속 일으킬 수 있고, 피리를 계속 불 수 있듯이 자신의 삶을 계속 즐길 수 있다. 그런데 풀무와 피리도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쉽게 꺾여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빈 공간이 필요하듯이 우리 인생에도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을 너무 세게 다루면 바람과 소리를 내지 못하듯이 권력, 금력, 명예, 명성, 학벌 등의 소유를 위한 지나친 노력은 삼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