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 격 - 1
장충동 영빈관 맞은편에 임시 수사 본부를 설치한 지 1주일이 지났다. 그 1주일의 기간이 허열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일본측이나 노범호 어른의 판단대로라면 백수웅은 지금도 살아 있어야 했고,
그가 살아 있는 이상 어디선가 움직이고 있는 흔적이 포착 되어야 하는데, 마치 쥐죽은듯 조용하기만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의정부. 수원. 인천 등 주요 도시는 물론 소도시에 이르는 전 관할 구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을 취합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분석해 나가고 있지만,
백수웅의 움직임으로 보이는 사건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토바이 탈취 사건도 없었고 살인 사건도 없었다.
주요 기관에 일선 형사들을 잠복 근무시켜 보았지만, 그 역시 헛수고였다.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이 흐른 뒤, 허열은 마침내 백수웅의 생존 가능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청평 그 녀석이 백수웅이었을 거야.'
허열은 수사 일지를 꺼내, 지금까지 걸어온 백수웅의 발자국을 주도 면밀히 재검토해 보았다.
그가 부산 해운대를 통해 침투한 이래, 이처럼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 본 일이 없었다.
어디에서도 백수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생존 가능성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신의 은폐를 위해 위장 자살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열차와 충돌하여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뛰어난 판단력과 조직적인 두뇌의 소유자 허열도, 백수웅의 침묵에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4월 14일. 그가 침투했던 3월 7일로부터 한 달이 훨씬 지나가 버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다시 수사대에 합류한 남성우나, 지금까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두 눈을 번뜩이던
최일우도, 몸이 뒤틀리는지 의자에 앉아 하품만 해 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보다도 더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이 있었다. 발목을 다쳐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 노옥진이었다.
허열은 백수웅의 생존에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지만, 노옥진은 그가 죽었으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보내 준 새 가정부가 알뜰히 보살펴 주고 있어, 집안 일은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발목의 움직임이 원활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직접 백 수웅을 찾아 나설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살아 있다. 죽을 이유가 없지. 백수웅씨는 틀림없이 우리 집 부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노옥진은 손으로 턱을 괸 채. 푸른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허열과 결혼한 것을 알아 냈을 거야. 그리고 내 아버지가 노범호라는 것도.
이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게 되었지. 백수웅의 목표는 우리 가정이야. 이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보고 싶겠지. 아버지는 참으로 어리석었어. 모든것을 잃어버린 한 사람을 그렇게 무참히 짓밟다니.
차라리 그의 복수를 달게 받고 싶었다. 죽음을 달라면 조용히 목숨을 내놓고 싶었다. 그것이 도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허락할 수 없다. 그런 이유가 있지. 그건 미라 때문이야. 핑계가 아니라구.
미라, 미라를 위해 나는 몸으로라도 그를 막아야 해. 미라는 내가 존재하는 의미 그 이상의 것이거든.
"딩, 딩, 딩"
2층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 왔다. 가정부가 새로 들어오긴 했지만, 웬지 미라는 그 새 가정부를
잘 따르지 않았고, 그 전처럼 알뜰히 보살펴 줄 겨를도 없어, 이화 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 하나를 개인 교수로 붙여 주었다.
미라는 다시 피아노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긴장감에 휩싸였던 집안 분위기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남편 허열은 옛날처럼 아침 8시면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고,
저녁 10시 전후에 귀가했다. 특수대의 특별 야근이 해제된 것이다.
발목이 완쾌되면 백수웅을 직접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수사 기관도 찾아 내지 못하는 그를
찾겠다는 건 한낱 꿈에 불과한 일이었다.
백수웅 위장 자살 사건이 터진 뒤 어느 새 4주가 흘러가 버렸다.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인 29일,
허열은 특수대 요원들을 모아 놓고 맥빠진 대책 회의를 열고 있었다.
"청평 열차 사고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느 새 20여 일이 지났다. 그 이후 백수웅의 움직임으로 보이는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고, 우리 본부는 단 한 차례의 위협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청평 사건 이후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건 두 자기로 생각됩니다.
하나는, 정말 열차에 치여 죽어 버렸다는 거구요. 또 하나는, 지루한 침묵 끝에 갑자기 돌출하여
뒤통수를 치자는 계획일 거라는 겁니다."
남성우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인내심 싸움이라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녀석에게 목표가 있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을 침묵할 리 없다는 겁니다.
성급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만, 백수웅은 아무래도 죽은 것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 청와대에 보고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 녀석은 죽었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특수대가 해체되는 건 아니다. 6월 중순까지는 이 조직을 유지 시킨다.
새로운 업무가 머지않아 하달될 것이다. 긴장은 풀지 마라."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3박 4일의 박성철 . 이후락 회담이, 바로 특수대 건너편 영빈관에서 극비리에 열린다.
그 때까지 이특수대는 존속될 것이며, 며칠 후에는 새로운 임무가 청와대로부터 부여될 것이다.
최극비 회담이기 때문에 부하들에게조차 비밀 회담을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백수웅이 죽은 것으로 판단한 뒤
허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고, 다소 긴장이 풀린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후 2시. 주말 근무자 한 명만 배치한 채, 그는 오랜만의 휴식을 위해 책 두어 권을 들고 온양 온천으로 떠났다.
"나는 온양에 가서 주말 휴식을 취할 것이다. 만일 내게 무슨일이 있으면 온양 관광 호텔로 연락하라."
그는 아내 노옥진과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훌쩍 서울을 벗어났다. 모든 것은 백수웅 출현 이전으로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이러한 평온의 회복이 모두를 안정시켜 주었지만, 서로 다른 이유로 두 사람만은
초조와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백수웅이 목숨처럼 사랑했던 8년 전의 연인 노옥진과,
일본에서 특명을 받고 파견된 기사키 하쓰요 두 사람이었다.
노옥진이 절망에 휩싸인 것과 대조적으로, 기사키 하쓰요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을 감추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백수웅이 죽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외형으로는 평범한 가정부였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이 작은 가정과 자신이 보살피고 있는
노옥진에게로 잔뜩 쏠려 있었다.
방문자는 물론 전화 한 통까지도 놓치지 않고 체크하고 있었고, 노옥진이 외출할 때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나 보름이 훨씬 지나도록 백수웅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거나 감시를 게을리 할
기사키 하쓰요가 아니었다. 다만 누가 끝까지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을 이겨 내느냐 하는
인내의 투혼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 허열이 자신을 집에 남겨 둔 채 휴식차 온양엘 간다는 전화를 해 왔지만, 노옥진은 불쾌감도 모욕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미 남편의 이런 태도에 너무나 익숙해 있었고, 지금 같으면 오히려 그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노옥진은 백수웅이 은신해 있다가 떠나 버린 창 밖의 그린파크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저 곳에 백수웅이 있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꿈만 같았다. 아버지가 보내 준 김도경이라는
새 가정부가 끓여 온 커피를 입술에 적시며 그녀는 가난에 찌들어 기어이 피까지 뽑아야 했던,
그러나 일생을 통틀어 그보다도 더 행복한 시절이 없었던 금호동에서의 며칠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자상하고 인자하던 백수웅의 어머니, 때로는 과묵하고 때로는 피를 토하는 열변으로 조국관을 들려 주던
백수웅의 힘찬 목소리. 그의 품에 안겨 평생을 이 남자와 함께 살겠다고 맹세했던 나날들.
기관으로부터 살려 내기 위해 허열과의 결혼을 승낙하고 결혼 1주일 전 기꺼이 순결을 바쳤던
기억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 아, 그 백수웅이 바로 코앞에 있는 저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니. 왜 나는 그런 걸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 날 밤, 남편이 그를 사살하겠다고 포위하던 그 날 밤, 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지.
그는 틀림없이 백수웅이었어. 그 때 차라리 그의 불 뿜는 총구에 쓰러졌다면 행복한 죽음이 되었을 텐데
백수웅. 어디 있어요? 살아 있다면 빨리 나타나 나를 만나 줘요. 그리고 나와 아버지를 용서해 줘요.
내가 용서받고 싶은 건구차한 생명 때문이 아니에요. 미라 때문이에요.
미라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린 미라를 위해 나를 용서해 줘요.
"때르릉---, 때르릉---."
노옥진이 한없는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집 안의 정적을 두드리며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들면서도 그 전화가
백수웅의 전화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 하느님 제발'
"네, 우이동"
"옥진이냐? 애비는 온양 갔다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화의 주인공은 백수웅이 아니라, 주말 오후 5시인데도 청와대에서
퇴근하지 못한 아버지 노범호였다.
"네, 아버님. 피곤했던가 봐요."
"애비 욕하지 마라.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게다, 그건 그렇고, 우이동으로 차 보냈으니
내 차 타고 조선 호텔 커피 숍으로 나와라. 기분도 전환할 겸, 아버지가 오늘 큰 선물 하나 사줄 테니."
딸 옥진의 비통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노범호다. 남편까지 홀로 떠나 버린 뒤 집 안에
쓸쓸히 남아 있을 딸을 위해 선물도 사주고 저녁도 함께 할 작정이었다.
"아버님 저, 몸이 좀"
"안다. 다 알아. 그래서 나오라는 거야. 벌써 차 출발했으니 나와라, 나는 다른 차로 갈 거니까."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났고, 노옥진은 어쩔 수 없이 서둘리 외출 준비를 했다.
가정부 김도경은 반찬 준비로 밖에 나가고 없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보낸 승용차가 도착했다. 그는 가정 비서들에게 말했다.
"새 아줌마 오면 밖에서 식사한다고 전해 주세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오후 6시. 우이동 허열의 자택 앞에는 크라운 대형 승용차 하나가
미끄러지듯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큰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로 접어들며 꽁무니가 모습을 감출 무렵,
노란 택시 하나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조용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의 표정은 잔뜩
긴장해 있었고, 승용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부라리며 응시하고 있었다.
"기어이 나타났군."
운전 기사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적의와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얼굴.
그는 바로 20여 일이나 숨죽이며 기회를 노리던 백수웅이었다.
천호동 하숙집은 백수웅의 훌륭한 은신처였고, 그의 새로운 지하 거점이 되어 주었다.
포장 마자를 운영하는 하숙집 주인 남편과 어울리며 취직 자리를 구해 달라고 졸라 댔고,
운전 기술을 인정받아, 앓아 누워 있는 한 운전 기사의 면허증을 월 50만 원에 사들여
택시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운전은 물론 정비 기술까지 뛰어나, 백수웅은 택시 회사에서 중요 인물이 되었고,
회사에 납입하는 돈도 언제나 1등이어서 사주(社主)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백수웅의 입금은 영업으로 번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주머니 돈으로 충당해 댔다.
김진구가 백수웅의 이름이었는데, 김진구는 바로 청평에서 열차에 내버려진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열흘째 우이동 허열의 집을 감시하며 맴돌고 있었다. 언젠가는 노범호가 나타나리라 믿었고,
나타나기만 하면 그를 납치하여 회담장 기밀을 탈취해낼 작정이었다.
만일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언젠가 사살해 없애려던 허열의 아내라도 납치할 계획이었다.
몇 번의 찬스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적절치 못했고, 또 좀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
허열을 지치게 만들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모습을 감춘 지 4주가 되는 29일 오후. 마침내 거대한 승용차 하나가 허열의 집 앞에 멈추어 섰다.
그것은 노범호의 승용차였다. 그 자를 워커힐에서 분명히 보았던 백수웅은, 차의 색깔과 번호를 뇌리 깊이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그는 택시를 몰고, 골목길 끝에 세워 두었다. 노범호나 허열, 아니면 허열의 아내,
셋 중 하나는 분명히 저 차를 이용할 것이다. 빈 차로 왔기 때문에,
백수웅은 집 안에서 틀림없이 누군가 나와 차에 올라탈 것이라고 확신했다.
30여 분이 지루하게 흘러간 다음에야, 멀리 승용차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차에 오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열의 아내다!"
그는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원수의 집안, 노옥진과 자신의 파멸을 불러일으킨 노범호와,
서지아를 무참히 살해한 허열, 그들의 딸이며 아내인 여인이 승용차에 올랐고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한 것이다.
'설마 청와대로 기어가는 건 아니겠지.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 납치하겠다. 만일 불응할 때는
내 과거와 노범호의 과거, 그리고 남북 회담의 비밀을 기자들에게 공개할 것이다.
결국 노범호는 나를 만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뿌드득---."
백수웅은 이를 갈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노옥진을 태운 '서울 자 3357' 크라운 승용자는 우이동에서 창경원, 광화문을 지나 조선 호텔 앞에서
멈추어 섰다. 백수웅은 더이상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자신의 택시를 반도 호텔 맞은 편 서울 시청의
공영 주차장에 세워 놓은 뒤, 여유 있게 조선 호텔로 걸어갔다. 그리고 광장 지하에 마련된 차고로 간 뒤,
운전기사 대기실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20여 명이 넘는 많은 자가용 기사들이 짝을 지어 화투도 치고 장기도 두었다.
마치 경찰 제복 같은 복장을 한 노범호의 기사는 구석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노범호의 기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백수웅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호텔 도어 맨에게로 다가갔다.
"수고하십니다."
" "
영문을 모르는 도어 맨이 작업복의 사내를 흘낏 바라보았다.
백수웅이 그의 주머니에 푸른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찔러 주었다.
"서울 자 3357 기사 좀 불러 주시오. 차는 두고 사람만 나오라구요. 저희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알겠습니다."
도어 맨이 정문 구석에 있는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운전 대기실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서울 자에 3357 기사, 차는 그대로 두고 현관으로 나오십시오. 서울 자에 3357 "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수웅은 지하 차고 입구로 걸어갔다. 이 곳 지리는 누구보다도 백수웅이 잘 안다.
한때 이 곳에 투숙하며 허열의 사무실을 습격한 일도 있었다. 이 지하 차고에서 뒤로 꺾어 돌아가면 반도.
조선 아케이드가 나온다. 그리고 정면으로 직진하면 반도 호텔이 나오고,
그 큰길을 건너가면 시청 공영주차장과 만나게 된다.
백수웅이 지하 차고 입구에서 잠시 서성이자, 40대로 보이는 제복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갈색 커버의 육각형 모자를 쓰고, 눈에는 검은 알의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 백수웅이 그의 앞을 막았다.
"저, 선생님이 3357 기사님이신가요?"
"그래, 왜?"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전, 심부름 왔는데요. 시청 앞 공영 주차장에 가면 6240 택시가 있을 거랍니다. 거기 가면 누가 짐을 줄 테니
이 차에 실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걸릴 테니 아예 저녁 식사까지 해 두시랍니다."
"택시에 짐이?"
"네. 제가 안내할까요?"
"아니, 됐어. 혼자 가지 아, 그런데 참, 심부름은 누가 시켰어? 내가 맞아?"
"네. 3357 기사님을 찾으라고 하셨어요. 전 여기 직원인데, 현관 도어 맨이 노 회장님 차라고 했지요."
백수웅의 거짓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반도.조선 아케이드로 빠지는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백수웅은 단숨에 달려가 자신의 택시에서 조금 전의 기사를 기다렸고, 잠시 후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6240 택시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그가 주차장 끝에 있는 노란색 택시를 발견했을 때,
백수웅은 옆차의 트렁크 뒤로 몸을 감추었다.
노범호의 기사가 택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트렁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서 있었다.
그 트렁크 안에 잘 포장된 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검은 매직으로 갈겨 쓴 노범호 이름이 보였다.
두 번이나 둘러보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말 7시가 되어 가는 저녁 시간의 주차장에
서너 대의 승용차만 있을 뿐, 을씨년스러울 만큼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기사가 투덜대며 트렁크에 목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포장된 상자를 집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이 때다.
옆차 뒤에 숩어 있던 백수웅이 번개같이 달려나와, 있는 힘을 다해 트렁크 문짝을 내리쳤다.
운전 기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목을 짓누르는 트렁크의 힘에
저항하고 있었다. 백수웅이 트렁크 문을 열자, 그가 허리를 폈다. 그 순간을 이용해 팔꿈치로
아랫배를 내질렀고, 그는 외마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며 기절해 버린 것이다. 백수웅은 운전 기사를 뒷자석에 싣고 옷을 벗겨 자신이 입고,
자신의 옷을 그의 몸에 걸쳐 주었다. 주머니에 매달린 승용차의 열쇠를 확인한 뒤,
철사로 옆의 다른 자가용문을 열어 그 곳에 운전 기사를 처넣었다.
이 작업을 마치는 데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백수웅으로서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만일 허열의 아내가 그 사이 차를 찾는다면 일이 뒤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백수웅은 재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택시를 멀찍이 옮겨 놓고 조선 호텔 차고로 달려갔다. 제복과 모자,
그리고 안경으로 얼굴을 뒤덮은 백수웅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장기를 두고 있는 기사에게
3357 찾는 방송이 없었느냐고 물었고, 허열의 아내가 승용자를 찾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휴--- 우.' 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일이 일사천리로 쉽게 쉽게 풀려 나갔다. 이것도 분명
하늘이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뼈에 맺힌 원한이 하늘에 닿았고, 하늘은 이 불행한 운명을
위로하기 위해 차질 없이 작업을 진행토록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그 여자를 납치할 것이다. 그리고 회담장의 비밀을 수단껏 알아 놓으라고 할 것이다.
만일 거절하면 네 딸을 본보기로 희생시킬 것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오늘 밤 운전 기사로 단숨에
변해 버린 내 솜씨를 보았다면, 어린 네 딸 하나 없애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분명히 인식하라고 일깨워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코 협박용이 아니었다. 노범호의 딸이며 허열의 아내라면 회담의 정확한 일자와 장소,
시간을 알아 내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다.
이 때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백수웅의 옆구리를 누군가 툭 쳐 댔다.
백수웅이 깜짝 놀라 사내를 바라보았다. 차고 관리자였다.
"아, 뭐 하쇼? 당신 찾잖아요. 차 가지고 올라가 봐요."
대기실 스피커가 3357을 찾는다며 계속 방송을 해 대고 있었다. 백수웅이 깜짝 놀라 키를 들고
승용차를 향해 달려갔다. 크라운 대형 승용차는 지하 차고를 빠져나와 호텔 현관 앞에서 멈추어 섰다.
저 쪽에 한 남자와 여자가 얼핏 스쳐 보였지만, 그들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분명히 허열의 아내일 것 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과 시선이 맞부딪치면,
그들은 이 낯선 얼굴의 운전 기사를 보고 경악할 것이다.
백수웅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핸들에 얼굴을 깊이 파묻은 채, 그들 앞에 차를 세웠다.
남자가 문을 열고 여자를 먼저 태우는 것이 상류 사회의 예의인데, 이들의 행동은 조금 달랐다.
여자가 문을 열고 안쪽으로 올라 탔고, 남자가 뒤를 이어 올랐다.
"가자!"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백수웅은 다시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그런데 이들이 가자는
방향이 어딘지 도무지 알수 가 없었다. 여자는 차에 오를 때 커다란 쇼핑 백을 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호화로운 양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큭, 큭 "
백수웅은 목에 사래가 들린 듯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목쉰 소리로 물었다.
"우, 우이동으로? 큭, 에취, 죄송 "
"우이동이라니? 여기서 쇼핑 마치고 워커힐 가서 저녁 먹기로 했잖아."
"아, 네."
가슴 죄는 몇 초가 지났다. 잠시 멈추어 섰던 승용차는 조선호텔을 빠져나와 을지로로 나섰고,
거기서 다시 좌회전하여 1.3 고가 도로로 올라섰다. 워커힐로 가잔다. 시나리오도 없이 한 편의
드라마는 멋있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워커힐 호텔까지 갈 필요가 없지. 구의동 입구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1.5킬로미터의 거리는
온통 숲으로 싸여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차 한 대 들어갈 만한 길이 수도 없이 많다.
신학 대학 입구가 그렇고, 영화사(永華寺) 입구가 그렇다. 아무 데고 조용한 장소를 골라
이 남자부터 없애고 허열의 아내를 납치할 것이다.
승용차가 3.1 고가 도로 위로 완전히 올라선 뒤에야 비로소 백수웅은 백 미러를 통해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예상대로, 바로 이 차의 주인 노범호였다.
'흠, 외동따님과 주말 쇼핑을 즐기고 있군. 그렇다면 허열은 지금 어디 있지?'
이미 조사를 통해 밝혀진 대로, 반도 호텔 306호의 특수대는 영빈관 앞으로 옮긴 지 오래 되었다.
그 곳을 드나드는 남성우와 허열 등의 모습을 찾아 낸 것이다. 4주 동안의 길고 지루한 인내의 싸움은
백수웅의 승리로 끝난 것 같다. 허열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의 아내와 노범호는 주말 쇼핑을 마치고
워커힐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다. 이것은 그들이 긴장을 풀었다는 증거다.
백수웅은 허열의 아내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뒷좌석이 워낙 넓은 데다가 차창에 바짝 붙어 있어
머리카락 일부만 겨우 보일뿐,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백미러를 돌려 시선을 부딪치는
모험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동차는 씽씽 달려, 고가 도로를 지나고 마장동을 지나, 이윽고 구의동 워커힐 입구에 이르게 되었다.
구의동 대로에서 워커힐로 접어드는 숲 속의 길은 좁고 어두웠다. 가로등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뱀처럼 휘어진 길을 모두 밝혀 주지는 못했다.
백수웅은 손에 땀이 촉촉히 배기 시작했다. 그의 두뇌는 지금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골몰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기서 노범호를 살해할 수는 없다. 일단 그를 협박하여 차에 잡아 놓고,
그의 딸을 협박하여 회담장 기밀을 고백받을 것이다.
만일 노범호가 회담장 비밀과 딸의 목숨을 바꾸겠다면, 기꺼이 이 여인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첫댓글 노옥진이 노범호의 딸이라는 걸 알게되겠네요..
휴우...다음글로 빨리 ...
가까이 있는데도 몰라보다니 안타까워요~!
즐감요 ~~
감사~~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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