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다...고대 역사서가 정립되기 이전에 그것은 이야기로써 명맥을 이어져 내려왔으며 끊임없이 기층사회 저변에 뿌리박혀 생명력을 가지고 숨쉬어 왔다.
문자가 쓰이게 되고 문자로서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서술에 대한 법칙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서술에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중요가치로 인식되었으며 이야기는 여전히 이야기로써 기층사회에 전하여 내려져 왔다.
즉 실질적인 역사는 기록된 문자의 역사와 기층사회저변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록된 역사는 객관성을 추구하고 최대한 사실을 표명하지만 구전된 이야기에는 그러한 제약이 없다. 상상의 나래는 끝을 모르는 것이다. 단군신화만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전된 역사가 결코 100% 순뻥, 구라라는 말은 아니다. 전래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반영하고 사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없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지어내지는 않는다.
구전되는 역사는 마치 양파와도 같아서 까면 깔 수록 신선한 "실재"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다고 단군신화를 뻥이라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분석을 통하여 선주민과 이주민의 융합을 나타내는 과정이라고 분석하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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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사가 구전되어 오지만 그것은 언제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은 한때 운이 좋으면 문자로 기록되기도 한다 .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이름 자체에서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다룬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노력에도 사라지게 된 많은 이야기들을 복원할 수 있다면 역사는 좀더 생동감있게 될 것이나, 미처 그러한 실정은 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이야기증 하나가 바로 호동왕자에 대한 기록이다. 그뿐이 아니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 원효와 요석 공주 이야기......등등등...역사기록과 맞물려 있으면서도 기층사회의 마인드를 대변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기록에 그려진 호동이라는 한 인간의 일대기는 너무나 극적이며 비참하고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낙랑공주와의 사랑이 이어지지 못한 것에 더욱 더 큰 연민을 일으킨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문학적이며 사람들의 기억속에 각인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현대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소재다. 그뿐인가...뮤지컬이나 연극, 미술, 음악 등의 소재로도 충분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실재로 호동 왕자 이야기가 예술의 소재로 활용된 예가 여러번 있다고 알고 있다.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그러한 시공을 뛰어넘는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그 이야기에 문학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성만 집중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유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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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 주목을 한다면...
1) 15년 호동이 낙랑공주의 도움으로 낙랑공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2) 낙랑왕이 공주를 죽이고 항복했다.
3) 15년 11월 자결했다.
이 사실들 중간중간에 많은 윤색과 문학적 감성들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호동이 자결한 대목을 보자...
서자인 호동이 군공을 세우자 원비입장에서 자신의 아들이 태자가 되지 못할가 두려워하여 왕에게 호동을 참소한바, 왕의 오해를 사게 되었다..이에 호동은 해명하게 될 경우의 일어날 일들을 이유로 대며 자결했다.
이와 같은 경우의 비슷한 예는 바로 전대의 해명의 자결과 비교활 수 있다. 해명태자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하며 주위사람들이 일의 앞뒤를 헤아리며 대처해도 늦지 않다고 해도 자결하고 그가 창으로 찔러 죽은 곳은 창원이라고까지 했다.
거의 비슷한 예는 중국에서 보인다. 진나라 왕(이름은 생각이 안남)이 애첩의 참소를 믿고 아들 공자 신생에게 죽음을 내리자 신생은 자결한다.
애첩이 왕에게 참소한 내용은 호동왕자의 경우와 똑같다.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참소한 내용이 왕에게 신생이 자신을 음란하게 희롱하려 한다고 참소한 것이다. 신생은 죽었고 신생의 동생은 19년간 중국을 떠돌다가 나중에 진환공이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도는 싱생과 중이의 이야기의 구도와 비슷하다. 그러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인의 참소에 의해 아들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아들이 멀리 외지에서 병력을 가지고 북방민족을 지키고 있었는데 참소에 의해서 진시황이 아들이 반역의 뜻을 가지고있다고 의심하여 죽음을 내리자 자결한 이야기는 해명태자의 경우와 비교된다. 진시황의 아들도 주위 사람의 만류가 여러번 있었으나 그대로 자결한다. 해명의 구도와 비슷하다.
따라서 나는 해명과 호동의 경우는 모두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실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리왕이나 대무신왕의 왕계나 정통성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호동왕자 이야기를 보고 싶지는 않다. 호동왕자의 이야기에 호동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오로지 원비뿐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기록이나 이야기에도 나름대로 그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록이나 이야기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 기록이나 이야기에 사실이 투영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투영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역사가의 일이다.